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 종교개혁 주일 (성경으로 돌아가자!) / 1.1.1. 부흥기도운동 / 인생이란 무엇인가?

김환기 사관 칼럼 종교개혁 주일 (성경으로 돌아가자! 렘 31:31-32) 개신교에서는 […]

김환기 사관 칼럼

종교개혁 주일 (성경으로 돌아가자! 31:31-32)

개신교에서는 10월의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킨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항의 반박문을 붙인 날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루터가 10월 31일을 택한 것은 가톨릭에서는 11월 1일이 ‘모든 성인의 날’ (Solemnity of All Saints)이다. 이날은 천국에 있는 모든 성인들, 특별히 축일이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교인들은 교회에 나와 미사를 드린다.

종교개혁의 원인

종교개혁에는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이 있다. 인연 (因緣)의 ‘인’이란 ‘직접적 원인’을 의미하고, ‘연’은 ‘인’를 돕는 간접적 원인을 의미한다. 피천득씨의 인연이란 시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 줄 알지 못하고, 보통사람들은 인연인 줄 알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고, 현명한사람은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우연으로 전락시키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연을 필연으로 승화시킨다.

직접적 원인은 베드로 성당의 건축이다. 무려 100년이 넘게 건축했으니 건축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러한 엄청난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교황청은 ‘면죄부’ (免罪符)를 판매했던 것이다. 면죄부는 ‘죄를 용서 받은 증서’이다. 자신의 죄뿐 아니라,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죄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다. 면죄부를 영어로 ‘Indulgence’라고 한다. 정확한 의미는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받아야 할 ‘벌’을 사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면죄부’보다는 ‘면벌부’ (免罰符)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테첼’이란 신부가 있었다. 타고난 수사학자였고, 뛰어난 설교가로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 면벌부를 안 살 수가 없었다. “여러분의 동전이 부모를 구해낼 수 있습니다. 동전이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납니다.” 당시의 교황청은 적폐의 원산지였다. 성직을 매매하기도 하고, 높은 성직을 돈으로 사기도 하고, 비밀 결혼까지도 성행했다. 성직매매를 ‘시모니즘’ (Simonism)이라고 하는데,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시몬이 은사를 돈 주고 사려는 데서 유래되었다.

간접적 원인은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구조의 변화’가 생겼다. 중세는 땅 중심의 봉건사회였다. 왕과 영주 그리고 농노는 땅을 중심으로 계약을 맺고 있었다. 농노는 땅에 예속되어 농민으로 살아야 했으며 해당 영지의 지배자인 영주에게 종속되었다. 농노는 노예와 다르게 사유재산권을 인정받아 노예보다는 높으나 자유민보다는 신분적으로 낮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영주가 다스리는 마을을 ‘장원’이라고 했다. 장원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했고 도시와의 교류는 매우 적었기 때문에, 공업제품은 거의 영주의 직영 작업장에서 생산되는 물품에 의존했다.

또한 르네상스 (Renaissance)로 인하여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중세의 ‘사상적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일어났던 그리스와 로마의 ‘인본주의’ (Humanism)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1000여 년간 신과 교회 중심의 체제 하에서 억눌리고 잃어버렸던 인간적인 것들을 되살려 보자는 ‘문예부흥운동’이다. 르네상스가 발생지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이다. 금융업으로 거부가 된 ‘메디치 가’의 과학, 예술, 문화 등에 대한 열정이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에 의해 무너지면서 다양한 학문과 많은 학자들이 피렌체로 유입되면서 ‘꽃의 도시’인 피렌체에 ‘문예의 꽃’이 만발하게 되었다.

다른 원인은 ‘흑사병’이라 불리는 ‘페스트’이다. 중세 초기에 시작된 흑사병은 유럽 지역에서 1346 ~ 1353년 사이 절정에 달했다. 페스트로 인하여 유럽 인구 1/3 이상이 죽었다. 페스트에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하는 교회의 권위는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자, 농노도 예전의 농노가 아니었다. 페스트는 중세를 붕괴하고, 근대를 향한 속도를 높이었다. 중세의 페스트를 현대의 코로나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될 것이다. ‘코로나 전 시대’ (Pro Corona)는 ‘대면’ (Contact) 시대이고, ‘코로나 시대’ (Corona)는 비대면 (Uncontact) 시대이며, ‘코로나 후’ (Post Corona)는 ‘대비면’ (Conuntact) 시대가 될 것이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하이브리드’ (Hybrid) 시대이다.

종교개혁의 기둥

종교개혁의 3개의 기둥은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이다.

‘오직 성경’은 ‘가톨릭의 전통’에 反하여 성경에 권위를 부여했다. 가톨릭 교회가 성경에 사도들의 전통과 교황 중심의 교리를 첨가하여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킬 때,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이 기록된 성경만을 교회의 기준으로 삼았다.

‘오직 믿음’은 ‘가톨릭의 행위’에 反하여 ‘믿음’를 강조했다. 하박국 선지자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2:4),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했고, 루터는 이 말씀을 의지하여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오직 은혜’는 ‘가톨릭의 공로’에 反하여 ‘오직 은혜’를 강조했다. 은혜란 상이 아니라 선물이다. 상은 자격이 있어야 받는 것이지만, 선물은 자격이 없어도 받을 수 있다. 은혜란 자격 없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은혜이고,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것도 은혜이고, 천국 가는 것도 오직 은혜로만 간다. 우리의 믿음 조차도 은혜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종교 개혁의 의의

종교개혁은 신학적으로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실천적으로는 성경의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며, 또한 사제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모든 신자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떤 책인가? 영어로 표현한 성경이란 단어의 기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성서를 ‘Bible’이라고 한다. Bible은 ‘책’이란 의미의 헬라어 ‘Byblos’에서 나왔다. ‘비블로스’는 성서를 기록한 ‘파피루스의 내피’이고, 파피루스의 무역 집산지였던 지역 이름이기도 하다. 책에 ‘거룩한’ 이란 단어가 붙어서 ‘성서’가 된다. 거룩이란 ’구별하다‘란 의미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을 ‘성도’라 하고,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인 ‘에클레이아’라고 한다. ‘에클레시아’는 세상에서 구분되어 부름 받은 거룩한 무리들이란 뜻이다. 성도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고,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공동체가 아니다. 선교란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세속화는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적’이지 않으면, ‘선교의 적’이 될 수 있다. 교회는 선교 공동체이고, 교인은 모두 선교사이다.

성서를 ‘Canon’이라고 한다. 이 말은 ‘Cane’라는 대나무와 같은 식물에서 왔다. Cane는 일정한 마디가 있어서 잣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Canon은 ‘잣대, 기준, 다림줄, 표준’이란 의미이다. 성경 (聖經)의 경 (經)은 “원칙, 날실, 다스린다” 등의 뜻이다. 유교에도 경전이 있고, 불교에도 불경이 있는 것처럼 ‘경’은 기준, 원칙이다. 아모스 7장 7-8절에는 ‘다림줄’이란 단어가 나온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암 7:7-8). 다림줄 (plumb line)은 담 혹은 벽을 쌓을 때 똑바로 쌓기 위해 실에 추를 달아 사용하는 건축도구이다. 아모스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영적, 도덕적 상태가 다림줄로 재어본 결과 붕괴 위험의 상태였다. 오직 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의 다림줄이다. “우리는 신구약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의 표준임을 믿는다” (구세군 교리 제 1조).

성서를 ‘Testament’이라고 한다. 구약은 Old Testament, 신약은 New Testament이다. Testament란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언약’ (Covenant)이란 뜻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19:5-6)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을 축복해 주시기 위함이다. 기도는 언약을 근거로 구할 때 가장 강력하다.

언약을 ‘맺다’라고 하는데 원래 의미는 ‘자르다’이다. 언약을 맺을 때 동물을 ‘자르고’ 그 사이를 지나기 때문이다. 구약의 시내산 언약은 ‘동물의 피’로 맺었고, 신약의 십자가 언약은 ‘예수의 피’로 맺었다. 옛 언약은 돌 판에 새겼고, 새 언약은 마음 판에 새겼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1-32)

옛 언약은 모세가 중재자가 되어 시내산에서 맺었고,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재자가 되어 십자가 상에서 맺은 언약이다. 옛 언약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고,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 제단, 제사장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단인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단 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예수께서 한마디로 요약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은 세상의 다림줄이고, 성경은 구원의 약속이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말씀 운동이다. 개혁은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 지속적인 운동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개혁의 바통을 이어받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1.1.1. 부흥기도운동

‘111 부흥기도운동’이란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져 사는 750만 한민족이 매일 오후 1시에 1분 동안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운동이다. 역대하 7장 14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말씀을 의지하여 악한 길에서 떠나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운동이다.

‘111 부흥기도운동’은 국제 도시선교회와 미동부성시화 운동본부의 대표인 김호성 목사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2020년 11월 1일부터 전 세계의 50여명의 강사가 기도를 녹화하여, 매일 오후 1시 1분 동안 CTS-TV (뉴욕)와 서부는 GBS 글로벌 라디오와 유튜브 등으로 송출될 예정이다.

부흥 (Revival)

부흥 (復興)은 죽었던 것이 ‘다시 산다’는 뜻이다. 부흥이란 단어는 회복, 재생, 소생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부흥은 영어로 ‘Revival’이고 히브리어는 ‘하야’, 헬라어는 ‘아나자오’이다. 부흥이란 ‘관계의 단절’에서 ‘관계의 회복’이다.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은 죽음이고, 관계의 회복은 생명이다. 부흥은 양적인 성장이 아니라 질적인 성숙이고,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 변화이다.

성경에서 ‘부흥’이란 단어는 단 한번 나온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 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부흥이란 ‘하예후’는 ‘다시 살다’란 ‘하야’에서 나온 단어이다.

에스겔 37장에 ‘마른뼈 골짜기’의 환상이 나온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묻는다. “에스겔아 이 마른 뼈들이 살 수 있겠는가?” 에스겔이 대답한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3절) 하나님은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야)” (겔37:5) 대언하라고 하셨다. 에스겔이 대언하자 흩어져 있던 뼈들이 맞추어 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나 그 안에 생기가 없었다. 생기를 향하여 대언을 하자, 생기가 그 안에 들어가자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었다. ‘살아나다’는 히브리어인 ‘하야’가 ‘부흥’이다. 창세기의 2장 7절의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넣으니 ‘생령’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히브리어 ‘하야’와 같은 단어가 신약에서는 ‘아나자오’이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온다. 아버지를 떠나서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 사람들을 초청하여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자,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터트린다. 이때 아버지는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아나자오) 내가 잃었다가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눅15:24)며 큰 아들을 달랜다. ‘살아났으며’가 ‘아나자오’이다.

기도 (Prayer)

기도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이다’, ‘기도는 축복의 통로이다’. 오늘 본문은 기도는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역하7:14) 기도는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교만한 자는 기도하지 않는다.

성경에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요 (시53:1),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라 ‘자기 의’로 사는 자이다. (롬10:3)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다. (벧전5:5) 교만한 자는 자기 힘으로 사는 자이고,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다. 한 때 천사장였던 루시퍼의 타락도, 인간의 타락도 교만 때문이다.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루시퍼),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 넘어지다니!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저 높은 하나님의 별들 위에 두고 신들의 회의장이 있는 저 북극산에 자리잡으리라. 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 (사14:12-14) 원어를 보면 ‘나’라는 말이 5번이나 나온다. 인간은 타락은 창세기 3장 하나님 같이 눈이 밝아 지기 원했고, 창세기 11장 바벨탑을 쌓아서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기 위함에서 시작되었다. 잠언기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다’ (잠16:18)라고 하지 않았던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는 말씀을 기억하자.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교만한 자가 아니다. 정말 교만한 자는 자신이 겸손하다고 착각하는 자이다. 어거스틴에게 제자들이 질문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의 제일 큰 덕목이 무엇입니까? 겸손이다. 두 번째 덕목은? 겸손이다. 세 번째 덕목은? 겸손이다. 선생님, 교만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겸손이다. 선생님, 한 가지만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까? 자기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교만한 놈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결코 회개할 수 없고, 자신의 교만함을 모르는 자는 결코 겸손할 수 없다. 죄에는 알고 지은 죄가 있고, 모르고 지은 죄가 있다. 우리는 모르고 지은 죄는 몰랐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모르고 지은 죄는 모르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알고 지은 죄보다 모르고 지은 죄가 더 나쁜 죄인지도 모른다. 교만한 자는 결코 배우지 않는다. 자기가 최고인데 누구에게 배우겠는가? 교만한 자는 감사하지 않는다. 자기 능력으로 다 했는데 누구에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

교만한 자는 “나는 내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고, 겸손한 자는 “나는 내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과 기도하고 성공한 사람에는 차이가 있다. 기도 하지 않고 성공하면 교만해져 결국은 패망하지만, 기도하고 성공하면 더 겸손해져 더 성공하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운동 (Movement)

‘운동’이란 일회적인 ‘행사 (Event)’가 아니라 지속적인 ‘움직임 (Movement)’이고,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한 지역에서 시작되지만 열방으로 퍼져 나가고,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로 이어간다.

한국의 ‘영적 대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의 회개로 시작이 되었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장대현 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다. 집회 분위기는 영적으로 너무 싸늘했다. 마치 사탄이 온 회중을 압도한 것처럼 아무런 은혜도 감동도 없었다. 길선주 장로는 이렇게 사경회가 끝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대중 앞에 서서 회개를 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 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죽은 친구의 부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길 장로의 회개는 ‘평양 대부흥 운동’의 도화선이었다.

양화진에 가면 캐나다 하디 선교사의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가 있다.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위대한 불씨로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이제 100주년을 맞아 다시 영적 부흥대각성의 불길을 사모하고, 그가 이 땅에 남기고 간 사랑하는 두 딸의 흔적을 기억하면서 이 비를 세워 역사에 뜻을 기리고자 한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가 부흥의 불씨가 되고, 길선주 장로의 회개가 부흥의 횃불이 되어 한국 교회는 세계 기독교사에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기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영적부흥운동은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부흥의 높이는 회개의 깊이와 비례한다.

이제 부흥의 바통은 우리에게 넘겨졌다. 흩어져 있는 한민족이 기도로 하나 되어 우리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하고, 다음 세대로 부흥의 바통 넘겨 주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딤전 2:4)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톨스토이의 이야기로 풀어 가보자. “길을 가는 행인이 있었다. 굶주린 사자를 만나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갔다. 도망하는 길에 우물을 만나 옆에 있는 칡넝쿨을 타고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우물에는 물이 없었고 바닥에는 독사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칡넝쿨에 매달려 있었다. 검은 쥐와 하얀 쥐가 번갈아 가며 칡넝쿨을 갈아 먹는다. 이때 벌통에서 꿀이 입으로 떨어진다. 행인은 꿀 맛에 심취하여 잠시 모든 것을 잊는다. 이것이 인생이다.” 검은 쥐는 밤, 하얀 쥐는 낮으로 시간을 말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칡넝쿨은 끊어질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에, 인생의 지혜를 깨닫고 후회하지 말자.

1. 인생은 주관식 (고전 15:10)

인생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이다. 하나님은 나를 나로 만드셨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고전15:10)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품으로 만들지 않고, 작품으로 만드셨다. 그것도 인류 역사에 단 하나밖에 없는 ‘걸작품’으로 만드셨다. 인생의 가장 큰 후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가,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만의 브랜드’를 가져야 한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삶은 ‘짝퉁 브랜드’로 사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사명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모두가 얼굴 모양이 다르듯, 사명도 각자 다 다르다. 아직도 기억한다.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복음을 전하는 최춘선 할아버지. 사람들은 그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왜 그런 식으로 전도해야 합니까?” 할아버지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하셨다. “사명은 각자 각자”

2. 인생은 진행형 (3:12)

인간을 ‘Human Being’ 이라고 한다. 인생은 진행형으로 ‘된 존재가 아닌 되어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생은 잡힌바 된 잡은 것을 향하여 오늘도 달려간다.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가 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만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그 날까지 나에게 주어진 ‘인생 편지’를 계속해서 아름답고 곱게 써가야 한다.

얼마 전 사진 강습회에 참석했다. 강의 제목은 “Photography for Wellbeing”이었다. 강사는 ‘Mindfulness’에 대해서 설명했다. 찍는 대상에 집중하는 순간이 ‘Mindfulness’라고 한다. 이 상태는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을 하지 않고, 오직 ‘현재에 몰입’된 상태이다. 몰입이 되면 시공간의 착각이 일어나고, 치유 (Healing)가 일어난다. 사진은 보는 것을 찍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찍는 것이다. 무언가 보인다는 것은, 그것이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를 통해서 나를 본다. 네가 아름다운 것은 내 마음에 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3. 인생은 수동태 (5:18)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술을 한잔 마시면 ‘양’ 같이 되고, 두잔 마시면 ‘사자’같이 되고, 세잔 마시면 ‘돼지’ 같이 되고, 네잔 마시면 ‘원숭이’같이 된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술이 술을 마시고, 결국은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된다. 사람이 술의 지배를 받게 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5:18) ‘성령 충만’이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 (Holy Spirit)이다.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거룩하게 살아간다.

‘거룩’이란 헬라어로 ‘하기오스’란 뜻으로 ‘성결’ (Holiness) 또는 ‘성화’ (Sanctification)라고 한다.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 ‘성결이고 성화’이다. ‘개인의 성결’을 넘어 ‘도시의 성결’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는 많은 단체가 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마5:13-14)라고 했지, 교회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지 않았다. 교회가 있는 곳은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안이다. ‘성 (Sacred)과 속 (Secular)’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하지 마라. 교회 안에서 세상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