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그리움–자유와 평화 / Secrete amicos admone lauda palam / 10.26-안중근 의사 이야기 /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 종교개혁 기념일에 떠오르는 몇 가지 잡문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79) _ 2020년 10월 26일
그리움 – 자유와 평화
오늘은 2020년 10월 26일 입니다. 지난해 2019년 10월 25일 ‘그리스 – 터키 인문학 여행’ 때 쓴 여행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여기 그날의 일기를 잡기장으로 대신합니다.
2019. 10. 25 (금) Crete – 하늘도 바다도 온통 푸른 세상에서 하루를 행복하게 지냈다.
나는, 우리는, 여행을 통하여 그를 만나고, 그녀를 만나고, 또 그것을 만난다. 보는 것과 만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보는 것은 그가, 그녀가,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아니 그 무슨 반응을 보여도, 전혀 상관 없이 내가, 내 생각, 내 입장, 내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만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나도 그와, 그녀와 그것을 보지만, 그와, 그녀와 그것 역시 나를 보아야, 우린 ‘만나게 된다’ 나는, 우리는, 그 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인생이라는 이 여행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를 만나야하고, 만나려고 노력해야한다. 만남이란 meeting이 인가? 아니다! meeting이란 단순한 ‘접촉’ touch 일 뿐이다. 진정한 만남이란 encountering이다. 부딪침이다. 나와 그가, 나와 그녀가, 나와 그것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부딪칠 때, 생각과 사상과 인생이 부딪쳐, 교감하고, 마찰과 파열음을 낼 때, 우리는 ‘만나게 된다’ 우리는 어제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선생님, 플라톤 선생님,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을 비롯하여 디오게네스와 에피큐러스를 만났다. 아테네의 거리와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와 아레오파고에서, 그리고 숲과 거리와 언덕과 골짜기를 걸으면서, 살아있는 그들의 소리를 듣고, 나 또한 할 말을 건네면서, 하루를 행복하게 지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또 한사람을 만났다. 니코스 카잔자키스! 베네치아 성채 높은 언덕을 찿아간 것은 이른 아침이다. 6시에 Anek에서 내린 우리는 멋지고 근사한 아침식사를 한 후, 제일 먼저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누워있는 언덕을 올랐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의 묘비에 쓰여 있는 Greek을 읽으면서, 많이 부끄러웠다. 진리를 향해,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찾아 한 평생을 달려온 한 선배 지식인을 만났다.
“오늘을 사는 내가 아는 것은,
누군가가 살아온 과거를 보고,
내가 살아가는 오늘을 살며,
또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하여
걸어가는 바로 이 하루다.
나는 오늘 그 자리에 서있다” – 시드니 인문학회원 김용강
“What is Life ?
Life is the Peace.
Peace means Carpe diem” – James Kang from Sydney
“묘사하면 그림이 되고
갈망하면 그리움이 된다.
종이에 그리면 그림이 되고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이다” – 이성열. 최부옥
니코스 카잔자키스를 찾아온 우리 인문학 친구들 중 몇 분이 아침을 먹은 호텔의 방명록에 남겨놓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더 이상 첨부할 말이 없었다. 그것이 내 글이었기 때문이다. 우린 오늘 모두 죽은 니코스 카잔자키스를 살아있는 모습으로 만난 후 언덕을 내려왔다. 사실 이젠 그냥 집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다.
오전과 오후, 우리는 미노아 문명의 발상지였던 크노소스 궁전터와 고고학 박물관을 방문했다. 과도 있고 지나친 점도 있지만, Arthur Evans경을 생각하면서 역사란 무엇인가? 문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온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탐욕? 투쟁? 죽고 죽이는 것? 파괴? 정복? 생존? 경쟁? 희생? 포기? 희망?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을 아울러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유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말이 맞다! 자유다! ” 인류의 역사는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다” 헤겔의 외침이 다시 귀전을 울린다. 물질로 부터의 자유! 욕망으로 부터의 자유! 당신으로 부터의 자유! 그리고 마침내는 모든 신들로 부터의 자유를 통하여 나 자신으로 부터 자유하는 것! 그것이다! 바로 이 자유를 향한 작은 몸부림들이 큰 문명과 더 큰역사와 더더욱 큰 종교와 사상을 만들기도 하고, 극복하기도 하면서 변증법적 전환을 거듭해 왔다.
10월 26일, 토요일 새벽 3시다. 배의 객실에서 일어나 씻고, 짐을 챙기고, 생각을 가다듬고, 오늘 생일을 마지하는 아들 현철이와 현명이와 밀리를 생각하며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어제를 유추하며 일기를 쓴다. 난생 처음 찾아온 크레타섬, 카잔자키스의 무덤과 묘비, 크노소스궁존터, 고고학의 의미, 성서고고학이 해야 할 일들,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의 현주소, 디도기념 교회, 그리고 좋은 인문학 친구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또 하루를 시작한다.
평화, 평강, Peace를 기도하면서 새로운 날의 아침을 기다린다. 좋은 친구, 강성형 선생이 크레타에다 써놓은 Peace는 무엇일까? 그는 Life에다는 아무런 관사를 붙이지 않으면서도 Peace 에다는 정관사 The를 붙였다. Life is The Peace! 강선생은 무슨 평화를 그리워할까?
“인생은 바로 그 평화” 라고 생각하는, “그 평화”가 마음과 육체, 정신과 종교, 정치와 경제, 너와 나,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평화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온누리에 평화가 임하기를 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53) _ 10월 27일
Secrete amicos admone lauda palam.
(세크레테 아미코스 아드모네 라우다 팔람)
secrete, 원형 secreto, 드러나지 않게 하라, 비밀리에 하라, 몰래, 따로 하라, 영어 secretly
amicos, 원형 amicus, 친구, 벗, 사랑하는 사람
admone, 원형 admoneo, 충고하다, 권고하다, 경고하다, 훈계하다
lauda, 원형 laudatio, 칭찬하다, 칭송, 예찬, 찬양하다
palam, 공공연히, 숨김없이, 드러나게, 면전에서
Secrete amicos admone lauda palam.
(세크레테 아미코스 아드모네 라우다 팔람)
사랑하는 사람은 몰래 꾸짖고 공개적으로 칭찬하라.
친구의 허물은 조용히 일러주고 그의 자랑거리는 크게 말해주라
Give advice in secret and praise in public.
이 명언도 앞서 살펴본 “Saxum volutum non obducitur musco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을 한 푸빌릴리우스 시루스 (Pubilius Syrus)의 명언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가능하면 모든 사람에 대하여, 허물이나 실수는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일러주거나 지적해 주고, 칭찬할 일이나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은 좀 공개적이며 넓게 알리는 태도가 인생살이와 인간관계에서 현명하고 아름다운 태도가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하여 퍽 많은 사람들이 이를 께꾸로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칭찬할 일은 조용히 사적으로 하고, 부끄러워할 일은 동네방네 떠들어 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칭찬이나 비판에 대해서는 오늘의 명언, Secrete amicos admone lauda palam – 꾸짖을 때는 조용히 하고 칭찬할 때는 좀 더 크게 하라 – 이외에도 비슷한 가르침들이 많이 있습니다.
칭찬은 감성적, 격정적으로 하되, 비판은 이성적, 합리적으로 하라.
칭찬은 자주하고, 많이 한다고 해서 별로 손해를 보진 않지만, 비판은 잘해야 겨우 본전이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비판이나 충고는 늘 비난으로 들릴 수 있음을 명심하라.
칭찬과 아부는 다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둘의 차이를 잘 분간하지 못한다.
비판과 비난도 다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역시도 구분하지 못한다.
칭찬한다고 하면서 아부하거나, 비판한다고 하면서 비난하는 경우가 참 흔하다.
칭찬은 오직 한명의 친구를 얻을 뿐, 수많은 적군을 만들기도 한다는 잊지 말아라.
칭찬과 충고도 적당히 균형을 잡아야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첨자가 되거나 매사를 비난만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칭찬과 비판도 순서를 잘 잡아서 하는 것이 지혜롭다. 먼저 장점부터 이야기한 후에 단점을 말해주는 것이 지혜롭다. 먼저 단점부터 이야기한 후에 장점을 말해주는 것은 어리석은 화법이다.
모든 비판은 한번으로 끝내야한다. 두 번하면 잔소리가 되고, 거듭하면 욕이 되기 때문이다.
칭찬은 두루뭉술하게 해도 괜찮지만, 비판은 구체적이고 자세해야 한다.
자, 다시 오늘의 라틴어로 돌아갑니다.
Secrete amicos admone lauda palam.
(세크레테 아미코스 아드모네 라우다 팔람)
사랑하는 사람의 허물은 조용히, 창찬은 공개적으로 !
Give advice in secret and praise in public.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좋은 하루되시길 바라며…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80) _ 10월 28일
10.26 – 안중근 의사 이야기
근대 우리네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10.26은 퍽 의미 깊은 날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그날은 저 개인적으로는 한 가지 더 의미가 더해지는 날이기도 하구요.
저는 아직도 스마트 폰이 그리 익숙하지 못하여 꼭 수첩, 다이어리를 사용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수첩에는 당연히 그 나라의 공휴일이나 기념일, 방학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종교적 축일들이 프린트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보통 새해 다이어리북을 사게 되면 거기에 우리 식구들이나 가까운 친척들의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기억하고픈 날들을 써놓곤 합니다. 엊그제 10월 26일자 제 수첩 제일 윗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1909.10.26.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날.
1972.10.26. 우리 첫 아들 현철이가 태어난 날.
1979.10.26.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
10월 26일.
거짓된 동양 평화를 물리치고 진정한 평화를 선포한 안중근의사 의거의 날,
나와 우리 가정에 주신 사랑의 선물이 태어난 날,
유신체제에 저항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된 경험이 있던 나에게는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날, – 10.26은 참 여러가지 깊은 의미를 함께하는 날입니다.
이틀이 지났지만 오늘 아침 저는 그 중에서 안중근 의사를 다시 떠올리며 그의 ‘동양평화론’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 인문학친구들에게 있어서 ‘평화’는 우리들의 중심 화두중 앞자리를 차지하는 개념이며, 우리 거개의 간절한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아침, 만주 하얼빈역에서 당시 초대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숨지게 함으로, 항일 독립운동의 첫 불길을 당긴 애국자요, 순국열사이며, 또한 동시대 위대한 정치사상가 이기도 합니다. 저는 안의사의 이토 저격을 흔히 일본에서 사용하는 정치용어인 ‘암살’이라는 개념으로 쓰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안의사는 이토 저격 당시 ‘대한의병군’ 참모 중장인 현역 군인으로써 작전계획에 따라 적군을 사살한 전투행위를 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안의사는 이토 저격 사살 후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3번 외친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된 다음, 이듬해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아침 10시 향연 32세로 처형되었습니다.
거사 이후 사형집행 까지 만 5개월 동안 그분이 감옥에서 쓴 글과 유묵들과 재판기록들은 퍽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칸트의 ‘영구평화론’ (Zum ewigen Frei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을 비롯하여 평화에 대한 논의를 끊임없이 이어갑니다만, 이젠 안중근 의사의 미완성 유고인 ‘동양평화론’에 대하여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안 의사는 당시 옥중에서 집필중이던 그의 ‘동양평화론’을 끝내기 위해서 사형집행을 한 달만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제는 이를 받아드리지 않고 그를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안의사는 일찌기 토마스 (Thomas)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이토 저격후 조선교구는 그의 신자 자격을 박탈하고, 사형을 앞에두고 요청했던 종부성사도 거절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훗날 좀 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만 일제 치하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와 성공회가 얼마나, 어떻게 친일적 행위를 해왔나 하는 데 대해서는 오늘의 친일청산문제와 더불어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의 성격을 ‘동양의 평화를 위한 전쟁’ 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된 주권국가로써, 서로의 국민, 영토, 주권을 인정하고 존중해야하며, 이에 바탕하여 서로 단결하고 상부상조하여 서구열강의 식민지 확장을 막아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첫째, 하얼빈 의거는 ‘동양의 평화 건설을 위한 전쟁’이다.
둘째, 한,중,일 동양 3국은, 서로 독립된 주권국가로써 존중되어야하고 서로 침략, 수탈, 전쟁을 해서는 않된다.
셋째, 동양제국을 점령하여 식민지화 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을 막아내기 위해서 한.중.일 3국은 하나로 뭉쳐 단결해야하고 상부상조해야한다.
넷째,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 식민주의를 반대하는듯 하면서 실제로는 그들 제국주의를 그대로 따라하는 위선적이며 거짓된 자요,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위장된 거짓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일체의 침략과 전쟁을 거부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서구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반대하고 비난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 역시 식민지를 확장하려는 제국주의 국가, 즉 ‘일제’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백 여년 전 안중근 의사가 주창했던 평화론을 좀더 국제적 논제로 확대, 발전 시켜, 군사적 침략만이 아니라, 경제적 횡포 까지도 거부하는 참된 평화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안중근 의사가 남긴 글과 유묵 중에서 추린 10개를 추수린 것입니다.
1)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2) 나는 늘 나라의 안위를 위해 걱정하며 애를 태운다. (국가안위 노심초사)
3) 가난하되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아야한다. (빈이무첨 부이무교)
4) 장부는 죽을지라도 그 마음이 무쇠와 같아야하고, 의사는 위태로운 일을 당할지라도 그 기운이 구름과 같도다. (장부수사심여철 의사임위기사운)
5) 남루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와는 더불어 생각과 뜻을 나눌 수 없다. (차오의오식자 부족여식)
6) 눈보라가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알수있다. (세한연후 지송백지부조)
7) 백번 참는 집안에는 태평과 화목이 찾아온다. (백인당중유태화)
8)하루라도 글을 읽지 아니하면 입안에는 가시가 돋는 법이다. (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
9) 황금 백만냥이 있어도 자식 하나 잘 가르침만 못하다. (황금백만량 불여일교자)
10) 사람이 멀리 보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기는 어려운 법이다. (인무원여 난성대업)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오늘도 좋은 하루되시길 바라며…
라틴어 인문학 (54) _ 10월 29일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엨클레시아 레포르마타 셈페르 레포르만다 에스트)
ecclesia, 교회, 영어 church
reformata, 개혁된, 달라진, 새로와진, reformed,
reformanda, 현재진행형으로 reforming
semper, 항상, 언제나, always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개혁된 교회 (개혁교회, 개신교회)는 늘, 항상, 계속해서 개혁해 나가야한다.
오는 10월 31일은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95개로 된 논제(Thesis)를 붙임으로 종교개혁 (교회개혁)의 불길을 당긴 기념일입니다. 오늘의 라틴어,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자주 사용해온 문장이지만 종교개혁운동이 확산되면서 깔뱅 (Jean Calvin)에 의하여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사실 중세에서 근대 르네상스 이후 새롭게 개혁된 교회는 그후 계속해서 스스로를 개혁해 나가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말은 잘 지켜질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교리적 개혁이었을 뿐,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개혁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교리적 개혁인 Sola Gratia, Sola Fide, Sola Scriptura –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성서 – 는 Sola Regnum, Sola Mammona, Sola Honoris – 오직 권력, 오직 물질, 오직 명예 – 로 바꿔졌다는 비아냥 소리를 들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개혁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한다.
여기에서 이 말은 ‘교회는 결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교회는 현실에 안주하여 현상유지를 꾀하는 순간 부터 부패해 집니다.
‘너 자신을 알라’ Know yourself!
모든 역사는 반드시 정, 반, 합을 통하여 지양할 것은 지양하고, 변화될 것은 변화되면서,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한번 ‘개혁했다고’ 해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그 자리에 둥지를 틀고 머물거리게 되면 반드시 썩게 됩니다. 교회를 비롯한 종교는 물론, 정치, 경제, 사상, 문화, 예술, 다 마찬가지입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누구 말대로 자식과 마누라만 빼고는 다 바꾸겠다는 다짐이 없이는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고인 물은 썩고 흐르지 않는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한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늘 새로워지시는 좋은 하루되시길 바라며…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81) _ 10월 30일
종교개혁 기념일에 떠오르는 몇 가지 잡문들
내일 10월 31일은 개신교에서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는 당시 비텐베르크성교회 (Wittenberg Castle Church) 정문에 95개조의 논박문을 게시하여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 (Disputation on the Power of Indulgences)을 제안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부, 한 수도원의 수도사, 한 작은 대학의 교수가 ‘면죄부’ (Indulgence)에 대한 문제 제기로 부터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16세기 종교개혁은 불길이 당겨졌습니다. 20여년 전 방문했던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Lutherstadt Wittenberg)는 수년전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내면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고 합니다만 저는 그 때 비텐베르크성교회 정문에 지금은 동판으로 새겨져 있는 라틴어 95개조가 눈에 선하게 남아있습니다.
역사는 흘러 503년이 되었습니다. 3년 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하면서 떠들석하게 여러가지 행사를 많이 하더니 그 후엔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오늘 잡기장은 지난날 몇 개의 잡기장노트에 써놓았던 조각글들 중에서 교회갱신에 대한 글들을 다시 한번 들춰 보면서 저 자신과 오늘의 교회를 반성해 보려고 합니다.
1)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반성과 성찰이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살피고 새롭게 해 나가는 것이다.
2) 오늘날 가장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은 교회다. 교회는 가장 철저한 무신론 집단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입으로만 믿을 뿐, 실제로는 돈을 숭배하는 모임이다. (John Cobb의 ‘영적파산’에서)
3) 교회가 존경을 회복하는 길은 간단하다. 하나님을 믿으면 된다. 교회는 어서 권력이나 금력이 없어져서 가난하게 되면 비로소 세상으로 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팀 켈러목사, 뉴욕 맨하탄 건물 없는 교회 담임목사)
4) 그 동안 교회는 마치 자기들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양 말해왔다. 그러나 우주의 신비는 과학이 더 잘 알고, 인간의 심성은 심리학이 더 잘 알고, 정치와 경제는 사회과학이 더 잘 알고, 문화와 예술은 미학이 더 잘 안다. 그러니 기독교는 겸손해야한다. ‘우리는 우주와 인간과 역사에 대해서 정말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줄 알아야한다. ‘과학이 발견해낸 최대의 공적은 우리 과학은 인간과 우주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오늘날 교회도 바로 여기에서 다시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겸손이 정답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에서)
5) 행복한 크리스챤이란 없다. 없어야 맞다.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6) 1948년 8월 15일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인도는 자기들 땅을 떠나 철수하는 영국군대와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만 남겨두고 교회는 가지고 가시오’ 간디가 한 말이다.
7) 고 김수환 추기경의 별명은 ‘바보 김수환’이었다. 그는 평소 늘 이렇게 말했다. ‘나 같은 인간도 하느님 나라에 갈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런데 우리 주변엔 천당 못갈 것 같은 교인들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다들 천국은 따놓은 당산들 처럼 말한다. ‘예수만 믿으면 아무렇게 살아도 천당은 가게 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어디 김추기경은 그런 교리를 몰라서 그렇게 말했을까요?
8)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일까?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일까?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일까?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일까? 다 아니다! 인생관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삶의 목표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9) 교만한 자는 반드시 망한다. 중세의 교만한 교회는 무너졌고, 근세의 교만한 이성도 무너졌고, 계몽주의의 교만한 인간도 무너졌다. 이 시대를 주름잡는 교만한 과학과 자본도 곧 무너질 것이다. 교만한 자들은 하느님이 무너트리시거나, 그리아니 하셔도 스스로 자빠지게 되어있다. 그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
10) 지난날 우파는 종교를 오도했고, 좌파는 종교를 폐기했다.
11) 종교는 지난날 죄를 많이 지었고 역사에 비극과 불행을 초래하는데 크게 앞장서 왔다. 기독교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그것은 교회의 잘못이지 예수의 잘못은 아니니까 겁내지 말고 인정해야 한다.
12) 오늘날 기독교는 여자들의 노출된 가슴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떨면서 이 극심한 빈부의 격차와 양극화에 대해서는 무덤덤하다. 낙태문제에 대해서는 한탄하면서도 미국의 세계지배와 제 3세계의 아픔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13) 몇년전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자료다. 한국 개신교 목회자수 – 14만 483명, 불교 성직자수 – 4만 6905명, 천주교 성직자수 – 1만 5918명, 대한 경신연합회 (무당연합회)와 한국역술인협회 회원수 – 약 30만.
14) 오늘날 사탄은 별로 할일이 없게 되었다. 과거 사탄이 하던 일들은 거의 교회가 대신해 주고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 여기 너무 오래 계시지마시고 어서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자들이 교회엔 많이 있다. 예수와 함께 살기엔 불편한 자들이 성직자가 되어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15) 오늘날 기독교는 겨우 출애굽을 시켜놓았더니 다시 제 발로 이집트의 끓고 있는 고기 가마 곁으로 돌아가 버렸다.
16) 나는 그리스도교를 떠나게 된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를 드린다.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 어느 노신학자의 고백, 한도명 저, 신학비평사, 2010)
17) 한국의 보수적 근본주의 대형교회들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으로 위장한 자본을 기초로 하고있다. 이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맘몬을 섬기고 있다. 기독교의 진짜 문제는 탐욕과 이기심과 특권의식이다.
18) 기독교가 교리화 되고, 말을 많이 하고, 설명과 변명을 길게 늘어놓는 것은 전혀 기독교다운 태도가 아니다. 기독교는 애초부터 말을 많이하는 조직이 아니라 말없이, 묵묵히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였는데 아무래도 말을 많이 하는 걸 보니 참 수상하다.
19) 신학자들은 신을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신은 누구인가?’ 잘 설명하기가 쉽질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신이 아닌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돈은 신이 아니다’ ‘권력은 신이 아니다’ ‘명예는 신이 아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20) 시장과 종교에는 공통점이 많다. ‘시장에 맡겨야한다’ ‘시장은 틀리지 않는다’ 이런 말은 ‘교회에 맡기십시오’ ‘교회는 절대 잘못이 없습니다’ 하는 말과 흡사하다. 시장무오설은 교황무오설과 비슷하다. (하비 콕스 저, ‘신이 된 시장’에서)
21) 이젠 ‘루터를 넘어서서’ – Beyond Luther – 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 사실 16세기의 가톨릭교회는 많이 변했다. 그들은 더 이상 면죄부를 팔거나 성직을 매매하지 않는다. 그들은 치열하게 반성했고 거듭났다. 오히려 지금은 개혁교회가 그 옛날의 가톨릭교회처럼 되었다. 헌금이란 이름의 돈으로 천국 입장권을 예매하고, 돈을 써서 총회장이나 감독이 된다. 자본주의적 기업형 교회운영, 탈세, 세습, 부도덕은 끝이 없다. 루터를 넘어서야 희망이 보인다.
22) 예전엔 교회가 그리스로 넘어가더니 교리와 이론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와 조직이 되었고, 근세엔 유럽으로 퍼져가더니 문화와 전통으로 자리 잡더니, 미국으로 가서는 자본과 기업이 되었는데, 이즈음 한국으로 건너와서는 거대한 재벌이 되어 버렸다.
23)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구원받고’ ‘그들이 구원 받는 것’이다.
24) 정말 정신차리고 똑똑히 알았으면 좋겠다. 종교는 그들의 제의의식들, 기도, 예배, 찬송, 설교, 주술을 통해서 오늘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핵문제, 생태계문제, AI나 과학 기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옛날엔 그런 종교적 제의를 통하여 비도 내리게 하고, 농사도 풍년이 되게 하고, 적도 막아내고, 병도 고쳤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기도로 탄소배출을 제한하거나 환경보호를 이뤄내는 시대가 아니다. (이하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중에서)
25)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와 똑같은 유대인과 우리와 같은 믿음을 지닌 기독교인들로 해석했지, 단 한 번도 무슬림이나 불교인이나 무신론자들도 사랑해야할 이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발 하라리)
26) 종교는 제일 뻔뻔한 집단이다. 정치인들 보다 훨씬 더 뻔뻔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자기들은 거장 이기적이고 교만하면서도 말로는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겸손하라고 설교한다.(유발 하라리)
27) 종교는 축구와 비슷하다. 교회도 축구클럽과 흡사하다. 22명이 공 하나를 좇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은 웃기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는 팀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결속성이 있다. 종교는 웃기는 것이 아니다.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과 결속성이 모여있다. (유발 하라리)
28) 간디는 말했다. ‘종교의 진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수를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고 하느님 처럼 대해야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29)기독교 2천년 역사중 기독교가 범한 최대의 실수는 ‘의심이나 회의를 죄’라고 규정하고 가르친 것이다. 생각해보라! 의심이나 회의는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의심이나 회의는 공부나 연구의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거룩함과 영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피할수 없는 과정이다.
30) 아모스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분명히 말했다. 신앙보다 도덕을 더 강조했다. ‘하느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바르게 사는 것을 원하신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말씀을 뒤집어놓았다. 신앙심이 도덕성 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가르쳤다. 종교의 타락은 하느님의 말씀을 비틀기 시작한 데서 부터 비롯되었다.
종교개혁 기념일을 앞에 둔 이야기들입니다. 지나치게 들리는 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에 좋은 양약은 먹기엔 좀 쓴 법이려니 생각하며 천천히 다시 읽으며 생각하면 참 고맙겠습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좋은 주말되시길 바랍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