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 인생은 Up and Down / 종교개혁의 샛별과 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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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사관 칼럼

인생은 Up and Down

인생은 Up and Down이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높아질 때가 있으면 낮아질 때도 있다. 산이 높을수록 골은 깊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믿음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인생의 원리이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높고 낮음이나,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믿음으로 ‘반응하느냐, 세상으로 반응하느냐’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메타인지가 높은 사람이다. 메타인지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인지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신앙을 객관화시켜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해야 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갈멜산의 UP

이스라엘인들은 흔히 자신들의 나라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삿 20:1)라고 말한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직선거리 약 240 km이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을 섬기는 450명과 아세라를 섬기는 400명의 선지자와 대결한다. 각각의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려놓고,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라고 결정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쌓은 단 주위를 뛰놀며 자신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자해를 하면서 신을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다. 단을 세우고 도랑에 물을 채우고 기도했다.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18:37) 즉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 돌과 흙은 물론 도랑의 물까지 다 마르게 하였다. 구경을 하던 백성들을 여호와를 찬양하였고,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를 모두 죽였다.

엘리야는 가뭄으로 힘들어 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비를 내려 줄 것을 기도했다. 7번째 사환을 보내어 확인 했을 때 멀리서 손바닥만한 구름이 몰려오고, 곧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해갈되었다. 갈멜산은 엘리야가 기도하자 불도 내리고, 다시 기도하니 비가 내린 놀라운 기적의 현장이다. 우리는 ‘엘리야니까 가능하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렇게 기록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5:17-18)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지만, 믿음으로 기도했기에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다. 여기까지가 열상 18장의 이야기이다.

브엘세바의 Down

19장의 1절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으로 시작한다. 분기가 충천한 이세벨은 만약에 내일 이맘 때까지 엘리야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천벌 이상으로도 받겠다고 맹서를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워 떨며 목숨을 구하여 브엘세바까지 도망했다. 갈멜산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약 193K 정도 된다. 브엘세바에서 종을 두고, 혼자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에 들어가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 죽기를 간구했다. 로뎀나무는 공동번역에는 ‘싸리나무'(Broom Tree)라고 했다. 광야에서 자라는 크지 않은 나무이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하루 전만해도 천하를 호령할 것 같은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브엘세바까지 도망하여, 죽기를 간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성서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면 3절에 “이 형편을 보고”란 말이 있다. 18장의 엘리야는 ‘하나님’을 보았는데, 19장의 엘리야는 ‘이세벨’을 보았던 것이다. 마태복음 14장에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예수님께서 ‘오라’는 명령을 의지하여 물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지게 된다. 인생은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는 ‘주바라기’가 되어 주만 보아야 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히12:2)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고 싶다’고 절규한다. 자살은 정말 죽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살고는 싶지만 더 이상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오늘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일 희망이 있다면 참을 수 있다. 이 고통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고통에서 해방되려는 최후의 선택이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의 문 위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이 문을 통과하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이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곳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문 앞에서 그들을 보며 고민하는 사람이다. 전신근육의 긴장에 의하여 격렬한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켜 깊은 고뇌에 빠진 실존적 인간의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 엘리야는 지금 ‘절망의 늪’에 빠져 있다.

호렙산의 UP

로뎀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던 엘리야에게 천사가 어루만져 주며 떡과 한병의 물을 주었다. 떡과 물을 마시고 다시 잠에 빠졌다. 천사는 다시 어루만져 주며 엘리야를 깨워 떡과 물을 먹게 하고, 40주 40야를 이끌어 그를 호렙산으로 인도하였다. 호렙산과 시내산은 같은 산이다. 출애굽기에서는 ‘시내산’이라고 했고(출20:1-17). 신명기에서는 ‘호렙산’이라고 했다.(신 4:10).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던 하나님은 엘리야를 만나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강한 바람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고,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고, 불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13) 엘리야는 하나님께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오직 저만 남았습니다. 이제 저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다. “너는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로 세우라”(16) “아직도 이스라엘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의 남아 있다.”(18)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엘리야는 다시 새 힘과 사명을 가지고 하산하게 된다.

엘리야의 UP and Down의 영적 상태를 생각할 때마다, 로마서 7장과 8장의 바울과 오버랩이 된다. 로마서 7장의 바울은 영적 블랙홀에 빠져있다. 그는 선과 악의 차이를 알고는 있지만,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한 일을 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탄식한다. “내가 원하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18),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24) 바울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연약함에 절망하고 있다. 8장으로 넘어오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느니라”(8:1-2) 8장에만 성령이란 단어가 22번씩이나 언급되고 있다. 성령은 우리가 기도를 어떻게 할지 모를 때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신다.(26)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성령님이다.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수동태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 노력해서 받는 상이 아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Be filled with Holy Spirit)”(엡5:18) 성령충만’이란 차고 넘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다는 뜻이다.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성령에 충만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다. 신앙생활의 고민은 비움이 없이 채우려고만 하기 때문이고, 펴지 않고 더 잡으려는 욕심 때문이다.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알고 있다. 침례교회 목사이고 백석대학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인 하덕규씨가 작사를 하고 작곡을 했던 노래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그가 몇 년 전 시드니에 와서 만난 적이 있다. 그날 집회에서 그가 마지막 불렀던 숲이란 노래가 있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숲에서 나오니 숲이 느껴지네. 외롭고 외롭던 숲” 숲은 자신이다. 자신에서 나오니, 자신이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 교회는 지금 과도기이다. 과도기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지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어떤 변화가 있든지 믿음으로 반응하겠다.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겠다. 올해가 구세군 사관으로 임관을 받은 지 30년이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이다. 미국에서 서부산 영문 개척사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 대기하던 중 갑자기 임지가 서청주로 바뀌었다. 그 후 합덕을 거쳐 구세군 본부에서 사역하다가 호주로 발령을 받아 벨모아 구세군 교회를 담임을 거쳐, 호주 구세군 본부에서 사역했다. 2019년 4월 14일, 구세군 라이드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교회의 표어를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라고 정했다. 성경이 기준 되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원했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절대란 절대로 없다’이다. 상대주의 가치가 대세인 시대에서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는 도전 받고 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호주 구세군을 깨우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 교회가 호주 구세군의 부흥의 불쏘시개가 되기를 기도한다.

종교개혁의 샛별과 관상

‘종교개혁의 샛별’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였고 신부였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이다. 가톨릭 교회의 교구장으로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고발하였고,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1382년 번역했다. 당시에는 성경도, 집례도 모두 라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은 신부의 말이 곧 진리라고 믿고 신앙생활을 했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교회와 교황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교황권에 도전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아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존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샛별’이 되었다. 사후 그는 이단으로 몰려 부관참시 되었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두 사람이 있다. 영국의 성서학자였던‘윌리암 틴데일’이다. 그는 영국이 아닌 독일에서 성경을 번역했다. 틴데일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바탕으로 영어성경을 번역했다. 성경을 번역했다는 죄목으로 1536년 화형을 당했다. 하지만 후에 ‘킹 제임스'(1611) 버전의 70% 정도가 그의 성경을 근거로 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또 한 명의 위대한 인물이 있다.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었고, 가톨릭 신부였던 ‘얀 후스’이다. 얀 후스는 체코에서 교회 지도자의 부패와 교황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비판하였다. 신학자인 그는 성경을 근거로 공격했다. 하지만 개인의 역량으로 시대를 바꿀 수는 없었다. 1415년, 그도 화형을 당했다. 그는 화형 당하기 직전에 예언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그의 예언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관상’이란 영화가 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허구 인물인 관상쟁이 내경을 등장시킨 팩션(Faction) 영화이다. 팩션은 사실을 나타내는 ‘Fact’와 허구를 뜻하는 ‘Fiction’의 합성어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오락적 요소를 가미시켜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해내는 장르이다. 관상은 역사적 사실에 감독의 상상력이 돋보였던 팩션 영화이다.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른다. 문종의 어명을 받아, 좌의정인 ‘김종서’는 단종을 보필하며 왕권을 지킬 것을 맹서한다. 역모를 꿈꾸는 사람들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관상쟁이 ‘내경’를 등용한다. 그는 ‘수양대군’의 관상을 멀리서 보고, 절대로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왕으로 만들었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한명회’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한명회와 내경의 대화로 끝을 맺는다. 내경의 푸념과 같은 말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사람의 얼굴을 보았으되 정작 시대를 보지 못했단 말이요.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볼 뿐, 파도를 만드는 바람을 못 본 거지.”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