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 (키에르케고르를 중심한 초기 실존주의 철학 이야기)

시드니인문학교실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 (키에르케고르를 중심한 […]

시드니인문학교실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

(키에르케고르를 중심한 초기 실존주의 철학 이야기)

회고

2017년 2월, 다문화 사회인 오스트레일리아에 와서 살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들로서 우리 개인과 우리 공동체의 삶을 보다 더 풍성하고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뜻을 지니고 몇몇 분들로 부터 시작한 시드니인문학교실은 3년을 넘어서 4년차로 접어들었습니다.

여기 그 동안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요약 정리해 봅니다.

시드니 인문학교실의 주제

보통 종교와 그들의 사상은 ‘신’을 주제로 삼습니다. ‘신이란 무엇이고 신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신의 속성과 뜻과 섭리와 계획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고 또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를 주로 취급합니다. 이 문제에 관심하는 이들은 주로 교회나 성당, 절이나 암자를 찾거나 신학교나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신과 진리를 찾아 출가하게 됩니다.

과학의 주제는 ‘물질과 자연’입니다.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 바다와 대지, 바람과 비를 포함하는 모든 자연계의 본질과 속성과 현상과 변화가 연구의 대상입니다. 순수과학에서 파생되는 응용과학과 사회과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이 만들어 놓은 ‘인간사회’와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다루곤 합니다. 순수과학자들은 대학과 연구소에서 평생을 씨름하고 실제 사회현실에 뛰어든 이들은 정치나 경제, 사회나 문화 예술 같은 분야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해온 인문학의 주제는 ‘인간’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과 물질 사이에 있는 존재,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존재, 영원과 시간 사이에 끼어 있는 인간이라는 매우 특별한 존재를 공부의 주제로 삼습니다. 인간공부를 하다 보니 연계된 ‘신’이나 ‘과학’ 혹은 ‘사회’에 대해서도 가끔 기웃거리긴 하지만 우리는 주로 서양의 ‘문사철-文史哲’(문학, 역사, 철학)과 동양의 ‘시서화-詩書畵’(시, 서예, 그림)를 포함하는 ‘소리’(음악, 가락)를 함께 읽고, 보고, 들으면서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어 왔습니다.

이렇듯 ‘인간’을 주제로 삼아 지난 3년간 우리가 함께 나눈 공부의 제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1강 – 왜 우리는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인문학의 목적)

제 2강 – 우리는 무엇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인문학의 정의와 역사)

제 3강 – 인문학은 어떻게 공부하는가? (인문학의 방법론)

제 4강 – 생각과 생각하는 것 – 인문학의 출발점

제 5강 – 인문학의 주제 1. 서양에서 생각해온 사람 (Saram).

제 6강 – 인문학의 주제 2. 동양에서 생각해온 사람 (Saram).

제 7강 – 인문학의 주제 3. 통전적 인간 이해 (Saram).

제 8강 – 나의 철학 만들어 보기

제 9강 – 내 인생의 중심개념 – 그것은 변하는가? 불변하는가? (고대 자연철학이야기)

제 10강 – 웃기지 마라! 네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다! (소피스트 이야기)

제 11강 – 죽음, 어떻게 마지 할 것인가? (소크라테스의 생각, 삶, 그리고 죽음)

제 12강 – 플라톤 선생님, 두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이원론과 국가론)

제 13강 – 무엇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어 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이야기)

제 14강 –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후기 그리스철학자들 이야기)

제 15강 – ‘알아야 믿는다’와 ‘믿으면 알게 된다’ 사이에서 (초기 중세철학 이야기)

제 16강 – ‘철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 사이에서 (후기 중세철학 이야기)

제 17강 – 인간, 이성, 자유 그리고 과학의 시대가 열리다! (르네상스 이야기)

제 18강 – 르네상스가 없었어도 종교개혁이 가능했을까? (16세기 종교개혁과 오늘)

제 19강 – 아는 것이 힘일까? 모르는 것이 약일까? (근세 철학에서의 인식론 이야기)

제 20강 – 인간과 역사는 과거 보다 나아졌는가? (18세기 계몽주의 이야기)

제 21강 –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내 마음에는 양심과 도덕이 있습니다 (칸트이야기)

제 22강 – 역사란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이다! (헤겔 철학 이야기)

제 23강 – 철학은 말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행동으로 현실을 바꾸어 나가야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과 철학)

제 24강 – 우리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기적 DNA와 싸운 신영복, 막스 베버, 헨리 조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케이스)

제 25강 – 당신은 Nein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부정과 전복의 철학자 니체)

제 26강 – Desidero ergo sum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프로이트와 라캉)

200여권 정도의 추천도서 목록

우리는 처음 이 강좌를 시작하면서 이 기간 동안 반드시 읽으시길 바라는 200여권 정도의 추천도서 목록을 만들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약 3년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금년 후반기에는 이를 수정, 보완하고 더 첨가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지난 3년 사이 홍길복 강좌 이외의 강의들

지난 3년 사이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26번에 걸친 홍길복의 강좌 외에도 그 보다 훨씬 더 소중한 분들의 강의가 계속되어 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웃되기의 역사학 – 박정신 숭실대 교수(2017.4.20)

2)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 탈북자, 이웃 환대하기 – 구미정 숭실대 교수(2017.4.20)

3) 간추린 호주역사 이야기 – 한상대 교수(2017.8.17)

4) 해외 한인 동포들 이야기 – 한상대 교수(2017.9.21)

5) 제 1회 시드니인문학교실 수련회 – 주제: 동과 서 (2017.10 1 -2일, St. Benedicts Monastery, Arcadia)

6)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1)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배경 – 주경식 교수(2017.10.5)

7)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2) 루터 : 교회개혁과 그 분열 사이에서 – 주경식 교수(2017.10.19)

8) 이민자와 정치, 그리고 호주의 정치제도 – 권기범 변호사(2018.2.15)

9) 정치란 무엇인가? – 권기범, 정동철, Peter Kim의 Forum(이 부분은 원고가 없음)

10) 인문학과 경제 : 장하준의 자본주의 해부 :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를 중심으로 – 최진 선생(2018. 4. 19)

11) 과학으로 조명하는 인간의 본질 – 양지연 박사(2018.5.17)

12) 영화와 인생, 그리고 인문학 – 주경식 교수(2018.8.16)

13) 묵자(墨子) – 사랑과 평화의 사상가 – 김춘택 선생(2018.9.20)

14) 인문학과 미술 : 르네상스 이후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탄생 – 이남순 선생(2018.10.18)

15) 인문학과 책 이야기 : 책읽기, 그 공감을 넘어서 – 김동숙 선생(2018.11. 15)

16)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서 본 신, 인간 그리고 구원 – 주경식 교수(2019.2.21)

17)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통해서 본 신과 인간 이해 – 주경식 교수(2019.3.21)

18) R. 니버의 신학 : 그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중심으로 – 홍길복(2019.4.18)

19)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주경식 교수 / ‘신영복의 서예세계’ -최진 선생(2019.5.16)

20) 현대 미술 : 후기 인상주의 – 이남순 선생(2019.8.15)

21) 인문학과 문학 : 시와 삶의 자리 – 전현구 목사(2019.9.19)

22) 인문학과 음악 : 오페라 여행 – 한상대 교수(2019.10.17)

23)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 최진 선생(2019.11.21)

24) 제 1회 인문학여행 – 그리스·터키·한국 (2019 10.22 – 11. 4일까지. 26명 참가)

25) 기타 소그룹 모임 (2017.3.12. ./ 5.7 / 8.27 등 몇 차례에 걸쳐 현실 문제를 놓고 토론했음)

감사

지난 3년의 인문학교실은 ‘감사’로 매듭이 지어집니다. 인문학 친구 여러분들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함께하신 분들은 물론이고 그 동안 잠시라도 우리와 함께 읽고 듣고 나누어 오신 분들이 있어서 우리의 생각은 조금씩 다듬어졌고 우리의 나눔은 많이 풍성해졌습니다. 또한 부족한 사람을 곁에서 이름없이 감싸주시고 도와주신 운영위원 여러분들의 헌신과 섬김이 없었다면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2020년 인문학 강좌 계획 (준비와 진행에 따라 변할 수도 있으나 년초에 세워보는 계획)

제 27강(2월 6일) :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 (키에르케고르를 중심한 초기 실존주의 철학 이야기)

제 28강(3월 5일) :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 또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르트르와 카뮈를 중심한 戰後 실존주의 철학 이야기)

제 29강(4월 2일) : 정말 생각없이 사시겠습니까? – 선과 악이 투쟁하는 인간의 본성 (한 위대한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도전)

제 30강(5월 7일) : 남성은 인간이고, 여성은 그냥 여자인가? (Man is a man, Woman is a woman?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 시몬 드 보부아르를 중심한 실존적 페미니즘 이야기

제 31강(8월 6일) : ‘1984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미쳐버린 인간들 (미셜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중심으로)

제 32강(9월 3일) : 똑같은 것도 달리 보고 다르게 생각한 사람들 (프랑츠 파농을 중심한 블랙 디아스포라와 ‘차이의 존중’)

제 33강(10월 1일) : 도대체 미국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깔려 있는가? (Pragmatism을 중심한 미국철학 이야기)

제 34강(11월 5일) :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가? 언어가 사건을 만드는가? / 왜 우리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복화술사(腹話術師)’들인가? (비트겐슈타인을 중심한 언어철학 이야기)

그 외 매월 3째 목요일 마다 진행되는 강좌의 주제나 강사는 현재 준비 중입니다만 우선 2월 20일은 강기호 선생님을 모시고 상담 심리학과 인문학, 3월19일은 양지연 박사님을 초청하여 인문학과 현대 뇌과학에 대하여, 4월 16일은 엔도슈사쿠의 “침묵”을 함께 읽고 독서토론을, 5월 21일은 김삼오 박사님을 청하여 ‘인문학과 정보 및 지식’(Truth와 Fact를 구별하는 법)에 대한 말씀을 들으려고 준비 중입니다.

2020년에 읽을 책들

2020년 인문학 교실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인문학 친구들이 가능하면 최소 1달에 1권씩, 1년에 12권 정도의 책 읽는 즐거움과 함께 독서의 습관을 훈련하도록 홍길복이 추천하는 ‘2020년에 읽을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물론 이것은 주로 금년도 인문학 강좌와 연계된 책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독서 계획이 이미 있으신 분들은 굳이 이를 따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임규정 옮김, 한길사, 2007. 기타 여러 역자가 있음.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07.

사르트르, 구토, 시사영어사, 1994 (문예출판사, 1999).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8.

카뮈, 이방인,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

카뮈, 페스트,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

카프카, 변신, 문학동네, 2005.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살림출판사, 2007.

미셜 푸코, 광기의 역사, 인간사랑, 1999.

조지 오웰, 1984년, 다락원, 2007.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문학동네, 2014.

윌리암 제임스, 실용주의, 정해창 편역, 아카넷, 2008.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 – 철학 논고, 책세상, 2006.

헥터 맥도날드, 만들어진 진실, 이지연 옮김, 흐름출판, 2018.

전병근,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열린책들, 2018.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등, 우리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책읽는 수요일, 2013.

나카지마 요시미치, 차별감정의 철학, 김희은 옮김, 바다출판사.

찰스 파스테라나크,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채은진 옮김, 말글빛냄, 2008.

천주희 등,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낮은산, 2018.

하비 콕스, 신이 된 시장, 유강은 옮김, 문예출판사, 2018.

지바 마시야, 공부의 철학, 책세상, 2018.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김영사, 2018.

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임재서 옮김, 말글빛냄. 2012.

알랭 드 보통, 불안, 정영목 옮김, 이레, 2010.

김상근 등, 인문학명강, 21세기북스, 2014.

레슬리 스티븐슨 등,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2019.

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한길사, 2007.

박정신, 뒤틀린 해방체제 그 너머, 동연, 2019.

히라노 게이치로, 나란 무엇인가, 이영미 옮김, 21세기북스, 2015.

이상 인문학교실이 지난 3년간 걸어온 발자취를 정리 및 회고하는 내용과 2020년도의 강좌 계획은 ‘기록으로 남겨 놓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이제 오늘 27번째 강좌의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의 주제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 (키에르케고르를 중심한 초기 실존주의 철학 이야기)

왜 ‘다시’라는 말을 하는 걸까요?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인문학교실의 주제인 ‘인간문제’를 반복하여, 거듭하여, 다시, 묻고. 토론하고, 고민하고, 씨름해 나가겠다는 뜻입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문제로 귀결됩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예술도, 도덕도, 종교도, 마침내는 진정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 앞에 이르게 됩니다. 트럼프나 시진핑, 스콧 모리슨이나 보리스 존슨, 문재인이나 박근혜, 조국이나 유시민, 손흥민이나 류현진, 홍길복이나 이기영, 그 누가 지닌 문제라 해도 결국은 ‘아 사람이란 진정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1) 외면할 수도 없고, (2) 바꾸기에는 힘에 부치고, (3) 그렇다고 도망치거나 못 본체 하면서 살아가자니 불편하고, (4) 안될 때는 안되더라도 싸워 보자니 너무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망서리게 됩니다.

인문학과 철학은 이런 주어진 현실을 분석하기도 하고, 또 종합하기도 하면서 이 인간 삶의 현실이 던져주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오려고 하다가 제일 마지막으로 부딪히는 것은 결국 ‘사람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연구와 탐구, 독서와 토론, 지식과 정보는 항상 ‘근본을 지향’합니다. 근본을 모르거나 근본을 덮어두고는 아무리 연구하고 공부를 해도 바람직한 결론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근본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공부에는 다양한 접근이 가능합니다.

(1) 신체적, 의학적, 과학적 접근 (2) 정신적, 심리적 접근 (3) 사회적, 환경적 접근 (4) 문화적, 문학적, 예술적 접근, (5) 정치적, 경제적 접근 (6) 도덕적, 영적, 종교적 접근 (7) 인문학적, 철학적 접근 등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수많은 인간 탐구의 방법이 있기에 인문학적, 철학적 접근 역시 그 모든 것 중 하나일 뿐임을 기억하고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다른 주장에 귀와 마음을 열고 독단에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때때로 자신의 주장만을 너무 앞세우다가 대립하고 충돌하게 되는 것은 인간 이해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에 대한 넓은 마음과 학문적, 인격적 겸손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지난 날 서양철학은 처음 그리스에서 ‘자연이란 무엇인가?’ ‘우주만물의 근본(Arche)은 무엇인가?’하는 의구심과 질문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으로 주제가 바뀌어 졌습니다. 얼마 후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나 가치관의 문제와 더불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인간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인식과 지식의 방법론 문제로까지 넓혀져 왔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그 동안 자연철학이니, 형이상학이니, 존재론이니, 가치론이니, 도덕철학이니, 인식론이니 등등 여러가지 이름을 붙여 공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핵심 주제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인간에 대한 논의와 정의는 수도 없이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Homo habilis, homo erectus, homo sapiens, homo movens, homo sexual, homo ludens, homo demens, homo aestheticus, homo consumes, homo economicus, homo duplex, homo viator, homo symbious, homo solus, homo religious, homo nomad, homo hundred, homo phonos 등등이었고 또 앞으로도 많이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가장 크고 강력하게, 혹은 가장 오랫동안 인간을 규정해 온 이론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 ‘인간은 탐욕적 존재다’ 같은 정의가 대표적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그 무엇이라고 한 가지로만으로는 도저히 규정지을 수 없는 복합적 존재요 가변적 존재’인 것 만은 확실합니다.

실존주의, 혹은 실존철학도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전통적 질문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실험적 도전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오늘날 21세기에 들어서서 실존주의는 철학의 중심부에서 점점 뒤로 물러 서고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등 여러가지 사회철학이 철학적 질문과 관심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만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대로 역시 어느 길로 들어서도 도착하는 지점은 거의 공통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데 모아지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로 부터 시작되어 플라톤의 이원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을 하나로 보려는 일원론을 거쳐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의 서양철학은 (1) 존재론, (2) 인식론, (3) 가치론이라는 세 개의 커다란 범주로 묶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그 강조점은 변해왔습니다. 그런데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현대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거치면서 다시 존재론으로 돌아섰고, 특히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개별적이며 현실적인 인간 존재에 focus를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합리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쇼펜하우어, 딜타이, 니체, 베르그송 등은 인간을 이성이나 지성 보다는 감성과 의지를 지닌 존재로 이해하였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헤겔의 ‘절대정신’이란 인간에게서 감성이나 의지를 빼버린 마네킹 같은 인간을 다룬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실존철학자들은 마치 만들어 놓은 사과, 화폭 속에 그려놓은 꽃, 쇼 윈도우 속에 서 있는 마네킹을 가지고서 사과란 무엇인가, 꽃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면서 떠들지 말고, 제발 빨갛게 윤이 나고 단맛과 신맛이 나는 사과, 향기가 나며 벌들이 날아오는 꽃, 지지고 볶으면서 실패와 아픔, 고민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숨 쉬고 있는 개별적 인간, 그 자체를 좀 주제로 삼으라고 권고합니다.

실존(實存)’의 의미

한글 글자의 뜻만으로 풀어 보자면 ‘실재로 존재하는 것’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실존주의, 실존철학, 혹은 실존주의 철학이란 영어로는 Existentialism, 독일어로는 Existentialismus 혹은 Existentialphilosophie, 프랑스어로는 Extentialisme로 표시합니다.

실존주의(實存主義)라는 한글은 우리 보다 앞선 일본 철학계에서 번역했던 것을 그대로 채용한 것입니다. 인간을 ‘실재로’ 혹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이런 시도와 사상은 19세기 중엽 이후 유럽 철학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름이나 개념 속에 있는 추상화된 인간이 아니라 현실 속에 실재하는 존재, 화장하지 않은 민 얼굴의 인간, 맨 모습, 참 모습의 인간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실존적 인간’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좀 쉬운 문장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회주의적 평등 사회를 지향 하려는 사람들과 자유주의적 시장 경제를 지키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실존적 문제입니다. ‘주 52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1만원이라는 정책적 결정 앞에서 중소 사업가들은 실존적 한계 상황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2015년 터키의 보드룸 해안가에 밀려온 3살배기 에이란 쿠르디라는 시리아 난민 어린 애기의 시신사진을 접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국제 분쟁에서 일어나는 비극적 인간의 실존을 실제적으로 보게 됩니다’ ‘국가 없이 떠돌이로 살아가는 4천만 쿠르드족의 비참한 삶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간과 역사의 슬프고 아픈 실존 현장을 목도하게 됩니다’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이 이민자의 땅에 와서 살면서 청소하며 타일공으로 일하는 나는 내 실존적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듯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의미를 지닌 실존(實存)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였고, 그후 이를 연구한 일련의 철학자들을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전통적 헤겔철학에 반기를 든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나 진리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큰 구조와 틀 속에서 보거나 보여지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실존은 개별적이고 개인적이며 독단적인 경험입니다. 인간과 진리는 개인적 고뇌와 경험을 통하여, 구체적 상황 속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투표를 통해서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학술 논문에서 논리적으로 증명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타인이나 집단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다. 법과 습관과 도덕율을 따라가는 것이 진리를 발견하는 길은 아니다. 진리는 주체성이다!’ 훗날 사르트르는 이것을 가르쳐 ‘실존주의는 본질주의를 거부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인간의 실존은 인간이라는 개념 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습니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말, 인간이라는 개념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으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실존주의철학이 대두된 배경

1) 멀리는 17,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과 그 계몽주의 사상을 낳은 유럽에서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19세기에 이르러 철학의 혁명과 연결된 데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뉴턴 이후 오랫동안 지배해온 기계적 결정론과 고전 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현대 물리학의 탄생이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물리학의 변화를 포함한 자연과학의 새로운 이론들은 실존주의와 거의 동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설 등은 키에르케고르 같은 초기 실존주의 사상가들에 뒤를 이어서 나타났지만 피차 영향을 주고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전 물리학을 깨트리는 현대 물리학과 그에 따른 인간 사고의 변혁은 후기 실존주의 사상가들에게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야스퍼스, 사르트르, 카뮈,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뒤를 이은 일련의 철학자들은 거의 현대 물리학의 영향으로 인하여 ‘절대적 진리는 절대로 없다’는 바탕 위에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어온 전통과 정통을 부정하려 들었습니다. 이는 자연과학이 끼친 영향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현대의 자연과학은 정신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오늘날 천문학을 비롯한 각종 우주 과학은 우주 전체의 불과 4% 만을 관측해냈을 뿐이며 나머지 96%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 학문적 겸허함이 인문학자들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만듭니다. 현대의 실존주의는 현대의 자연과학이 낳은 사상 중 하나입니다.

2)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실존주의는 칸트로부터 피히테(Fichte)와 쉘링(Schelling)을 거쳐 헤겔(Hegel)에 이른 일련의 독일 합리주의 사상에 대한 antithesis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역사는 정반합(正反合)을 거듭하면서 지향(指向; Aufheben)을 거듭합니다. 원래 독일어의 Aufheben이란 ‘위로 올라간다’ ‘위로 올려 민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정신사도 뒤 따라오는 것이 끊임없이 앞에 있던 것을 밀어냄으로 발전을 이루어 내게 됩니다. 전통과 정통을 거부하고 부정하려는 노력이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조합니다. Innovation은 현대의 경영학이나 사업가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모든 사고와 삶의 영역에서 다 함께 요구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이론과 주장에 대해서 ‘그것만이 아니다’ ‘아닐지도 모른다’ ‘달리 볼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새로운 시각이 생겨 날 때 개인과 공동체와 역사는 조금씩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기존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바꿔보려고 읽고, 듣고, 보고, 생각하는 노력을 통하여 물론 개인적으로는 치매도 예방할 수 있겠지만 공동체적으로는 정체와 침몰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최근 핀란드에서는 34살 된 산나 마린이라는 젊은 여성이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끄는 연립정부의 5개 정당 당수 5명은 모두 여성입니다. 그 중 4명은 30대입니다. 오늘날 유럽을 중심하여 많은 나라가 이미 그 동안 누적 되어온 전통과 정통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를 포함하여 오늘의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각종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새롭고 창의적인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절감하고 있습니다. 남성이 아닌 여성, 기성세대가 아닌 신세대, old generation이 아닌 new generation 만이 그동안 ‘남성 늙은이’들이 만들어 놓은 쓰레기통을 치울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여튼 현대 유럽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엽 실존주의 사상이 움트기 시작했던 무렵부터 반항과 대결, 부정과 해체를 통한 새로운 사상을 추구했습니다(세계를 바라보면 오늘날 전통적이며 정통적인 사고와 생활 태도를 향한 도전이 제일 느린 곳이 한국의 정치계, 종교계, 학문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변화를 위해 몸부림치는 경제계를 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변화하면 무엇을 잃을 것만 같고 심지어는 망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주어진 전통과 정통을 종교적 신앙처럼 여겨 이를 지키려고 하는 이들은 자기들 끼리 얽히고 설킨 인맥과 이해관계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합니다).

하여튼 실존주의를 필두로 한 19세기 이후 유럽에서부터 강력하게 대두된 인문학적 사상들은 일체 기존의 전통과 정통에 대한 부정, 반항, 도전, 해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보려는 인문학적 노력 중 하나였다고 하겠습니다.

3) 그러나 키에르케고르 다음, 후기 실존주의 사상이 태어나게 된 구체적이며 결정적인 배경은 20세기 초엽부터 시작된 1, 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의 폭정과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럽은 제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병사 900만명이 죽음을 당한 것을 포함하여 거의 4,000만이 죽거나 부상, 실종을 당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6,100만명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실종되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히틀러는 유태인들만 600만 이상을 죽음의 가스실로 몰아넣었습니다. 1945년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려 한자리에서 24만명의 목숨을 살해했습니다. 그에 앞서 일본은 1938년 난징대학살 때 불과 6주 만에 약 30만명의 중국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고 합리적 존재인가?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실존주의사상은 바로 이런 인간의 동물화(動物化) 현상을 목도하면서 탄생된 철학입니다. ‘진정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가?’ 진지한 자기 반성을 가져다 준 것이 비극적이고 야만적인 살육전을 경험한 다음 찾아온 물음입니다.

실존주의철학에서 보는 인간이해

보편적 인간, 인간 일반을 정의하는 것도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닌데 개별적이며 구체적 인간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소포클레스의 말대로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요. 세상에는 이상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이기에 사실 너무 알려고 집착하는 것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일일수도 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비극이 시작된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어라.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몰라도 아는 척하면서 그냥 우물우물, 대충대충 어물쩡하게 지나가라. 인간이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기도 하지만 알고 나면 큰일이 터지는 핵폭탄과 같은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1) 영어의 existent라는 말은 그리스 말에서 왔는데 이는 ‘ex’ 곧 ‘밖에’ ‘밖으로’라는 말과 ‘sistere’는 ‘있다’ ‘존재한다’ ‘서있다’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실존’(existent)이란 글자대로는 ‘밖에 있는 존재’ ‘밖에 서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인간이란 ‘안에 있는 존재’ ‘안에 갇혀진 존재’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밖으로 내던지진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다’ ‘인간은 피투된 존재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기가 자신의 삶을 선택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도 모르게 ‘지금 여기로’ ‘here and now’로 던져진 존재로 이해합니다. 최초의 본질이나 근본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 여기에’ 이렇게 던져져서 살아가는 실재적 존재,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간으로 이해해 보자는 것이 실존주의의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이란 밖으로 던져진 존재다.’

2) 실존주의에서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의 현실, 상황, 그 컨텍스트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이란 두리뭉실하게, 묶어서 혹은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인간은 개별적 존재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입니다. 인간은 집단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는 그 이해가 불가능도 하지만 그렇게 막연하게 ‘인간 존재란 무엇 무엇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해 온 서양철학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인간은 감성적 존재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 ‘인간은 탐욕적 존재다’하는 식으로 서양철학은 그 동안 거듭해서 인간을 ‘그 어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규정해야 마음이 편하고 안심되는 듯이 인간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설명해 왔다고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그렇게 단순하게, 단일하게 정의할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비이성적이거나, 비정치적이거나, 비경제적이거나, 혹은 비탐욕적 존재일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란 복잡한 존재요 다양성을 지닌 존재다’ ‘우리는 모든 인간을 하나로 보고 한가지로 설명하려고 했던 헤겔까지의 모든 시도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고 사람을 하나하나 따로 따로 떼어서 보고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실존하는 인간에 대한 실존주의적 인간이해의 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 헤겔까지는 이런 명제에 대해서 보편적 이해로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실존철학에서는 이 똑같은 명제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말이 50살 먹은 김동숙이 할 때와 100세가 되신 김형석 선생님이 할 때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개별성(즉 한 사람, 한 사람을 독립적 실존으로 이해하자는 것) 이것이 실존철학에서의 인간 이해입니다. Gabriel Marcel에 의하면 ‘not merely thinking subject, but the acting, feeling, living human individual’ 입니다. 그는 강단과 연구실에서, 책과 논문을 통하여 관념론적으로, 마네킹을 앞에 두고 그 마네킹을 들여다 보면서 인간을 연구해 보겠다고 달려들었던 형이상학적 인간 공부에는 마침표를 찍자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나’라고 하는 한 인간을 마주보면서 내가 던져진 상황 속에서 울고 불며 지지고 볶으며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지금 여기 이렇게 피투된 실존적 인간’을 보라!

3) 여기에서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이 ‘존재’ 문제입니다. 실존주의에서는 ‘개별적 인간존재는 그 존재 자체로 이미 의미와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인간이란 그 앞에 어떤 형용사를 붙일 필요가 없이, 또 붙여서도 안되는 존재로 이해하려는 것이 실존주의에서의 개별적 인간 이해입니다. ‘이성적’이니 ‘정치적’이니 ‘경제적’이니 ‘탐욕적’이니 하는 형용사를 붙이게 되면 반드시 그 반대의 다른 형용사도 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의미와 가치가 있음으로 모든 개별적 인간들은 자신이 있는 그대로 그냥 인정받고 대우받아야 마땅하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사르트르가 선언한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물들과는 달리 ‘인간존재’ 그 자체가 인간의 다른 본질이나 기능 보다 앞섭니다.

여기 자동차가 있습니다. 컴퓨터가 있습니다. 냉장고가 있습니다. 소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인간도 있습니다. 자동차는 사고가 나서 폐차하게 되었습니다. 컴퓨터는 고장이 나서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냉장고는 신형이 나와서 쓰던 것은 버렸습니다. 소파 역시도 부셔져서 버렸습니다. 모든 물건은 그렇게 존재의 본질과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폐기되어 존재를 상실하게 됩니다. 폐차된 자동차는 자동차라고 부르지 않고, 고장난 컴퓨터는 컴퓨터라고 할 수 없고, 부서진 냉장고나 소파는 이미 냉장고도 소파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 실존하는 구체적 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그럼 그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공부를 못하고 마약을 하고 사고를 쳤습니다. 그럼 그는 내 자식이 아닙니까? 그가 사람을 죽이고 교도소에 가 있습니다. 그럼 그는 인간이 아닙니까? 그에게는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합니까? 여기 홍길복이 치매에 걸렸습니다. 우리 집 아파트 윗층에는 지체 장애아가 있습니다. 여기 우리가 아는 사람이 큰 죄를 범하고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심각합니다(들키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나는 그 사람보다 나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여튼 실존주의철학에서는 인간을 기능이나 소유나 준법여부나 도덕적 행위나, 종교적 신앙의 소유 여부와는 아무관계 없이 ‘하나의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으로 여기고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법을 어긴 사람, 악한 사람, 악마 같은 사람도 모두 다 ‘사람’이라는 존재에는 변화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물건처럼 용도나 기능, 쓰임새나 능력에 따라 인간이 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물화(物化)하지 말아라’ 인간을 ‘물건 중 하나’로 취급하여 무디어진 칼, 고장난 TV를 버리듯이 인간도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사고에 대하여 도전하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에서의 인간 이해입니다. ‘인간의 실존은 인간의 기능과 능력, 본질과 성격 보다는 늘 앞선다!’ 한 사람을 향하여 그의 어떤 일면만 보고서 ‘그는 인간도 아니야!’라고 단정적으로 말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인간이란 그의 실존이 그의 다른 어떤 것 보다 앞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몹쓸 물건’은 있어도 ‘몹쓸 인간’이란 없습니다. 물건은 쓰레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쓰레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히틀러나 김일성도 인간이고 슈바이처나 마더 테레사도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4) 그러나 그 다음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대두됩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이란, 나라는 존재는 바로 이 ‘지금 여기’ 이렇게 여러가지 다른 모습으로 던져진 인간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인간’이 될 때 비로소 그는 ‘실존하는 인간’이 된다고 봅니다. 자신의 현존을,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자신됨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야한다. 자각해야한다. 깨닫고 자각한 존재가 되어야한다’ ‘실존은 자각적 존재다’ – 자기의 참 모습, 자신의 실재적 모습을 주어진 현실 속에 피투된 존재로 여기, 이렇게,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하고 깨닫는 존재 만이 ‘실존적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대로 하자면 히틀러나 김일성이 슈바이처나 마더 테레사와 다른 점은 여기서 구별됩니다. ‘자각된 존재냐 아니냐?’ 지능적으로 뛰어 나거나 정치적으로 힘이 있거나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종교적으로 거룩하냐, 아니냐에 따라서 인간이 되느냐, 못되느냐, 혹은 인간으로 취급해 주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설혹 그가 지능과 지성과 상식에 있어서는 능력이 미치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악하고 종교적으로 추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는 실존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대접 받아야 마땅하지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깨닫고 자각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실존적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기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아는 인간인가?’ 그런데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모르는 무지한 존재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이 우주의 신비를 아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안다고 큰 소리를 쳐도, 모르는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예컨대 한국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한국 사람의 진짜 모습은 어떠한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우리 민족을 스스로 성찰할 때 우리는 한국인의 실존적 자아상을 보게 됩니다. 물론 얼마든지 긍정적이고 좋은 모습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과 양심에 충실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자화상에 대해 비판적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70년대 독일 탄광에서 생명을 담보로 일했던 파독 광부들의 스토리를 들을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2019년 현재 1년에 100명 이상씩 3D 노동 현장에서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동남아에서 와서 일하는 이주자들이 한국사회에서 당하는 수모와 고통의 이야기에는 무심한 호주 이민 경험자인 우리는 과연 어떤 인간인가? 일본의 위안부 문제를 놓고는 티격태격하며 각 곳에 소녀상을 세우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여 저질렀던 입에 담을 수 없는 만행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진짜, 실존적 자화상은 무엇인가? 나는 나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인간의 민 얼굴을 알고 있는가? 실존주의에서 보는 인간은 성찰, 자성, 그리고 이어지는 겸손한 인간상입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 출신의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사상의 선구자였습니다. 대부분의 철학개론이나 실존주의 입문서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실존주의의 전체적 내용과 성격에 대해서는 거의 일치된 설명을 하면서도 ‘인간초월’의 방향에 대해서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구분합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자로는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를 중심하여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와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을 들고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로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필두로 하여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를 대표자로 칩니다.

오늘 우리는 그 중에서 키에르케고르와 그의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만 저는 유신론적, 혹은 무신론적이라는 개념으로 이들을 구별하지 않고 19세기 이전의 초기 실존주의, 혹은 세계대전 이전, 즉 戰前의 실존주의 사상가 중 대표자로 키에르케고르를 공부한 후, 다음 달에는 20세기 다음, 혹은 세계대전 이후, 즉 戰後의 실존주의 사상가와 문인 중에서 사르트르(Sartre), 알베르트 까뮈(Albert Camus)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간단한 생애

코펜하겐에서 태어난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 미카엘(Michael) 키에르케고르는 독실한 루터교 신앙을 지닌 사람으로 경제적으로는 퍽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훗날 아버지 사후 쇠렌은 꾀 많은 유산을 물러 받았는데 그는 죽기 전까지 일정한 직업 없이도 물러 받은 유산으로 생활을 영위하였고 자신의 저서들을 출판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안네(Anne)는 처음 키에르케고르네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다가 혼인하지 않는 상태에서 먼저 쇠렌의 형, 페테르(Peter)를 낳았는데 쇠렌에게는 이것이 일생토록 ‘경건한척 하면서 방탕한 아버지’의 위선적 이미지로 자리를 잡게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경건한 척하는 기독교 교인이었지만 육체적 욕망에 이끌리어 가정부를 욕보여 임신을 시키고 내 형을 낳았다. 위선과 거짓 속에서 불안하게 인생을 살아온 것이 우리 아버지의 실존적 모습이다’ 그 후 가정부 안네는 아버지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둘째인 쇠렌을 비롯하여 7남매를 낳았는데 그의 동생 다섯은 모두 33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쇠렌은 이것이 모두 아버지가 가정부에게 범한 죄와 위선으로 가득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쇠렌은 어려서 부터 아버지의 엄격한 종교적 훈련 속에서 성장했는데 ‘아버지의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는’ 현실 속에서 사춘기의 쇠렌은 종교적 갈등과 고뇌와 번민 속에서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그래도 그는 고등학교에서는 라틴어와 역사학을 공부했으며 그 후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 코펜하겐대학 신학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쇠렌은 아버지의 위선적 삶과 당시 루터교회를 비롯한 개신교의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좌절하고 반기독교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신학도이면서도 교회를 떠나 방탕한 생활을 했고 심지어는 자살을 시도하다가 미수에 그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불안과 갈등, 우울증과 불안정 속에서 그는 1840년 레기네 올센에게 청혼을 했다가 1년도 안되어 파혼을 선언하는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원인은 신경쇠약에 따른 불안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의식과 불안이 평생 그를 억눌렀습니다. 그러나 이런 중에도 그는 1841년에는 ‘아이러니의 개념 –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곧 이어서 1843년에는 ‘공포와 전율’(두려움과 떨림),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출간했습니다. 그 후 키에르케고르는 숨을 거두기까지 약 10여년에 걸쳐 일정한 직업이 없이 저술과 잡지 발행 등을 하면서 제도권 교회를 비판하거나 자신의 실존주의 사상을 펼치다가 42세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정신병적 광기와 천재성을 지닌 철학자라는 측면에서 그는 니체와 매우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주요 저술

년도별 주요 저작으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1843년 – ‘이것이냐 저것이냐’ / ‘유혹자의 일기’ / ‘두려움과 떨림’ / ‘반복’

1844년 – ‘철학적 단편’ / ‘불안의 개념’

1845년 – ‘인생길의 여러 단계’

1846년 –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비학문적 해설문’

1847년 – ‘다양한 영혼이 말하는 교훈적 담론’ / ‘사랑의 행위’

1848년 – ‘기독교 토론’

1849년 – ‘죽음에 이르는 병’

1850년 – ‘기독교의 훈련’

1851년 – ‘신의 불변성’ / ‘자기 수련을 위하여’

1855년 – ‘순간

그외 1958년 Oxford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한 키에르케고르의 ‘일기’[Journals]가 있다.

(한글로 번역된 책들 – 유혹자의 일기, 임규정·연희원 옮김, 한길사, 2001 / 두려움과 떨림, 강학철 옮김, 민음사, 1991 / 공포와 전율, 반복,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07 / 불안의 개념,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07 /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강성위 옮김, 동서문화사, 2007 / 죽음에 이르는 병, 김용일 옮김, 계명대출판부, 2006. 임규전 옮김, 한길사, 2007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07 / 기독교의 훈련,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05)

그의 사상

1)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철학, 특히 그의 ‘절대정신’(Absolute Geist) 같은 관념론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헤겔철학을 깊이 공부했으면서도 헤겔을 넘어섰습니다. ‘헤겔은 추상적 관념론자이다.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구체적이며 실존적 인간의 삶을 볼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구체적 개인으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실존은 개체다. 실존은 개인이다. 개인과 개체는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말한 ‘실존적 상황’이라는 개념은 인간을 ‘인간 일반’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독립된 개체로 보자는 입장입니다. ‘인간은 전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인간은 혼자서 개별적으로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자이고 그에 따른 책임도 자신이 지고 가야하는 존재다’

사실 19세기 중엽 이후 현대 인문학과 현대철학은 그 어떠한 사상이나 주장도 단정적으로 획일화해서 설명하는 것이 어렵고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의 생각과 삶은 복잡다단해졌기 때문입니다.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형이상학과 반형이상학, 과학주의와 반과학주의가 서로 대립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특징은 첫째, 객관적 지식이나 객관적 인식을 거부하고, 둘째로 불변의 실체나 진리를 거부하며, 셋째로 무슨 일이든 결과 보다는 그 일을 이루어가는 과정 자체를 중시하고, 넷째로 인간의 개인적 존엄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모든 인류의 역사는 앞선 생각에 대한 훗날의 반대로 부터 비롯됩니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플라톤[Plat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칸트[Kant]나 헤겔[Hegel]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우리가 기존의 주장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은 그 누구의 그 어떠한 사상도 결코 완전한 사상, 완벽한 작품은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정반합[正反合]을 통하여 끊임없이 진행을 거듭하는 과정일 뿐이지 흠없는 완제품은 없습니다).

2) 그 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선택과 결정은 주로 역사적 배경이나 환경적 조건에 따라 타의적으로 결정된다고 믿어왔습니다(지금도 제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모든 인간의 선택과 결정은(그것이 정치적이던, 경제적이던, 사회적이던, 도덕적이던, 철학적이던, 종교적이던 간에)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라고 보았습니다.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진리는 객관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진리는 실존적이고 ‘실존적 진리만이 참된 진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명예를 포함한 일체의 모든 것을 다 던져서 결정, 결단하고 따라가야 할 주체성 있는 진리의 길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받치는 아브라함의 스토리를 예로 들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진리란 객관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며 주체적 결단’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이냐, 아들이냐’ 이런 선택은 그 누가 보아도 모든 인류가 함께 동의하고 아브라함을 따라서 자기도 덩달아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받쳐야만 하는 보편 타당성을 지닌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란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종합하여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결단한 ‘개인의 주체적이며 실존적 결단’이라는 주장입니다.

3) 그럼 과연 어떤 사람이 이런 실존적 진리를 따라서 순간순간 마다 자아를 결단하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오직 자신에 대하여 깨어있는 개인만이!’ – 이것이 키에르케고르의 대답입니다. 그는 상찰, 깨어있음, 반성, 자신에 대한 긴장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타고 가는 이 세계라는 마차 속에서 한시도 정신을 잃지 않고 내가 탄 이 마차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주시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든 예입니다 한 마부가 손님을 마차에 태우고 길을 갑니다. 그런데 말 고삐를 잡고 있는 마부는 가끔 졸기도하고 잠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마부는 말의 고삐를 잡고는 있지만 진정한 마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긴장하고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마차를 타고 가는 손님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합니다. ‘말 고삐를 쥐고 있지 않은 손님이 진정한 마부다. 그는 역사의 깨어있는 마부다!’ 자신의 실존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의미없이 생명만 이어가는 존재는 실존적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실존적 인간은 매 순간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의식하면서 이것저것들을 보고 부딪치면서 선택하고 결단하는 깨어있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4) 그런데 개인적으로 던져진 삶의 현실이던, 아니면 공동체적 운명이던, 이 역사와 삶의 현실 속에서 눈을 뜨고 ‘깨어있는 실존’으로 말고삐를 잡고 갈 것인가, 아니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졸면서 지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며 자유입니다. ‘인간의 모든 선택과 결정은 개인의 자유다!’ ‘실존적 인간은 자유로운 인간이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선택과 결단을 앞에 둔 자유로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현실로서의 ‘불안과 고독’입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안하고 고독합니다. 불안하고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불안하고 고독하지 않은 존재는 실존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실존적 존재론서의 인간이 불안하고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유 때문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그냥 주어진 일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데 자유로운 인간은 그 자유 앞에서 스스로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야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고독한 것입니다. 불안과 고독은 자유의 선물입니다. 부자유가 인간을 불안하고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오히려 인간을 불안과 고독 속으로 끌어드립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생각과 삶을 결정해 주면 나에게는 자유도 없지만 동시에 불안이나 고독도 없습니다. ‘돌맹이는 불안하지 않다. 짐승들에게는 고독이 없다. 우리가 불안하고 고독한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이다’ ‘당신은 불안하십니까? 당신은 때때로 고독하십니까? 그럼 당신은 틀림없이 사람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고독한 것은 그가 그냥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말년에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꽤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늘 고독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별난 사람이 되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냥 사람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loneliness, Einsamkeit는 인간됨의 가장 정확한 표식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책 ‘불안의 개념’과 ‘공포와 전율’에서 거듭해서 말합니다. ‘인간은 자유가 없어서 고독하고 불안한 것이 아니라 실은 자유로워서 불안하고 고독하다’ 그는 이를 ‘자유의 현기증’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5) 실존철학에서의 불안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신경과학에서 말하는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는 심리현상이나 감정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신체적, 혹은 정신적 위기의식에서 나타나는 공포와는 다른 것입니다. 불안과 고독은 ‘대상이 불분명 한데도’ 생겨납니다. nicht etwas입니다. 근심이나 걱정은 ‘무엇 무엇 때문’이라는 대상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불안과 고독은 ‘무의 심연(無의 深淵)’속에서 생겨나는 존재 자체의 속성입니다. 불안과 고독은 인간존재의 근본적 자기모순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무한과 유한 사이에서, 영원과 시간의 틈새에서, 자유와 속박 사이에서, 인간 스스로의 모순에 끼어 든 상태가 불안과 고독으로 표출되는 겁니다. 후기 실존주의 철학자들인 하이데거나 사르트르도 인간을 불안한 존재로 보았지만 키에르케고르가 처음으로 인간을 ‘불안한 존재’, ‘고독한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공포와 전율’은 이렇듯 대상이 불분명한 데서 오는 불안과 고독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를 사람들은 ‘불안의 철학’(Philosophy of Anxiety)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자유스러우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실 자유로우면 불안한 것이 인간이다’ 이런 주장은 다른 사람의 책에서 베껴오거나 머리로, 관념적으로 생각해서 만든 이론이 아니라 키에르케고르라는 한 실존적 인간 자신의 삶의 철학입니다.

6)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의 불안과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죽음이라는 낭떠러지 앞에 서있는 인간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뛰어내릴 것인가 말 것인가?’는 선택지가 아닙니다. 뛰어내리는 길 하나뿐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선택지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그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공포, 불안, 두려움, 전율, 떨림, 그리고 고독을 마주하게 됩니다.

7) ‘죽음에 이르는 병’ 앞에서 인간의 자기 자각,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 거기에서 오는 불안과 고독을 극복해 내는 길은 없는가? 여기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적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3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미적 단계’입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따라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단계입니다. 이왕 죽을 몸인데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다가 가자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국 반복되는 허무와 우울과 절망이 이어질 뿐입니다. 둘째는 윤리적 단계입니다. 미적 단계에서 벗어나 이성과 도덕률에 따른 삶의 기준을 정하고 성실하고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 역시도 지속성이 없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자각하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절망감과 죄의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세 번째 종교적 실존의 단계입니다. 신에게 귀의하여 신 앞에 단독자로,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서 손을 드는 단계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키에르케고르는 후기 사르트르나 카뮈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과는 구별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요,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맺는 말

맺는 말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보는 자각하는 실존적 인간을 요약,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독립적이고 개별적 존재다. 둘째,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셋째, 인간은 선택과 결단을 요구받는 존재다. 넷째, 인간은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다. 다섯째, 인간은 죽음 앞에 선 존재다. 여섯째, 인간은 단독자로 신 앞에 설수 밖에 없는 존재다.

앞에서 소개한 키에르케고르의 간략한 삶과 그가 출판했던 책들의 목록들을 읽으시면서 여러분들은 키에르케고르라의 생각과 사상을 어느 정도는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그의 중심 개념은 한 마디로 ‘자유’ ‘불안’ 고독’ ‘죽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는 계몽주의와 헤겔로부터 반항의 깃발을 들고 인간을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보려는 초기 실존주의로 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실존적 삶에 충실하게 반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정직하게 자신의 일생을 자신의 철학으로 빚어낸 사람입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시대와 그 개인의 삶이 엮어낸 작품입니다.

Comments, Questions & Sharing

(1)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실존론적 접근을 통하여 유신론적 입장에 확고하게 섰고, 그 후 칼 바르트나 불트만, 라인홀드 니버 등 많은 신학자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만 당시 그가 살던 시대의 덴마크의 국가교회(National Church)의 형식주의와 교권주의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랄하게 비판하고 맞섰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실존주의자로써 교회와 대결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복음의 본질(역사적 예수의 삶과 사상)과는 어긋나는 현실적, 제도적 교회의 비복음적이며 반예수적 모습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나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

(2)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경험했던 불안과 두려움, 공포와 고독,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해 낸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까?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