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 조선 최고 지성, 다산과 추사의 알려지지 않은 귀양살이 이야기
석한남 / 가디언 / 2017.8.18
정약용, 유배지의 현지인과 동고동락하며 1표2서로 애민을 실천하다
김정희, 금수저로 태어나 유배지에서 예술의 완성을 이루다
– 절체절명의 유배지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간 다산과 추사의 유배 생활 이야기
조선의 유배는 사대부에게 큰 형벌이었다. 유배란 사대부에게 있어 사형을 제외하고는 가장 치욕적인 벌이어서, 패가망신하거나 가문의 위상이 크게 추락하는 경우가 잦았다.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가까웠던 친지·지우들이 고개를 돌리고 떠나기도 일쑤였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도 정치적 탄압과 박해를 받아 강진과 제주로 유배를 떠났다. 다산은 종교적 이유로 18여 년간 유배 생활을 했고, 추사는 정치권력의 패권 다툼으로 인하여 두 번에 걸친 10여 년의 유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유배지에서의 삶은 사뭇 달랐다. 답답하고 고된 유배 생활이지만 다산은 현지에서의 삶에 적응하고 다신계를 만들어 제자들과 차와 학문을 나누었으며, 심지어 유배 생활 도중 딸까지 얻었다. 그는 이 기간을 통해 걸출한 후학을 길러냈고,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대표되는 위대한 사상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에 비해 추사는 현지 적응에는 실패했다고 할 만큼 제주의 토착 음식과 거센 환경에 몸서리쳤다. 그는 세속의 험난함에서 벗어나 신선처럼 살아가려 했던 소동파의 유배를 동경했으나, 자신은 그런 유배 생활을 하지 못했다. 유배 기간 내내 경주 김 씨 가문과 지인들, 제주목사 등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끝내 신분주의와 우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지한 현지인들의 모습에 대해 개탄하거나 다른 서예가와 스님들까지도 서슴없이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역시 단절된 유배지에서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글씨를 재창조하며 독특한 추사체를 만들어갔다.
저자는 이렇게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유배지에서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원래 고문번역가로 사계에 정평이 나 있는 저자는 그동안 천여 편이 넘는 방대한 조선시대의 간찰과 시를 번역하였으며, 이 책에서 다산과 추사가 가족과 친지 등에게 보낸 서신과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가며 그들의 예술과 학문과 삶을 재조명했다. 이 책『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는 두 천재가 보여준 유배지에서의 생활과 학예연찬의 진실한 모습을 소개한 책이라는 점에서, 칭송 일변도의 기존 책들과 달리 두 천재의 새롭고 진솔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 목차
머리글_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다산과 추사의 유배 이야기 5
1부 놋수저 양반과 금수저 사대부
1장. 출발부터 너무 달랐던 다산과 추사
다산, 소외된 남인 집안에 태어나다 17
추사,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천재로 살다 22
2장. 학통과 학예 연찬에서 다른 길을 걷다
비주류 지식인들과 맺은 다산의 학통(學統) 29
소외된 천재들과 맺은 지란지교(芝蘭之交) 32
연경(燕京)의 귀한 인연 34
험난하지만 기대에 가득 찬 연행길 36
청나라 지식인을 만나다 42
옹수곤과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 46
3장. 다산과 추사, 승승장구하다
정조 임금 장학생, 다산 56
일찍부터 권력의 중심에 선 추사 61
추사와 로열패밀리 61
추사와 초의선사의 만남 63
2부 유배
1장. 유배의 정석
몰락의 시작인가 또 다른 도전인가 69
유배의 롤모델 소동파 72
2장. 다산과 추사, 유배를 떠나다
가문의 몰락, 그리고 18년의 긴 유배 생활 78
정조의 사망과 암흑시대의 서막 78
율정(栗亭)의 이별 82
도연명에서 소동파로 86
권력 다툼의 희생양으로 떠난 두 번의 유배길 94
경주 김씨와 안동 김씨 94
추사와 전설의 고향 96
3장. 유배지에서 생긴 일
다산과 유배지의 제자들 101
현지인으로 생활한 다산의 유배 101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넘어 꽃피운 다산학단 103
사의재와 강진 6제자 104
전등계, 유·불의 경계를 허물다 109
다산초당, 다산학이 무르익는 계절 112
다산초당에서 만난 학문과 사랑 122
다산의 자본주의 125
아! 하피첩 128
노년에 꽃피운 사랑, 두 폭의 매조도 132
4장. 유배지에서 본 추사의 민낯
유배지에서도 내려놓지 못한 귀족의식 141
입에 맞는 반찬과 차를 보내라는 편지 141
‘싸움닭’ 추사 146
명필 이광사를 작심하고 비판 152
백파 스님이 노망난 것이라고 비판 153
야만인들의 땅, 제주 157
평생 허물로 남은 추사의 우월의식 159
제주와 추사체 163
추사와 수선화 166
제주목사 177
실험 정신에서 비롯된 추사체와 금석학 183
세한도와 그 후의 이야기 188
책 한 권 값의 진실 188
그림, 글, 글씨가 완벽하게 빚어낸 〈세한도〉의 가치 193
이리저리 유배를 다녀온 〈세한도〉198
해배 후 강촌의 삶 200
‘북청’ 그 인연의 땅 206
‘침계(?溪)’ 유감 213
5장. 유배가 조선 천재에게 미친 긍정적 영향
1표 2서에 담긴 다산의 마음 217
과골삼천(?骨三穿) 223
다산의 저서 225
경세유표(經世遺表) 226
목민심서(牧民心書) 228
흠흠신서(欽欽新書) 230
불계공졸로 완성한 추사의 예술혼 232
과천의 늙은이 232
동치미 247
참고 자료 252
○ 저자소개 : 석한남
고문헌 연구가. 독학으로 한문과 고서화를 공부하여 약 3만 자 정도의 고문 문장을 외우고 있다. 초서로 쓰인 옛 편지 1천 여 편을 탈초(脫草)·번역(飜譯)하였으며, 사서(四書)에 능하다.
국민대학교, 예술의전당, 추사박물관, 단재신채호기념관, 육군박물관, 소암기념관 등에서 고서화 전시회의 자문 및 고서(古書)의 탈초와 번역을 하였다. 대형 로펌 같은 기업체, ‘에이트 인스티튜터’ 같은 미술교육기관, 공무원연수원 등에서 “공자 이야기”, “대학”, “중용”, “장자”, “우리 옛 글씨와 그림” 등의 강의를 하고 있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옛 도장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다.
예술의전당의 《서로서로》, 육사박물관의 《형명(形名)》, 추사박물관의 《정벽 유최관(貞碧 柳最寬)》, 소암기념관의 《고간(古簡)》 등을 번역하였으며, 《명문가의 문장》을 저술하였다.
○ 출판사 서평
조선의 유배는 사대부에게 큰 형벌이었다.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신세 격변을 통해 조선의 사대부들은 깊은 절망으로 중병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유배란 사대부에게 있어 사형을 제외하고는 가장 치욕적인 벌이어서, 패가망신하거나 가문의 위상이 크게 추락하는 경우가 잦았다.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가까웠던 친지·지우들이 고개를 돌리고 떠나기도 일쑤였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도 정치적 탄압과 박해를 받아 강진과 제주로 유배를 떠났다. 다산은 종교적 이유로 18여 년간 유배 생활을 했고, 추사는 정치권력의 패권 다툼으로 인하여 두 번에 걸친 10여 년의 유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유배지에서의 삶은 사뭇 달랐다. 답답하고 고된 유배 생활이지만 다산은 현지에서의 삶에 적응하고 다신계를 만들어 제자들과 차와 학문을 나누었으며, 심지어 유배 생활 도중 딸까지 얻었다. 그는 이 기간을 통해 걸출한 후학을 길러냈고,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대표되는 위대한 사상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에 비해 추사는 현지 적응에는 실패했다고 할 만큼 제주의 토착 음식과 거센 환경에 몸서리쳤다. 그는 세속의 험난함에서 벗어나 신선처럼 살아가려 했던 소동파의 유배를 동경했으나, 자신은 그런 유배 생활을 하지 못했다. 유배 기간 내내 경주 김 씨 가문과 지인들, 제주목사 등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끝내 신분주의와 우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지한 현지인들의 모습에 대해 개탄하거나 다른 서예가와 스님들까지도 서슴없이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역시 단절된 유배지에서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글씨를 재창조하며 독특한 추사체를 만들어갔다.
다산과 추사, 두 사람은 머나먼 유배지에서 각기 다른 세계를 꿈꾸며 나름의 유배 생활을 완성한 것이다. 확연히 다른 가문과 성장과정, 결코 융합될 수 없는 사상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조선 인문학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는 데에는 긴 유배 생활이라는 공통점이 분명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유배지에서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원래 고문번역가로 사계에 정평이 나 있는 저자는 그동안 천여 편이 넘는 방대한 조선시대의 간찰과 시를 번역하였으며, 이 책에서 다산과 추사가 가족과 친지 등에게 보낸 서신과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가며 그들의 예술과 학문과 삶을 재조명했다. 이 책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는 두 천재가 보여준 유배지에서의 생활과 학예연찬의 진실한 모습을 소개한 책이라는 점에서, 칭송 일변도의 기존 책들과 달리 두 천재의 새롭고 진솔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저자는 말한다. “조선서예를 논하는 이들은 추사 김정희를 조선서예를 대표하는 서성(書聖)으로 인식하고 추앙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추사의 천재성이 빚어낸 독특한 서체인 추사체가 이전 수백 년간 이어 내려온 조선 서예사에 그 독보적 위상으로 군림하고 있으면서 조선서예 전반에 대한 폄훼와 배타적 성향까지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이나 추사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에게 다가가고 이들로부터 알아내고자 하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진실 추구를 벗어난 막연한 추앙과 도를 넘는 찬양 일색의 분위기가 문제라는 것이다.”
저자 석한남이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도 다산과 추사가 조선의 예술사(藝術史)와 지성사(知性史)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역사적으로 보면 수많은 인재들의 족적과 업적이 자칭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작위적으로 구성된 것이 많다는 점이 유감이라고 말한다. 다산과 추사는 조선의 학문과 예술을 이끈 천재임에 분명하지만, 지나치게 신비스럽고 극적인 모습으로 과잉 포장되어 마치 전설 속의 영웅과 같이 왜곡되고 부풀려져 비치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오래전부터 조선사회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다산과 추사라는 두 천재에 대하여 오랫동안 유전되어온 다양한 자료들을 사실적 기록과 대조하면서 이들의 실체를 한 번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까지 번역되어 전해온 문헌들을 하나하나 고증하고 처음부터 다시 번역해가며, 일반에게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고쳐 이 책을 완성했다. 작가는 20년 가까이 매일 습관적으로 초서로 된 간찰과 시고를 읽고 있으며, 그동안 1천여 편이 넘는 방대한 조선시대의 간찰과 시를 번역하였다. 이 책에 실린 모든 문헌도 작가가 처음으로 국역하여 소개하였거나, 기존의 번역을 무시하고 다시 번역한 것이다. 특히 초사楚辭와 송사宋詞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수선화부는 작가가 처음으로 번역하였으며 이 책에는 그 일부를 실었고, 추사가 국문(鞫問)을 당하는 일성록의 기사도 처음 번역하여 소개한 것이다.
또 삶의 굽이마다 그들이 읊고 노래하고 저술했던 시와 글씨, 서책 등을 사진 자료와 함께 최대한 담아, 그들의 사상과 예술 세계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다산과 추사의 생애와 그들이 교류했던 인물들, 그들을 둘러싼 조선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물론 유배 생활을 중심으로 한 두 사람의 삶과 족적을 두루 살필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평 1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면서 유배생활이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정리한 책이다. 정약용의 학문적 성취와 김정희의 글씨체 완성은 조선후기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배부를 때는 찾아오지 않는 예술의 심술 탓일까. 이들의 사상과 예술을 발전시키는데는 혹독한 유배생활의 몫이 컸다.
혹독한, 이라고 표현했지만 저자는 다산과 추사의 유배생활이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라 많이 달랐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남인에 속하는 다산이 정조 사후 바뀐 권력에 희생되어 집안 자체가 풍비박산이 났다면 노론에 속한 추사는 다산에 비해 비교적 평온한 유배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뒷배가 든든했다고 소개한다. 세한도에얽힌 이야기가 재미있었는데 추사의 고급 유배생활비를 거의 지원한 이상적이 지금으로 따지면 강남 빌딩 한채 정도의 비용을 쓴 뒤에 얻은 것이 세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소유권자를 바꾸다가 2010년이 되어서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문화유산을 공공의 재산으로 볼 줄 아는 소유자의 통큰 기증이 있어 가능했다.
다산의 유배 생활도 해가 거듭될 수록 평온함을 찾아가는 듯 했다. 학문을 숭상하는 조선의 분위기는 18년 유배생활동안 500권이 넘는 책을 쓴 다산을 위대한 학자로 존경했다. 많은 제자들이 그를 흠모하고 따랐기에 유배지에서 다양한 장르의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유명한 다산의 책 제목이나 내용보다 인상적인 것은 유배지에서 만난 소실과 딸 이야기였다. 50대에 접어든 다산에게 젊은 소실과 어린 딸의 존재는 고목에 싹튼 것처럼 생의 활력을 되찾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 모녀는 다산이 유배가 끝난 뒤 본가로 따라갔지만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대목에서 당시 사회가 어떻게 약자를 대했는가를 짚어볼 수 있어서 안타까웠다. 반대로 다산의 정실 부인이 낡은 치마를 유배지에 보내와 다산은 그걸로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은 책으로 만들었는데(하피첩)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책의 경매가가 7억5천만원이었다는 사실과 저자는 이 금액도 적다고 우리의 문화재 인식이 낮다고 호소하는 대목을 보고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이 책은 다산과 추사를 비교하면서 그들의 일생을 조명하고 있다. 저자는 한문과 고서화에 능하다고 하는데 한시를 우리 말로 번역한 것은 무척 좋았다. 당시 생활을 그대로 엿볼 수 있도록 쉽게 풀어놓은 다산의 시는 시냇물 흐르듯이 부드럽고 막힘이 없어서 더 읽고 싶었다.
그러나 다산이 남긴 시와 그림 등의 작품과 책을 인용하고 추사의 글씨를 보여주는 이 책을 들여다보면서 든 생각은 이 책이야말로 내겐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가 아닌가 싶었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삽입된 글씨를 보아도 별 감흥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여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귀한 자료가 되었을 텐데 내겐 그런 눈이 없으니 좋은 것이 있어도 좋은 줄 모르고 그저 흘리듯 눈요기하고 지나쳤을 뿐이다.
○ 독자의 평 2
다산과 추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유배를 갔었다는 것이고 그를 통해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는 점이다. 석한남의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는 그 점을 파고든 책이다. 저술 동기는 두 선현에 대한 막연한 추앙과 도를 넘는 찬양 일색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도 다산과 추사의 천재성과 그들의 열정이 빚어낸 위대한 업적이 조금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란 게 저자의 주장이다. 추사는 여섯 살에 월성위궁에 입춘첩을 써 붙였다. 이를 본 박제가가 학예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것을 예언했다. 후에 추사는 박제가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추사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가 월성위(김한신; 영조의 사위)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의 남편인 월성위 김한신이 추사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다산은 어머니 해남 윤씨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공재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다.
옛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글을 써 보낼 때 나이에 관계 없이 자신을 아우<제; 弟>라 칭했다. 심지어 동방입격(同榜入格)한 과거 시험 동기생이 자신의 자식보다 어린 경우에 제라 쓰기가 민망해 늙은 아우라는 뜻의 노제(老弟)라 쓴 사례도 있다.
동파 소식(東坡 蘇軾; 1037-1101)은 조선 지식인들 뿐 아니라 많은 유배인들이 존경하여 따르고자 한 롤모델이었다. 추사가 스승으로 모신 청나라의 지식인 옹방강은 소동파를 흠모해 평생 제사를 지냈다. 그 영향으로 추사는 유배된 자신의 처지를 은근히 소동파의 해남도 유배 생활과 동일시하며 이를 반영한 작품을 남겼다.
소동파는 유배 기간 내내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73 페이지) 소동파의 유배를 닮고 싶었던 추사의 유배는 우리나라 최남단 섬으로 간 것이라는 점만 빼면 소동파의 유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보다는 도연명(陶潛 陶淵明; 365-427)의 전원생활을 동경했던 다산의 유배가 오히려 소동파의 유배 생활과 흡사했다.
다산은 소동파의 전원생활을 꿈꾸었으나 소동파의 귀양살이로 내달았다.(94 페이지) 추사는 어처구니 없게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가게 된다. 저자는 여섯 차례에 걸쳐 36대의 신장(訊杖; 매질)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위리안치라는 중형을 받고 의금부 도사의 차가운 손에 이끌려 절해고도로 유배를 가던 추사가 전라감영에 들러 당시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을 만나 그의 글씨를 보고 시골에서 밥은 먹을 만한 글씨라 혹평했다거나 대둔사에서 초의를 만나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전의 현판 글씨 대웅보전을 떼게 한 뒤 스스로 다시 써서 걸게 했다는 이야기는 억측일 뿐이라 말한다.(98 페이지)
다산은 유배 시절 배움에는 귀천이 없고 남녀노소, 부자와 가난한 자, 힘이 있고 없는 사람 누구에게나 독서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 믿었다. 가르침이나 교류에 있어서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고 그렇게 애써 가르쳤다. 공자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공자는 가르치는 데는 계급이 없다<유교무류; 有敎無類>고 했다.
다산은 ‘논어고금주’에서 하늘이 사람을 내릴 때는 귀천을 두지 않았고 멀고 가깝고의 구분도 없었다고 해석하며 가르침이 있으면 모두 같다(유교즉개동; 有敎則皆同)고 정의했다. 다산은 유배 8년째인1808년 비로소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추사는 유배지에서조차 계급적 신분주의와 지적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59 페이지)
추사는 인격적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저자는 추사가 다른 사람을 과도하게 깎아 내리고 필요 이상으로 비판했지만 그의 예술혼과 실험정신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추사는 그 이전의 서풍과는 전혀 다른 독보적인 예술세계와 작품을 만들어냈다.(163 페이지) 다산은 아들 친구 추사를 벗으로 호칭했다.(168 페이지)
추사체는 수백년 동안 어떤 고증과 해석도 없이 맹목적으로 왕희지의 서풍을 답습하려고 노력해온 조선 서예에 대한 비판 및 새로운 서체의 구현을 위한 추사의 실험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으니 추사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의 표상이다.(186 페이지) 추사는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 견해가 아니라 말했다.(190 페이지)
세한도는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선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과 민영휘 집안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일본의 추사 연구가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소유가 되었다. 추사를 근대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게 한 인물이 후지츠카 치카시이다. 세한도는 소전 손재형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팔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아무 대가도 없이 넘겨받았으나 정치계에 투신하며 자금에 쪼들린 나머지 그림을 저당잡혔다. 개성 갑부인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가 새 주인이 되었는데 그는 이를 국민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인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선친이 평생 모은 2,750점의 추사의 필적과 자료를 자비를 들여 손질한 후 과천 추사박물관에 기증했다.(198, 199 페이지)
저자는 추사가 가마를 타고 오른 고갯마루에서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에 취해 감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를 읆은 것과 다산이 사람들이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른다는 시를 쓴 것을 품성에 기인하기보다 출신 배경과 성장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말한다.(210 페이지)
다산의 유배지 강진은 수백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보길도 섬을 통째 소유할 정도로 대단한 부자였던 외가 해남 윤씨의 세거지(世居地)에서 가까웠다. 그래서 해남 윤씨 집안에서는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하는 데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해남 윤씨 소장의 다양한 서책을 손쉽게 열람하게 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205, 206 페이지)
○ 독자의 평 3
전통시대 유배라 함은 현실과의 단절을 뜻했다. 익숙한 모든 것과의 단절은 당사자에게 끝없는 절망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통시대 유배지는 대부분이 변방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주도나 흑산도와 같은 섬은 주로 중죄를 지은 이들에게 내려지는 유배지였다. 유배지와 육지를 가로막고 있는 바다로 인해 유배 객들이 느끼는 절망은 다른 곳에 비해 더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섬이 아니면 괜찮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또한 유배는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야 하는 길을 돌아가게 만들거나 그 사람 일상의 삶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단절에 따른 절망을 어떻게 견뎌내고 살았는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우리는 많은 유배 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삶은 자신들이 원한 삶이 아니라, 오로지 후세사람들이 평가한 삶일 뿐이지만 말이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는 조선말기 대표적인 학자이고 예술가였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생과 삶에 대해 알고자 한다. 아마 그들의 삶에서 지식인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똑같이 유배생활을 했고, 유배지에서 남다른 학문적, 예술적 경지를 이루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삶에 대한 책은 넘쳐난다. 이 책 또한 다산과 추사의 유배생활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그럼에도 선뜻 이 책을 택한 것은 대부분의 책들이 다산과 추사에 대해 한사람만 다룬 것에 비해, 이 책은 두 사람을 함께 다루었기에 무언가 남다른 해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였다. 그러나 단지 그들에 대한 비교뿐이었다는 것이 다소 아쉽기만 하다.
다산은 조선의 전형적인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당시 정가에서 소외된 남인 계층이었다. 18세에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승보시에 선발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한 다산은 개혁을 꿈꾸는 실학자들과 서학의 인물들과 교류했다. 이런 다산의 학통은 조선말기 소외 받은 지식인의 계보인 이른바 성호학파와 일치된다. 27세에 생원시와 정시에 합격한 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으나 정조의 승하와 함께 그의 관운도 끝이 났다. 이에 비해 추사는 월성위 김한신의 손자인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인 김노영의 양자가 되어 월성위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노론 집안의 자제로 24세에 생원시에 장원을 한 그는 시대를 이끌던 주류정치 학문 집단과 교류를 하였다.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연경에 가게 되자 자제 군관으로 연행길에 올라 중국의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정조의 죽음은 순조의 등극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어졌다. 노론벽파는 남인을 비롯한 정치적 반대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서학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고,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된 다산은 1801년 11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유배지 강진에서 사람들은 모두 다산을 피하기에 급급했고, 다산은 주막의 주모가 내어준 골방에서 겨우 유배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배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산은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혜장, 초의와 같은 불교계 승려들 과도 교류를 했다. 처음 사의재에서 가르친 아이들은 대부분이 아전의 자제로 신분이 낮은 계층이었으나, 외가인 해남 윤씨의 도움으로 다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다산 초당에서 길러낸 제자들은 양반 가의 자제들이었다. 이들 제자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다산이 방대한 저술을 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곳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해배된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와 말년을 보내다가 1836년 7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순조 사후 헌종이 등극하자 안동 김씨는 노론벽파를 축출하고 세도정치를 시작했다. 추사는 55세이던 1840년 안동 김씨의 무고에 의해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다산과는 달리 추사는 집권세력에 포함된 유배 객이었기에 유배지 제주에서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유배지에서의 반찬 투정이나, 제주에 대한 비하, 그리고 유배되어 있으면서도 당대의 서예가들에 대한 날 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아마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이에 대해 저자는 추사가 계급적 신분주의와 지적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추사는 유배지에서 중국학계와 꾸준히 교류하였고, 수백 년 동안 어떠한 고증과 해석도 없이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의 서체를 답습하려는 서풍에서 벗어나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이는 조선서예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서체를 구현하려는 실험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48년 8년여에 걸친 제주유배에서 해배 되었으나, 1851년 다시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 추사는 1년 후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 머물렀다. 그리고 4년후인 1856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산이나 추사, 이들에게 유배는 익숙한 일상에서 쫓겨나 낯선 곳으로 버려진 데서 오는 상실감과 고독이 그 무엇보다도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다산에게는 가족에 대한 걱정이 더해 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배가 자신과 가문의 입신양명을 위해 뒤돌아 볼 틈없이 살아온 지식인에게 안식을 제공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다산이 일표이서로 대표되는 경세사상을 완성할 수 있었고, 추사가 추사체라는 조선서예의 혁신적 문자구조를 완성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의 사람이 보기에 그런 것이고, 자신의 일이 아니어서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저자는 기존의 책들이 다산과 추사에 대한 막연한 추앙과 도가 넘는 칭송일변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들의 예술과 학문과 삶을 재조명하여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으로 번역하여 책에 실었다는 부분들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기쁨도 주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너무나 의욕이 앞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아마 나의 욕심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산과 추사에 관한 책, 한 권을 추가한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