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즈번에서
‘명예’와 ‘멍에’ 사이에서
요 며칠 브리즈번의 날씨는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이다. 잔뜩 흐린 하늘에 예고없이 흩뿌리는 비, 그리고 서늘한 바람. 한여름에 ‘을씨년스럽다’라는 표현이 가당치도 않는 말이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보기에 날씨나 분위기 따위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데가 있다’ 는 뜻을 지닌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의 어원이 을사늑약이 맺어진 해인 1905년이라는 설은 꽤 많이 알려져 있다. 1905년 11월 18일은 실로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생기기에 족할 만큼 섬뜩한 한기가 돌던 초겨울이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약 문서에 기록된 날짜는 17일이지만 고종이 굴복한 날, 그리고 조약이 공포된 날은 11월 18일, 이로써 대한제국이 식물국가가 된 날이었다.
얼마 전 뉴욕의 몇 목사들에게서 시국집회에 관한 연락을 받고 같이 참여하고 싶어서 이 곳에 있는 목사 27분에게 안내 메시지를 보냈다. 답이 온 것은 딱 한 분이었다. 그것도 따끔한 충고와 함께….목사가 촛불이나 피킷을 들고 거리로 나가는 것이 과연 성직자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길일까?
작년 연말 한국의 상동교회에서는 전덕기 목사의 생애를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전덕기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대문 시장 숯장수였던 숙부 슬하에서 자랐다. 그의 인생에 서광이 비친 것은 스크랜튼이라는 감리교 선교사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스크랜튼은 양반 동네에 외국인도 많은 정동에서 교회를 꾸리다가 “민중이 있는 곳” (where people are)으로 남대문 안 상동으로 교회를 옮겨 버릴 정도로 가난한 민중들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기독교인이었고 전덕기는 그로부터 감화를 받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 새로 이전한 상동은 상놈들의 동네였고, 전덕기는 ‘애민구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극빈자들에게 삶의 기반을 만들어 주고자 노력한다.
그는 11월 10일 일본이 을사 조약 체결 이전 남산에 대포를 설치하고 덕수궁을 겨냥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무렵 교회에서 구국 기도회를 개최했다. “나라가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받아 지구상에 독립국이 확실케 하여 주심을 예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그는 목사였지만, 평안도 교인들을 조직하여 오적 암살을 모의하고 무장 투쟁을 고무하기도 했던 것이다. 일제가 보기에 그는 당연히 목사 옷을 벗어야 하는 사이비 목사였다.
을사늑약이 공포된 11월 18일 대한문 앞에 도끼를 어깨에 멘 한 떼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덕기가 이끄는 상동교회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이 도끼로 역적의 목을 베든지 아니면 나의 목을 베든지’라는 극단적인 구호를 외치며 꿇어 엎드려 절규했다. 훗날 그는 상동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신민회를 설립하여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는 일제에 저항했다. 삼일 운동 후 조선 총독부에서 나온 보고서는 상동교회를 “조선 독립 운동의 근원”으로까지 꼽았다. 전덕기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전덕기는 경술국치 후 민족운동의 뿌리를 뽑으려는 일제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 후 191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고문 후유증과 결핵으로 인한 병마에 시달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도 마치 바울처럼 편지를 보내는 ‘병상 목회’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목회에 필요한 세 가지 물품으로 ‘마른 쑥과 나막신, 그리고 종이로 만든 약식 관(棺)’를 들었다. 그것은 연고 없는 가난한 이가 돌아갔을 때 마른 쑥을 콧구멍에 꽂고 들어가 그를 염해야 하기 때문이었고, 대개 시체 썩은 물이 방안에 그득하므로 나막신이 필요했으며, 그 종이 관에 싸서 망자를 묻어 주었던 자신의 숱한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가 소천했을 때 서울 장안은 슬픔에 휩싸였다고 한다.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모를 초상꾼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관을 잡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가장 슬퍼한 것은 남대문 일대의 거지들, 불한당 소리 듣던 이들이 꺼이꺼이 눈물을 흘렸고, 기생들도 소복을 입었으며, 사람 취급에서 벗어나 있던 백정들도 소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우리 선생님이 죽었다.” 상여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 리를 헤아렸다고 한다. 나이 마흔도 안된 젊은 목사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슬퍼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의 생애를 돌이키면 그 이유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목사 전덕기에게 성직자의 ‘명예’란 무엇이었을까? 한 때, 성직자들이 가운 위에 걸치는 스톨을 보며 왜 저런 것을 목에 걸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었다. 내가 그 길에 들어서서야 이유를 알았다. 스톨은 밭을 가는 소나 말의 어깨에 얹어진 멍에를 상징한다는 것을. 분명 예수가 우리의 어깨 위에 얹어주는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목사들은 갖가지 문양으로 장식된 ‘무거운’ 스톨을 스스로 메고 그것을 ‘명예’로 여기는 것 같다. 차라리 도끼를 메는 편이 낫지 않을까? 브리즈번의 날씨는 아직 을씨년스럽다.
김웅재 목사 (브리즈번 서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