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칼럼
과부의 두 렙돈의 의미(마가 12:38-44)
성경 본문에 보면 이제까지의 예수님의 일반적인 행보와는 다르게 성전의 연보궤 앞에 앉으시고는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시는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 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언제인가부터 교회에 헌금과 봉사를 강조하는 목사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되어버렸다. 이 여인의 모습이 왜 어떤 목사들에게는 헌신의 표상으로 비춰졌는지 모르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만은 않는 듯하다. 만약 정말로 그러하다면 예수님께서 그녀를 불러 칭찬 한마디쯤 해 주셨어야 하지 않았을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과부의 헌신도 함께 전파되리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온 그 어떤 사람도 그 구차한 중에 자신의 모든 소유를 헌금한 사람은 이 과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과연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당시 참새 반 마리의 값)을 헌금한 과부는 그 이후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 아니면 굶어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
이 이야기의 전후사정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예수님께서 왜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시에 헌금함은 성전 안 여인의 뜰에 놓여 있었는데, 헌금함은 모두 열세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 헌금함은 놋쇠로 되어 있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헌금함이 놋쇠로 된 이유가 당시의 헌금이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구리 등의 금속이었기에 소리를 내게 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함으로 드리는 자들이 더 많이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있다. 이 헌금함중 9개는 성전세나 제물을 대신한 헌금을 바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나머지 4개는 가난한 자를 돕는데 쓰일 재원마련을 위해 설치되었다고 한다. 과연 성전의 헌금이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와 같은 가난한 자를 돕는데 사용되고 있었을까?
성경에는 이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당시의 성전헌금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종교지도자인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나온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 12:38-40).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가 누가복음 21장에도 나오는데 여기에는 이어서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추가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눅 21:5,6)는 내용의 말씀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이야기의 전후상황을 맞추어보면 전체적인 구조는 단순하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 그리고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치는 과부, 그리고 그러한 헌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종교 지도자의 탐욕으로 희생된 과부와 헌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부를 자랑하는 성전을 심판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 서기관 그들이 섬기는 신은 맘몬(재물)신이었다.
구약에서는 여러 종류의 우상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들에게 절하며 섬기지 말 것을 엄히 경고하시는 여호와의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1-6). 이 말씀은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일계명과 이계명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특히 여호와의 이 두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는 이유가 있다면 우상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복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도 그 짧은 기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라엘백성들이 만들어 내었던 그들의 신은 ‘금송아지’였다(출 32:21-24).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영생을 사모하며 살아야 할 택함받은 믿음의 백성들이 영생을 포기하고 잠시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이 땅의 삶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이들을 어리석고 악한자라고 말하고 있다.
뜻밖에도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성경처럼 우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름과 사건은 나오지 않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듯 섬기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데,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말씀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듯 보였지만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배를 위한 재물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앞서 섬기며 인도한다고 하는 그들의 탐욕과 위선에 예수님께서는 심히 노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노하심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 중에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이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16-28). 너무도 두렵고 심히 떨리는 경고의 메시지였지만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열심히 이 땅의 재물을 하나님 섬기듯 섬기며 살았던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지요?
가난한 자의 하나님 되심을 잊어서는 않된다!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한다! 여호와는 세상에 의지 할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의 주가 되심을 잊지 말아야한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의지 할 수 없는 모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복음은 전파되기 시작하였든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주의 성령이 내게(예수)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아멘!
이용호 목사(시드니달란트교회 / 호주나눔선교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