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인문학과 미술: 르네상스 이후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탄생

시드니인문학교실 인문학과 미술: 르네상스 이후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탄생 지난 2개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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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미술: 르네상스 이후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탄생

지난 2개월에 걸쳐 홍길복 선생님을 통하여 르네상스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예술분야에서도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과학의 발달과 산업의 발달 상업의 발달로 새로운 계층이 만들어져 미술에서의 제재 또한 다양해 졌습니다. 오늘 시간에는 르네상스 그 이후 사실주의의 대표작가 쿠르베와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한 마네, 그리고 인상주의의 가장 대표작가 모네를 중심으로 소개를 해드리려 합니다. 저는 진중권의 인상주의라는 책을 교과서 삼고 그외에 구글 검색으로 그림을 삽입하고 많은 분들이 정리해 올려놓은 글들도 인용 삽입하였습니다.
회화의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용 – 제재(그림의 소재)와 주제(그림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세지)
.형식 – 형태(형태 그리는 것 = 소묘)와 색채(색을 칠하는 채색)

고전주의는 사물을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그들에겐 색채보다는 형태가 더 중요했다. 원근법, 완벽한 신체의 비례 등 연구하고 색채는 형태를 돋보이게 하는데 사용된다.
자연주의가 사물을 정교하게 묘사하는데 머물렀다면 고전주의는 그 수준을 넘어 사물을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르네상스이후 미술은 자연의 모방이라 불렸는데 여기서 자연은 가시적인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인간의 신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인간신체를 아름다운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리려 했다.(그림; 보티첼리의 프리마벨라[봄] 에서의 삼미신)
원근법적 공간의 구축(르네상스이후 500여년간 지탱해온 서양미술의 규약) – 르네상스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대상을 그리기 전에 원근법을 이용한 공간구축을 한다.
•시각 피라미드의 횡단면 – 시각점을 중심으로 대상을 가상의 피라미드모양으로 설정하고 그리드를 만들어 그려내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카메오브스쿠라 이용했다.
•장르의 위계 – 역사화(도덕적,종교적 교훈) > 인물화(인물의 외관을 통한 내면의 정신성) > 풍경화(고전에선 그림의 배경으로, 품격을 위해 이야기가 있는 풍경) > 정물화(네덜란드 중심으로 발달, 이 지역이 근대적 의미의상업적 자본주의가 등장) – 자본주의적 소유욕의 당당한 긍정 > 풍속화(네덜란드의 풍속화는 훗날의 대중민주주의 시대의 예술의 전조)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
1)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년)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인 미술가이자 기술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조각, 건축, 수학, 과학, 음악,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했다. 열다섯이 되던 해에 피렌체로 가서 부친의 친구인 베로키오에게 미술 수업을 받았고, 이곳에서 자연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법을 배운다.
서른 살에는 더 큰 도시인 밀라노로 떠나 1년을 머물며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익히는데, 이때 만든 작품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를 둘러싼 열두 명의 제자를 소재로 한 ‘최후의 만찬’은 1495년~1497년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예수의 머리를 소실점으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회화의 법칙과 질서를 학문적으로 접근한 다빈치는 이 작품에서 원근법과 투시법을 활용하여 작품의 완벽한 질서를 표현하였다.
또 사람과 동물의 시체를 해부하는 기이한 행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스케치북에 남긴 인체 해부도는 의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2)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년)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몰락한 귀족 출신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공부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를 원했지만 그림에만 관심이 있는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미켈란젤로는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은지 일년여 만에 조각으로 눈을 돌리고,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공이 운영하던 조각 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조각과 인체 해부에 전념하며 신화와 성서 등 고전을 읽고 교양을 쌓은 미켈란젤로는 ‘다비드’나 ‘피에타’와 같은 힘 있고 감정이 살아 있는 걸작들을 남긴다.
이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성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를 의뢰받는다. 그는 ‘나는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거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길고 고통스러운 작업이 시작되었다.
1508년부터 4년여에 걸친 작업 기간 동안 미켈란젤로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뒤이어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라는 대작을 완성시켰고,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회화, 조각뿐 아니라 시집까지 출간하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다비드상’ 성경 속 인물 다비드(다윗)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1504년에 완성한 대리석 조각이다.
3)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년)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 3대 거장 중 하나인 라파엘로는 다른 두 사람의 장점을 고루 갖춘 예술가로서 살아 있는 동안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궁정 화가였던 아버지에게 처음 그림을 배운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고향을 떠나 피렌체로 건너 간다.
그곳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한참 활약하고 있었는데, 라파엘로는 그들의 업적을 연구하며 다양한 작품을 남겼고, 미켈란젤로의 라이벌로 평가받기도 했다.
4년 뒤에는 로마로 향해 평생을 그곳에서 지내며 그의 생애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 ‘감옥에서 구출되는 성 베드로’ ‘아테나 학당’ 등의 대표작들은 그 시절 교황의 거처를 꾸미는 벽화로 그린 것들이다. 한편 그의 초상화는 섬세한 색조와 고요한 분위기가 특징으로 훗날 램브란트, 티치아노 등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 쿠르베와 사실주의 – 고전미술의 붕괴
Jean-Désiré Gustave Courbet(1819년 6월 10일-1877년 12월 31일)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미술을 아름다운 가상으로 이해한 고전적 이념을 무너뜨린 것은 쿠르베의 사실주의였다. 사실주의는 19세기 과학적 실증주의, 사진술 발명, 1848년 혁명이 낳은 예술이었다. 과거의 예술이 이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쿠르베와 같은 사실주의자들은 미술의 목표를 진실에서 찾았다. 그 진실이 어둡고 추하더라도. 그래서 진중권의 미술사에서는 쿠르베의 미술을 아름다운 가상의 파괴이며 혁명과 민주주의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등학교(Collège)를 나온 후, 1837년 브장송(Besançon)의 왕립 고등학교(Lycée)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교에 있는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리세 졸업 후 1840년 쿠르베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간다. 그러나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화파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분석한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활동에 숨기보다는 파리코뮌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 시대는 오직 그 시대의 예술가들, 즉 그 시대 안에 사는 예술가들에 의해서만 재현될 수 있다. 나는 한 세기의 예술가들은 근본적으로 과거나 미래의 세계의 면모를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예술가들이 과거나 미래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카메라 도입으로 새로운 지각, 수정 미화 없이 그대로 포착) “이상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데에 이르러 나는 개인과, 민주주의의 완전한 해방을 성취한다. 사실주의는 그 본성상 민주주의적 예술이다.” 독립적 예술가 의식을 보여주는 쿠르베의 현대적 면모를 볼 수 있는 그의 견해를 보자. “나는 어떤 체계나 편견도 없이 고대와 현대의 예술을 연구해왔다. 나는 전자를 모방하려 하지도 않았고 후자를 복제하려 하지도 않았다. 쓸데없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내 목표가 아니었다. 아니다! 나는 그저 전통에 대한 완전한 숙지로부터 나 자신의 개성에 대한 사려깊은 독립적 의식을 끌어내려 했을 뿐이다. 창조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알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사실주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 대상의 사실적 묘사, 당대 사회의 묘사, 현실의 비판적 묘사.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사실주의는 이미 유럽의 시대정신이었다.

2. 마네 –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에두아르 마네(프랑스어: Édouard Manet, 1832년 1월 23일~1883년 4월 30일)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 19세기 현대적인 삶의 모습에 접근하려 했던 화가들 중의 하나로 시대적 화풍이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전환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초기작인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는 엄청난 비난을 불러 일으켰으나 반면에 수많은 젊은 화가들을 주변에 불러모으는 힘이 되었는데, 이들이 후에 인상주의를 창조하였다. 이 그림들은 오늘날 현대미술을 창시한 분수령으로 여겨진다. 그의 화풍의 특색은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에 있다.
마네 본인은 인상주의자로 여기지 않았으나 화면이 3차원적 환영에서 2차원적인 구성으로 돌아갔으며 붓자국도 인상주의적이다.
•모던의 만보객 – 마네는 길거리 카페나 레스토랑를 제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린 이른바 모던라이프를 그린 최초의 화가이다. 윤곽의 명확성 세밀묘사가 생략된 것에서 인상주의적 경향을 볼 수 있어 당대 평론가들에게 악평을 받았는데 들라쿠루아와 소설가 에밀 졸라만이 기법의 바탕에 모던의 새로운 지각방식을 알아채고 인정했다.
•마네와 쿠르베의 충돌 – ‘올랭피아’를 보고 쿠르베가 “그것은 평편하고 모델링이 되지 않았다. 목욕을 하고 나온 하트의 여왕같다.”라고 한 혹평에 마네는 “쿠르베의 모델링으로 우리를 지루하게 한다. 그의 이상은 당구공이다.”라고 대응했다. 이 두사람의 충돌은 프랑스회 화가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는 과거 티치아노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비교되며 스캔들을 일으켰다.
•마네와 인상주의자들 – 마네의 주위에 인상주의자라 불릴 화가들이 모였으나 마네의 관심은 세계를 제 눈에 보이는 그대로 ‘진실하게’ 그리는데 있었다.
•마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 마네는 살롱전에 처음으로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을 출품했다.
지금에 와서는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고 정말 유명한 작품이 되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낙선한 작품이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작품의 소재는 술로 몰락한 사람들 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윤리를 해친다는 이유도 포함됐다.
또한 치밀한 묘사를 찾아볼 수 없고, 마무리가 엉성하다는 것에 그 당시 심사위원들은 혹평을 했다.
마네의 스승인 쿠튀르 조차도 마네의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작품을 혹평했으니, 그 당시에는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이 무시를 당했는가 알 수 있다. 이후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을 그린 화가는 드가, 르누아르, 고갱, 로트렉, 피카소 등 아주 많다
•‘막스밀리안 황제의 처형’ – 밀리안이 나폴레옹 3세의 권유로 멕시코의 황제로 갔다가 본국의 군은 철수하고 멕시코 독립군 세력에 처형을 당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부분 습작. 멕시코 군인인데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 The Third of May, 1808’(114, 유화, 260-345cm), 마네의 ‘막스밀리안 황제의 처형’(1867년),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년)는 비교된다.
이렇게 공산주의 사실주의자였다. 그런데 기법에선 인상주의적인 면이 강해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렸다.
•‘튈르리에서의 음악회’ – 마네는 모던 라이프를 그린 최초의 화가였다. 대도시의 거리를 거닐며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만보객이었고 그런 이들이 즐겨 모인 공원의 하루를 보여준다. 윤곽의 명확성이나 세부묘사를 포기한 것에서 인상주의적 경향이 보인다.
* ‘벨벳을 입은 모리조’ –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는 외교관 외조부와 법조계 아버지를 둔 상류사회여성으로 그 당시엔 흔치않게 그림공부를 하였고 마네를 만나 많은 영향도 받고 마네의 그림에 모델로도 많이 등장한다. 마네의 동생과 결혼한 후에도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을 한 거의 유일하게 알려진 여성 인상주의 화가이다.
•베리트 모리조 ‘접시꽃과 어린아이’ – 여덟 차례 진행된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딸을 낳던 해인 1879년을 제외하고 모두 참여했던 인상주의 여성 화가다. 카미유 코로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빛에 대해 눈을 떴다.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와 결혼한 베르트 모리조는 이따금씩 마네의 작품 모델이 되기도 했다. 풍경화도 그렸지만 작품의 주된 소재는 일상 속의 여성과 아이들이었고, ‘접시꽃과 어린아이’에서 어린아이는 모리조의 딸이다. 그러나 딸도 단순하게 묘사하면서 빛을 색채로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3. 모네 – 인상주의의 탄생
•19세기 미술사의 꽃 인상주의 – 인상주의는 ‘색은 곧 빛’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색이 반사광에 불과하다면 대상의 고유색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풀밭위의 점심’ – 모네의 시작이 마네이었다는 걸 확실히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집세 대신 집주인에게 주었다가 1884년에 찾았는데 보관이 잘못되어 곰팡이가 나서 그림을 삼등분해서 남은 부분이다.
•‘인상 해돋이’ – 모네가 마네에서 완전히 벋어났음을 보여준다. 유화물감을 이용해서 마치 스케치를 한듯하다. 노르망디해안을 그렸지만 그에겐 제재가 중요하지 않았고 해뜨는 그 시각의 인상이 중요했다. 모네는 회화의 목표가 객관적인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극히 주관적인 인상의 표현으로 바뀌었다. 시간 시간 바뀌는 빛의 변화와 그 인상이 중요했기에 그는 동시에 여러 개의 캔버스를 늘어놓고 시간 변화에 따라 캔버스를 옮겨가며 작업을 하곤 했다. 그래서 같은 장소의 다른 칼라의 연작이 아주 많다.
1874년 살롱전 거절작가들의 전시회에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등이 참여했다. 여기에 평론가 루리 르루아가 ‘르 카리바리’라는 잡지에 ‘인상주의자들의 전시’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며 인상주의자라 불렸다.
•대상에서 인상으로 – 모네가 그리려는 목표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망막에 비친 그것의 주관적 인상의 표현이다. 모네는 야외로 나가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의 색채를 신속하게 포착하려했다. 이런 방식으로 한 그림 안엔 오직 한순간의 이미지 만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모네는 대상에서 반사된 빛들이 우리의 망막에 연출하는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려 하였다. 모네와 그의 친구들은 사물에 고유색 따위는 없고 단지 빛의 조건에 따라 매순간 바뀌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포착하기 위해 같은 대상을 빠르게 그리고 여러 시간대에 여러번 반복적으로 그렸다.
•‘모네의 정원’ – 1926년 사망전 30년간 지베르니의 별장에서,백내장으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며 그림은 더욱 원색적이고 추상적으로 변해가는데, 가치를 인정 받지 못했던 파노라마형태의 ‘모네의 정원’이 1940~1950년대의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등장으로 다시 고평가 되었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설치된 모네의 ‘수련’ 1914년 모네는 지베르니의 별장에 이 프로젝트만을 위해서 설치한 스튜디오에서 파노라마 작업을 한다. 그의 목표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마치 물처럼 끊임없고 무한한 풍경이미지 창조였다. 모네는 사방으로 둘러쌓여 그림 속에 들어가 감상을 하게 하는 이 파노라마작품을 거대한 장식이라 불렀다. 현대미술에서 설치미술에 해당한다.

•이렇게 각 시대의 철학의 변화,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그 시대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인상주의자들이 빛을 분석하고 외광에 푹 빠질 수 있었던 데에는 튜브에 든 물감이 제일 크게 영향을 준게 아닐까 생각한다. 색의 가루를 오일에 개어 만들어 쓰던 것을 튜브에 된 물감을 보고 흥분했을 모습과 이젠 그것들을 들고나가 직접 자연속에서 자연을 느끼며 그 풍부한 감성에서 튀어나오는 모든 것을 화면에 즉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가슴 뛰고 벅차했을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렇게 변화는 계속 가속화되어지고 그 표현방법은 날로 다양해 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시간을 계기로 더 많은 분들이 미술에도 더 관심 갖게 되시고 재미를 느끼시면 좋겠습니다. 미술사에는 많이 부족한 제게 공부할 좋은 기회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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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순 작가
Australian Korean Art Therapy Association(AKATA) 선임연구원
Korean Women Art Society in Sydney(KWASS) 자문위원
– 시드니여성미술협회(전 회장)
Concord Art Studio 개인레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