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토론모임 시드니시나브로
‘역사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을 읽고
유시민 저 / 돌베개 / 2018년 6월 25일
1. 들어가는 말
2017년 ‘국가란 무엇인가’를 출간한 저자가 2018년 ‘역사의 역사’를 통해 이 시대와 역사를 어떻게 봐야할지 영감을 준다.
저자는 한(카카오) 인터뷰에서 본서의 집필이 2016년 겨울에 시작됐다고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과 이어진 ‘촛불혁명’을 마주하면서 역사의 현장이 어떻게 기록되고 전해지는지 다시금 관심을 기울이며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최초의 질문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의 발생사 즉, ‘역사의 역사’를 깊게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저자는 역사의 고전으로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거나 최근 관심을 끈 대표적인 역사서들을 찾아 틈틈이 읽고 정리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까지 2,500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역사가들이 남긴 이야기들을 섭렵하고, 그들이 역사를 어떻게 썼고, 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지 정리했다.
본서는 동·서양의 역사가 16인과 그들이 쓴 역사서 18권을 탐사한다(그중에서 10권은 좀 더 깊고 자세히 다룬다). 역사서들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시대 순으로 9장으로 나뉘어 구성되며, 각 장은 때로는 한 명의 역사가와 한 권의 책을, 때로는 복수의 역사가와 여러 권을 함께 읽는다. 또한 앞서 읽은 책을 뒤에서 다시 읽기도 하고, 한 역사가의 목소리와 다른 역사가의 생각을 겹쳐 읽기도 한다. 각 장에서 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드러나기도 하고 숨겨져 있기도 하다.
역사가들마다 역사의 서술 대상이나 서술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위대한 역사서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대의 우리에게 말 걸기를 시도하는데 저자는 그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역사에 가장 정직하게 접근하는 방식이라 여겼다.
저자는 본서에서 한마디로 역사를 정의한다거나 자신의 의견을 높이는 일을 삼가하는 대신 역사가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그 아래 스민 메시지를 밝히는데 집중한다. “위대한 역사가들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생각과 감정을 듣고 느껴봄으로써 역사가 무엇인지 밝히는 데 도움될 실마리”(p.6)를 찾는 ‘역사 여행 가이드’(p.319)임을 자처하며 그 책무에 충실한다.
2. 저자: 유시민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개혁국민정당 대표와 16, 17대 국회의원, 44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으며 2009년 국민참여당을 창당해 대표를 맡았다.
대한민국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란 덕분에 거리와 감옥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감옥에서 ‘항소이유서’를 쓰면서 글쓰기 재능을 처음 발견했다. 민주화가 시작된 뒤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 아내와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에 돌아와 책과 칼럼을 쓰고 방송 일을 하다가 2002년부터 정치에 참여했다. 좋은 대통령, 좋은 나라를 만들겠노라며 뛰어다녔는데, 성공한 일도 있고 실패한 것도 많았다. 2008년 총선 후 정치활동을 접고 글쓰기와 강의활동에 몰두하던 때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를 대신 정리하면서 슬픔을 견뎠다. 2013년 정계를 은퇴했다.
평생 운동과 글쓰기 사이에서, 정치와 글쓰기 사이에서 살던 그는 정계 은퇴 후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지식과 정보를 나누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 ‘기억하는 자의 광주’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대한민국 개조론’ ‘후불제 민주주의’ ‘청춘의 독서’ ‘국가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3. 목차
.서문: 역사란 무엇인가?
.프롤로그: 기록, 과학, 문학
.제1장 서구 역사의 창시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거리의 이야기꾼, 헤로도토스 / 페르시아 전쟁과 ‘역사’ /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리스 세계의 몰락 / 세계사와 민족사의 동시 탄생 / 사실과 상상력 / 서사의 힘과 역사의 매력
.제2장 사마천이 그린 인간과 권력과 시대의 풍경화
역사가의 우아한 복수 / 기전체로 그린 시대의 풍경 / 사료의 공백과 문학적 상상력 / 역사의 코스모스
.제3장 이븐 할둔, 최초의 인류사를 쓰다
과학과 역사의 첫 만남 / ‘성찰의 책’과 ‘역사서설’ / 왕조의 흥망과 ‘아싸비야’ 이론 / 역사가와 종교의 속박 / 왕이 된 예수 / 이슬람 세계의 통합과 분열 / 군주에게 준 경고
.제4장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 랑케
타고난 역사가 / 전문 역사학자의 시대 / ‘문서고 깨기’의 달인 / 역사와 신학 / ‘있었던 그대로’의 생명력 없는 역사
.제5장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해석에서 변혁으로 / 유물론, 변증법, 유물사관 / 공산주의 혁명과 역사의 종말 / 후쿠야마의 변종 역사종말론
.제6장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 박은식·신채호·백남운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주의 역사학 / 박은식의 ‘한국통사’ / 개명 유학자에서 민주주의자로 /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 ‘조선상고사’ / 걸출한 사료 연구자, 신채호 / 김부식의 역사 왜곡 / 백남운의 조선 역사 4단계 발전론 / 식민사관과 유물사관
.제7장 에드워드 H. 카의 역사가 된 역사 이론서
‘역사란 무엇인가’가 난해한 이유 / 역사가와 사실 / 모든 역사는 현대사 / 개인과 사회, 역사의 진보
.제8장 문명의 역사, 슈펭글러·토인비·헌팅턴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역사의 연구’, 문명의 백과사전 / 도전과 응전의 기록 / 창조적 소수자와 내적·외적 프롤레타리아트 / 문명의 충돌 / 단층선 분쟁
.제9장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역사와 과학을 통합하다
부족 인간에서 사피엔스로 / 과학자가 쓴 역사 / 인지혁명과 역사의 탄생 / ‘역사의 최대 사기’ 농업혁명 / 신이 되려는 인간
.에필로그-서사의 힘
.참고문헌
.찾아보기
4. 책속으로
프롤로그
나는 역사가 문학이라거나 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훌륭한 역사는 문학이 될 수 있으며 위대한 역사는 문학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 책에서 다룬 역사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흥미로운 역사의 사실을 아는 즐거움을 얻었고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하게 다가온 것은 저자들이 문장 갈피갈피에 담아 둔 감정이었다. 역사의 사실과 논리적 해석에 덧입혀 둔 희망, 놀라움, 기쁨, 슬픔, 분노, 원망, 절망감 같은 인간적·도덕적 감정이었다. 역사의 매력은 사실의 기록과 전승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데 있음을 거듭 절감했다.(p.16~17)
제1장 서구 역사의 창시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누가 처음으로 역사를 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후세에 전해진 가장 오래된 역사서를 집필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뿐이다. 그런데도 서구 지식인들은 호로도토스(BC 484?-430?)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한다.(p.23)
아홉 권짜리 편집본으로 후대에 전해진 ‘역사’는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하려고 벌였던 전쟁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 1-5권까지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드라마의 무대와 배경, 주인공과 조연들의 성격과 행동양식을 설정한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하이라이트린 6-9권까지 그들의 욕망과 행위가 빚어낸 전쟁의 양상과 결말을 서술했다.(p.26-30)
두 사람(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이 역사를 쓴 목적은 비슷하지만, 역사서술의 대상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헤로도토스는 ‘세계사’를 썼다 … 투키디데스는 ‘세계사’가 아니라 ‘그리스 민족사’를 썼다. 전쟁 막바지에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투키디데스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은 어디까지나 그리스의 내전이었다 … 두 사람은 왜 역사의 서술의 대상을 다르게 설정했을까? 헤로도토스는 세계주의자였고 투키디데스는 민족주의자여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직접 체험한 사건을 기술하고 서술했을 뿐, 세상을 보는 관점과 철학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전쟁을 다룬 게 아니었다.(p.36-39)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역사를 서술할 때 부딪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여러 면에서 보여주었고, 각자 나름의 방법ㅂ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그 문제들을 해결했다 … 페르시아 전쟁은 한번뿐이 대사건이었기에 헤로도토스는 전쟁의 주역들이 이룬 문명의 성취와 전쟁의 원인, 전쟁의 흐름과 결말을 서술하는데 집중했다. 반면 투키디데스는 그와는 다른 측면에 조명을 비추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수많은 도시국가에서 벌어진 내란 상황도 면밀하게 관찰한 것이다.(p.46-50)
역사는 사실을 쓴 이야기이고 언어로 재현한 과거인데, 남의 언어로 재현한 남의 과거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하고 흥미를 느끼려면 그 책이 담고 있는 기초 정보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 모든 낯선 정보를 다 검색해 가면서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다. 서사에 집중하면서 읽으면 충분하다. 우리가 옛 역사서를 읽는 것은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미래에도 반복해서 나타날 행동 패턴과 사회 현상에 주목함으로 써 인간의 본성 가운데 역사의 시간이 바꾼 것과 바꾸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게 만든다 …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벌인 국제전은 두 세계 모두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당하는 결말을 맞았다. 그러나 21세기 문명들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기술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또 한 번 대규모 문명 충돌이 벌어진다면 그 결말은 사피엔스를 포함한 지구 생태계의 완전한 절멸(絶滅)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유추해 낼 수 있기에 오늘도 누군가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책을 읽는 것이리라.(p.52)
제2장 사마천이 그린 인간과 권력과 시대의 풍경화
서구 역사학자들이 ‘역사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사마천(BC 145-85?)의 ‘사기’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 그 이유는 단순하다. 사마천과 ‘사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알고서 그렇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하나의 전쟁을 다루었지만, 사마천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쟁, 크고 작은 국가의 흥망, 다양한 사회제도의 특성과 변화, 자기만의 색깔로 살다 죽은 개인들의 생애, 전설과 신화의 시대에서 한(漢) 왕조에 이르는 수천 년 중국사회의 역사 전체를 입체로 재구성했다. ‘사기’의 집필 시점이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보다 300년 정도 늦다는 사실은 별 의미가 없다.(p.59)
사실의 수집과 기록에 관한 한 ‘사기’는 ‘역사’나 ‘펠로론네소스 전쟁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하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 결정적인 요인은 작업환경의 차이였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민간인’으로서 혼자 힘으로 역사를 썼다. 반면 사마천은 국가의 역사 기록을 관리하는 ‘공무원’(태사령)이었기 때문에 더없이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다.(p.60-61)
… 사마천은 그(이릉)를 변호했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는 바람에 투옥되어 거세형을 당했다 … 사마천이 목숨을 끊지 않고 치욕을 견딘 것은 ‘사기’때문이었다 … 이릉을 변호하다가 당한 치욕에 대한 일종의 복수였다 … 무제(사마천을 거세한 왕)는 올곧은 신하를 박해한 어리석은 군주가 되었고, 사마천은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지식인과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니, 이토록 우아하고 지성적인 복수가 문명의 역사에 또 있을지 모르겠다.(p.62-64)
수많은 역사 애호가들이 지금도 ‘사기’를 읽는 것은 그 안에 인간의 이야기가 있어서다.(p.70)
‘본기’, ‘세가’, ‘열전’이 인물과 사건에 관한 정보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과 달리, ‘서’는 개별적 인물과 사건만 가지고는 알기 어려운 제도와 문화의 역사를 다루었다.(p.74-75)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서를 한 권만 뽑는다면 ‘사기’가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되는 게 마땅하다. 사마천은 역사를 역사답게 쓴 중국 문명 최초의 역사가였다. 민간의 역사서와 다양한 국가 기록을 참고해 ‘사기’를 집필했지만 ‘사기’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이전의 역사서가 저마다 별 하나를 그렸다면 사마천은 우주를 그렸다. ‘사기’는 시대와 문명의 과거를 언어로 재구성한 ‘전체사(全體史)’였다. 인류 역사에서 혼자 힘으로 그런 작업을 해낸 역사가는 오로지 그 한 사람뿐이었다.(p.76)
제3장 이븐 할둔, 최초의 인류사를 쓰다
600년 전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이븐 할둔(1332-1406)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계를 일곱 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썼다 … 현대 과학의 수준과 비교하면 할둔이 활용한 지리 정보와 기후학 지식은 매우 빈약하고 부정확하다. 그러나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고찰하는 관점과 방법은 나무랄 데 없이 과학적이다.(p.83-84)
‘역사서설’이 오늘날까지 역사서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보편적 역사법칙을 밝혀서가 아니라 귀중한 역사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었던 역사법칙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7세기에 탄생한 이슬람 문명과 아랍 사회의 현황 및 특징을 기록했고, 당시 아랍 지식인들이 인간과 문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밀하게 서술했다. 이런 정보 덕분에 ‘역사서설’은 이슬람 문명의 발생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귀한 길잡이가 되었다. 이 책은 또한 시대를 한참 앞서간 과학적 사고방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담고 있어서 만만치 않은 재미를 맛볼 수 있다 …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사마천은 역사를 서술하는데 필요한 만큼만 이론을 탐색했다. 반면 할둔은 역사의 보편 법칙을 찾는 것을 연구의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역사서설은 역사 이론서로 보인다. 그렇지만 할둔을 역사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쓴 것은 역사 이론서가 아니라 ‘성찰의 책: 아립인과 페르시아인과 베르베르인 및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탁월한 군주들에 관한 초기 및 후대 역사의 집성’이라는 일곱 권짜리 3부작 역사서였다.(p.85)
할둔은 역사서설 1부에서 세계를 일곱 기후대로, 각 기후대를 열 개 지역으로 세분해 지리적 특성과 거주민의 상황을 서술했다. 2부에서는 사람을 주거환경과 생존방식에 따라 ‘도시민’과 ‘베두인’으로 나누고 둘 사이의 관계를 살폈다. 베두인은 사막에서 유목생활을 영위하는 아립인이다. 2부의 핵심은 ‘아싸비야’ 이론이다. 아싸비야는 어떤 집단 내부에 형성되는 유대감, 연대의식, 집단의식을 말하는데 할둔은 그것이 혈연관계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 아싸비야 이론은 이타행동이론의 아랍버전이다.(p.90-91)
14세기 이전 이슬람 문명에 대한 종합보고서 같은 ‘역사서설’은 ‘서’에서 제도사와 문화사를 따로 서술한 ‘사기’보다 더 체계적이고 입체적이며 학술적이다.(p.94)
할둔은 현대의 전문 역사 연구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 예컨대 토인비의 대작 ‘역사의 연구’는 ‘역사서설’과 닮은 곳이 많다. 문명단위로 인류사에 접근하는 관점, ‘도전과 응전’, ‘미메시스와 네메시스’라는 개념으로 문명의 흥망을 분석하는 패러다임이 그렇다.(p.111)
제4장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 랑케
역사가 레오폴트 랑케(1795-1886)는 1854년 9월 25일부터 10월 13일까지 독일 뮌헨에 있던 왕의 별장에서 로마제국의 흥망부터 비국 독립전쟁과 프랑스대혁명을 거쳐 나폴레옹 전쟁까지 2,000년 서구 역사에 대해 거의 매일 (독일 바이에른 국왕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에게) 강의했다.(p.119)
랑케는 아무리 극적인 사건이라도 지극히 무미건조하게 서술하는 능력이 있었다 … 랑케는 전문 역사학자이자 역사가였다. 전문이라고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역사 연구와 서술, 역사 강의가 유일한 직업이었다.(p.121)
랑케는 민주주의 혁명과 왕정복고의 반혁명이 교차하는 가운데 유럽전역에 사회주의 혁명의 열기가 들끓었던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 19세기는 사회혁명의 시대였고 제국주의 시대였으며, 산업화와 과학혁명의 시대였다.(p.122-124)
지독히 재미없게 글을 썼던 랑케가 ‘역사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학문적 업적이지만 다른 하나는 치명적이고 중대한 인식의 오류다. 랑케의 업적은 오류덕분에 빛나며, 오류는 업적 때문에 돋보인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역사학은 그가 이룬 업적의 토대 위에서 그가 저지른 오류를 극복하면서 가지를 뻗고 꽃을 피웠다. 이런 인물을 빠뜨리고 역사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p.126~127)
랑케는 확실한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 1814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진학해 정식으로 역사공부를 시작한 랑케는 신학에 집중했는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종교경전이 아니라 역사문헌으로 보고 연구하는데 흥미를 느꼈고, 교회사 강의를 들으면서 강력한 지적 자극을 받았다 … 랑케는 1818년부터 8년 동안 독일 동부 르랑크푸르트에 위치한 학교에서 그리스 고전, 세계사, 문법론을 가르치면서 자연 연구자, 고고학자, 그리스어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유럽사를 연구했다 … 베를린 대학교 교수가 된 랑케는 유럽 각지 대학 도서관과 공문 문서보관소의 문헌 자료를 섭력했다 … 이 과정에서 랑케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특권을 누렸다 … 랑케는 군주국의 권력자들과 넓고 깊게 교류했는데, 마지막으로 생애를 구술한 1885년 11월의 기록에서 (중략) 그가 문서를 열람할 때 얼마나 대단한 특권을 누렸는지 보여준다 … 랑케는 ‘도장깨기’를 이어가는 무협소설 주인공처럼 유럽 주요 도시의 문서보관소 문을 열었다.(p.128-129)
랑케는 배울 것이 많지만 반면교사로 삼기에도 좋은 역사가다. 역사가는 해부학을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노련한 과학수사대 요원과 법의학자가 시신을 다루는 자세로 역사의 사실을 대면해야 한다. 시신을 해부해서 거기 무엇이 있는지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p.141)
제5장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랑케가 문서보관소를 순례하며 과거를 있었던 그래도 보여주려고 애쓰던 바로 그 시기에, 전혀 다른 목적을 품고 전혀 다른 시선으로 역사를 들여다 본 사람이 있었다 … 그는 바로 랑케가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 부임했을 때 그 교정에서 헤겔의 철학 강의를 듣던 카를 마르크스(1818-1883)였다. 마르크스는 역사가도 역사학자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를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 또는 혁명가라고 한다 … 사회와 역사를 연구하는 지식인들은 그를 무시하거나 건너뛰지 못하는데 … ‘공산당 선언’은 역사가들의 관심 밖에 놓여 있던 노예, 농노, 농민, 노동자를, 마르크스의 표현으로는 피지배계급을 역사의 주역으로 소환했다. 권력과 부를 독점한 지배계급이 아니라 억압과 착취에 맞서 투쟁하는 피지배계급이 사회를 변혁하고 역사를 만드는 주역이라고 했으니, 유럽 모든 나라의 정부가 마르크스를 감시하고 추적하고 박해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마르크스는 사상의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엥겔스(1820-1895)와 함께 1847년 2월 런던에서 최초로 독일어판 공산당 선언을 출간된 이후 영어와 프랑스어를 비롯한 유럽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빠르게 세계로 퍼져 나갔다.(p.147-149)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은 종교적 광신에 버금가는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혁명가와 정치가들은 그 열광을 솜씨있게 활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과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이다.(p.152)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 혁명으로 봉건제의 사슬을 해체함으로써 생산력의 폭발적 발전을 이루어 냈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도 결국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 이 예언이 거의 모든 면에서 현실을 비껴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기계는 노동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지 않았으며 임금을 모든 곳에서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리지도 않았다.(p.159-161)
마르크스가 랑케처럼 모라시대부터 19세기까지 유럽의 역사를 쓰거나 하라리처럼 인류사를 집필했다면 어땠을까? 유물사관이 지닌 치명적이 논리적 모순과 사소한 결함들을 스스로 충분히 인지했을 것이다. 뛰어난 문장력의 소유자였던 만큼 대단한 역사서를 남겼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미래를 바꾸는 데만 관심을 쏟았고 가거를 텍스트로 재구성하는 작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p.164)
역사종말론을 폈다고 해서 마르크스를 특별히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일지도 모른다.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한 인물은 마르크스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 20세기 막바지에 역사종말론 열품을 일으켰던 프랜시스 후쿠야마(1952- )는 그런 사고방식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녔는지 다시 확인해 주었다. 후쿠야마는 유물사관의 단선적 역사 발전 도식의 네 번째 단계인 자본주의 체제가 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p.165)
제6장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 박은식·신채호·백남운
16세기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같은 나라들은 발전한 산업기술과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호주, 아프리카를 점령해 저마다 본국과 식민지로 이루어진 제국을 구축했다 …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완전하게 자리잡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식민지에 이식해 자원을 수탈하면서 기독교 문명으로 야만인을 교화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런데 정복할 수 있는 땅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세기 중반부터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을 포함해 러시아,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이 식민지 쟁탈전에 가세했다. 제국주의 열망을 버리지 못한 강대국들이 마침내 자기네까리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20세기 세계를 피로 불들인 두 차례 세계대전이었다.(p.177)
박은식(1859-1925) 선생은 황해도 시골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성리학을 공부했다 …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그는 광복을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25년 상해에서 눈을 감았다 … ‘한국통사’는 제목 그대로 우리 민족이 당한 아픈 역사를 재현한 책이어서 갈피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 박은식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데 초점을 두고 ‘한국통사’를 썼으며 후속작인 ‘한국독립운동 지혈사’도 다르지 않았다 … 한국통사 제1편은 한반도의 지리와 역사, 주요도시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와 조선에 이르는 민족의 역사를 요약했다. 제2편은 열두살 소년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한 1863년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까지 조선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 탄압, 국정부패와 정치적 혼란, 일본의 침탈 과정을 서술했다. 개항,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청일전쟁, 을미사변, 항일의병전쟁을 비롯한 주요사건이 들어있다. 제3편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에서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을 거쳐 합방늑약에 이르는 상황을 담았다. 마지막 항목은 안명근 의사의 일본 총독 데라우치 살해 미수사건과 총독부가 105명의 민족 지사를 체포한 1911년의 ‘105인 사건’을 다룬다.(p.178-179)
박은식은 당대사를 기록하는데 모든 열정을 쏟았지만 고대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의 형체가 무너진 것은 19세기 말이었지만 정신이 무너진 것은 훨씬 오래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p.188)
당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박은식과 달리, 신채호(1880-1936)는 집요하게 고대사를 파고 들었다 … 신채호는 수양제와 당태종의 침략을 물리친 을지문덕과 연계소문 등 민족사의 군사 영웅에게 ‘조선상고사’의 지면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 신채호도 처음에는 개명 유학자였지만 사상적으로 박은식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 공산주의와 아나키즘까지 일부 받아들였다 … 신채호는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위치한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던 1914년 무렵, 그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면서 민족의 고대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권고에 따라 1915년부터 1919년까지 북경에 체류할 때 북경 대학(현 베이징대학교) 도서관의 조선 관련 역사문헌을 샅샅이 뒤지면서 준비한 끝에 1931년 조선일보사에 ‘조선상고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11편으로 나누어 엮은 책이 나온 것은 1948년이었다.(p.190-195)
‘조선상고사’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철학과 실증적 사료연구능력, 서사를 창조하는 문학적 내증을 모두 보여준다 …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안시성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 근처라고 서술했지만 신채호는 안시성이 압록강 너머 만리장성 바깥의 랴오허강 근처에 있었다고 보았다 … 조선의 역사가들은 사대주의에 빠져 연개소문의 승전기록을 없애버렸고 당의 사관들은 황제의 권위와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기록을 날조 왜곡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진단한다.(196-198)
신채호는 외부 침략을 물리친 전쟁 영웅에게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장군의 전기를 썼으며 평양 천도와 북벌을 주장했던 고려의 승려 묘청을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정치가로 평가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국가 공인 역사 교과서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요동과 간도 지역을 민족사에서 삭제하고 중요한 사료를 다 폐기해 버린 김부식을 사대주의 역사관의 원흉으로 지목하기도 했다.(p.201)
기왕이면 우리나라 역사를 다룬 책이 나을 것 같아서 경제사학자 백남운(1895-1979)이 일본어로 출판한 ‘조선사회 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살펴본다 … (백남운은) 해방 후에는 정치활동에 뛰어들어 김두봉, 여운형과 함께 중도좌파 정당에 몸담았다가 미국정이 사휘주의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자 1947년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를 선사 시대부터 원시 부족 국가시대와 삼국 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고대사를 서술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유물사관의 공식을 따랐다. 조선의 역사도 원시공산 사회-노예제 사회-봉건 사회-자본주의 사회라는 인류의 보편법칙에 따라 발전했다고 주장하면서 삼국시대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했다 … 백남운은 정통 유물사관을 견지했던 식민지 조선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p.204-206)
헤로도토스에게 역사 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 증명이었으며, 할둔에게는 학문 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의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게는 민족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 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자든 아나키스트든 마르크스주의자든,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이 쓴 역사를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적 환경과 오늘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같지 않은 데도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까?(p.212~213)
제7장 에드워드 H. 카의 역사가 된 역사 이론서
‘역사는 무엇인가’는 에드워드 H. 카(1892-1982)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했던 연속 특강을 정리해서 만든 책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는 평범한 역사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지식인 사회가 도달한 최고 수준의 지성을 보여준다 .,, 제1장부터 제4장까지 카는 ‘역사가’로서 발언했다. 제5장과 제6장에서는 ‘지식인’으로서 세계와 인류 문명의 앞날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p.225-228)
제8장 문명의 역사, 슈펭글러·토인비·헌팅턴
토인비 이야기를 할 때는 독일의 철학자 오스발트 A. G. 슈펭글러(1880-1936)가 항상 따라 나온다. 슈펭글러는 1918년 서구 문명이 몰락의 운명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는 책 ‘서구의 몰락’을 발표해 유럽 비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 슈펭글러와 ‘서구의 몰락’을 살펴보는 것은 토인비와 ‘역사의 연구’를 만나기 위해서일 뿐이다 … 슈펭글러는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천동설과 동격으로 취급했다. 세계의 중심이 서구라고 믿은 근대 서구인의 역사관을 조롱한 것이다.(p.248-252)
토인비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역사가의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역사는 기록이고 과학이며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서 차례에서 본 것처럼 ‘역사의 연구’는 문명의 탄생과 성장, 쇠락과 해체의 과정과 원리에 대한 단 하나의 이야기다. 세부 사항을 서술할 때 문학적 표현을 즐겨 사용한 그는 역사와 문학을 뒤섞었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문장 스타일을 견지했다.(p.256~257)
헌팅턴은 문명의 공간적 접촉에 대한 토인비의 이론을 정치의 무대로 소환해 냉전 해체 이후 국제질서와 정세의 변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로 제공했다.(p.246)
제9장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역사와 과학을 통합하다
인류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킨 인물은 재레드 다이아몬드(1937- )였다. 그는 원래 역사학자가 아니라 생리학, 조류생태학, 진화생물학, 생물지리학, 문화인류학 등을 연구해왔던 과학자이자 작가, 저널리스트였다 … 인문학과 과학을 아우르고 넘나드는 종합지식인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p.289).
‘총, 균, 쇠’가 지닌 특별한 점은 과학자가 쓴 역사서라는 것이다 … 다이아몬드가 수행한 인류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결론은 명확하다. 지난 500년 동안 유럽인이 나머지 세계를 정복하고 현대 세계의 부와 권력을 장악한 것은 다른 대륙 사람들보다 원래부터 뛰어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연히 그에 유리한 환경을 만난 덕분일 뿐이다.(p.294-295)
인류사의 문이 열리자, 다이아몬드가 다루었던 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품은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들어섰다 … 하리라의 ‘사피엔스’ 한국어판에는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하라리는 예루살렘에서 레바논 출신 유대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 ‘총, 균, 쇠’는 역사학의 연구 성과를 최대한 받아들인 과학자의 역사책이고, ‘사피엔스’는 과학자의 연구성과를 최대한 받아들인 역사학자의 역사책이다.(p.298-299)
인지혁명으로 걸음마를 뗐고, 농업혁명 이후 달리기 시작한 인류의 역사는 과학혁명으로 날개를 달았다. 은 시간이 흐를수록 빨라졌고 위력도 커졌다.(p.306)
에필로그
역사의 역사는 내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의미를 알면, 시간이 지배하는 망각의 왕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그라질 온갖 덧없는 것들에 예전보다 덜 집착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인생을 자신만의 색깔을 내면서 살아가라고 격려했다.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이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해졌기를!(p.320)
5. 나가는 말
저자에게 ‘역사’는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이자 평생에 걸쳐 찾는 지적 과제로. 역사를 탐구한 까닭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좀 더 깊은 답을 찾기 위해서라 하겠다. 역사를 읽고 쓰는 의미와 방법을 역사가의 삶과 그들의 텍스트로부터 추려낸 ‘역사의 역사’도 곧,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해석하고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는가에 대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역사 고전들은 혼자 읽고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다. 본서는 각 역사서의 주요 내용과 책이 쓰인 당시의 시대적인 맥락뿐 아니라 서술 대상과 서술 방식 등을 두루 살피며 자신의 언어로 요약한다. 여기에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을 체크해주거나,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안내자 역할까지 맡는다.
한편 저자가 생각하는 ‘훌륭한 역사서’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그는 책의 서두에 “훌륭한 역사는 문학은 될 수 있으며 위대한 역사는 문학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p.16)고 썼다. 역사는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당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낸다. 따라서 좋은 역사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독자와 공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저자는 본서의 곳곳에서 역사가들에게 답하듯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 예를들면 사마천의 ‘사기’(열전)야말로 사료와 문학적 상상력이 절묘하게 결합된 책으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임을 극찬한다(제2장). 신채호와 박은식의 텍스트를 읽을 때는 민족주의 역사학자의 험난한 인생 역정과 글쓰기에 안타까움을 피력한다(제6장). 인류사의 가능성과 한계를 읽는 저자의 지적 호기심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적극적이다(제9장).
저자는 역사에 대한 애정과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며, 자신의 역사 공부법을 공개하는 셈이다. 역사의 힘과 논리, 역사가의 생각과 감정, 역사 공부의 재미와 깨달음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저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게 한다.
임운규
(시드니시나브로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