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칼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다! (엡 6:10-17)
인생(人生)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가십니까? ‘인생’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뜻을 찾아보면, ‘사람이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인생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라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문제는 왜 사는 것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는지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안다고 해도 과연 그 대답이 옳은 것인지는 살아 봐야 알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존재의 이유’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궁금하여 인터넷상에 이러한 질문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그의 질문은 “보통 지구상에 살아 있는 생명체들은 지구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고 살아가는데 유독 인간만이 환경을 파괴하고 여러 생명체를 이유 없이 죽이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지구멸망이란 단어까지 나오게 되는데…. 이런 인간들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라도 있을까요?”라는 질문이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인생이라는 인간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어려우면서 쉽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의 존재 곧 창조론을 부정한다면 매우 어려운 질문이 되겠지만, 신에 의한 창조론을 인정한다면 그 대답은 의외로 매우 쉽다고 말할 수 있다.
진화론적 인간존재의 시작은 무엇인가?
창조론과 가장 반대적인 사상은 진화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진화론의 시작은 꽝하고 빅뱅(Big Bang)이 일어나면서 어쩌고 어쩌다 보니까 DNA가 생겼다. 그러다가 유전자가 생기고 세포가 생기고 하다가 아메바가 생기고 해서 결국 사람이 생겼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간 존재의 시작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우연 속에서 목적을 찾을 수 있을까? 진화론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내 인생의 존재 목적, 더 나아가 아무런 의미 없는 덧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말 이 말이 믿어진단 말인가?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이다. 진화론을 믿다보니 각자가 알아서 인생의 목적을 정하고 의미를 찾다보니 사람마다 다 다르다. 자연의 모든 종류의 각 종들은 존재목적이 같다. 사자라면 모든 사자가, 사슴이라면 모든 사슴이, 포도나무면 모든 포도나무가 그러하다. 그러나 유일하게 인간들은 똑같은 종들이면서 각자의 존재목적이 다 다른 것이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분명히 똑같은 목적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1994년에 발표된 톰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라고 하는 유명한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전체 13번의 아카데미 상 지명을 얻었고, 그 중 아카데미 작품상, 아카데미 시각효과상, 아카데미 감독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반하는 6개의 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를 내용을 보면 당시 현대인들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주인공인 포레스트는 IQ가 75정도인 사람으로서 자기 인생의 목표와 목적을 세울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삶의 모든 사건은 우연한 계기로 일어나고, 그런 우연히 계속되는 가운데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말하는 바이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깃털 하나가 날아다니는 장면이 오랫동안 나타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깃털은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고, 그저 바람 따라 계속 떠다닐 뿐이다. 그리고 이 깃털은 포레스트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살아지는 것이고,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끝난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던 것이다.
진화론뿐만 아니라 영혼불멸을 전제로 하는 윤회론도 있다. 인간의 영혼이 영원 전부터 있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가 때로는 짐승으로, 때로는 부잣집에 태어나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는 끝없는 시작과 죽음의 반복을 통한 윤회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민족마다 자기 민족이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신화도 있다. 우리 한반도 사람들은 환웅 이야기가 그러하다. 곰이 어쩌고저쩌고 해서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하여 인간 삶의 존재목적을 알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왜 인생을 사냐?”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 이 질문의 범위를 좀 더 좁힌다면, “왜 공부합니까?, 왜 일합니까? 왜 결혼하려고 하나요?”일 것이고, 이런 ‘왜’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물음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으뜸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창조론적 인간존재의 목적은 분명하다.
인간인 저와 여러분의 시작은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다. 여러분이 남자로 여자로 한국 사람으로 호주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외모 또한 내가 선택한 적이 없었다. 이 세상과 나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 근거의 유일한 자료가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Bible)의 첫 번째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창 1장)”이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믿어진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것이 인간존재의 목적이다. 기독교의 소요리문답에서는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존재 목적에 변수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단’의 등장이 그것이다. 마귀(devil)는 사탄(Satan)의 별칭이다. 마귀는 ‘나누고 참소하는 자’라는 뜻이고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는 뜻이다. 귀신(demons)이나 악령(evil spirit)들은 마귀의 졸개들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보좌를 욕심내다가 타락한 천사였다. 하늘나라에서 있을 곳을 잃고 이 땅으로 쫓겨난 그는 인류 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를 미혹케 함으로 죄를 짓게 만들고, 그 결과 인간은 이 땅의 모든 권세를 잃고 사단에게 그 권세를 넘겨주게 된다. 사단은 그 넘겨받은 권세로 이 땅에서 인간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과는 반대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곧 우리의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며 섬기는 일(마태 19:19)이라고 하셨는데, 사단은 하나님 말씀과 다르게 사단 자신을 섬기는 것은 곧 이웃보다는 너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너부터 먹고 살아야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간을 속이고 다스리기 시작한 사단은 결국 인간의 왕이 된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기적인 욕심을 가진 인간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언제인가 TIME 잡지에 ‘기록된 인류의 역사’가 5,561년인데, 그 동안에 전쟁이 14,531번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 사실이 맞는다고 한다면 지나간 5000년 동안에 해마다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전쟁이 두 번 정도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 전쟁의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가에 대해 노르웨이 컴퓨터가 다음과 같은 답을 내렸다고 한다. 한 사람의 적군을 죽이는 데 들어간 비용이 주전 54년 시저 당시에는 미국 돈 75전, 나폴레옹 당시에는 3천불, 세계 1차 대전 때에는 2만 1천불, 세계 2차 대전 때에는 20만 불, 만약 3차 대전이 일어날 경우에 한 사람의 적군을 죽이는데 들어갈 비용이 얼마냐고 물으니 미국 돈 100만 불, 우리나라 돈 10억 원이 들어간다고 했다. 한 사람의 적군을 죽이는데 10억이라고 하는 돈을 들여서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느라 지금도 세상에서는 그칠 줄 모르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세상이 이렇게 무서운 세상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누구를 먼저 사랑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전쟁이라고 하는 역사의 배후에는 영적사단이 존재하고 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말씀으로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 땅의 삶은 사단과의 영적전쟁 곧 영적씨름과 같은 삶이 되고 말았다. 오늘 본문의 말씀 그것이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0-17)고 말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악한 영적존재와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사단의 미혹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을 때에 잃어버린 것은 육적인 능력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인간이 힘센 짐승을 비롯하여 모든 짐승들을 다스릴 수 있는 영적인 존재였음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잃어버린 영적인 힘을 다시 회복하여 사단에게 빼앗긴 권세를 회복함으로 이 땅에서부터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육을 위하여 양식을 매일 먹는 것처럼 하루도 빠지지 말고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 지켜 행하는 자들이 복된 자들이며(계 1:3), 존재목적인 영적 승리자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은혜의 기쁨을 구하기 전에 승리의 기쁨을 취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이용호 목사(시드니달란트교회, 호주나눔선교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