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별세
사회장으로 14일 발인
한국의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6월 10일 오후 11시 37분에(현지시간) 서울 신촌동 세브란스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다.
한국 김대중평화센터는 “이 여사가 이날 오후 11시 37분 소천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그간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고 이희호 여사는 이화고등여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전과하여 수학한 후 1950년 교육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해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피난살이의 와중에도 이태영,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대한여자청년단(1950년), 여성문제연구원(1952년) 등을 잇따라 창설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모임에서 이희호는 해운회사 사장 김대중을 처음 만났다. 미 공군에 근무하던 감리교 크로 목사의 주선으로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고 이희호는 대한여자청년단 간부 김정례를 통해 김대중을 처음 만났는데, 김정례는 1·4 후퇴 때 서울의 피란민들을 배로 후송하려고 인천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피란민을 싣고 갈 배의 주인이 김대중이었다. 김정례는 김대중에게 피란민들을 부탁하고 부산에 오게 되면 한번 만나자고 했고 뒤에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긴 김대중은 김정례를 찾았는데, 김정례는 김대중과 만나는 자리에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과 함께 나왔고 그 간부들 중에 이희호가 있었다.
서울의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는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다시 모였는데 33명으로 시작한 면학동지회는 전쟁이 나는 바람에 후속 회원을 뽑지 못했고 대다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기 때문에 ‘면학동지회’는 이름을 ‘면우회’로 고치고 외부인도 받아들였다. 면우회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였고 김대중은 면우회가 외부인에게도 개방하면서 면우회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린 그 모임에서 이희호와 김대중은 시국, 인생 등에 대해 토론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았다.
미국 램버스 대학교(1954~1956)에서 사회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스카릿 대학교 대학원(1956~1958)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8년 미국에서 귀국 한 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강사가 되었고 여성문제연구원 간사, 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직 등을 역임하였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 YWCA 총무로 일하며 여성계 지도자로 자리잡아가고 있던 시점인 1962년 5월 41세의 나이로 39세의 정치 낭인 김대중과 결혼하였고 다음 해인 1963년 11월에 아들 김홍걸을 낳았다. 이희호는 감리교인이었고 김대중은 천주교인이었지만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는 관계였다. 이희호는 김대중이 선거에서 여러 번 떨어지고 가산도 탕진한 인물이었지만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신념을 높이 평가하여 배우자로 선택하였다.
이후 김대중의 정치 활동을 돕는 한편 공덕귀, 이우정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80년 김대중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자 옥바라지를 하였고 그 때 주고받은 편지가 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좋은 학벌과 왕성한 사회 활동을 통해 형성된 이희호의 재야·여성계·학계·기독교계 인맥은 고졸 출신 김대중의 정치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유학 시절 쌓은 영어 실력과 영문 타자 솜씨, 서구식 매너 또한 정치 활동의 자산이었다. 이희호는 김대중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세계 각지의 유력인사들에게 유려하고 호소력 짙은 편지를 보내 구명 운동을 펼쳤고 김대중의 미국 망명 생활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97년 12월에 김대중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1998년 2월 25일부터 2003년 2월 24일까지 청와대에서 생활하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행정부에 여성부가 설치되는 데 역할을 하였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엔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며 북한 땅을 밟은 첫 영부인이 됐다.
2002년 5월 유엔 의장국 대한민국의 대표로서 유엔 총회에 참석하였는데, 김대중을 대신해 참석한 이 총회에서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저서로 ‘나의 사랑, 나의 조국’, ‘이희호의 내일을 위한 기도’, ‘옥중서신’, ‘동행’ 등이 있다.
한편 고 이희호 여사의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다. 장례위원회 집행위원장은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가 맡으며 발인은 오는 14일 진행된다.
장례절차는 사회장으로 치러진다. 사회장은 사회적으로 지도자 역할을 한 인사가 사망했을 때 사회 각 단체가 자발적으로 모여 거행하는 장례의식이다. 국가장과 다르게 장례절차와 방법에 정부가 직접 관여하지 않지만 국가가 장례비용 일부를 보조하거나 훈장을 추서하기도 한다. 장례위원장을 유족이 아닌 특정 단체가 맡기도 하며, 노제나 영결식이 광장 등 공공장소에서 열리기도 한다. 이희호 여상의 경우 김대중평화센터가 장례의식을 주관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