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 환경 교육 단상

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환경 교육 단상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환경에 […]

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환경 교육 단상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환경에 관심을 갖거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자연은 한국인에게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산의 나무는 겨울철에 땔감으로 남벌 [濫伐]되고 눈에 띠는 온갖 야생동물들은 단백질 부족을 메꿀 수 있는 포획의 대상이었다. 여러해 전 금강산 관광으로 휴전선에서 금강산까지의 짧은 거리를 버스로 이동하며 북한의 산하를 엿볼 기회가 있었다. 금강산을 제외한 나머지의 산에는 서 있는 나무가 손가락으로 꼽아도 몇 개가 될가말가 한 민등산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의 헐벗었던 남한의 산들의 모형을 재현하여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자연보호나 환경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넌센스이었을지 모른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사회에서 환경문제 거론이 설득력을 얻기가 힘든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다. 한국이 경제성장과 함께 필연적으로 병행할 수밖에 없었던 마구잡이식 환경파괴는 각종 공해와 함께 감당하기 힘든 역작용으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70년대 후반부터 곳곳에서 크고 작은 환경파괴와 오염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이 때까지 한국의 국가 정책은 경제 발전과 소득증대라는 대명제 [大命題]에 촛점을 맞추고 있었으므로, 환경문제라든가, 환경교육은 거론하기가 거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80년대에 곳곳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생기고 도시의 팽창으로 인해, 겉잡을 수 없는 갖가지 부작용이 야기 되면서 경제개발만이 능사 [能事]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게 된 것이며, 국가정책도 환경문제를 등한시 할 수 없게 되었다. 1980년에 환경청이 생기고 1987년에는 헌법조문에 환경권 규정까지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의 제35조 1항에서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조항이다. 1990년에는 보건사회부의 외청이었던 환경청을 환경부로 승격시켜 환경정책을 독립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교육쪽에서는 헌법개정이전 부터 교육과정을 통해 환경교육의 선언적 규정을 포함시켰다. 1981년에 고시된 제4차 교육과정의 총론편에서 환경교육을 교육활동 전반에 걸쳐 이루어 져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공해 [公害]라든가, 환경오염 등 구체적인 환경용어 등이 교육과정에 등장하게 되며 문제의식이 확산되어 나갔다.

1990년 10 ~ 11월에 전국수준에서 실시된 “환경 보전에 대한 국민 의식조사”에 의하면 63.7%가 2000년대에 직면할 가장심각한 문제로서 “환경오염 문제”를 꼽고 있으며, 특히 환경보전이 경제성장능력을 높일 수 있고 [73.6%], 환경보존은 생산활동을 뒷받침 하게 된다 [80.2%]고 보는 등 환경문제의 중요성 쪽으로 기울은 것이다. 1995년에는 제6차 교육과정에 선택교과이긴 하지만 “환경” 교과 [敎科]가 신설되는 획기적인 정책이 채택되었다. 이는 한국의 사회가 얼마나 환경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 하였는가를 나타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도 환경교육은 최근에서야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다. “환경교과”의 교과목화 [敎科目化]의 의미 [意味]를 1970년대의 “인구교육” 교과목화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폭발하는 한국인구 증가율은 위기감까지 느끼며 갖가지 인구감소 정책을 시행하였고 교육에서도 “인구”교과 신설 직전까지 갔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한 인구 감소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현재 한국은 높은 인구증가율에 고심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저출산 [低出産] 고령화 [高齡化]를 예측하지 못한 인구 정책을 보며 환경문제도 미래 지향적이고 가치중심적인 목표가 있어야한다.

환경과의 독립은 교육사적으로 지대한 의의를 지닌다. 교육학자인 홍웅선은 21세기는 환경과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환경문제는 지구상의 어느 누구나 외면할 수 없는 인류의 생존문제가 되면서 그의 언급이 실감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이다. 환경문제는 어느 특정 분야가 아닌 인류미래의 사활이 걸린 절박한 문제이기에 학문적으로도 종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미래를 대비하는 교육분야는 환경문제를 소홀리 할 수 없는 필연적인 시점을 맞이한 것이다. 그동안 세계의 관계단체나 각국의 관계부처에서 환경교육에 관한 정의 [定義]를 발표하여 왔다. 그 중에서 미국의 교육시설 연구소 [Educational Facilities Laboratories]가 개최한 ‘인간 환경에 관한 연구 [Project Man’s Environment] 협의회’ [1971]에서 환경교육에 관련된 각 분야의 전문가 25인이 피력한 환경교육의 개념을 종합한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과 그가 사는 환경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새로운 접근으로서, 그 내용은 사람이 그를 둘러싼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 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사람이 자연 및 인공적인 환경에 대처하는 길을 통합적으로 다루는 과정이다. 학교와 그 학교가 위치한 지역사회의 사람들과 자연과 물리적인 자원의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경험중심의 학습이다. 모든 교과를 하나의 목적, 즉 지구 전체를 다루는 내용으로 통합하는 접근이다. 도시 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생활중심의 학습활동이며, 지역사회개발을 위한 것이다. 사람마다 책임있고, 목적이 뚜렷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신뢰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평생 변하지 않을 행동의 유형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외의 세계의 관련단체와 각국의 관련부처의 정의가 있지만 대동소이하며 이러한 환경교육의 정의들을 종합한다면, 환경교육은 환경과 환경문제에 대한 탐구 및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교육이라고 정리 할 수 있다. 환경교육을 통하여 현세대는 물론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환경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의 건전한 인격 형성은 물론 당면하고 있는 현재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미래에 더욱 심각해질 환경문제를 예방하여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이다.

환경교과는 전담교사나 생물 등 관련교과 만이 다룰 성질이 아니다. 전 교과 내지 전인교육차원에서 다뤄져야 추구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환경교육론이 등장하지 않던 시대에, 기성세대가 즐겨 읽던 의인화 [擬人化]된 우화 [寓話]나 설화 [說話] 등이 fiction이긴 하지만 전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자연환경에 위해 [危害] 요소로 작용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에서 여름날 개미가 먹이를 모으는 것이나 베짱이가 우는 것은 그들의 생태습성의 한 과정이며 그들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활동일 뿐이다. 작금에 와서는 사악하다는 뱀이나 교활한 여우의 이미지는 재미나 교훈적 매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동들이 생태계에서의 동물의 실제적인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어른이 될 때까지 동물들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지니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환경교육은 단순한 몇 가지 가치기준이나 태도 등을 기른다고 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최종적으로는 한 인간이 삷을 살아가는 동안 실천적 행동으로 일관하고 자연생태에 관한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능력까지 갖추게 할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환경교육은 과학과 인문, 모든 분야에서 지향 [志向]하여야 할 공동목표가 된 것이다. 환경교육이 환경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다. 최고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연환경에 관하여 거의 무시하는 행태로 어떤 정책을 강행하려고 할 때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학습하는 교육도 이루어져야 한다. 환경교육은 지향하는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환경교육은 사회변혁을 위한 교육적 활동으로서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기르고 자연환경의 순환질서를 존중하게 하며 인간의 그릇된 방식이 일으키는 생명 파괴에 대하여 윤리적인 책임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그 중점은 환경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 그리고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수준에서의 의사 결정에 대한 능동적인 참여를 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성장과정은 곧 자연환경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환경에 둘러싸여 자라고 자연을 보고, 듣고, 느끼고, 의문도 가지고, 성장 발달해 간다. 현대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거의 흙을 접하지 못하고 아스팔트, 아파트로 뒤 덮인 인공 환경 속에서 자란다. 이러한 학생들이 흙의 촉감을 알리가 없으며 자연속에서 활동하는 생명체의 신비함을 체험할 기회가 없다. 자연환경과 친하게 될 기회가 없으니 자연환경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감상 능력이 배양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을 접해 봐야 아름다움도 알게 되고 생명체의 강인한 생명활동을 보고 생명체의 존엄함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접근방법을 통해서 환경의 중요성을 자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환경교과의 구성내용은 방대하다. 도시와 농촌간에 다루어야 할 과제가 다르고 학년 [學年]에 따라 학습내용은 달라진다. 환경문제의 쟁점과 관련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에 그 많은 분량을 주 [週] 1-2시간, 년 34-68시간으로 소화 할 수 있을까? 하는데 의문을 갖게 한다. 환경관련 내용의 주요한 주제를 열거해 보면 환경교육의 필요성과 현실성이 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구환경과 인간, #도시화와 환경, #소비 생활과 환경, #미래의 에너지, #환경오염, #대기오염. #폐기물, #오존층 파괴, # 지구온난화, #쾌적하고 건강한 환경, #생활속에 환경보존 등등… 얼마나 방대한가?

환경교육과 환경운동과의 차별성의 문제이다. 환경운동은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환경상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추진하는 개혁적 노력의 일환이다. 따라서 운동의 목적이었던 환경상태가 해결되면 그 운동은 소멸된다. 그러나 환경교육은 환경문제가 아닌 인간 곧 학생들이며 계속 새로운 학생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환경운동은 즉시적 효율성을 기대하지만 환경교육은 교육의 속성인 장기성, 심층적인 내면성에 중점을 두게 되는 것이다. 환경교육이 현재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다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을 환경을 위하는 방식으로 해나갈 수 있는가를 가르치고 배우는 예방차원 [pre-cycling]의 교육이어야 한다. 지구는 인류에게 하나밖에 없는 생활의 공동체이다.

환경전문가들은 인간이 지구 환경에 대해서 청지기 윤리 [stewardship]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지기는 양반집 수청방 [守廳房]에서 주인집 일을 맡아보고 시중을 드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지만 성경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신임을 받아야 하고 관리인은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서 주인에게 흠결 [欠缺]없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주인은 하나님이다. 이 청지기 논리는 봉건적 사회의 상하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라 자율과 민주적 참여의식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부적합하지만 오늘날 인류에게 직면한 자연환경 파괴의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지구를 주인처럼, 하나님처럼 성실하고 극진하게 모셔야 한다는 의미로서 적절한 인용구 [引用句]로 여겨진다.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 등으로 세계인이 지구의 위기감을 느낀 데다가, 1986년 4월 26일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쿄에서 370km 떨어진 태평양 앞바다에서 진도 9.0의 대지진의 여파로 후크시마 원전의 폭발에 의해 유출된 방사능은 인접국가 내지 세계인에게 공포감을 줌으로서 지구의 유일성 [唯一性]을 통감하게 하였다. 세계인류 전체가 발 벗고 나서도 지구의 자연환경을 보전하며 개선해 나갈지 의문이 가는 문제이지만 환경교육은 인류에게 주어진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 되었다.

박광하 (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38khpark@hanmail.net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2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생명과학이야기’ (북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