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 베트남을 다녀와서

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베트남을 다녀와서 베트남 수도 하노이 지난해(2018) 10월 […]

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베트남을 다녀와서

베트남 수도 하노이

지난해(2018) 10월 1일, KAL479 항공편으로 베트남 수도 하노이를 방문했었다. 필자의 베트남에 관한 단편적인 인식으로 3박4일의 베트남여행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베트남은 호치민이라는 공산당 지도자가 골리앗이라고 해야 할 미국을 상대로 끈질긴 투쟁끝에 쟁취한 통일된 국가이지만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느라고 허덕이고 있을 나라쯤으로 생각했다. 도착한 날 오후 하노이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하롱베이라는 관광지로 이동하면서 꿈에서 깨어나듯 베트남의 이미지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17명의 여행객을 인솔하는 가이드의 베트남 해설은 마디마디가 새로운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속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무엇보다 하노이 지역만 해도 매일 3,000명 이상의 한국인이 방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노이공항 여행객 만 3,000여명이지 사이공이나 다낭 등 다른 지역으로 가는 여행객까지 합산하면 엄청난 수의 한국인들이 베트남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토록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인이 있겠지만 필자로서는 언듯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베트남 여행기를 쓰고 있는 이 시간에(2018년 11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이 동남아 순방길에 오르는 기사가 있다.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정상회의와 파푸아 뉴기니에서 열리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5박6일 일정으로 출국(2018년 11월 13일)하였다는 기사다. 지난해 태국을 다녀 올 때의 공항이나 금년 베트남을 오고가는 비행기 안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확인해보니 한국의 유학생 유치정책의 영향인 것 같았다. 동남아에 관광객 증가뿐만 아니라 동남아 등 아세안 국가들과 무역 등 경제관계며 문화교류가 날로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인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지역이 아세안이다. 인적 교류는 해마다 10%씩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1,000만 명을 달성하고, 2020년까지 이를 1,500만 명으로 확대한다는 것이 한국정부의 목표라고 한다.

문재인 정부의 신 남방정책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신 남방정책”의 관계자가 언급한 것을 보면 인적 교류의 넘버1은 미국이고 넘버 2(2위)가 일본인데 일본에서는 혐한류 붐이 다시 나타나고 있어서 아세안이 일본을 제치고 넘버2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특히 유학생 수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17년 아세안 지역으로부터 유학온 학생이 2만 명 정도였는데 2018년에는 32,000명 정도로 늘어날 것이라 했다. 전체 유학생 가운데 23%가 아세안 지역에서 유학온 학생들이라고 한다. 또 한국은 ‘한국판 아세안 풀브라이트’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고 있다. 이 정책이 현실화되면 “40%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라고 낙관했다. 미국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과 다른 나라의 교육·문화 등 인적 교류를 증진해 왔다. 금년의 한-아세안 교역액은 1,600억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문 대통령 임기 안인 2020년까지는 2,000억 달러까지 늘리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교역 규모가 말해주듯 아세안이 한국에게는 교역과 수출에 효자 지역이 분명하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효자 국가가 베트남이라는 것이다. 현재 베트남은 미국과 중국에 이은 제 3위의 수출 국가다. 베트남은 벌써 일본을 능가한 국가인데 2020년까지는 (대 베트남 수출액이) 1000억 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의 EU(유럽연합) 국가 전체에 수출하는 액수가 1,000억 달러 좀 못치는 것을 감안하면 효자중에 효자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20년이 되면 이렇게 베트남 효자 국가 하나가 EU국가 전체 수출액을 커버할 정도로 성장할 것이라고 하니 베트남을 떠받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롱베이 투어

도착 다음날 하롱베이 투어에 이색적인 풍경에 놀라기 시작했다. 하롱베이는 한국의 홍도나 남해안에 늘어서 있는 섬 모양과는 사뭇 다른 무수하게 많은 섬들이 해안을 뒤덮고 있었다. 하롱베이에 3천 여개의 섬이 있다는 것이다. 관광 상품 소개에 “크루즈 관광”이라고 해서 대형 크루즈를 연상하였었으나 시드니의 섬들 사이를 운행하는 페리호급의 선박이었다. 크루즈는 한곳에 정박하고 모타보트로 섬들을 둘러보는데, 급회전하고 빠르게 달리는 모터보트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으며, 섬에 뚫린 해식 동굴을 통과하기도 하고 섬에서 뛰어노는 원숭이에게 먹잇감을 건네주기도 하는 섬 사이의 구경거리 투성이었다. 이러 저런 케이블카를 많이 타 보았지만 미스틱 마운틴[7500광년 건너편에 있다는 성운의 이름]이라는 이름에 유원지에 신설된 케이블카는 장관이었다. 이 유원지의 이름을 ‘드래곤 파크’라고 부르는데 동남아시아 최대의 놀이공원이라고 한다. 2017년 1월에 오픈한 드래곤 파크는 아직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썬월드 하롱 콤플렉스 중앙에 위치해 있다. 썬월드 콤플렉스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바로 해상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 미스틱 마운틴 콤플렉스이다. 이 건물 2층으로 가면 대형 이층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데 이 케이블카 역시 동남아 최대 크기라고 한다. 이 케이블카가 특별한 것은 2층짜리 케이블카라는 점이다. 2층에 타거나 1층에 나거나 케이블카 안에서 바라보는 전망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외관으로 봐서 일단 2층짜리 케이블카라는 점이 참 근사하게 느껴진다. 관광객의 관심을 고조시키려는 전략이겠지만 이 케이블카의 기둥의 높이가 189m로 가장 높은 케이블카기둥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하며, 한꺼번에 230명을 케이블카에 태울 수 있는 것도 함께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면 Sun Wheel이라는 대형 관람차가 있는 건물로 들어간다. 그 곳에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실내놀이터도 있고 어른들도 이용할 수 있는 오락실도 있다. 다양한 실내놀이시설과 입체영화관도 있어서 뱀과 공룡이 날아다니는 입체영화를 관람도 하게 되었다. 2층에 Zen Garden은 일본식 정원인데 중앙에 일본의 후지산을 흉내 낸 작은 언덕도 있다. 선월드 콤플렉스는 베트남의 경제번영의 꿈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성장 발전할 것인지는 미래에 나타날 일이지만 한국이며 중국, 대만의 관광객들이 물밀듯이 몰려드는 것은 하롱베이가 관광지의 매력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노이의 모습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듯한 오토바이 행렬을 어떻게 지울 수 있겠는가? TV나 동영상으로 베트남이나 태국(泰國)에 오토바이 물결을 본 일은 있지만 퇴근길에 하노이는 오토바이 도시로 불러야 마땅할 것 같았다. 저녁나절 마차를 타고 하노이 시장의 골목길을 누비며 베트남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봤다. 미로 같은 골목골목에 바쁘게 움직이는 삶의 모습은 어느 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생동감이 넘쳐 났다. 한국(韓國)의 전통시장을 연상하게도 하였지만 오토바이로 꽉 차있는 시장골목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베트남 커피

팩케이지 여행(Package tour)에 끼게 마련인 선전매장을 들렸으며 그 중에 커피매장이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베트남도 커피 생산국으로 정평이 나있지만 쪽제비의 소화기관을 통과 시켜서 커피를 파는 나라인 줄은 몰랐다. 커피매장에서 해설도 듣고 시음을 하면서 꽤 많은 커피 제품들을 구매하였으며, 필자도 적지 않은 여행비를 들여 커피 제품을 한 보따리 샀다. 동물의 소화 기관을 거친 커피의 대명사가 된 커피를 루왁 커피라고 하는데 관련된 이야기는 너무 많다. 코피 루왁은 인니어로 커피(Kopi)와 사향 고양이(Luwak)의 합성어다. 루악 커피의 짝퉁이 몇 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다. 선전매장에서 커피나무로 오르내리며 커피 열매를 먹는 쪽제비의 동영상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쪽제비를 좁은 사육장에 가둬서 커피 열매를 사료로 해서 배설시킨 뒤에 세척 과정을 거쳐 커피를 만든다는데 사육상자의 동물학대 논란도 있다. 태국은 코기리 똥에서 골라낸 블랙아이보리라고 하고, 베트남의 쪽제비의 소화기관을 거치게 한 커피를 위즐커피(weasel coffee)라고 한다. 필자는 커피를 즐겨 마시기는 하지만 사실 맛은 잘 모른다. 쓴맛이 나는지, 신맛이 나는지 정도 구분할 정도다. 시음장에서 마셔본 위즐커피의 맛은 스타벅스의 쓴맛은 없고 약간 들핏하며 부드러운 맛에 풍미가 있었다. 쪽제비의 소화기관을 거치는 동안 동물의 소화효소에 의해 카페인과 쓴맛이 제거되기 때문에 색다른 커피 맛에 흠뻑 빠지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커피 거르는 컵까지 곁들여서 샀으니 위즐커피를 맛볼 작정이다.

호치민

오늘날에는 호치민(胡志明)하면 베트남의 남부도시 호치민을 연상하게 되지만 사실 호치민은 베트남의 국부(國夫)로 생각하고 있는 베트남 민족의 영웅 호치민(胡志明)이다. 필자도 호치민에 관해 별 관심을 갖지 않다가 이번여행을 통해 인물, 호치민(胡志明)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가 신비에 가깝게 유별난 삶을 살아가며 베트남의 독립과 베트남 국민들을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에 관한 평전과 검색자료를 종합해 볼 때 세계적으로 그만한 지도자도 드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월남전에서 미국이 패망하고 북베트남 군인들의 소련제 탱크들이 우르렁 거리며 남베트남의 대통령 관저로 밀고 들어가 베트남 공화 국기를 내리고 베트남의 빨간색·파란색의 5각형의 별이 박힌 임시 혁명정부 기를 올리는 것으로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어 1975년 4월 30일까지 8년간을 끌어온 베트남 전쟁은 끝나게 된다. 호치민은 평생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쳐 싸웠지만 한국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하면 북쪽의 공산당이 자유 베트남을 전복시킨 전쟁으로 인식하기 쉬우나 호치민(胡志明)은 그 이전에 베트남을 침략한 프랑스와의 독립투쟁을 더 오래한 인물이다. 한국의 38도선이 있다면 베트남에는 17도선으로 남북이 분열되었고 호치민은 17도선 남쪽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과의 전쟁이 고조되고 있던 1969년 9월 2일에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1964년 8월에 미국이 통킹만사건을 구실로 개입함으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1965년에 미국, 대한민국 등이 지상군을 파병하였다. 이후 8년간의 전쟁 끝에 1973년 1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그 해 3월말까지 미군이 전부 철수하였고, 1975년 4월 30일에 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통일을 이뤄 1976년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 전쟁은 제공권을 장악한 압도적 군사력의 미군이 폭격과 공습, 포격, 수색 섬멸 작전 과정에서 네이팜탄과 같은 대량 살상무기를 투하하고 고엽제 등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희생시킴으로써,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을 촉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제적 군사개입에 대한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호찌민은 유언으로 당의 단결과 전쟁 후 국토 재건을 당부하였다. 일생을 프랑스, 일본, 미국과 상대로 싸웠던 호찌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남베트남 정부의 지도자였으며 호찌민을 상대로 싸웠고 한때 남베트남의 부통령을 지낸 응우옌까오끼는 전쟁 후 “그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존경 그 자체였다. 그는 프랑스는 물론 다른 외침에 대항하는 투쟁에 언제나 앞장섰다. 내가 어려서 철이 없었을 때,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호찌민을 대단한 애국자로 생각했다. 나도 그를 대단히 칭송했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CBS는 광고없이 7분간 호찌민의 사망을 헤드라인 뉴스로 보도하였다.

1969년 9월 8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1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호찌민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하노이 바딘광장은 길고 험난했던 베트남 혁명의 상징이다. 여기에는 주석궁, 호치민이 살던 집 나산, 호치민 영묘와 호치민 기념관이 모여 있다. 하노이 관광의 마지막 날인 10월 4일(2018) 이 바딘광장을 방문하였다.

호치민의 사망

1969년 9월 3일에야 호치민의 사망 소식을 발표했다. 호치민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전 세계에서 논평이 쏟아졌다. 모스크바는 공식성명을 통해 호치민을 “영웅적인 베트남 인민의 위대한 아들이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이며, 소련의 훌륭한 친구”라고 찬양했다. 인도의 어떤 글은 그를 “인민의 정수(精髓)이며 자유를 향한 열렬한 갈망과 인내와 투쟁의 화신”이라 묘사했다. 우루과이의 한 신문에는 이런 사설이 실렸다. “그는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아이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었다.”미국 백악관은 논평을 거부했다. 그렇지만 미국 국민들의 관심을 나타내듯 CBS의 크론카이트는 호치민의 사망 소식을 톱뉴스로 보도하면서 상업광고없이 7분을 할애했다. 반전운동을 지지하던 신문들은 호치민이 훌륭한 적이며, 약하고 억압받은 사람들의 옹호자였다고 묘사했다(듀이커, 정영목 옮김,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 817). 바딘 광장에는 날마다 조문객들이 줄을 섰다. 외신기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현지에서 이렇게 기사를 썼다.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정치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치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런 순간들이었다.”(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3, p 444). 9월 8일에 바딘광장에서 호치민의 장례식이 열렸다. 광장에 모인 10만 명의 인파는 흐느꼈고, 군악대는 ‘남베트남을 해방하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장례식은 단 35분 만에 간소하게 치러졌다. 이는 호치민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사적인 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제가 떠난 후, 인민들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대규모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 시신은 화장해서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 베트남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하고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이 쉬어갔으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북베트남 정부는 화장해 달라는 호치민의 유언 부분은 아예 삭제하고 소련의 레닌처럼 영묘에 전시하기로 했다. 국부 호치민이 베트남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상징성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유언장에서 당의 단결과 전쟁 후 국토 재건을 당부하였고, 자작시도 수록했다 “우리의 산도 우리의 강도 우리의 인민도 영원하리 양키가 패전하면 우리는 10배 이상 더 아름답게 이 땅을 다시 세우리”(호치민 지음, 배기현 옮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p 311-31). 한편 1975년 8월 29일에 호치민의 영묘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영묘 입구에는 하얀 제복을 입은 경비병이 밀랍 인형처럼 꼿꼿하게 서 있고 매주 2만여 명이 찾는다. 호치민의 묘역에 들어가는 절차는 엄격했다. 국제공항 출입국 통과처럼 소지품이 검색되었고 사진 촬영도 통제하고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호치민의 밀납시신이 있는 영안실 한가운데 백발에 납처럼 하얀 얼굴의 호치민의 밀납시신이 관위에 누워 있었으며, 놀라운 것은 하얀 제복의 경비병 4명이 부동자세로 시신옆을 지키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호치민은 이런 짓을 하라고 하지 않았을텐데…

박광하(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38khpark@hanmail.net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2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생명과학이야기’(북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