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6년 6월 29일, 사도 바울 (Paul, 5연경 ~ 65년)의 순교일로 추정
바울 (Paul, 5년경 ~ 64/66년 6월 29일 순교 추정; 바오로, 바울로스, 고 그: Παυλος, 라: Paulus)은 초기 기독교의 사도로, 신약성경의 주요 부분인 바울 서신을 저술한 인물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앞장서서 박해하였으나, 예수의 음성을 들은 이후 회심하여 이후 기독교의 초기 신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회심하기 전의 이름은 ‘큰 사람’이라는 뜻의 ‘사울’ (שָׁאוּל)로 불렸다. 고대 로마의 속주였던 소아시아 키리키아 지방 (현재의 터키)의 중심 도시 타르수스 (다소) 출신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성공회에서는 6월 29일 사도 바울을 기념하며, 정교회는 7월 12일 기념한다.
– 바울 (Paul)
.출생: 기원후 5년경, 터키 다소
.사망: 기원후 64/66년경 (61 ~ 62세), 로마
.업적: 아시아와 유럽 전도여행, 바울서신들, 초대교회들 설립
바울의 순교한 때는 약간씩 다르게 추정되고 있다. 사망 년도를 율리우스력 서기 65년 6월 29일 (그레고리력 서기 65년 7월 12일)로 추정, 가톨릭과 성공회는 6월 29일을 기념일로 지킨다.
AD 33년경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 스데반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달아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몇몇이 안티오키아 (안디옥)로 가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행 11:19~21). 이것이 이방인 전도의 효시라 하겠다.
물론 그전에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한 일이 있고 (행 8:26~40) 베드로가 가이사랴로 가서 고넬료 백부장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례가 있지만 (행 10:24~48)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예외 현상에 불과하다.
특히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했다.(행 13:1~21:16) 그의 헌신으로 민족적, 지역적 범주에 머물러 있었던 기독교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세계적 기독교로 탈바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는 물론 억지이지만 바울이 복음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 틀림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삶을 꾸린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요, 지중해 곳곳에 주 예수님을 널리 선전한 사도이다.
바울의 생애를 엮자면 우선 그가 손수 쓴 편지들을 참고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료로서 사도행전을 꼽는다. 사도행전 9장과 13~28장에서는 바울의 개종과 활약상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기술한 누가는 바울을 상면한 적이 없었다.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자기 자신에 관해선 말하지 않고 주 예수님을 알리는 데만 전심전력한 까닭에 (고후 4:5) 그의 친서들에 따라 그의 생애를 엮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대조적으로 누가는 사도행전 9장과 13~28장에서 바울의 활약상을 일관된 서술한 까닭에 사도행전에 따라 바울의 활약상을 서술하기란 비교적 쉬운 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의 생애를 서술함에 있어 흔히 사도행전을 많이 따르게 된다. 바울에 관한 사료들을 포괄적으로 참조하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제법 자세히 밝힐 수 있다.
○ 생애 및 활동
– 출생 연도
AD 33년경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맨 처음으로 스데반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던 사람들의 겉옷을 맡았다. (행 7:58) AD 55년경 에베소에서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노인으로 자처한다. “나이 많은 나 바울은” (몬1:9) 바울의 출생 연도 또는 나이를 가늠케 하는 정보는 이 두 구절뿐인데, 젊은이 및 노인의 기준이 매우 모호한 까닭에 이런 표현들을 근거로 바울의 출생 연도를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출생지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났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행 21:39, 22:3) 다소는 지중해로 흐르는 치드누스 강 양편에 자리잡은 도시로서 지중해에서 16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하며, 현재 주민은 10만명 남짓하지만 고대에는 문화․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치드누스강에서 목욕하다가 익사할 뻔했다.
대왕 사후에 다소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니, 일례로 스토아 학파의 유명한 철인들이 여기서 활약했던 것이다. 기원전 64년 로마에 병합되었고, 기원전 57년에는 길리기아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다. 다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민와서 정착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바울은 자연스레 헬라어와 셈족어, 헬라 문화와 셈족 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
다소에는 바울 시대의 유적이 거의 없다. 고작 로마 시대의 성문이 남아 있는데, 흔히 클레오파트라 성문이라고 부른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와 함께 다소에서 신혼여행을 즐겼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다.
– 가족
바울이 자신의 출생․할례․성장 등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보면,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으며 철저한 바리새인으로 언급했다. 바울은 자신을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소개하는데, 당시 제관이나 레위가 아닌 평신도 유대인들은 유대 지파 아니면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자처했다.
<갈 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빌 3:5~6>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로라”
<롬 11:1>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특기할 사항은 그의 부모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바울은 태생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이다. (행 16:37~38, 23:27) 카라칼라 황제가 212년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전에는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로마 시민권을 지닌 이들은 많지 않았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어려서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당대 최고의 율사였던 가말리엘 1세 이래서 율법 공부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행 22:3)
– 이름
바울은 친서에서 자신을 일컬어 언제나 ‘바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7:58~13:7에서는 ‘사울’이라고만 하다가, 13장 9절에서는 ‘사울과 바울’을 동일시한 다음, 13:13~28:30에서는 ‘바울’이라고만 한다.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에서 세 차례 (행 9:1~19, 22:3~21, 26:9~18) 나오는 바울의 개심기에서는 그를 일컬어 ‘사울’이라고 한다.(행 9:4, 17 ;22:7, 13; 26:14) 이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이스라엘 초대 임금인 사울에게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로마․그리스식 이름이다. 우리 주인공은 이스라엘 문화와 언어권 그리고 그리스 문화와 언어권에 산 까닭에 ‘사울’ 과 ‘바울’ 두 가지 이름을 지녔던 것이다.
– 직업
바울은 전도할 때 스스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했다. 그것은 바울이 신도들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했고, 무엇보다도 수입을 노려 전도한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와 관련된 주요 단락은 다음과 같다.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했는지는 바울 자신은 직접 밝히지 않는다. 다행히 사도행전 18장 3절에 그의 직업이 명시되어 있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51년~52년경 그가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유대인 부부와 함께 천막 짜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 부부는 49~50년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한 관계로 고린도로 쫓겨와서 살다가 바울의 전도에 큰 도움을 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바울은 이처럼 교우들의 신세를 지기 싫어했지만 빌립보 교우들이 주는 도움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만은 바울의 진심을 늘 믿어 주었기 때문이다. (빌 4:10~20, 고후 11:9)
– 건강
개신 전의 건강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지중해 각지에서 전도할 무렵에 만성적인 지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로지 주 예수님을 선포하는 데 전력투구한 사도인지라 자신의 병명을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가 고질병에 시달린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갈 4:13~14>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50년경 제2차 전도 여행때 바울은 오늘날의 터키 중부에 위치한 갈라디아 지방을 그냥 통과할 작정이었으나 뜻밖에 발병하여 한동안 머무르게 되었고 그 기회에 그 지방에 여러 교회를 창설했다.
<고후 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에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바울은 43년경에 엄청난 계시의 말씀을 들었고, 그 다음부터 고질병을 앓게 되었다. (고후12:1~10) 바울의 혹평자들은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정작 대면하면 몸도 약하고 그 말주변도 미약하다” (고후 10:10) 하다 하였다.
성격과 언변
바울은 소극적인 타입이 아니었다. 그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곧 행동으로 옮기는 투사형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유대교를 신봉하는 데도 남달리 철저했고 한 번 개심한 다음 예수님을 전하는 데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그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신약 시대에 설교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계 그리스도인 아볼로였다. (행 18:24~28). 고린도 신도들은 아볼로의 설교에 열광한 나머지 아볼로 당파를 만들 지경이었다. (고전 1:11~12, 3:4~6, 22) 아볼로와는 달리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로부터 말주변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고후10:10)
그의 필력을 살펴보자. 바울에 대해 비판적인 고린도 교우들조차도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고 평했다. (고후10:10) 사실 바울의 편지는 자신의 신앙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이 있다. 그러기에 125년경에 씌어진 베드로 후서에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들 가운데는 난해한 곳이 있다고 한다.
<벧후 3:15~16>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 성장 배경
바울이 자라면서 받은 영향을 대별하면 세가지이다. 유대교 배경, 그리스 문화 배경, 로마 정치 배경이다.
유대교 배경은 이렇다. 바울은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았다.(빌 3:5, 갈1:14)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파에 가입했다. (빌 3:5, 행 23:6, 26:5)
그리스 문화 배경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바울은 그리스 견유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서 애용한 혹평 논법 (그리스어로 디아트리베)을 즐겨 썼다. (갈 5~6장, 고전 9장, 롬 2:9, 12~15). 이 논법은 적수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상하고 적수의 반론에 맞서 그를 이인칭으로 부르면서 공세적으로 논박하는 논법이다.
그리고 바울이 사용한 낱말들을 살펴보면 히브리, 아람어에는 없는 그리스어 낱말들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면 자유, 양심, 자연, 덕, 의무, 시민권, 이성 (理性) 등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운동 경기를 하지 않는데 반해 그리스인들은 운동을 무척 즐겼다. 바울은 그리스 경기 종목에 속하는 경주와 권투의 예를 들곤 했다. (고전 9:24~26, 빌 2:16, 3:13~14)
마지막으로 로마 정치 배경을 살필 차례다. 로마에서 출생한 바울은 로마 시민권에 따르는 특전을 누렸다. 로마 시민은 태형을 면했다. 따라서 바울이 빌립보에서 매질을 당하고 나서, (행 16:37) 예루살렘에서 매질을 당할 위험에 처하자 (행 22:25) 자신의 시민권을 내세워 항의했다.
또한 로마 시민이 지방 관청의 재판을 불신하는 경우에는 로마 황제의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AD 60년 가을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유대 최고 의회에 넘겨주려 하자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다. (행 25:6~12)
교회 박해
바리새파의 바울은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는 율법 실천에 몰두하였다. (갈 1:13~14, 빌 3:5~6). 그러므로 그는 율법을 호되게 비판한 예수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율법과 성전 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절대로 메시아 일수 없다고 바울은 확신했다.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 사건이지, 역사 한 가운데서 일어난 과거 사건일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 (갈 1:13, 23, 고전 15:9, 빌 3:6). 그가 박해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행 6:11~14)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스데반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했고, (행 7:58~8:1) 수리아 지방의 다메섹 교회를 박해하러 출장가기도 했다. (행 9:1~19, 22:3~21, 26:9~18) 스데반이 순교하자 예루살렘의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지중해 동부 여러 곳으로 피신하여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만, 나중에는 이방인들에게도 전도했다. (행 11:19~20)
– 개심
AD 33년경 바울은 다메섹 교회를 핍박하러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뵙고 주의 사도가 되었다. 예수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 돌변했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대하는 시각이 한순간에 달라졌던 것이다. 개심이야말로 바울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갈 1:15~16>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행전의 필자인 누가는 세 번에 걸쳐 자상하게 바울의 개심담을 소개했다. (행 9:1~19, 22:3~21, 26:9~18)
– 개심에서부터 제1차 전도여행 직전까지 (AD 33~45년경)
바울은 개심한 다음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신앙 노선을 준수하면서, 유대 민족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하였다. 그는 스스로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개심한 다음 그는 우선 다메섹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았고 (행 22:16) 설교도 했다. (행 9:20~22).
그후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나바데아 왕국, 지금의 요르단 왕국)로 갔다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새” (갈 1:17~18)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목적은 그곳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전도는 고사하고 아라비아인들의 미움을 사서 다메섹으로 피신한 것 같다. AD 36년경엔 다메섹에서 바울을 체포하려고 하자 그는 비상 수단을 동원해서 극적으로 탈출,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서 보름 동안 게바와 함께 지냈다.
극적인 탈출 사건에 관해서는 바울 자신이 기록을 남겼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고후 11:32~33, 행 9:23~25)
AD 36년경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 게바와 야고보를 만나 보고 나서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서 한동안 (36 ~ 44년경) 전도했다. (갈 1:19~24)
그 무렵,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수리아의 수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도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거하는 교회 공동체를 설립했다. (행 11:19~20)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구브로섬 출신 바나바를 파견하였다.
바나바는 다소에 있던 바울을 초빙하여 만 일년 동안 (44~45년경) 그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돌보았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 11:19~26에 적혀 있다.
안디옥은 사회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대도시였다. 로마 제국의 주민 100만 명이 넘는 도시는 제국의 수도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라아였고, 안디옥은 수리아 지방 수도로 50만명의 시민이 살았다. 로마 제국에서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요즘에는 발음이 조금 바뀌어 안타키아라고 하며, 주민은 20만명쯤 된다.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본대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 고넬료 가족에게 전도한 적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 현상이었다.(사도쟁전 10장)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가 안디옥에서 교회 사상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행 11:20) 그 결과 안디옥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생겨났다.
–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에 광범위한 전도여행을 하게 되는데, 안디옥을 전도의 거점으로 삼았다. 안디옥과 지중해는 오론테스강으로 연결되었다. 안디옥에서 지중해까지는 80리. 오론테스강 하구에는 셀류기아 피에리아 항구가 있는데 (행 13:4), 바울이 바다로 여행할 때면 그 항구를 이용하곤 했다.
– 안디옥 시민들이 예수를 신봉하는 성도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6)
– 사도 교부 이냐시우스가 여기서 주교로 재직하다가 110년 로마에서 순교했다. 4세기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중요한 총대주교좌가 되었다.
– 제 1차 전도 여행 (45~49년경)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행전 13~14장에 있다. 사역자들은 바나바, 그의 생질 (조카) 마가 (골 4:10), 그리고 바울. 그들은 안디옥에서 서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셀류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나바의 고향 땅인 구브로 섬 (현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살라미스와 총독부가 있던 바보에서 전도하였다.
바보에서 승선하여 터키 남부 지역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는 그만 전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행 13:13)
버가에는 헬라․로마 시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1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 1만 2천명이 구경할 수 있는 경기장, 공중 목욕탕, 헬라 성문, 로마 성문 등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버가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터키 중부 지역으로 가다가 비시디아와 안디옥에 이르렀다.(행 13:14) 양자간의 거리는 약 160킬로미터. 오늘날의 얄바츠 근교에 비시디아의 안디옥 유적이 남아 있다. 미시간대학교 발굴팀이 여러 유적들을 발굴했는데 그 중에서 아우구스투스 신전이 볼 만하다.
사도행전 13장 14~52절에 따르면 사역자들은 두 안식일에 걸쳐 회당에서 설교했는데 이방인들은 믿었으나 유대인들은 불신할 뿐더러 사역자들을 추방해서, 사역자들은 이고니온으로 갔다.
이고니온은 오늘날에는 코니아라고 하며 1992년 현재 주민은 180만 명이고, 바울 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 코니아는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메블라나 셀라렛딘 루미 (1207~1273)가 활약한 덕분에 신비주의 성지가 되었고, 12~13세기에는 강력한 셀주크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현존하는 유적들은 대부분 그때의 것들이다.
이고니온에 이어 루스드라에서 전도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설교하던 중에 앉은뱅이를 고쳐주자, 주민들은 바나바는 쓰스(제우스 신)이요, 바울은 허매 (헤르메스 신)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 하였다.(행 14:8~18) 루스드라는 제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울의 애제자가 된 디모데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행 16:1~2)
루스드라에 이어 더베에서 전도한 다음 (행 14:20~21) 이제까지 전도한 지역들을 거꾸로 가면서 보살피고 나서 앗달리아 항구에서 전도 출발지였던 안디옥행 배를 탔다.(행 14:25~26) 앗달리아는 오늘날엔 안탈리아로 이름이 조금 바뀌었다. 1992년 현재 주민 수는 90만명. 기후와 물이 좋아 이름난 휴양지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117~138년 재위)의 순시를 기념해서 세운 하드리아누스 성문이 보존되어 있다. 아치식 출입구가 셋이 있는 성문이다.
– 예루살렘 사도회의 (49년경) 예루살렘 사도회의 (49년경)
제1차 전도여행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들에게 예수 신앙만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유대교의 율법 준수까지 요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에 상주하던 토박이 유대계 사도들과 지중해 동부 여러 곳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유대계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참석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하였다.
–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 이 결의로써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로부터 명실공히 독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 예루살렘 거주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한다.
안디옥 사건
갈라디아서 2:11~14에 기록된 안디옥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가 있고 나서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였다. 당시 그곳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유대인들이요 또 일부는 이방인들이었는데, 그들은 격식 없이 함께 모여 공동체 모임을 갖곤 했다. 곧,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거행했던 것이다.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라 알려지자 소동이 일어났다.
예루살렘 교회 총책임자인 베드로가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해선 안된다는 규정을 어겼으니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이를 나무라자 베드로는 그만 이방인 성도들과의 회식 겸 성찬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베드로의 영향을 받아 안디옥 교회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마침내 바나바조차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끊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베드로의 일관성 없는 태도 때문에 안디옥 교회가 양분되었던 것이다.
이에 바울은 분연히 일어나서 그곳 교우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었다. 곧,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해선 안된다는 율법 규정 때문에 교회 일치가 파괴될 수 없다고 준엄히 나무랐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도회의의 규정에 따라 바울은 교회 일치를 설파했던 것이다.
– 제2차 전도 여행 (50~52년경)
제2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행전 15:36~18:22에 있다. 사역자들은 양분되어 바나바와 마가는 구브로섬으로 가고 (행 16:39) 바울과 예루살렘 출신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요 로마 시민인 실라 (행 15:22, 32, 40)는 바울이 이미 1차 전도한 바 있는 터키 남부 지역인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다시 찾아갔다. (행 16:40~41)
다소의 치드누스강을 따라 북상하여 47킬로미터 지점에서 길리기아 관문을 통과한 다음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로 갔을 것이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제자로 삼았다. (행 16:1~3) 이어서 당시의 갈라디아 지방, 오늘날의 터키 수도 앙카라 주변을 지나가던 중에 갑작스런 발병이 계기가 되어 갈라디아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교회를 창립하였다.(행 16:6)
드로아에 이르러 교회를 세운 다음 (행 16:8~10, 20:6~12) 밤에 계시를 받고서는 에게 바다를 건너 그리스의 항구도시 네압볼리 (오늘날의 휴양도시 카발리)에 닿았다.(행 16:6~11)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리스 북부 지역 마게도니아에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를, 그리고 남부 지역 아가야에 고린도 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네압볼리에 닻을 내린 바울은 에냐시아 국도를 딸 13킬로미터 내륙으로 들어가서 빌립보에서 전도했다. 빌립보 전도에 관해서 사도행전 16:13~15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빌립보 교회야말로 바울이 구라파 대륙에 세운 첫 번째 교회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생계와 전도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유일무이한 교회다. 빌립보 전도 말기에 바울은 점쟁이 노비에게서 점 귀신을 떼어 준 관계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기회에 간수의 가족을 구원시킨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중 (53~58년경) 에베소에서 무려 27개월간 머물렀는데 한 때 바울은 신앙 때문에 에베소 주둔 로마군 부대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때 빌립보 교우들로부터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고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곧 빌립보서다.
기원전 42년 빌립보에서 로마 공화국의 운명이 판가름났다. 케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씨우스의 로마군, 그리고 케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로마군이 대회전을 벌여 후자가 승리한 곳이 바로 빌립보이다. 그후 승자들끼리 로마 공화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다스리다가, 기원전 31년 그리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쳐 대권을 통합하고 기원전 27년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로 즉위했다.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 재위)
바울 시대에 빌립보에는 주로 로마인들이 살았다. 로마 시대의 유적으로는 아크로폴리스 산비탈 아래에 극장, 에냐시아 국도, 광장 등이 남아 있다.
빌립보를 떠나 바울은 압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마게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가로 가서 전도했다. 바울은 관례대로 안식일에 유대교 회당에 가서 설교하여 많은 시민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의 전도를 반대하는 바람에 바울 일행은 올림퍼스 산중에 있는 75킬로미터 떨어진 베뢰아 (지금의 베리아) 마을로 피신했다. (행 17:1~10) 바울은 베뢰아와 아덴 (현 아테네)을 거쳐 고린도에서 전도할 무렵 데살로니가 교회로 편지를 보냈으니, 이것이 곧 데살로니가 전서이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예수 부활과 예수 재림을 강조했다. 예수님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이미 일어났고, 그 분이 재림할 때면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오늘날 데살로니가와 그 주변의 주민 수는 56만 명이다. 데살로니가는 수도 아테네 다음으로 큰 도시이고, 가장 큰 항구 도시이다.
바울 시대 유적으로는 소개할 만한 것이 없다. 후대의 유적으로는 도심에 갈레리우스 개선문이 있다. 이는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개선문이다.
바울이 베뢰아 마을에서 전도하는데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극도로 훼방하는 바람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두고 홀로 아덴으로 갔다. (행 17:10~15) 당시 정치․경제적으로는 몰락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우월감을 드러내었던 아덴에서 바울의 설교는 거의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전도 실패담이 사도행전 17:16~34에 적혀 있다.
실라와 디모데가 아덴으로 내려오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을 알아보고 싶기도 하고 또한 그곳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해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고 (살전3:1~5) 바울 자신은 실라를 데리고 고린도로 내려갔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89킬로미터 떨어진 고린도로 가서 무려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큰 교회를 세웠다.(행 18:1~17)
고린도는 그리스 남부 지역 아가야 속주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북쪽에는 레카이온 항구를, 동쪽에는 겐그레아 항구를 끼고 있어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자연히 풍기는 문란했다. 고린도 뒷산 위에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여 (女) 신전 주변에는 이른바 창녀 (神娼)들이 1천여 명이나 득실거렸다고 한다.
AD 45~50년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하였다.(수에토니우스. ‘그라우디오의 생애’ 25항) 그때 로마의 유대계 그리스도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로마에서 고린도로 옮겨 천막 만드는 일에 종사했는데, 바울은 이들 부부와 함께 살면서 같은 일을 하였다.
그리고 디모데가 고린도로 내려와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자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편지를 써 보냈으니 곧 데살로니가 전서이다. 이는 바울의 편지들 중에서 첫 번째 편지일 뿐 아니라 신약 성서를 통틀어 제일 먼저 씌어진 작품이다.
고린도 지역에서 전도의 말엽에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아가야 총독 갈리오의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발하였다. 갈리오 총독은 당대의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으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 함부로 종교 문제에 무모히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행 18:12~17) 고린도 유적지에 가보면 레카이온 중앙통 끝에 총독이 연설하고 재판한 법정 축대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델피에서 발견된 금석문에 의하면 갈리오는 51~52년 아가야 총독으로 재직했다. 바울 역시 같은 때에 고린도에 체류했다. 사도 바울은 겐그레아 외항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베소, 이스라엘 총독이 상주하던 가아사랴,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행 18:18~22)
– 제3차 전도 여행 (53~58년경)
사도행전 18:23~21:16에 제3차 전도 여행기가 실려 있다.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설립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을 돌본 다음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베소로 내려가서 무려 27개월 가까이 활약했다.(행 19:8~10, 20:31)
– 문이 활짝 열렸다고 바울 자신이 말할 만큼 에베소에선 전도가 잘 되었다. “내게 광대하고 공효(功效)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고전 16:9) 또한 사도는 제자 에바브라를 시켜 에베소 동쪽 500리쯤에 위치한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도 교회를 세웠다.(골 4:12 참조)
–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에 유대주의를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의 소식을 접하고 갈라디아서를 써 보냈다.(갈 1:6~10)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곧 지금의 고린도 전서이다. 또한 에베소 로마군 부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빌 1:13) 빌립보 교회와 골로새 교회 신도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감옥에서 석방되어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행 20:1 참조) 고린도 교회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이는 고린도 후서이다.
– 풍요의 여신 아데미 신전이 있었는데, 세계 7경 중 하나라는 평판이 있었고, 온 아시아에서 순례객들이 모여들었다. 바울의 전도로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드는 은장이들의 수입이 줄어들 지경이었다. 그러자 은장이들의 사주를 받은 시민들이 바울의 일행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극장으로 데려가 난동을 피웠다.(행 19:23~40) 바울 시대 유적들로는 가슴에 황소 생식기가 달린 아데미 여신상. 피온산 기슭에 자리잡은 극장.(수용 좌석 2만 4천석) 피온산 너머 아데미 신전터 등이 있고, 교부 시대의 유적들로는 에베소 공의회 (431년)가 개최된 바 있는 성모 성당, 그리고 성 요한 성당 등이 있다.
마침내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헬라 (고린도)로 내려가서 석달 가량 머무르는 동안 (행 20:3)에 자신의 신앙을 총집약해서 로마 교우들에게 보냈으니, 곧 로마서이다. 장차 로마 교회를 방문한 다음 스페인으로 가서 전도할 적장을 한 사도인지라 (롬 15:22~28) 자신의 신앙을 공유하지는 뜻에서 로마 교우들에게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다음 빌립보 교회로 가서 58년 과월절을 보내고 (행 20:6) 에베소 남쪽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밀레도 그리고 오늘날 레바논의 항구도시 두로,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 항구도시 아코 (옛적의 돌레마이), 이스라엘 총독부가 위치한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행 20:7~21:17)
– 체포, 구금, 로마행, 가택연금 (58~63년경)
바울이 예루살렘에 상경하여 성전에서 체포되기까지의 경위는 사도행전 21장 17~36에 적혀 있다. 예루살렘을 찾는 아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알아보고 민족과 종교의 배신자로 규탄하면서, 그에게 린치를 가했다. 다행히 성전 북부에 주둔한 로마 군인들이 구해 주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어서 안티바스를 거쳐 (행 23:31) 지중해 부근의 가이사랴 총독부 감옥으로 이송되어 미결수로 2년 동안 갇힌 몸이 되었다 (58년 오순절 ~ 60년 가을. 행 23:12~27). 바울은 총독의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했다.(행 25:1~12)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었는데, 사도행전 27:1~ 28:15에 그 기록이 있다.
AD 60년 가을 (행 27:9) 가이사랴를 떠나 그레데 섬을 거쳐 (행 27:8~12) 항해하다가 파선하여 구사일생으로 멜리데 (몰타)섬에 상륙하여 석달 동안 겨울을 났다.(행 28:11). 61년 봄에 다시 배를 타고 시실리섬을 거쳐 나폴리 북쪽에 있는 보디올리 포구에 닿아 육로로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에선 감시를 받기는 했지만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행 28:16) 거처를 정하고 자유롭게 손님을 맞아들이면서 2년 동안 지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 28:30) 일종의 가택 연금 상태라 하겠다. 사도행전의 경우 바울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 스페인 전도
58년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쓸 때부터, 바울은 예루살렘과 로마를 거쳐 서바나 (현재 스페인)에 가서 전도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롬 15:24, 28) 그 소원이 실제로 이루어졌을까? 로마 주교 클레멘스가 95년경 고린도 교회로 써 보낸 편지를 보아도 바울이 스페인에 가서 전도 후에 언젠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 바울은 언제 어떻게 순교하였을까? 전거가 없으니 짐작할 수 밖에 없다. AD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 시가를 불지르고 나서 여론이 사나워지자 다급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간 (64 ~ 68년) 모질게 박해하였다. (타키투스 ‘연대기’ 15:44)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네로 박해 때 순교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았고,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 남문 교외에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곳 (Tre Fontane)에서 순교했고, 그 근처 대성당 (San Paolo Fuor le Mura) 자리에 묻혔다고 한다.
○ 바울의 신학
예수 그리스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된 야고보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인 12사도들은, 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리스 등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 선교하여,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만 바울도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선교하였을 뿐, 유대인에게 선교 우선권을 두었다. 이것은 유대인이 선택받은 백성인 만큼 복음을 먼저 접할 우선권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전도할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유대인 밀집 지역의 회당으로 가서 전도하고 거절당하면 이방인들을 상대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회당에서는 바울을 핍박하고 쫓아내기 일쑤였고 결과적으로 이방인 전도자 수가 유대인 전도자 수보다 많았다.
야고보와 베드로를 위시한 12사도들과는 달리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학을 수학하며 외웠고 로마 제국 시민권자로서 당시 그리스 (헬라) 철학에도 상당히 능통하였다. 바울은 예수를 향한 사상을 정리하는 방식도 달랐다.
바울은 모든 이들이 예수를 믿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주장했는데,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메시지다.
바울은 믿음 이외의 다른 것들, 특히 유대인이 중시했던 ‘혈통’과 ‘율법’을 중시하기보다는 믿음을 강조했기에, 어느 정도 유대교와의 연속성 내에 있으려고 했던 야고보나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와도 다를 뿐더러 일반 유대인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실제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회당에서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들어오니 당황하면서 이리저리 변명한 일에 대하여, 나중에 바울로에게 질타당한 적이 있다. 그만큼 바울의 사상은 혁명적이었고, 반면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조차 혈통주의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바울의 신학 중 강조점은 믿음으로써 의인의 신분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이다. 믿음으로써 의인이 되어 ‘믿음의 조상’으로 선포된 아브라함의 사례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의로움에 이르려는 그 어떤 인간의 노력에도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들어 이것을 입증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수행과 공덕 같은 의로운 행위를 이용한 구원의 완성을 주장하는 여타 종교와 구분된다고 주장하는 근본이 되는 교리 중 하나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바울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교의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해 율법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에서 중요한 바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이웃을 향한 헌신과 사랑이지, 외면에 관계된 율법 행위의 시행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역설했다. 이것은 예수께서에도 바리새인을 위시한 기성 유대인을 대상으로 비판한 바이기도 하다.
유대교 관점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유대인이고 선민의 표시였기에, 바울은 유대교의 정체성을 흔드는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한테 공격당했다. 바울이 이런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당시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율법행위들을 중시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반대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율법주의를 고수해 온 유대인 처지에서 이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 Werner G. Kümmel의 견해
원시 기독교의 사상발전의 맥락 속에서 바울의 중요성은 그가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였을 뿐 아니라, 선교사였다는 점이다 . 이는 그가 조직적으로서가 아니라, 선교사적인 과제의 맥락에서 숙고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바울을 적절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신학적 사유에 대한 역사적 전제들을 고찰해야만 한다. 그는 랍비의 제자일 뿐 아니라, 신념있는 바리새인이며, 디아스포라 유대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적 표현에서 바울은 팔레스틴-유대적인 개념들과 표상들도, 헬라주의적-유대적인 개념들과 표상들도, 헬라주의적-이교적인 개념들과 표상들도 사용하였다는 점을 참작해야만 한다. 바울의 신학을 서술하기 위한 자료들로서는 A.D. 50년과 60년 사이 에 기록된 9개의 바울 서신들이 있다. 우리는 바울의 문학적인 표현들이 유럽과 소아시아에서의 그의 활동의 짧은 기간에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선포에 있어서 가장 중심된 것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을 당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바울의 신학의 출발점은 임박한 종말적 구원의 완성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점에서 바라볼 때 바울의 구원론이 이해될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서신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다가오는 종말사건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는 바울에게 있어서 현재는 이미 구원의 시대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기대의 지평에 국한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함에 따라 이미 종말은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으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확신은 예수의 궁극적인 재림에의 희망을 가져오게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종말적인 행동을 야기했던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죽음, 그의 부활을 통하여 그의 현재는 결정적으로 규정되었다는 생각에서 그의 신학의 출발을 확실히 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하여 시작된 이 종말사건은 두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와 결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이며, 두 번째는 종말사건을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와 결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바울은 창조이해로 하나님의 행동의 모든 방향은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옛날부터 계획된 종말구원의 시작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바울의 소명 체험은 하나님께서 때가 찼을 때 실제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으며, 그리스도는 맏아들로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서 바울은 현재를 시작된 종말 구원의 시대로 이해했으며, 그리스도인을 이러한 역사적 현실의 맥락 안에서 보게 되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존재나 인간적인 실존을 정확히 기록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려지지 않은 하나님께 속한 분이 자유로운 행위로 인간 존재의 완전한 현실로 물려받았으며, 더 나아가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관심하고 있다. 그는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 현재를 구원의 완성을 희망하는 시대로 보고 있다. 구원의 현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그의 영을 통하여 현재적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인자라는 칭호대신에 미래의 아담으로 주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로써 장차 오실분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주”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라는 칭호는 자신이 주의 종이라는 의식에서 나왔음을 볼 수 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을 자기의 소유로 얻으신 것이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어투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하여 행동하신다는 확신으로 인한 것이다.
세상에 관하여서 바울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으로 들어왔으며, 하나님은 피조물을 허무에 종속되게 버려두셨다고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육과 영은 대립 안에 있는 것으로 보고, 육과 몸을 다르게 표현한다. 육은 죽을 현실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반면, 몸은 부활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바울은 아담으로 말마암아 시작된 죽음에 대해 말하지만, 원죄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나며, 이러한 점 때문에 신의 은혜가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을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음을 강조한다. 그는 이 세계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영의 세력아래 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을 누리며, 율법과 죄와 죄과로부터도 해방을 누림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으며, 이것을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범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롭다 인정하시는 행동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일어난 사랑의 행동이라고 표현한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의는 죄있는 인간을 종말에서 의롭다고 선포하시며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일어난 사랑의 행동이다.
바울은 죄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음을 세례를 통해서 말한다. 세례는 물속으로 들어감은 죄사함을 주는 씻어냄으로 해석한다. 바울은 세례에 대한 이해를 원시공동체와 함께 하고 있으며, 세례받을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합시킨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주의 만찬은 하나의 공동체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 역시 종말때의 구원과 결합된다고 본다.
바울과 예수의 문제에 있어서 예수의 선포와 바울의 신학은 상이한 구속사적 상황에 처해있다. 비록 두사람다 구원완성을 시간적인 임박속에서 기대했으며, 모두 희망된 종말구원이 그들의 현재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신했을지라도 예수가 자신 안에 성취되는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한 반면, 바울은 성취된 구원을 삼자의 입장에서 증언하는 것이다. 분명 바울은 예수보다는 하나님에게부터 떨어져 있으며, 그의 사역은 예수로부터 시작되었음은 확연한 것이다. 그는 예수의 종으로서 종말론적인 선포를 지닌 사람이지만, 복음의 본질에 있어서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지닌 자들이었다.
– 바울 신학
바울 신학이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자처하던 율법주의자 유대인 사울이 예수의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석으로 가던 도중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회심한 후 복음의 사도로서의 바울의 신앙과 그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정립 표현함을 말한다.
바울은 선교 활동을 위해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고 이들 새로운 교회들과 많은 서신으로 문안, 권면, 격려, 지도를 하였다. 바울의 많은 서신들은 신약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사도행전은 그 내용의 절반 이상을 바울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복음의 교리와 복음의 윤리적인 내용들을 명확하게 제시한 개척 신학자이다. 고로 바울 사도의 서신들은 그가 신학적으로 조직적으로 기록함을 알 수 있다.
바울의 메시지인 바울서신을 각자 자신이 받은 사명적 배경 속에서 바라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진술한 교훈과 그의 세부적 권면들을 꿰뚫고 흐르는 진리의 원칙들이 오늘날에도 신앙과 실천에 대하여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처음 바울에게 영감을 주셨던 성령께서 동일한 역사로 오늘의 성도들의 마음을 지켜주고 역사하고 계시다. 오늘날 우리가 바울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사상 속에서 찾아야 한다. 바울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바울의 종교관은(갈2:20; 고전15:30; 갈6:14-17) 자기를 부르신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며, 또한 그리스도에게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사는 삶이다. 특히 바울의 신학은 인간학적으로 해석하려는 현대의 종교적 실존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반대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빌 1:20-21; 고전 2:1-52:13-14; 빌 3:7-9)
– 바울 신학의 특색
.체험 중심 신학
바울은 처음부터 신학자로 출발하지 않는다. 그는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그의 모든 사상은 여기에서부터 발전한다. 바울이 말하는 체험이란 인간자신의 자의적인 힘에 의한 체험이 아니라, 바울의 체험은 그와 정반대로 예수가 나타나서 바울을 책망하고 넘어뜨리고 회개케하는 불가항력인 강권적 외적의 힘에 의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요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체험은 인간중심인 인본주의이며 바울의 체험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중심의 신본주의이다. 이렇게 본질상 다른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에 나타난 예수를 말하며 자기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이체험 중에서 완전히 죽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기를 말할 때에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1; 갈 2:20; 롬 14:7-8) 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는 살고 자기는 죽는 것을 항상 체험하면서, 다메섹의 체험을 생활의 필수조건으로 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체험은 사람들이 흔히 명상하는 가운데 무슨 비젼을 봤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전인생이 뒤집어지는 정확하게 말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이다. 그러므로 그의 체험은 다른 종류와 비교할 바 아니다. 전 인생이 개조되었다는 이런 체험은 부활하신 예수가 거기에 나타나서 이런 사건이, 발생하였음으로 체험의 주동자는 그리스도이며 바울은 피동적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당했을 뿐이다.
.그리스도 중심 신학
바울의 체험중심 신학은 자연히 그리스도 중심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체험의 내용이 예수의 빛을 보고, 또 그를 직접 만나고, 그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체험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었다. 실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내던지고 (빌 3:8), 그리스도만 알기로 작정하고, 일편단심 그를 위하여 염려하고, 그리스도만 자랑하면서, 살든지 죽든지 그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사나 죽으나 예수의 것으로 그 생애를 일관했다 (고전 2:2; 갈 2:19-21; 빌 1:20; 롬 14:8).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십의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여행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면서 예수를 전했다 (고후 11:23-27).
이와 같이 바울은 예수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14:7-8)고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확신하고 있다.
바울의 이와같은 예수 집착의 이유는 ① 다메섹의 체험이 너무도 강권적이며, 거기에 나타난 예수가 바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확신을 주었으며, ② 바울 자신이 예수를 이단시 할 때, 진실한 기독교인 스데반 집사를 죽이고, 또한 예수를 핍박했던 일을 생각할 때에 무지했던 자신을 자책하므로, 바울이 예수에게 집착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기몸에 매질을 하면서까지 오직 예수에게만 복종코자 하였다.(고전 9:1-16; 빌 1:20-21) 그리고 바울은 회심 전에 이미 예수의 교훈이나 그가 한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서신에서 찾아 볼수 있다. 예수님이 만찬을 잡수신 일이나, 부활에 대한 일이나, 기타 예수님의 교훈이 많이 써있음을 볼 수 있다.(고전 13:23-26; 15:12-21; 행 20:35; 갈 3:1-2)
그러나 그가 예수를 알았다고 할지라도 회심 전에는 “육체대로”만 알았고 회심 후에는 “신령하게”만을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후 5:15-16; 갈 2:19-20)
결국 바울은 회심 전에 기독교도를 열심으로 핍박한 점에서 볼 때에, 그는 예수에 대한 말을 많이 듣고 있었으나, 예수가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고, 메시야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으로 박해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보통 사람들이 넘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이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치 않았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세례 요한이 예고하기는 했지만 (마 3:11-12; 요 1:32-34), 그를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세례 요한 자신도, 믿어지지 않아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확인케 하였다.(마 11:2-5)
바울은 회심 후에야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오실 메시야로 안후에는 그분만 붙들고, 살든지 죽든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 산다고 하면서 평생을 일관하였다. 그는 실로 그리스도만 중심하는 그리스도의 봉사자요, 그리스도와 합한 자였던 것이다.(빌 1:20-21; 딤후 1:11-12; 갈 2:20)
.중생 중심 신학
바울 신학의 또 하나의 특색은 그의 체험에서 오는 중생을 역설하는 데에 있다. 육체적으로만 예수를 알았던 사울이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 보고는, 눈이 어둡게 되었고 그러나 그의 심령의 눈이 뜨면서 새사람이 되었다. 그 후 바울은 3년간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사는 동안 주님의 계시를 받아 율법주의자 사울은 완전히 죽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는 새사람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중생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알지도 못할 뿐더러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미련하게 여겨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고로, 진노를 받을 자식이니, 이러한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심령을 새롭게 하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다.(고전 2:14; 롬 8:7; 엡 2:3; 갈 5:24; 고후 5:17; 엡 4:22-24)
중생한 새사람은 의와 진리로 지으심 받아서 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고,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다메섹에서 넘어짐같이 넘어져야 하고, 큰 회개와 중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생전의 사울은 예수가 한낱 목수의 아들로 보았으나, 중생 후의 바울은 그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안에 능력이 있고, 복과 부요함이 충만함을 보고 세상의 구주로 섬기게 되었다.(고후 12:9; 롬 15:29; 엡 3:8; 엡 4:13; 갈 3:16) 그러므로 중생은 바울과 예수를 관계지어준 큰 계기가 된 것이다.(갈 2:20; 고후 5:17; 딛 3:5)
바울은 이 중생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 중에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갈 1:13-16; 고전 15:3-10; 빌 3:5-11; 딤전 1:12-16) 초대교회도 바울의 중생문제를 중대시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도 여러번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행 9:1-18; 22:3-15, 26:4-18) 그래서 그가 중생을 말할 때에 그것없이는 예수가 없고 하나님이 없을 만큼 크게 취급한 것을 알 수 있다.
.선교중심 신학
바울은 자기가 받은 체험과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선교 문제가 나온다. 그리고 그 선교의 내용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고전 2:1-5; 롬 1:16; 고전 15:9-10; 엡 3:7-9; 딤 1:3)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함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말함이라 하고, 자기는 나타내지 않았다.(롬 1:16; 고전 1:182:1-2; 고후 4:5)
선교는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에 예수에게 직접 받은 사명이요, 오히려 이 사명 때문에 예수가 다메섹에서 바울을 붙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후일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으리니”(고전 9:16)라고 하였고, 그의 3회에 걸친 전도여행은, 당시의 세계판도로서는 최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새교회를 세웠고, 남이 세운 터 위에는 일하지 아니했다.(롬 15:20)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이었으며, 앉은뱅이를 고쳤고, 무녀에게도 옥졸에게도 아데네의 철학자들에게도 상선의 선객들에게도 로마의 옥중에서도 전도했다.(행 13:42-46; 14:8-16; 16:29-32, 17:18, 27:22-25, 28:23, 30-31) 그는 전형적 전도자로서, 그 사명을 위해 담대하였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선한 뜻으로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면서 전도에만 열정을 다바쳤다.(빌 1:20; 딤후 4:2; 빌 1:15; 살전 2:8; 골 1:28-29)
그리하여 그의 선교중심 신학은 자연히 교회중심 신학과 연결된다. 선교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교회를 위하여 서신을 썼다.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을 흠이나 티가 없는 영화로운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보고 (엡 5:26) 사랑하였다. 그래서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찾아가기도 하고 편지를 썼다. 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었고, 그가 쓴 서신들은 자기가 전한 예수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일이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면서 (고후 6:16; 딤전 3:15) 교리를 지키고, 권징을 하면서 (딤후 2:15; 고전 5:13; 빌 4:9; 딤 4:2),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한다.(엡 4:29; 롬 12:5; 고전 12:12; 엡 4:15-16) 이러한 바울의 교회관은 그가 진실로 일생토록 선교를 위하여 몸바친 모범적 전도자임을 알게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