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이제 철학은 말로 세상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행동으로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 Karl Marx의 사상과 철학

시드니인문학교실 이제 철학은 말로 세상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행동으로 현실을 […]

시드니인문학교실

이제 철학은 말로 세상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행동으로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의 사상과 철학)

들어가는 말

오늘은 공산주의 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던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과 철학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저를 포함하여 우리들 중에는 마르크스와 같은 진보적 사상가를 공부하기에는 좀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패기 넘치던 대학생 시절에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젊은 시절 한 번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려는 꿈을 꾸어 보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며 늙어서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를 그리워하는 자 또한 어디 있으랴?’ ‘10대 20대 때 문학소녀의 꿈을 꾸지 않았던 소녀가 어디 있겠으며 40대에도 여전히 시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는 바보 또한 어디 있으랴?’ 젊은 시절엔 한 두 번씩이라도 반항과 혁명, 변혁과 진보를 논했고 이상적 동화의 세계를 그려보았던 우리들도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 점차 변화는 싫어하고 진보적인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며 현실에 안주해 버리는 나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강좌는 우리 중에서 경제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하신 친구들이 담당해 주시기를 희망했으나 모두들 사양하시는 바람에 오늘도 그냥 ‘무식한 사람이 지닌 만용’을 발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중이라도 혹시 잘못되었거나 고쳐야 할 부분은 반드시 수정, 보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배경

지난날 인간역사에서 어떤 인물들이나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그들의 생각이나 뜻을 역사속에 펼쳐나가게 된 데는 반드시 그 시대와 그 지역의 다양한 배경이 있습니다.

배경중에는 첫째는 지리, 기후, 온도, 토질 같은 자연적 배경이 있고, 둘째는 그 사회의 정치체제나 계층구조 같은 사회정치적 배경(background)이 있고, 셋째는 그 시대, 그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과 지성 같은 정신적 배경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까지 거의 550년을 이어온 춘추전국시대는 고대 중국에서 주(周)나라를 출발점으로 하여 진시황(秦始皇)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당시 중앙집권적 봉건제는 조금씩 약화되어가고 각 곳의 제후들은 저마다 세력을 넓혀가며 군웅이 활거함으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던 시절, 때마침 철기문화가 발전되어 각종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해내고 전쟁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서 헤어나질 못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로 그런 혼란과 무질서한 시기가 동시에 정신문화에서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이기도 했습니다. 각 곳에서 사학(私學)이 발흥하고 지식인들이 배출되고 사회의식은 높아지고 창의적인 사상들이 피어나면서 공자, 맹자를 비롯한 유가(儒家), 노자, 장자를 비롯한 도가(道家), 묵자를 중심한 묵가(墨家), 관중과 한비자를 중심한 법가(法家) 등 수많은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등장하여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반 사상을 풍성하게 만들어냈고 그 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정치적 혼란의 시대가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꽃을 피웠습니다.

AD 1세기를 전후한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원전 7세기 나라를 잃고 세계의 디아스포라가 되기 시작했던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서 정치적 힘과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들의 전통 종교인 유대교는 이미 타락하여 그 백성들의 구심점이 못되어 갈 때 예수라고 하는 한 인물이 나타나 역사의 B.C와 A.D를 가르는 종교적–정신적 혁명의 불길을 지폈고 서구와 세계역사의 변혁을 주도했습니다.

그런 예들은 너무 많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출현한 시대적 배경, 근세 르네상스가 시작된 정치-경제 및 사회적 배경, 몇 주전에 공부한 계몽주의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근세 유럽에서의 몇 가지 혁명들까지 우리는 역사의 크고 작은 변혁과 그 변혁을 이끈 사상가들의 출현에는 반드시 그 시대의 다양한 배경을 결코 간과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라는 인물을 역사 속에 등장시킨 19세기 유럽은 어떤 시대였을까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마르크스가 출현하기 이전 17, 18세기 유럽은 거대한 혁명의 물결이 휩쓸던 시대였습니다. 첫째는 산업혁명, 둘째는 시민혁명, 셋째는 철학의 혁명이 이어졌습니다(시드니인문학교실 ‘제20강-18세기 계몽주의 이야기’와 ‘제21강– 칸트철학 이야기’를 다시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세 가지 혁명의 세례를 받고 태어난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에게 크고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프랑스를 중심한 18세기 시민혁명이나 곧 그 뒤를 이어서 사상과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불러들인 칸트나 헤겔의 ‘생각하고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도 엄청난 것이긴 하지만 오늘은 산업혁명과 연관된 이야기만 좀 더 나누어 보겠습니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을 중심하여 출발된 산업혁명은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수렵경제, 농업경제, 수공업체제를 공장, 공업, 그리고 기계산업체제로 바꾸었습니다. 이어서 산업혁명은 대규모 대량생산과 생산의 전문화, 분업화와 함께 도시화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화는 이동, 통신, 생산, 소비 체제를 새롭게 발전(up-grade) 시켰습니다. 근대적 산업혁명은 경제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과거의 봉건체제를 무너트리는데 기여했고 지난날의 지주계급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신흥산업 브르조아지와 도시노동계급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산업혁명은 근대 민주사회로 나아가는 교두보가 되어 시민혁명과 함께 보편적 선거제도를 만들어 가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산업혁명은 위에서 본 것처럼 긍정적 측면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부정적 측면도 함께 있었습니다. 첫째로 산업혁명의 가장 큰 어두운 점은 빈부격차가 점점 더 확대된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새롭게 나타난 공장주들은 기업주가 되고 자본가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의 임금을 가능한 한 줄여서 그들의 임금을 착취하여 공장을 더 확대하고 생산과 소비를 더욱 늘여 갔습니다. 한편 이와 연계되어 생겨난 상인들은 처음엔 단순히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시장에 내다파는 장삿꾼의 역할을 했지만 점차 다양한 유통 및 서비스 산업으로 확대해 가면서 자본을 들여 가게를 넓히고 백화점을 만들고 거대한 유통업을 만드는 등 자본주와 경영자 계층이 되었으며 거기에서 월급이나 주급을 받는 일일 노동자 계층 사이에는 가면 갈수록 빈부의 격차와 함께 제반 사회적, 정치적 간격이 더욱 더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장주와 노동자, 사업가(경영자)와 월급쟁이는 결국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계층으로 사회의 구조를 갈라지게 했고 그들 사이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더욱 더 심화되었습니다(이것은 한 사회 속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 제국과 그들이 점령했던 식민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들이 점령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같은 식민지 국가들로 부터 값싼 원자재를 거의 뺏어오다 싶이 하여 자기들 사회에 있던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여 그야말로 원가는 얼마 안들여서 제품을 만든 다음 다시 그것을 원자재를 탈취해온 그 식민지 국가들에게 비싸게 팔아먹는 수법으로 부를 축적하여 오늘날 제 1세계와 제 3세계의 경제구도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둘째로 산업혁명의 또 다른 어두운 측면은 자연환경의 파괴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산업혁명 초기에 만든 기계와 공장들은 전혀 자연도 환경도 고려하지 않고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무차별적 벌목과 광산개발, 거기에 따른 도로와 철도의 부설 등은 전혀 자연 파괴라는 생각이 없이 오직 돈과 정복의 논리로 계속되었습니다. 각종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와 소음과 스모그와 오염된 폐수는 런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고 테임스강을 송사리 한 마리도 살 수 없는 강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갑작스런 도시화는 하수도나 화장실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런던과 파리를 세계의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대소변을 아무데나 버리는 공동화장실이 되게 했습니다. 이렇듯 도시의 기간산업은 전혀 갖추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산업혁명은 도시인구만을 폭발적으로 증가 시켰고 도시를 사람이 살수 없이 황폐화 시키면서 각종 전염병과 온갖 범죄, 도둑, 폭력, 살인, 성폭력으로 병들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내세워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지구의 온난화를 비롯한 생태계의 파괴가 가져다주는 온갖 종말적인 징조들은 이미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셋째로 산업혁명은 결국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산업혁명은 인간을 농노에서는 해방시켰지만 그외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비인간화를 촉진시켰습니다. 인간의 기본권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인권은 유린되고 착취되었으며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되어 하루 노동 시간은 16시간까지 이르렀습니다(10세 이하의 어린이도 12시간 노동을 필수로 했습니다). 오늘의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열악한 처지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부려먹고 해고했습니다. 노동자는 한번 쓰다가 버려도 괜찮은 일회용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노동조합이 어디 있습니까? 노조를 만드는 일은 법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죽거나 다쳐도 한 푼도 배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산업재해나 보험제도가 어디 있었습니까? 퇴직금이 어디 있습니까? 일전 한푼 받지 못하고 그냥 쫓겨나도 말 한마디 못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사는 우리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자본가들은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경찰을 다 공장 안으로 끌어들여서 노동강도를 높이도록 채찍질을 했습니다. 60년대 구로공단은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개집이나 닭집이나 쓰레기장에서 잠을 잤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30세 안밖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그랬으니 그들이 정복한 식민지에서는 어떠했겠습니까? 흑인들은 아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말할 줄 아는 동물’로 여겼습니다. 백인들만 사람이고 흑인들과 황인들은 사람 비슷하게 생긴 짐승으로 취급하여 소나 말, 개나 돼지처럼 사고파는 노예시장, 노예 정복, 노예의 수입과 수출이 법적으로 용인되었던 것이 불과 2백년 전 일입니다. 산업혁명이 빚어낸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런 부정적 측면들이 바로 카를 마르크스나 엥겔스 같이 인간을 회복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결심한 사상가들을 배출해 낸 직접적 배경입니다.

인물과 삶

2019년이라는 시간과 호주 시드니의 인문학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서구의 인문학 역사를 공부하는 중 카를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하니 지난날에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현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저희처럼 1960년대 초반 5.16 이후(여기에서도 저는 여전히 그걸 ‘5.16 쿠테타’라고 해야 할지 ‘5.16 군사혁명’이라고 불러야 할지 우리 인문학교실에 참석하는 다양한 연령층을 의식하면서 그냥 5.16이라고 적당히 얼버부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대학에 들어간 세대, 군사정부와 유신 독재와 권위적 시대를 지내온 지금의 70대 중반을 전후한 기성세대는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지은 책은 물론이고 그의 이름 조차도 함부로 불렀다가는 반공법에 걸려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는 사형을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늘날은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Karl Heinrich Marx의 이름을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라고 쓰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 때 그 시절에는 ’칼 맑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저를 포함하여 ‘칼 맑스’ ‘칼 맑스’라고 발음하는 것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참 많습니다. 당시 우리들 중에서 ‘칼 맑스’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빨갱이’가 아니면 ‘공산당’ 혹은 거기에 가까운 사회주의 운동가라고 여겨졌습니다. 그 후 80년대를 지나면서 소위 ‘운동권’에 속하거나 거기에 가까운 사람들은 숨어서이긴 했지만 마르크스를 읽거나 그의 사상에 대하여 토론을 벌리는 ‘의식화 공부’를 했고 구로 공단과 부천 등을 비롯한 공장 등에 위장 취업을 하면서 ‘야학’을 열어 ‘의식화 운동’을 넓혀가면서 노동운동을 통한 연대를 이루어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사회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후에 좀 더 소개하겠지만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저서들은 거의 다 한국어로 번역, 출판이 되었고 금지된 도서가 아니어서 숨어서 읽을 필요가 없을 뿐더러 이제는 지성인들의 필독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동 시대인 19세기 초엽인 1818년 지금은 독일 영토이지만 당시엔 프로이센(Kingdom of Prussia) 땅이던 서부 라인강 지역의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나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공부하고 가르치고 저술하며 여러가지 활동을 하다가 1849년 영국으로 망명하여 그의 주저인 ‘자본론’을 저술한 후 1883년 숨을 거두기까지 거의 34을 영국에서 살다가 마침내 망명지 런던에서 숨을 거둔 후 하이게이트 공동묘지(Highgate Cemetery, London)에 잠들어 있는 독일의 철학자요 사회학자요 역사학자이며 동시에 경제학자입니다.

정치체제나 경제 이론에 있어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사상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떠나서 그는 20세기 이후 오늘의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상가 중 하나로 평가를 받습니다. 한 세기가 되도록 일제와 분단, 전쟁과 냉전 구도속에서 살아온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 때 마르크스는 무조건 ‘빨갱이’로 취급되었지만 이제는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입장에 서서 그의 사상과 철학, 사회과학과 역사학적 이해를 시도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더 나아가 근대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다시 가다듬고 자본론이나 공산당선언 같은 저술을 통하여 긍정적인 방향이던 부정적인 부분에서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현실적 문제에 대하여 좀더 깊고 성숙하게 생각해 보도록 우리 시대에 자극을 준 사상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전통적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습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네덜란드에서 랍비로 있었으며 친가쪽 할아버지 역시 트리어에서 랍비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아버지가 돌아간 다음 가문의 전통인 유대교로부터 개신교로 개종을 하고 변호사로 일하면서 계몽주의적 사상을 따라갔습니다. 마르크스는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으며 일찍 죽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루터교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가문의 경제적 생활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습니다. 트리어 고등학교를 거쳐 17살 때 본 대학교에 들어간 마르크스는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강요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후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마르크스는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헤겔과 포이에르바흐 등에 관심이 더 깊었습니다. 마침 20살 때 부친이 죽음으로 그는 법과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고 본격적으로 철학과 문학에 심취하여 몇몇 단편 소설과 희곡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그는 다시 진보적인 예나대학으로 옮겨 거기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큐러스의 자연철학 비교’(Uber der Differenz der Demokritischen und Epikureischen Naturphilosophie)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부터 마르크스의 인생은 험하고 거친 길을 걷게 됩니다. 처음에는 ‘라인신문’(Rheinische Zeitung)이라는 언론사에서 저널리스트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하여 정부를 비판하고 러시아를 공격하는 등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탄압하는 정부 당국과 대결하다가 마침내 폐간이 됨으로 생활의 거처를 파리로 옮기게 됩니다. 파리로 온 마르크스는 초기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 교제하게 되고 점차 급진적 사상가로 변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만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rich Engels)였고 이후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거의 평생을 함께하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독불연보(獨佛年報)는 부정기적 신문을 발행하면서 헤겔의 독일 철학과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을 결합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그는 ‘의인동맹’(Bund der Gerechten)이라는 비밀결사체에 가입했고 그 단체가 불법단체로 규정됨으로 프랑스에서도 추방이 되어 벨기에의 브뤼셀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마침내 독일 관념론을 비판한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했습니다. 1848년엔 파리에 있던 ‘의인동맹’이 정식으로 ‘공산주의 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대회를 준비하게 될 즈음 그 창당선언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쓰게 된 글이 이후 역사에 남게 되는 ‘공산당 선언’이었습니다.

마침내 마르크스는 1849년 런던으로 추방되어 트라팔가 광장 근처의 쓰러져가는 집에서 34년 동안이나 비참하게 가난한 삶을 살면서 6명의 자녀를 낳아 3아이들의 목숨을 잃어 가면서도 매일 같이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출퇴근을 하며 하루 10시간 이상이나 공부했습니다(저는 한 30여년 전 처음 런던을 찾았을 때 오후 반나절을 The British Museum에 가서 이것저것을 둘러보던 중 그곳 독서실, The Reading Room에서 공부했던 유명인사들 이름이 붙어있는 방을 보았는데 지금 생각나는 사람은 Mahatma Gandhi이고 또 그 방에는 특히 마르크스가 앉아서 공산당선언을 썼다는 책상과 의자를 그대로 보관, 전시해 두고 있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날 늦은 오후 저는 거기에서 멀지 않은 Highgate Cemetery를 찾아가서 마르크스의 묘지와 묘비도 둘러 본 것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독일어로 “Proletarier aller Lander, vereinigt euch!”라는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귀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마르크스 사상을 뒤이은 3인의 공산주의 정치인들 –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있는 레닌, 천안문 광장에 있는 마오쩌둥, 그리고 평양 금수산궁전에 있는 김일성, 이 세 사람의 웅장하고 무섭도록 성스럽게 처리된 시신을 모두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들의 화려한 시신의 모습이 마르크스의 무덤과는 크게 대비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산업혁명의 어두운 그늘을 바라보면서, 또 자기 자신의 가난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서 ‘정치경제학 요강’ ‘정치경제학 비판’ ‘잉여가치론’ 같은 책을 집필해냈고 마침내 1867년에는 그 유명한 ‘자본론’을 완성한 후 숨을 거두게 됩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죽기 얼마 전 그에게 유언할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이 친구야 유언 같은 것은 살아 있을 때 해야 할 말을 다 못한 얼간이들이나 하는 거야! 그만 가보게!’(Hinaus! Letzte Worte sind fur Narren, die noch nicht gegnug gesagt haben…)

주요저술

마르크스의 대표적 저술을 년도별로 간추려 봅니다. 제가 참고한 자료는 그의 저술들을 독일어가 아닌 영문으로 기록해 두어서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것들은 주로 최근 번역판을 중심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1839년–앞에서 소개한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큐로스의 자연철학 비교’

·1842년–The Philosophical Manifesto of the Historical School of Law.

·1843년–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1845년–Theses on Feuerbach

·1847년–The Poverty of Philosophy ‘철학의 곤궁’ 이승무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8

·1847년–Wage-Labor and Capital

·1848년–Manifeste der Kommunistischen Partei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공산당선언) 엥겔스와의 공저, 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6 (한국에서 ‘월간 좌파’를 발행하는 박종철출판사는 1987년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이 치안본부 보안분실에서 고문으로 죽음으로 민주화운동에 불을 지핀 것을 기념하여 그의 친구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든 출판사입니다. 현재 대표인 김태호는 박종철의 서울대 언어학과 1년 선배입니다.) /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8 (이진우는 연세대를 거쳐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그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귀국 후 포스텍과 계명대에서 교수로 있습니다.)

·1862년–Theories Surplus Value

·1865년–Value, Price and profit

·1867년–Das Kapital 1. ‘자본론’, 상·하권.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김수행은 서울 상대를 거쳐 런던대에서 학위를 받은 후 한신대에서 출발하여 서울대에서 정년 퇴임 후 성공회대학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을 강의하다가 2015년 별세한 교수로 정운호, 박영호 교수 등과 더불어 한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제 1세대에 속하는 학자입니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부의 33명 교수 중 유일하게 마르크스경제학을 강의한 사람으로 정년퇴직 때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동안 서울대 경제학부의 구도가 32대 1이었는데 이제부터는 33대 0이 되겠네요. 자본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해 나가려면 자본주의 경제학을 옹호하고 가르치는 교수도 있어야 하지만 반대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가르치는 교수도 있어야만 합니다’ 이 말은 한국에서의 학문적 풍토가 오직 한 방향으로만 치우침으로 사회과학 분야가 계속 낙후 될 수밖에 없다는 염려를 피력한 것이라고 봅니다).

·1885년, 1894년–Das Kapital 2, 3는 사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외 한국어 번역판으로는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김현 옮김, 책세상, 2015 /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김효균 옮김, 중원문화, 2017 / ‘경제학 철학 초고’ 김문수 옮김, 동서문화사, 2016 등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철학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개념 풀이

1) 유물사관(唯物史觀, Historical Materialism) : 방법론적 출발은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에서 비롯됐으나 헤겔과는 달리 역사가 발전해 나가는 원동력은 정신, 이성, 관념 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성을 지닌 물질의 생산양식과 분배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역사관입니다. 우주와 역사의 근원을 물질이라고 보고 일체의 모든 정신현상이나 종교까지도 모두 물질의 작용에 의해서 생기거나 발전되어 온 것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헤겔에 대해서 공부한대로 그는 역사를 절대정신(절대이성)을 향한 무한한 자기 발전과 변형의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헤겔은 역사란 이성, 혹은 정신의 발전 과정이라고 보았던 사람인데 반하여 마르크스나 엥겔스는 인류의 역사란 원시 공산사회에서 출발하여 고대의 노예제도, 중세의 봉건제도, 근세의 자본주의 제도를 거쳐 변증법적으로 진행되어 오긴 했지만 그런 계급적 차별이나 빈부의 차이를 주도해 온 제도는 반드시 소멸되어 없어질 것이며 마침내는 ‘유물’(唯物)–‘오직 물질’의 생산과 분배가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역사유물론’(史的唯物論), ‘역사유물론’(歷史唯物論)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 唯物論)이라고도 부릅니다.

2)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와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 : 국가사회주의, 개량사회주의, 수정사회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등 여러가지 형태의 사회주의 이론들이 있지만 모든 사회주의들의 공통점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관리를 인정하지 않고 그 사회가 공동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관리 할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생산된 모든 재화(생산품)도 평등하게 분배하자는 정치-경제적 사상입니다. 일찍이 플라톤과 원시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시작하여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거쳐 19세기 영국 감리교 공동체에서 이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로버트 오웬(Robert Owen) 등 현대 사회주의 사상에는 이상적 사회를 그리는 인류의 오랜 꿈이 담겨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경제이론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와 비슷하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갖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라틴어 communis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함께하는’이라는 뜻입니다. ‘공산’(共産)은 ‘함께 소유하고 함께 생산하고 함께 관리하고 함께 나누어 갖는다’는 의미에서의 ‘공동체 전체의 것’이라는 경제적 의미를 지닌 개념입니다. 한편 정치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억압받아온 인민들을 해방시켜 그들이 공동체(국가)를 만들어 계급없는 사회를 건설하여 강제적으로라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갖게 되는 사회’를 만든다는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긴 역사를 지닌 공산사회에 대한 꿈과 이상을 프랑스 혁명 이후 가장 최근에 이론적으로 다듬어낸 사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이고(1848년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자본론’ 1권과 1885년 자본론 2권, 1894년 자본론 3권–2.3권은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출판) 이를 역사상 처음으로 실험해 본 것이 1917년 레닌의 지도 아래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이라 하겠습니다. 공산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채택했던 국가들은 첫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적 이데올로기로 정하고 둘째, 기본적 생산수단들은 국유화(공유제)하고 셋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공산당 일당독재를 해 왔습니다(물론 오늘날 북한 노동당과 같은 정치체제는 주체사상이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그들 나름의 다른 정치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3) 부르조아지(불어, 영어, 독일어 공히 Bourgeoisie) : ‘성’(城)을 뜻하는 프랑스어 ‘bourg’에서 온 말로 ‘성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돈 많고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성안에서 살고 가난하고 힘없는 농노들은 성 밖에서 산다는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조아지 개념을 ‘자본가’ ‘지주’ ‘상인’ 같은 ‘유산자 계급’이라고 보았습니다.

4) 프롤레타리아(영어와 독일어 공히 Proletariat) : 원래는 라틴어 proles에서 온 말인데 그 뜻은 ‘자식’ 혹은 ‘아들’입니다. 로마시대 가진 것이라고는 ‘새끼’ 밖에는 없고 토지도, 집도, 돈도 없이 오직 몸 밖에는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는 무산계급(無産階級)을 이른데서 온 말이 프롤레타리아입니다. 마르크스는 이 개념을 정치 경제학적 의미로 첫째는 무산계급(無産階級)이요, 둘째는 피지배계급(被支配階級)이라고 보았습니다. 공산주의에서는 부르조아지는 결코 제도나 설득으로는 스스로 그들이 가진 재산을 내놓지 않는다고 보고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하여 그들의 소유를 빼앗아 공동의 소유로 만드는 길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5)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 / Theorien uber den Mehrwert / Theory of surplus value and profit) : 마르크스는 모든 이윤은 노동이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들어서 팔 때는 원래의 재료비(오늘날은 상품에 대한 모든 광고비까지도 포함)와 시설에다 투자한 비용(토지, 공장, 기계설치 등)에다가 노동자의 인건비가 합쳐진 다음 거기에다 일정한 이윤을 덧붙여서 판매함으로 이윤을 창출하게 됩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제품의 총가격 = 재료비 + 시설비 + 노동비 + 이윤]이 됩니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재료비나 시설비는 불변의 원가인데 노동자의 인건비는 자본가가 얼마든지 덜 주거나 착취할 수 있는 가변성을 지닌 원가임으로 결국 이윤을 낼 수 있는 부분은 이 노동자의 노동력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재료비나 시설비는 누가 보아도 다 알 수 있는 불변가(不變價)이기에 결국 이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야는 가변성(可變性)을 지닌 임금에서 밖에는 올 데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가(기업주)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을 더 늘이도록 강제 하거나 노동 강도를 높여서 제품을 더 많이, 혹은 더 좋게 만들도록 억압하거나 기타 여러가지 방법으로 노동력을 착취해서 재화를 만들어 내어 팔기에 결국 모든 가치는 일종의 잉여가치이며 그 잉여가치는 바로 이 노동자의 노동이 만들어 낸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마르크스의 노동을 통한 잉여가치론이 지닌 모순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만 예를 들겠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제품이든지 모든 제품은 팔려야 이윤이 창출되지 팔리지 않으면 제 아무리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일을 한다고 해도 그 노동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잉여가치, 즉 이윤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수요가 이윤을 만든다는 것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생각과 그 생각이 만들어낸 이론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막 성장세를 높여가던 자본주의의 무한정한 이유추구와 그에 따른 최대의 부작용으로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의 현장에서 나온 이론입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마르크스는 틀렸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상과 이론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그 시대, 그 상황에서 나온 그 시대의 증언입니다. 마르크스는 당시 무산계급의 대변인이었지 오늘날 변화된 시대 속에서 노조운동의 지도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6) 헤게모니 : 이탈리아어 Egemonia culturale에서 온 말로 영어로는 Hegemony라고 쓰고 우리말로는 ‘문화 패권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한 집단이나 문화가 다른 집단과 그들의 문화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지배집단이 피지배집단에게 그들의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수용케 하여 그 사회를 통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 개념을 ‘자본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통제하는 수단’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경우 자본가들은 힘과 돈, 제도와 조직 등을 동원해서 마치 노동자들 자신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런 통제를 받아드리겠다고 동의한 것처럼 꾸며냅니다. 역사를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투쟁사로 이해했던 마르크스는 역사의 최종적 헤게모니는 공산주의사회로 돌아오게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7) 자본주의(資本主義, 독일어 Kapitalismus, 영어 Capitalism) : 자본주의란 기본적으로는모든 동산과 부동산등 일체의 재화(財貨)는 개인의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빼앗기거나 양도 할 수 없는 기본권이라는 입장입니다. 자본주의는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고 지원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일체의 생산 수단을 자본가와 기업가들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보장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제도화된 사회, 정치, 경제 체제를 말합니다. 사적 소유권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는 모든 재화의 매매, 양도, 소비, 이윤 처분 등을 개인이 결정하도록 하고 상품이나 노동의 가격, 투자, 분배 역시도 시장이 결정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됩니다. 고전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아담 스미스가 근대 자본주의 사상을 정립했습니다만 마르크스는 이런 자본주의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 비판가입니다. 이후 자본주의가 지닌 여러가지의 모순들은 각종 조세제도(租稅制度)나 – 예컨대 소득에서의 누진세나 재산세, 양도세, 상속세 같은 것들 – 혹은 각양각색의 사회적 기부운동이나 현대의 다양한 복지제도에 의해서 그 모순들을 극복해 나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여전히 개인적 탐욕을 경쟁과 경쟁을 통한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부추기고 있으며, 집단적으로는 오래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으로 부터 시작하여 팍스 로마나(pax Romana), 기독교 식민지 정복주의, 이슬람 과격주의,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의 순혈주의를 거쳐 오늘날도 여전히 America First나 Brexit나 백인 우월주의와 서구의 문화적 우월주의를 외쳐대면서 쉬임없이 갈등과 다툼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8) 볼셰비키혁명과 소련 공산주의의 종말 : 영어로 Bolsheviks로 표기되는 러시아어 ‘볼쉐비키’의 뜻은 단순히 ‘다수파’라는 의미입니다.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2차 전당대회에서 레닌이 이끌었던 ‘다수파’ 즉 볼쉐비키가 소수파인 멘쉐비키를 이기고 승리한 데서부터 이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볼쉐비키다’ ‘우리가 다수파다’ ‘우리가 승리했다’ 는 것이 이 개념의 본래 뜻입니다. 당시 소수파였던 멘쉐비키는 온건파였는데 비하여 다수파인 볼쉐비키는 무장혁명에 의한 정권 붕괴와 현행법을 무시하고 폭력에 의해서라도 혁명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중은 과격한 편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후 1917년 2월혁명과 10월혁명을 통하여 볼쉐비키들은 2월에는 러시아의 차르 전제정부를 무너트리고 10월에는 온건파 자유주의자들이 세웠던 임시정부도 무너트린 다음 마침내 소비에트 정권을 탄생시켰습니다.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깃치아래 마침내 공산주의 이론을 추구해온 볼쉐비키혁명(일명 러시아혁명, 혹은 10월혁명으로도 불리웁니다)이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듬해 볼쉐비키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으로 국명을 변경하고 당의 이름 또한 ‘러시아 공산당’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소련 내에 있는 모든 공화국들의 독립을 인정, 선언하고 ‘독립국가 연합’(CIS)의 수립을 선포함과 동시에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의 지도부는 모두 해제하고 러시아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을 대통령으로 승계토록하고 크렘린에서 소련의 국기를 내리고 그 옛날 러시아의 국기를 다시 올림으로 70여년 만에 공산주의 시대를 마감했습니다. 이렇듯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게 된 원인 중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상과 현실을 혼돈하고 꿈과 가능성을 뒤섞어 놓은 데 있다고 봅니다. ‘모든 사람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꿈이요, 모두가 바라는 소망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인간성이란, 인간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탐욕이란 인간과 제도가 극복해 내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이 점을 너무 나이브하게 보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지금도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이상가들이 싸워 온 것은 자본, 혹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간성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탐욕과의 전투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의 사상과 철학

1) 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 : 처음 마르크스는 플라톤이나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로터 어느 정도 사고의 단초를 제공 받았지만 그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은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였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우리 인문학교실 제18강에서 자세히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그의 대표작 ‘유토피아’(Utopia)에서 이상사회(理想社會)를 그렸습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이하로 일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자기가 선택합니다. 영구적 사유재산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집이나 부동산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10년에 한 번씩 제비를 뽑아 돌아가면서 삽니다(만약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투기로 재산을 증식하고 있는 한국같은 사회에서 10년에 한 번씩 제비뽑기로 돌려가면서 살게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러나 훗날 마르크스는 토마스 모어를 포함하여 불란서의 생시몽(Saint Simon, 1760-1825)이나 영국의 오웬(Robert Owen, 1771-1858; 영국감리교인으로써 처음으로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운동을 펼쳤습니다)도 인간의 평등한 소유를 주장했지만 그것은 감정에 근거한 것으로 보고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합리적으로 찾아내고 공산주의의 필연적 승리를 예측하는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다음 마르크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헤겔입니다. 헤겔 사후 베를린 대학을 중심한 독일 철학계는 헤겔 좌파(반헤겔파)와 우파(헤겔파)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헤겔이 던진 사상적 핵심 명제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말로 요약이 되는데 헤겔 우파를 지지하는 보수적 사람들은 이성에다 방점을 찍고 헤겔의 관념론을 계승해 나가려고 했고, 헤겔 좌파는 반대로 현실에다 촛점을 두면서 철학적 관념론과 종교적 신앙을 비판하고 유물론적 이론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이 때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의 급진적 사상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포이에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도 마르크스나 엥겔스 같은 혁명적 사상가들에게 크고 절대적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을 통하여 ‘신학은 곧 인간학’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신을 만들어냈다고 보았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천국의 사랑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정의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했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본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사상과 정의롭고 평등한 이상 사회 건설의 꿈은 바로 이와 같은 포이에르바흐의 혁명적 사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라고 하겠습니다.

2)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 : 한 마디로 지배계급이 독점하고 있는 생산체제를 인민 모두의 공동 소유가 되게 하여 착취 없는 사회를 이루어 내고 생산체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익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하자는 사상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이를 요약한 명제가 바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사회’라는 말이 됩니다. 마르크스는 플라톤과 초대 기독교와 토마스 모어가 꿈꾸었던 이상적 공산사회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법칙에 따라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종말이 올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그가 주장한 역사 발전의 다섯 단계는 1.초기 원시 공동체 → 2.고대 노예제도 체제 → 3.중세 봉건제도 → 4.근대 자본주의 시대를 거쳐 이제는 마지막 단계인 → 5.공산주의 사회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역사발전의 5단계 이론은 정반합(正反合), 正反合, 正反合의 여러 과정들을 거쳐 지금은 4번째 단계인 근대 자본주의까지 왔지만 머지않아 유물론적 변증법은 이것을 뛰어넘어 필연적으로 5번째 단계인 공산주의에 이르게 되어 그 앞의 모든 것들은 다 해체되고 말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밖에서 무너뜨림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닌 모순 때문에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보았습니다.

자본주의가 지닌 가장 결정적 결함을 그는 ‘잉여가치설’(Theories of Surplus Value)로 설명합니다. 잉여가치(Mehrwert, Surplus value)란 무엇입니까? 앞에서 한번 말씀드렸지만 다시한번 더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자동차 공장이 있습니다. 자동차는 어떻게 만들어 집니까? 자본이라는 원자재(예컨대 엔진, 기계, 전자 부품, 플라스틱, 철제, 유리, 페인트, 고무 타이어, 등등 우리가 아는 수 백가지도 더 되는 원자재들과 거기에 공장이라는 시설과 각종 판매 회사들과 광고 회사들을 모두 묶어서 자동차를 만드는 원자재라고 칩시다. 다른 말로하면 자본가는 돈을 댑니다), 그리고 자본에다가 현장에서 자동차를 조립하고 만들어내는 노동이라는 생산수단이 더해집니다. 다른 말로하면 원자재 + 노동이라는 2가지가 합쳐져서 결국은 자동차라는 제품(재화)이 만들어집니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생산을 위한 자본을 댔고 노동자는 기술과 노동을 댔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동차를 만불에 판다고 칩시다. 당연히 그 자동차의 판매 가격은 모든 원가(자본의 총계) +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인건비 + 마진(margin)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잉여가치란 바로 이 장사해서 남는 돈입니다. 마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본가는 당연히 마진을 높이려고 듭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그가 투자한 자본의 총액은 얼마이고 노동자들에게 지불한 임금은 얼마나 되고 잉여가치는 얼마나 되는지 거의 다 노출 되었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증대 시키는 가장 쉽고 흔한 방식(즉 돈을 많이 버는 길)은 잉여노등을 통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자본가는 이윤의 증대를 위하여 노동시간을 연장 시키고 노동의 강도를 높이고 임금을 가능한 한 적게 주거나 깎음으로 잉여노동을 착취하려 들게 됩니다. 그가 말한 ‘잉여노동이 이윤의 원천’이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자본가(사용주)는 어떻게든지 노동자들에게는 일은 많이 시키고 월급은 적게 주어야지 회사(자본가)에게는 잉여가치가 증대된다는 이론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드라큘라 처럼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여 이윤을 증대 시키고 더 나아가 이를 제도와 법률로 공고화하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부르짖으며 이런 사악한 제도는 역사적으로, 필연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만국(萬國)의 노동자(勞動者)여! 단결(團結)하라!’(Workers of the world, unite!)는 공산당 선언은 바로 이런 철학에 근거한 선언이요, 외침이었습니다.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한 그는 산업혁명 이후 18, 19세기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당시의 사회악과 비극을 보면서 오직 이를 극복해 내는 길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단결하고 뭉쳐서 싸우는 길 밖에 없음을 절감했던 것입니다(물론 오늘날 우리는 노동조합의 힘이 신장되어 노동 3권 만이 아니라 노조의 경영 참여권까지 확대되어가는 상황에서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미리 내다보지 못한 마르크스의 한계를 압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의 근본문제와 줄기차게 싸워나간 도전과 혜안으로 인하여 오늘날 자본주의의 모순들은 조금씩이나마 줄어들었고 역사는 조금 씩이라도 발전된다고 봅니다).

3) 마르크스의 사상과 철학의 중심 3가지 기본 사상 : (1)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다. 역사의 중심은 신(神)이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것이 마르크스 사상과 철학의 핵심입니다. 그는 인간 중심의 인간관, 사회관, 국가관, 역사관을 부르짖었습니다. ‘돈이 중심이 아니다.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본이 핵심일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착취하고 소외시키고 비인간화하는 구조이고 따라서 악의 근원이다’라고 보았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토지, 공장, 은행 같은 생산수단들은 거의 다 부르조아지가 독점하고 노동을 통한 생산에는 거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고 그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주지 않음으로 부를 축적한다고 보았습니다. 자본주의라는 경제구조는 결국 몇몇 부르조아지들의 도구가 되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자본주들과 부르조아지들을 미워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다만 힘없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과 프롤렐타리아를 사랑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는 어떤 특정계층을 증오하고 미워한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을 애정과 사랑으로 보듬어 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Humanist라고 불리웁니다. 그를 극찬하는 사람들 중에는 마르크스를 가리켜 예수 다음으로 역사상 소외계층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하층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역사에 영향을 키친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대립되는 계층 사이에서 한 쪽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 편을 사랑할 수 있는 그 힘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요?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사랑하는 인애사상(仁愛思想)은 그의 인간주의, 휴머니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 둘째로 마르크스는 냉철한 눈으로 현실을 직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현실’을 ‘진리’와 동일시했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과 ‘여기’를 결코 지나치거나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 중요했습니다. ‘똑똑히 보아라. 세상은 머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의해서 움직인다. 역사는 생각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을 움직임으로 창조된다’는 현실주의(現實主義)가 마르크스의 사상과 철학을 낳은 기조입니다.

(3) 마지막으로 그는 물질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그는 이상을 좇아가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물질주의자(物質主義者)였습니다. 그의 유물사관은 여기에서 이론화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떠받드는 하부구조(下部構造)인 물질이, 즉 노동, 돈, 쌀, 빵, 옷, 집이 정치, 사회, 학문, 과학, 문화, 예술, 스포츠, 교육, 종교 등등 모든 상부구조(上部構造)를 만드는 기초라고 믿었습니다. 인간, 그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을 받쳐주는 물질, 이 3가지 개념이 마르크스의 사상과 철학을 형성하는 key words입니다.

나가는 말

마르크스의 사상과 철학 공부를 마무리하면서 그를 다시 정의(定議)해 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마르크스는 자기 이전의 모든 철학 사상들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고 해석만 해왔을 뿐이지 진정으로 (주체적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그 현실을 사랑하지는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르크스는 역사에 대한 구경꾼이나 해석자나 설명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태로 바꾸어 보려고 몸부림을 쳤던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는 지성’ ‘행동하는 철학자’였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철학은 세상을 바꾸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 철학(哲學)의 임무(任務)에 대한 그의 새로운 정의(定議)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공산당 선언’이나 ‘자본론’은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행동할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후기(後記) 및 헌사(獻辭)

부족한 저는 이번 4월에 쓴 23번째 ‘시드니인문학교실’ 강좌를 이 4월에 하느님 나라로 가신 故 태환 최성원 장로님께 드립니다. 그 어른은 평생 ‘더불어 함께 사는 삶’(Living Together)을 몸으로 실천하시다가 지난 2016년 4월 제 3의 이민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 남쪽과 북녘에서 따로 살고 있는 우리 동족이 더불어 함께 사는 삶(공생, 共生)을 살게 하기 위하여 모진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염소 1만 마리 보내기 운동’ 등을 온 몸으로 이끌어오셨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나 공산주의를 추종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정신을 따라 이상적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사셨던 분입니다. 그 어른의 자녀들과 지인들은 그 분의 삶을 본받아 살리라고 다짐하면서 공생강좌(共生講座)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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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aring : 오늘 함께 나눌 이야기 – ‘당신이 피땀 흘려 노력해서 번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Yours is yours)하는 말과 ‘당신이 아무리 피땀 흘려서 번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것입니다’(Yours is not yours, but ours)하는 두개의 statements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지지하는 편입니까?(몇 년 전 저는 호주 Liberal Party의 당수가 의회 연설 중에 한 말을 기억합니다. ‘Dear Australians, please remember, Yours is Yours, not Others’)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