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첫 모임에 홍길복 목사 “포스트모던이즘 이야기” 주제로 강연 [강의전문포함] – 스트라스필드에서 제2시드니인문학교실 시작해 / 다음모임은 5월 19일 곽승룡 신부 “성서에서 보는 인간관” 주제로

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첫 모임에 홍길복 목사 “포스트모던이즘 이야기” 주제로 강연 […]

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첫 모임에 홍길복 목사 포스트모던이즘 이야기주제로 강연 [강의전문포함]

스트라스필드에서 제2시드니인문학교실 시작해

다음모임은 519일 곽승룡 신부 성서에서 보는 인간관주제로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은 2022년 5월 첫모임을 지난 5월 5일(목) 오후 7시, 온라인과 함께 LKS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에서 대면모임을 병행해 가졌다.

5월 5일 강사로 선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는 ‘겉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포스트모던이즘 – Postmodernism – 이야기)’를 주제로 강연하며 서두에 “오늘의 화두인 <포스트모던이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이란 우리 개개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지지하든 반대하든, 우리의 호불호 (好不好)나, 우리의 찬반 (贊反)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우리 앞에 맞닥뜨려진 현실이라는 점입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은 이미 피해 갈 수 없는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논의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와 우리 인문학 친구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은 사실 기껏해야 모던이즘의 영역에 속했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먼 중세기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들 딸들, 사위 며느리들, 손주와 증손주들은 이미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좀처럼 말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말이 않통한다는 것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세대와는 기껏해야 가정경제나 건강을 포함하는 일상적 생활 이야기나 나눌 뿐이지 우리가 인문학교실에서 나누는 이런 심도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지는 못하고 삽니다. 우리는 젊은 세대들과 더불어 허심탄회하게 진리와 사실, 신앙과 이성, 합리와 비합리, 역사와 현실, 아프리카의 빈곤과 선진국가의 책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언제 작정하고, 마음 먹고, 날 잡아서 이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말이 잘 통할까요?)

미국에서 한 아버지와 아들이 거리에 나갔다가 초등학교 6학년 다니는 아들이 너무 큰 소리로 떠들기에 아버지가 주의를 주면서 말했답니다. ‘애야, 공공 장소에서는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면 않돼!’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는 지금 제가 나이가 어리다고해서 개인의 지유, 그것도 특히 중요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려는 것입니까?’ MZ 세대가 대들지 않아서 그렇지 포스트모던이즘은 이미 우리네 기성세대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우리 앞에서 무섭게 퍼져가고 있습니다.”라며 ‘포스트모던이즘 (Postmodernism) – 그 문자적 의미’, ‘역사의 지각생 – 포스트모던이즘을 이해하는 어려움’, ‘포스트모던이즘 – 이전과 그 이전의 이야기’, ‘포스트모던이즘에 이르기 까지’, ‘포스트모던이즘이 등장하게 된 직접적 계기 – 68운동’, ‘포스트모던이즘의 경향성’, ‘포스트모던이즘의 몇 가지 특징들’, ‘포스트모던이즘의 특색이 드러나는 몇 개의 분야들’, ‘포스트모던이즘의 특색이 들어나는 사례들’, ‘대표적 학자들’, ‘한국어로 된 추천도서들’ 등의 순으로 강연했다.

이어 Questions, Comments & Sharing 시간에는 “포스트모던이즘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노암 촘스키는 포스트모던이즘이 주장하는 것들은 오늘날 우리 인간과 사회에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아무런 실제적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도킨스 역시 포스트모던이즘은 과학의 엄밀성을 너무 과소 평가한다고 비판합니다. 사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엇이라고 이름이 붙여질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포스트-포스트모던이즘’이 나올 날도 있을 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글을 읽으신 후 어떤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등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배움에 감사하며 노래하는 강성형 회원

특별히 이날 강사로 선 홍길복 목사는 ‘시드니인문학교실’ 제 1기를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우리 교실에서 부족한 사람이 맡았던 서양철학사를 중심한 인문학교실은 오늘로써 제 1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2017년 이후 지난 5년 반 동안 제가 진행해온 부분은 사실 누구든지 조금만 미리 준비하시면 다 하실 수 있는 내용이었는데 실력도, 능력도 부족했던 제가 조금 앞에 나섰다고 해서 아는 척했거나 잘난 척한 것이 있었다면 널리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늙어가며 점점 아둔해지는 사람에게 그래도 글을 읽고, 써보며,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인문학 친구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날 우리가 이런 작은 모임이나마 함께 해 올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땅 시드니에 ‘이런 식으로나마 생각을 나누며 자신을 성찰하는 이들의 모임’이 필요하다고 여기어 함께 해 주신 여러분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이번 38회로 일단 한걸음 머물러 서서 숨을 고르려고 합니다. 희망 사항입니다만 앞으로 혹시 능력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도철학과 중국철학 그리고 한국철학을 비롯한 동양의 인문학에서 만나는 날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거듭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립니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한편 제2 시드니인문학교실이 지난 4월 27일 (수) 스트라스필드소재 Carrington Ave Uniting Church (13 Carrington Ave Strathfield)에서 첫 모임을 시작했다. 매달 2, 4주째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모임을 갖는다.

이날 제2시드니인문학교실 모임에 참석한 회원들은 이민생활가운데 공부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어 감사하다고 이구동성 말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우리 시대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그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을 초청합니다. 2월부터 5월까지, 8월부터 11월까지 1년 8달, 매달 첫째와 셋째 목요일 저녁 7시부터 함께 자리(1년에 모두 16번 모임)합니다”라고 취지를 밝히며 초청했다. 제2 인문학교실은 둘째와 넷째 수요일 오전 10시 모인다.

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모임은 5월 5일과 19일 (목) 후 7시 대면과 온라인을 병행해 열린다.

오는 5월 19일 모임은 곽승룡 주임신부 (시드니 대교구 한인 천주교회, 실버워터 성당)를 강사로 “성서에서 보는 인간관”을 주제로 열린다.

세부내용 아래 포스터 참조

제2 인문학교실은 5월에는 5월 11일과 25일 모인다.

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모임 안내

.일시: 2022년 5월 5일, 19일 (목) 오후 7~9시

5일: 강사 –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주제 – 겉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포스트모던이즘 – Postmodernism – 이야기)

19일: 강사 – 곽승룡 주임신부 (시드니 대교구 한인 천주교회, 실버워터 성당), 주제 – 성서에서 보는 인간관

.장소: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

(대면과 온라인 병행해 모임)

.문의: 아래와 같음

주경식 (0401 017 989, drjks709@hotmail.com)

임운규 (0425 050 013, woon153@daum.net)

– 제2 시드니인문학교실 수요 주간모임 안내

.매월 2, 4주째 수요일 오전 10시 15분

.일시: 5월 11일, 25일 (수) 오전 10:15 ~ 12시

.장소: Carrington Ave Uniting Church (13 Carrington Ave Strathfield)

시드니인문학교실 [5월 5일 강의 전문]

제 38강 : 겉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포스트모던이즘 – Postmodernism – 이야기)

전제 (前提)

오늘의 화두인 <포스트모던이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이란 우리 개개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지지하든 반대하든, 우리의 호불호 (好不好)나, 우리의 찬반 (贊反)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우리 앞에 맞닥뜨려진 현실이라는 점입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은 이미 피해 갈 수 없는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논의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와 우리 인문학 친구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은 사실 기껏해야 모던이즘의 영역에 속했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먼 중세기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들 딸들, 사위 며느리들, 손주와 증손주들은 이미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좀처럼 말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말이 않통한다는 것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세대와는 기껏해야 가정경제나 건강을 포함하는 일상적 생활 이야기나 나눌 뿐이지 우리가 인문학교실에서 나누는 이런 심도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지는 못하고 삽니다. 우리는 젊은 세대들과 더불어 허심탄회하게 진리와 사실, 신앙과 이성, 합리와 비합리, 역사와 현실, 아프리카의 빈곤과 선진국가의 책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언제 작정하고, 마음 먹고, 날 잡아서 이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말이 잘 통할까요?) 미국에서 한 아버지와 아들이 거리에 나갔다가 초등학교 6학년 다니는 아들이 너무 큰 소리로 떠들기에 아버지가 주의를 주면서 말했답니다. ‘애야, 공공 장소에서는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면 않돼!’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는 지금 제가 나이가 어리다고해서 개인의 지유, 그것도 특히 중요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려는 것입니까?’ MZ 세대가 대들지 않아서 그렇지 포스트모던이즘은 이미 우리네 기성세대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우리 앞에서 무섭게 퍼져가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 (Postmodernism) – 그 문자적 의미

Modernism이란 흔히 유럽에서 중세 시대를 넘어 르네상스가 시작된 15-16세기 부터 시작된 <근대주의> 사상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Postmodernism이란 이 Modernism 이라는 영어 단어 앞에 라틴어 post를 붙여서 만든 말입니다. 라틴어 post에는 3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after 입니다. 그러니 postmodernism이란 after- modernism, 즉 ‘근대 이후 (近代 以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는 anti 입니다. 따라서 postmodernism이란 anti-modernism, 즉 근대주의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반근대주의 (反近代主義)’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세 번째는 trans 입니다. 때문에 postmodernism이라는 개념 속에는 <근대주의>를 넘어서서, modernism을 극복하고 초월해 내려는 trans-modernism, ‘초근대주의 (超近代主義)’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우리들 대부분이 잘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많이 사용하는 라틴어 단어 중에는 am과 pm이 있습니다. m은 라틴어 meridiem, 즉 ‘정오’ ‘한낮’ 혹은 ‘남쪽’ 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의 첫 글자입니다. 그 meridiem, ‘정오’ 앞에다 앞, 전 (前)의 뜻을 지닌 ante의 머릿자인 a를 붙이면 am, 즉 ‘정오 이전’ ‘오전’이 됩니다. 밤 12시 부터 낮 11시 59분 까지를 이르게 되지요. 그리고 그 meridiem 앞에다 뒤, 후 (後), 다음의 뜻을 지닌 post의 머릿 글자인 p를 붙여서 pm이라고 쓰면 ‘정오 이후’ ‘오후’가 됩니다. 낮 12시 부터 밤 11시 59분 까지를 ‘오후’ pm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postmodernism도 modernism 앞에다 라틴어 post를 붙여서 만든 개념으로써 ‘근대 이후’ ‘반근대적’ 혹은 ‘근대를 넘어서서’라는 3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듯 푹 넓게 쓰여지는 개념인 이 ‘포스트모던이즘’을 우리말로는 흔히 ‘탈근대주의’ ‘후기 모더니즘’ 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어떻게 옮기는 것이 마땅할지 많이 머뭇거려집니다. 이는 ‘포스트모던이즘’이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그 내용이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대로 저도 이 강의안에서는 그냥 postmodernism, ‘포스트모던이즘’ 이라고 표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역사의 지각생 포스트모던이즘을 이해하는 어려움

머리나 생각으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되는 것이라 해도 본인이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현실감 있게 받아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차라리 그런 옷은 입어본 적도 없는데 유행이 지나가 버렸다든가, 그런 노래는 들어 본적도 없는데 이미 ‘흘러간 노래’가 되어버렸다든가 하는 것은 별로 큰 갈등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자유, 인권, 민주, 평등, 정의, 사랑, 자본주의, 공산주의, 다문화사회, 세계화 같은 것들은 실제 우리네 삶과 역사에서는 제대로 경험해 본적이 없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그런 것들을 다 경험한 후 그것들이 지닌 문제점들을 논의하면서 이를 극복해 내야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 우리는 많이 당황하게도 되고 ‘같은 개념을 두고도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포스트모던이즘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 나이 또래의 한국 사람들은 <근대적 사상, modernism> 조차도 제대로 이루어 냈거나 경험해 보지 못하고 살아온 세대인데 포스트모던이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이 근세 초기에 이미 경험했던 합리주의나 이성주의에 대한 계몽주의 시대를 격어보지도 못했는데 우리는 니체와 실존주의를 논의해야 했고, 서구의 산업혁명과 거기에 따른 비인간화와 도시화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피부에 닿게 느껴보거나 고민해 보지도 못한 체 갑자기 세계화와 기후변화와 생태계의 위기 앞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같은 정치적 민주화의 경험도 일천하고, 경제적 번영의 기회도 아직 제대로 누려 보지 못했고, 합리적이며 이성적 토론이나 공부도 본격적으로 해 본적이 별로 없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가부장적 전통과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와 전근대적 사고 방식에 묶여 왔는데, 그런데 갑자기 ‘포스트모던이즘’을 논의하면서 <근대를 넘어서자> <근대를 극복하자> <근대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자>고 하니 많이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길희성 교수의 표현대로 하자면 <역사의 지각생>이 남들이 정해 놓은 템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인주의의 경험이 없는데 갑자기 개인주의를 벗어나자든가, 자유의 경험이 일천한데 갑자기 자유의 문제점과 그 한계와 책임성을 논의해 보자고 한다든가, 종교적 사회의 경험이 별무한데 갑자기 세속화 논의를 해 보자고 하니 잘 수용이 않되는 것입니다. 이미 천 여년 전 부터 유럽의 성시화를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해 보고 그 폐단을 실감한 다음, 이제는 세속화 논의를 하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서, 이제서야 철지난 성시화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포스트모던이즘>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것입니다. 과학적 학습의 경험이 짧고, 인본주의란 무엇이고, 합리주의란 무엇인지 고민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수 백년에 걸쳐 유럽인들은 그들이 경험했던 modernity가 빗어낸 여러가지 갈등, 폐단, 문제점들과 씨름을 하면서 postmodernism을 이야기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적이며 실제적 경험이란 전무한 채로 남들이 던져준 문제를 마치 나의 문제인양 덥썩 안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입니다. 근대적 사고와 삶의 패턴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탈근대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혁명적 변화의 시기를 놓친 사람들에게 닥쳐진 또 하나의 culture shock라 할 수 있겠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 이전과 그 이전의 이야기

오늘 우리의 화두는 <포스트모던이즘> 입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이즘>이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사상이나 현상이 아닙니다. <포스트모던이즘> 앞에는 <모던이즘>이 있었고, 그리고 그 <모던이즘> 이전에는 <프레 모던이즘>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앞에는 더 오래된 고대의 역사가 있습니다. <역사란 전진하는 것이다, 역사란 제자리걸음을 거듭하는 것이다, 아니다, 역사란 뒤로 물러서는 것이요 퇴보하는 것이다> 등등 여러가지 주장들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모든 역사란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사를 신과 자연이 빚어내는 것이라고 보든, 아니면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든, 모든 역사란 앞에 있었던 역사를 이어가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이어지는 연속성을 지닙니다. 그것이 진보적 지향이든, 반복되는 순환이든, 뒤로 물러서는 퇴행이든 관계없이, 역사 자체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제를 알아야 하고, 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제를 살펴볼 수 밖에 없습니다> <단절된 역사란 없습니다> 우리가 최소한 <포스트모던이즘>을 공부하기에 앞서 <모던이즘>과 또 그에 앞선 <프레 모던이즘>을 간략하게라도 살펴보려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의 연속성과 그 연속성이 가져다 주는 오늘>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시대적 흐름을 중세부터 간략하게 더듬어 보겠습니다.

프레 모던이즘 (Pre Modernism) / 중세 (The Middle Age) – 유럽에서의 근세, 즉 유럽에서의 Modern, Modernity, Modernism이란, 중세 (Medium Aevum) / Middle Age)를 이어서 태어났습니다. 프레 모던이즘이 먼저 있었기에 그에 뒤를 이어서 모던이즘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중세의 기간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5세기 부터 15세기 까지의 약 천년을 중세시대라고 부릅니다.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고 게르만 민족은 민족적 대 이동을 시작하던 476년 부터,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던 1453년을 전후하여 인쇄술이 발명되고 르네상스가 본격화되기 까지의 기간을 중세라고 불러왔습니다. 물론 이 기간 역시 꼼꼼하게 볼 때는 중세 초기, 중세 전성기, 그리고 중세 말기로 다시 세분화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동시에 그 시대 마다 제각기 다른 특징과 장단점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우리의 일차적 괸심은 그 모든 시대를 통털어서 나타난 특징이 무엇이냐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봉건정치, 농업경제, 기독교를 중심한 종교와 그 교회를 위하여 만든 신학, 철학, 교육, 건축, 문화, 예술 등등 많은 분야가 포함됩니다만 우리는 이 시대의 특징을 통털어서 신본주의 시대요, 봉건주의 시대요, 비이성적이고, 천동설이 주축울 이루고 있던 비과학적인 시대라고 특정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교회의 권위가 극대화 되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함한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종교, 특히 기독교가 지배하고 통치하고 석권했던 시대입니다. 거기에다 교회는 신의 대리자라는 교황을 통하여 세속의 정치권력 까지도 지배하면서 왕과 봉건 영주들을 휘하에 두고 정치와 경제 까지 완전하게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했습니다. 상식과 교양과 건전한 이성적 판단과 과학적 합리성은 비집고 들어 갈 틈이 없었습니다. 신이 모든 것을 만들고 계획하고 진행하며 심판한다는 신화적 세계관을 지녔던 고대의 사상에서 단 한 발자국도 진보하거나 달라진 것이 없이 다만 신화적 이야기를 교리화하고 신학화하여 이론화하고 정당화 했다고 보는 것이 <프레 모던이즘> 즉 <중세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던이즘 (Modernism) – <모던이즘> 앞에는 <프레 모던이즘>이 있었던 것 처럼 <포스트모던이즘> 앞에는 당연히 <모던이즘>이 있었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은 <모던이즘>의 연속이거나, 반동이거나, 극복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이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던이즘>에 대한 공부가 필수적 입니다. 엄밀하게는 Modern, Modernity, Modernism이라는 개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습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모던이즘> <근대> <근대주의> <근대사상> 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마디로 이는 중세시대, 즉 <프레 모더니즘>이 지배하던 시대의 신본주의와 봉건주의와 비과학적이며 비이성적인 사상에 대한 거부요, 반항이요, 극복입니다.

따라서 <프레 모던이즘>에 반기를 든 <모던이즘>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들이 들어납니다. 첫째 –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하여 의심하라. 신에 대해서 의심하라. 교황과 교회에 대해서 의심하고 질문하라. 정치와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의심을 갖어라. 그리고 질문하고 대들어라. 심지어는 그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 너 자신 까지도 의심해라.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둘째 – <신 대신 인간을 중시하고 인간을 중심에 두어라.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꾸려가는 주인공은 사람이다. 신이 아니라 사람,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가 되어야 마땅하다> 셋째 – <봉건적이며 지배적인 정치-경제 구조에 대항하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 민주적이며 시민적 자유주의에 기초하는 사회체제를 만들어 가야하고 또한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은 없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다> 넷째 – <비과학적이며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 사고구조를 조장해 왔던 중세적 사고 방식을 과감하고 철저하게 버려라. 우리는 이 세상과 역사를 비롯한 모든 신과 인간, 종교와 신앙, 정치와 경제, 그리고 온갖 사물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아서는 않된다.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이성의 눈, 과학과 합리성의 안목, 상식과 교양의 시각에서 보아야한다>

포스트모던이즘에 이르기 까지

포스트모던이즘은 앞에서 살펴본 모던이즘을 반대하고 거부하고 저항합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이란 16세기 이후 모던이즘이 추구해 왔던 일반적 사상, 이론, 가치를 거부하고 그것들을 해체하려는 경향성을 지닌 사상과 운동을 총칭하여 부르는 개념입니다. 모던이즘이 줄기차게 추구해 왔던 이성주의, 합리주의, 객관주의, 그리고 그 후 나타나기 시작한 실증주의, 사실주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등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생각이나 운동을 우리는 포스트모던이즘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이즘이란 어떤 하나의 확정된 사상이나 이론이나 체계가 아니라, 모던 소사이티, modern society 즉 근대 이후에 전개되는 오늘날의 현대 사회, 이 contemporary society 전반에 걸쳐 흘러가며, 넓혀지는 일종의 사조요, 흐름이요, 경향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옛적, 즉 고대 시대 사람들은 신화를 만들고, 신화를 믿고, 신화 속에서 살았습니다. 인간 보다 위대한 그 어떤 신이 계셔서 그 신이 인간과 자연과 역사와 공둥체를 만들고 이끌어 가고 무너뜨리며 심판한다고 믿었습니다. / 중세시대 사람들은 그 신에 대한 스토리들, 즉 신화에 대한 믿음과 각종 종교의식들을 교리화하고, 논리화하고, 제도화하고, 정치화하는 데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과 그 신에 대한 믿음은 종교 뿐만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 사상과 문화를 포함하여 음악, 미술, 건축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오랫동안 죽어지냈던 인간과 인간들의 삶을 되살려내고 새롭게 부흥시켜 보자는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르네상스, 문예부흥이 도래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천여 년 동안이나 지녀왔던 신앙과 종교적 제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 인간과 역사의 중심축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근세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주인이다. 인간이 중심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드디어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가 왔습니다. 모든 이해와 판단, 앎과 삶의 기초와 기본, 기준과 시금석은 이성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근세는 이성주의에 바탕을 둔 과학주의, 실증주의, 객관주의적 사고 방식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포스트모던이즘입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은 5백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왔던 모던이즘과 Modernity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철석 같이 믿어왔던 인간이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성적 사고로 하나가 되어 똘똘 뭉쳐온 것들에 대하여 <그건 아니다. 인간은 생각한 것처럼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획일적이다. 인간은 지극히 부분적으로 이성적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 일이란 내가 보아도 옳고, 당신이 보아도 옳은 것은 아니다. 내가 볼 때는 옳아도 당신이 볼 때는 틀릴 수도 있는 것이고, 내가 볼 때는 틀려도 당신이 볼 때는 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설계하고 이성으로 건축해온 모든 사고와 삶의 제반 영역들에 대해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포스트모던이즘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장은 <인간의 이성에는 문제가 있고 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날 모던이즘이 중세에 대하여 <신과 교회를 중심한 종교와 그 종교에 대한 신앙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부르짖었던 것과 비슷하게, 이제 포스트모던이즘은 모던이즘이 강조해 왔던 인간과 인간의 이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인간이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깨우친 것입니다. 사실 19세기 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열쇄는 합리성과 과학이다> 그것이 모던이즘의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두 차례에 걸칭 전쟁과 나치와 스탈린과 냉전시대를 겪으면서, 또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모순과 인간성 속에 담겨있는 온갖 탐욕과 사회의 양극화 등 여러가지 모순된 사회현상들을 경험하면서 인간 자체와 인간의 이성과 그 인간들이 만들어 낸 합리주의가 지닌 한계를 깨우치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합리성과 이성주의는 과연 옳은 것이나? 이제 우리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부터 벗어나야한다> 포스트모던이즘의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이런 생각은 특히 1960년대 이후 점점 더 강하게 대두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이제 중세의 신 (神)도, 근세의 인간 (人間)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중세의 신앙이나 종교는 물론이고 근세의 이성이나 과학적 합리성 조차도 모두 신뢰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포스트모던이즘의 슬픈 자화상 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모던이즘이 주장해 왔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핵심사항에 대하여 포스트모던이즘은 아주 분명하게 NO라고 말합니다.

A) 세상에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 예컨대 모나리자는 누가 보아도 객관적으로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이즘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NO ! 인간의 이성, 마음, 정신, 느낌, 사회적 관습 등은 모두 개념적 구성일 뿐이요, 언어로 이루어진 가공물일 뿐이다. 모나리자도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볼 수 있다.

B) 과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서술은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 NO ! 진실이란 상대적이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C) 이성, 과학, 기술 등은 인간과 인간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미래는 현재 보다는 좀 더 번영하고 정의롭고 문명화 될 것이다. – NO ! 우리는 인간 이성은 물론 과학과 기술 조차도 믿을 수 없다! 인간이란 결코 합리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내일 일은 알 수 없다.

D) 이성과 논리는 보편적으로 유효하다. 이성과 논리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 될 수 있다. – NO ! 논리와 이성은 특정한 지적 전통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여기서는 이성적이지만 저기에서는 비이성적일 수도 있다.

E) 인간에게는 태어 날 때부터 주어진 본성이라는 것이 있다. – NO ! 인간의 본성이란 살아가면서 사회 안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F) 언어란 실재하는 것을 가르키는 것이다. – NO! 언어란 사용하는 사람과 그것을 사용하는 집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언어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G) 세상에는 그 어떤 절대적인 것 (진리, 사실 등)이 있다. – No ! 아니다. 절대란 절대로 없다. 나에게는 절대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상대적인 것이 된다. – 그런데 그 어떤 절대적인 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했을 때 찿아오는 것은 회의주의와 허무주의다.

포스트모던이즘이 등장하게 된 직접적 계기 – 68운동

이미 자세히 말씀드린바와 같이 포스트모던이즘이 우리 시대의 사회현상, 혹은 사회운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모던이즘이 추구해 왔던 이성주의, 합리주의, 이상주의적 가치 쳬계에 대한 반발에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이스트들은 Anti- Rationalism, Anti-Idealism 위에 서서 중세와 근세를 포함한 종래의 모든 사고체계를 상대화하고 지난 날의 도덕과 윤리, 사상과 종교 등에 대하여 거부를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포스트모던이즘은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학문적 경향성을 넘어서 하나의 사회 현상, 혹은 사회 운동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직접적 계기는 일반적으로 1968년 프랑스 드골 정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68운동, Mai 68, 영어로는 May 1968 Events in France>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이 운동은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된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시작은 불과 8명의 젊은이들이 파리 거리에서 베트남전쟁 반대를 외치는 데모로 부터 비롯되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그 숫자가 늘어나 수만 명의 대학생들과 천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서 이 운동에 가세하였고, 이후 서독, 이탈리아, 체코슬라비키아, 스페인, 미국, 일본 등 여러지역으로 확산이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이 68운동에 별 반응이 없이 지나갔습니다. 1.21사태, 프에블로호 사건,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과 맞물렸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초기 <반전운동>으로 부터 비롯되었던 이 운동은 점차 기존 질서, 특히 권위주의적이고 전통적인 사고와 정치체계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번져 나갔고, 이는 드디어 반체제, 반문화운동으로 까지 점차 자리를 넓혀갔습니다. 그래서 68운동은 문화사적 변혁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탈식민주의 운동으로 부터 시작하여 냉전체제에 대한 반발과 반전, 반핵운동은 물론이고, 보다 넓은 <반문화운동, counter culture movement>이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68운동 이후 여성해방운동과 여성신학, 각종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흑인신학, 환경보호 운동, Green Peace 운동 등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의 특징은 물론 대학생들을 중심한 젊은 세대가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 외에도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불복종 같은 것을 꼽곤 합니다. 68운동 이후 유럽에서는 반기독교적 성향이 증가하고 기독교인구는 급속히 줄어들었습니다. <교회란 보수적인 사람들, 늙고 낡은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는 인식이 거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68운동의 줄기찬 표어는 <모든 금지하는 것은 금지하라, Il est interdit d’interdire>는 것으로 부터 <방해 받지 말고 즐기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등이었습니다. 이는 기성 체제, 전통적 사고방식과 그에 따른 삶의 방식에 대한 전반적 거부요, 반항이었습니다.

68운동이 일어난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상적 배경입니다. 이 운동을 이끌어간 사람들은 <역사와 세계는 변증법적으로 발전되어 간다>는 헤겔식의 전통적 사상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역사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 바탕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나 마오이즘, 호치민의 민족주의와 체 게바라의 혁명적 사상 같은 것들이 미친 영향도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사회적 배경입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전후 세대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특히 이들은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전쟁 범죄에 대해 강력한 처리를 주장했고 빈부 격차나 성차별이나 인종 차별 등 일체의 차별과 권위주의에 대하여 도전했으나 여전히 세상은 권위주의적 정치권력과 기독교적 종교체계가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래서는 정말 않되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경제적 배경이 있습니다. 68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2차 대전 후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는 점점 침체되어 가는데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미국의 지원하에 활기찬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각종 제조업 등에서 앞서 가자 그 원인을 드골주의의 우파 정권에서 찿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드골 정부는 무너졌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렀습니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Jean-Francois Lyotard, 1924-1998)는 1979년 <포스트모던의 조건, The Postmodern Condition>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 <포스트모던이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이 개념은 하나의 현대적 사조로 평가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Modernism이 그 이전의 Pre-Modernism이 지녔던 신과 신화 중심, 기독교와 교권을 중심한 신본주의에 대하여 결별을 선언했듯이, 이제 Post-Modernism 역시, Modernism이 줄기차게 외쳤던 인간과 인간이성, 합리성과 객관주의를 중심한 인본주의에 대하여 결별을 선언해야한다고 천명했습니다. 물론 더 멀리는 20세기 중반 역사가 토인비가 <역사 연구>의 축소판에서 근대 이후에 촉발된 세계대전과 혁명과 합리주의의 붕괴 같은 현상을 보면서 이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했던 것에 근거를 두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의 경향성

첫째로 포스트모던이즘은 근세의 이성중심적이며 합리적 사고 체계로 부터 벗어나려는 <탈이성주의와 탈합리주적 사고와 그 운동>을 지향합니다. <인간의 이성이란 믿을 수 없다. 차라리 감성이 보다 더 정직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포스트모던이즘은 현대인들 개개인은 물론, 현대 사회 전반에 걸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음악, 미술, 건축, 디자인, 마케팅, 비지니스 등에 널리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 모두의 생각과 삶과 전체를 구조적으로 옥죄고 있는 일체의 구조주의적 틀과 사고로 부터 해방해 보려고 하는 <해체주의 (Deconstructionism)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부시지 않으면 새로 세울 수는 없다>는 해체주의적 원리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부셔야 세울 수 있고, 없애버려야 생겨나게 되고, 부정해야 긍정이 나타난다>

셋째로 포스트모던이즘은 모든 것에 대해 다양성을 지지합니다. <그 어떤 질문에도 결코 하나의 대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질문은 하나이지만 답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답이 여러 개라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결코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질문은 질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지 꼭 답이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포스트모던이즘에서는 결론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기성세대들에게는 불편하지만 포스트모던이스트들에게는 그냥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결론은 각자가 따로 따로 내려도 된다> <Result 보다는 Discourse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왜 진리는 하나만 있어야 하는가? 진리가 많이 있으면 큰일이 나는가? 왜 신은 한분이어야만 하는가?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고등종교이고 다신교를 믿는 종교는 저등한 종교인가? 실제로 지구 70억 인구에게는 이미 70억 이상의 신과 종교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왜 애써서 부인하려고 하는가?> 이것이 포스트모던이스트들의 질문입니다.

넷째로 포스트모던이즘은 <탈중심주의>를 지지합니다. 모던이즘에서는 어떤 사람, 가정, 사회, 회사, 조직, 국가, 종교 등은 물론이고 모든 개념이나 사물에도 늘 일정한 <중심이 있다. 중심이 있어야만 한다>는 <중심주의 (中心主義)>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포스트모던이즘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중심은 없다. 중심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중심이 있어서는 않된다. 그 누군가가 혹은 그 무엇인가가 중심이 되면 즉 centre가 되면 다른 개인이나 다른 조직은 변두리로 몰리게 된다> 포스트모던이즘에서는 권력과 경제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지식과 정보와 권위와 물리적 힘 까지도 그 어떤 중심 부분에 모든 것을 집중 시켜선 않된다고 봅니다. <모든 것은 흩어져야한다. 모든 것은 독립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은 분산되고 제각기 따로 따로가 되어야한다> 포스트모던이즘이 이렇듯 중심 (中心), centre, 가운데 자리, 일률성, 일반화를 거부하고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은 해체주의적 성격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의 몇 가지 특징들

<역사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역사의 목적론을 거부합니다. 모던이즘에서는 역사의 발전, 계속성, 연속성을 주장하며 <역사란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헤겔식의 논리를 지지했지만, 포스트모던이즘은 역사란 아무 목적이 없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던이즘은 자신의 역사이해를 비관적 역사관이라고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역사의 중심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인간과 인간 이성을 중심한 세계관을 거부합니다.

<모든 것은 다 다르다. 민족, 언어, 문화, 전통, 역사, 정치, 종교, 사상, 삶의 방식, 사물에 대한 태도… 그 어느 것도 같은 것은 없다. 다 다르다. 그러나 모든 다른 것들 사이에 우열이란 없다.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없다. 주체와 객체도 한번만 바꾸어 앉으면 주객이 전도된다. 남자와 여자, 동양과 서양, 흑인과 백인, 소위 말하는 문명과 미개라는 것, 건강한 사람과 병약한 사람도 한번만 자리바꿈을 하면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대 담론의 시대는 종결되어야한다. 이제는 미시 담론을 이어가야한다. 하나의 아론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 할 수는 없다. 거대 담론으로 우리 사회를 설명하거나 바꾸거나 이끌어 갈 수는 없다. 거대담론 자체는 이미 그 속에 중심주의와 주도권과 권위주의적 사고를 내포한 것이다. 인간과 사회는 반드시 미시 영역에서 보는 눈을 가져야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도 아니고 합리적 사고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란 동물적 존재로써 그 본성은 탐욕으로 가득차 있다. 단지 오랫동안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이성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의 탐욕적 본성을 억눌러 왔거나 가장해 왔을 뿐이다>

<진리는 상대적이다> 프레모던이즘과 모던이즘에서는 <진리는 오직 하나>라고 가르치며 세뇌해 왔으나 <진리는 상대적이며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것이 포스트모던이즘의 주장입니다. 이렇듯 진리의 상대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반드시 하나의 원리나 원칙에 따라서만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우치려는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에서는 트롯트에 나오는 가사 처럼 ‘인생이란 정답이 없다’고 봅니다. 진리, 사랑, 영원, 신앙, 종교, 정치, 경제, 과학 까지도 정답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 정답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postmodernism은 post – truth, post – fact 시대를 지향한다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의 이런 특징들을 요약하면 다음 몇 가지 단어들로 표현해 볼 있으리라고 봅니다. 첫째는 다양성, Diversity이요, 둘째는 혼종성, Hybridity이요, 셋째는 이질성, Heterogeneity이며, 넷째는 다원성, 혹은 복수성, Plurality이요, 다섯째는 상대성, Relativity이요, 여섯째는 해체성, Deconstructionism이요, 일곱째는 탈경계, 탈장르, 탈주체, 탈중심 등을 포함한 탈식민주의, Post-Colonialism이요, 여덟째는 비동일성, Non-Identify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의 특색이 드러나는 몇 개의 분야들

우선 인문학에서는 종래의 이성적, 주체적, 객관성 같은 개념들을 반대하거나 해체하거나 이를 넘어서려고 합니다. 인간과 세계는 물론이고, 그 동안 인간들이 쌓아온 온갖 이성과 지식, 진리와 사실이란 결코 하나의 체계 속에 갇힐 수는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객관성, 유일성, 중심성, 일체성 같은 개념들은 거부하고 부정하며 이를 넘어서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성에 대한 불신, 탈이성, 탈객관, 탈합리성을 부르짖습니다. 역사의 변칙적 발전 가능성을 신뢰하고 다양한 생각과 주장과 삶의 태도를 지지하게 됩니다.

역사학에서는 <위에서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 <아래에서 전해진> 역사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왕실 증심으로 기록된 이조실록만 읽고 해석 할 것이 아니라 <흥부와 놀부> <심청전> <춘향전>에서도 역사를 읽고 해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가 보다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여기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민중사요, 미시사요, 오리엔탈이즘과 포스트 히스토리와 환경사나 녹색사 같은 것들이라 하겠습니다.

문학에서는 작가가 중심이 아니라 독자가 중심이 된다고 봅니다. 작가 개인의 창작력 보다는 독자들이 지닌 상상력을 보다 중시합니다. 작품의 마지막은 독자들에게 여운으로 남겨 둠으로 독자들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론 짖게 하야지 작가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주입 시켜서는 않된다고 봅니다. <메시지는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생각과 그것을 듣는 사람의 해석이 다를 수 있다. 메시지는 다양하고 다양성을 가져야한다> 뿐만 아니라 종래의 지성적이고 난해한 글들이 반지성주의적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지식 보다는 비젼, 논리 보다는 환상, 에고 보다는 이드를 중시하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기독교신학에서의 포스트모던이즘은 ‘종교적이면서도 동시에 얼마든지 합리적일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근세주의는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은 결코 종교적이거나 신비적일 수가 없으며 신앙적이며 경험적인 것들은 절대로 이성적일 수가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포스모던이즘 신학’에서는 논리적 신학, 합리적 신학, 더 나아가서는 과학적 신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데이빗 그리핀 (David Griffin)은 그의 책 ‘God and Religion in the Postmodern World’에서 ‘합리주의와 함께 가는 영성신학’을 부르짖습니다. (포스트모던 하나님, 포스트모던 기독교, 강성도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음악이나 미술이나 무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기존 질서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질서와 균형을 중시했던 근대적 태도에 대해 제일 먼저 염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각종 전위예술입니다. 작곡가나 연주자나 화가나 연기자들은 자신들이 예술행위의 중심이 아니라 그 음악을 듣거나 그 그림이나 무용을 보는 사람들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음악이나 미술이나 각종 행위예술에는 아주 폭넓고 다양한 장르들이 펼치어지게 됩니다. 음악만 해도 전통적 클래식을 넘어서 다양성을 중시하는 각종 팝 아트, 비데오 아트, 랩 음악은 물론이고 팝송과 트로트와 BTS를 중심한 대중적인 음악들이 사람들을 끌어들이어 함께 노래하며 같이 춤을 추도록 유도 합니다.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다다이즘과 그 후에 나타난 초현실주의, 입체파, 추상파 등도 이성적 제약을 벗어나고, 전통적 사상이나 종교, 도덕, 윤리의 제약을 도외시하려는 표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음악도 연주해 보고, 거꾸로 보아도 이해가 되는 그림도 전시해 보고 즉흥연주, 거리공연, 뉴 에이지, 미니멀리즘, 크로스 오버 같은 것도 펼치어 보는 것은 모두 포스트모던이즘적 예술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의 특색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분야는 건축입니다. 성당을 중심한 중세시대의 고딕식 건축 양식은 오직 신과 신앙을 고무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신고전주의적 건축물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이 역시도 신흥 부르주아들의 높아진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이 곳 저 곳에 많은 장식물들을 부착하는 등 변형된 중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기계화와 도시화가 가속화 되면서 만들어진 근대의 건축물들은 거이가 성냥갑 처럼 정사각형 아니면 직사각형으로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거리도, 건물도, 건축물의 내부구조도 한결같이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예술도 신앙도 다양성도 없이 오직 진보와 기능과 실용성만을 극대화한 건축이었습니다.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의 마천루들은 오직 기능에 따라 동선을 계획하고, 좁은 땅에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설계된 것들이었습니다. 건축자재들도 한결같이 표준화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집은 하나의 기계가 되었다> 건축가 르 코르뷔제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를 잘 나타내는 스토리가 1976년 러시아에서 엘다르 랴자노프 감독이 제작한 영화 <운명의 아이러니, The Irony of Fate>입니다. 스토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모스크바에 사는 36살된 외과의사 제냐는 12월 31일 저녁 망년회를 하려고 합니다. 그는 친구들과 같이 사우나에 가서 목욕 후 휴게실에서 맥주와 보드카를 섞어 마시는 바람에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 집으로 간다는 것이 그만 레닌그라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레닌그라드공항에 내린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택시기사에게 자기 아파트의 주소를 불러줍니다. 레닌그라드에도 모스크바와 똑같은 거리, 똑같은 아파트 건물이 있어서 기사는 아무 것도 묻지 않은채 제냐를 그 아파트 앞에 내려 주었습니다. 제냐는 거리 이름도 같고, 아파트 동수도 똑같고, 건물의 모양, 구조, 문, 심지어는 열쇠구멍 까지 똑같은 집에 들어섰습니다. 들어가 보니 현관, 실내장식, 방, 침대, 심지어는 벽지 까지도 모스크바의 자기 집고 똑같은 그 집에서 그는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아파트의 진짜 주인인 여주인공 나쟈가 들어옵니다. 나쟈는 처음, 낮 모르는 이상한 남자가 자기 방에 들어와서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또 얼마 후 나쟈의 약혼자 아폴리트가 등장하여 이를 목격하고선 대판 싸우다가 갈라서게 됩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낮 설고 처음보는 이 남자 제냐와 나쟈는 그 날 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그 똑같은 아파트에서 자기 집 처럼 친밀해 져서 사랑에 빠지게 되어 새해 아침을 마지하게 된다는 스토리입니다.

이는 영혼도 없고, 얼굴도 없고, 개성도 없이 똑같이 지어진 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아파트단지에서 황폐해진 인간들과 획일성으로 꾸며진 세상을 비웃는 이야기입니다.

포스트모던이즘 시대의 건축가들은 건축물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애완동물처럼 xxx street, xxx 번지, xxx unit에 살고 있는 이런 현상을 개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건축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건축물>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통과 질서, 권위와 위엄에서 벗어난 포스트모던적 건축물의 가장 대표적인 것 가운데서 사람들은 흔히 파리의 퐁피두센타 (Centre Georges-Pompidou)를 꼽습니다. 건물의 철골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배수관, 가스관, 통풍구 등 안에 들어갈 것들을 그냥 그대로 노출 시켰는가 하면 외벽은 유리로 구성된 건축물입니다. 그러나 퐁피두센타의 진면목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보고, 듣고, 먹고 마시며 그야말로 삶을 즐기는 공간 개념으로 만들어 졌다는 데 있습니다. 1977년에 준공된 이 건축물은 커다란 공공 도서관은 물론이고 미술관과 박물관, 영화관과 연극장, 강의실과 서점, 각종 레스토랑과 카페 등을 고루 갖추고 있는 복합적 문화-예술-휴식 센터입니다. 그 외에도 포스트모던이즘적 특색과 성격을 잘 표현한 건축물로는 뉴욕의 AT&T, 포틀랜드 공공사업국 (Portland Public Service Building), 덴버 공공 도서관과 미술관, 샌프란시스코의 현대 미술관, 로버트 벤츄리의 벤츄리 하우스, 독일 누스바움 박물관, 베를린의 유태인 박물관, 도쿄 시청사, 영국의 SIS, , 서울의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 전당 같은 건축물들이 경직되고 획일화된 기존 전통을 벗어나 창의적이며 실험적인 건축물들로 많이 이야기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시대의 창조적인 포스트모던적 건축가들의 이름 몇 분을 올려놓겠습니다만 그 분들에 대해서는 훗날 기회가 있을 때 우리 인문학 교실의 건축가이신 안인승 선생님께로 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Philip Johnson, Michael Graves, Mario Botta, Daniel Libeskind, Robert Venturi, Kuma Kengo, Jane Jacobs, Aldo Rossi, Charles Jencks, Peter Eisenman, Bernard Tschumi, Manfredo Tafuri 등)

포스트모던이즘의 특색이 들어나는 사례들

앞에서 말씀드린 것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포스트모던 세대의 모습을 몇몇 사례를 중심으로 집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직장을 선택함에 있어서 명분 보다는 실리를 선호한다. 우리는 민주적 조직이 되어 있는 직장은 물론이고 일과 휴가와 봉급의 균형을 중시한다.

우리는 나이가 더 많다든가, 남자라든가, 일류 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더 많이 했다든가, 목사나 신부나 스님이라든가, 직급이 더 높다고 해서 그들의 말과 행동이 옳다고 생각지 않으며 그런 것을 가지고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혼이나 미혼이나 비혼이나 이혼이나 동거를 개인의 취향에 따른 개인적 선택이라고 여기며 이를 다 같이 존중한다.

우리는 클래식 보다는 대중 문화를 더 선호한다. 우리는 독서 보다는 만화나 영화나 동영상을 더 선호한다. 우리는 대형극장이나 대형 공연장 보다는 작고 개성있는 공연장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방, 만화방, 찜질방, 전화방 같은 문화를 더 선호한다. 우리는 일상의 삶과 문화나 예술은 구분되어서는 않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열린 음악회, 열린 정치, 열린 교회, 열린 사회가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 신념이나 인식에 대한 확신이 약하거나 없는 사람들이다. 인간과 세상은 하도 넓고 다양하니까 우리는 그 무엇이든 <확정적으로,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 같아요> < 하나님은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심지어는 <오늘 날씨는 좋은 것 같아요> 라고 말하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합니다> <그 말이 맞아요> <오늘 날씨는 참 좋아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 모름, 오늘 오후엔 날씨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같은 개연성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윤리, 도덕, 가치 보다는 개인의 가치와 취미, 개인이 추구하는 목표를 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집단적 인식 보다는 개인적 감정을 더 존중한다.

우리는 여럿이 함께 모여 회식을 하거나 회의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잔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히려 혼밥이나 작은 모임을 선호하며 같이 모여 회의하며 토론하는 것 보다는 게시판이나 댓글을 이용하여 의견을 취합하는 것을 더 좋아하며 그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안과 밖, 속과 겉, 몸과 영혼은 나누어져서는 않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감각적 상업문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개방적이다. 우리는 배꼽 티를 입고 거리에 나서는 일을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안과 밖, 집안과 집밖은 똑같아야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집안애서 입고 먹고 말하는 것과 집 밖에서 하는 행동이 다른 것은 위선적이며 정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교회의 성가대에서 배꼽 티를 입고 노래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진솔한 모습이라고 보지 그걸 속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설, 스토리, 영화, 연극 등에서 모든 것은 해피 엔딩으로 끝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권선징악적 도덕의식으로 종결하는 것 역시도 거부한다. 그런 것들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상>을 그릴 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그리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우리 앞선 세대와 똑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것을 느끼고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은 훨씬 확장된 곳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세상은 넓고 할 일과 선택의 폭은 대단히 넓어졌다, 모든 사람은 개인적 취향과 목표에 따라 그 무엇이든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커피의 종류, 음식의 메뉴, 스포츠와 레저, 관광지와 즐길 것만이 아니라 직업의 종류도 말 할 수 없이 많아졌다. 우수개 소리로 왼쪽 귀와 오른 쪽 귀 전문의사가 각각 다르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신도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유일신이란 아주 옛날 원시시대의 신관이라고 생각한다. <자장면으로 통일>이라고 외치던 시대가 지나갔듯이 <예수로 통일하는 시대>도 이미 지나갔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남북한이 꼭 통일을 이루어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통일문제에 대해서 별로 관심도 없지만, 있다고 해도 통일을 이루어야하는 이유를 납득하기가 어렵다.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둘이 더 좋은 것이 아닌가?>

포스트모던이즘의 특색에 대해서는 이외에도 많은 사례들이 열거되곤 합니다. – 남의 말이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의 말과 주장에 더 치중한다. / 사회 봉사나 구제와 같은 일 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일에 더 관심한다. /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문화를 소홀히 여기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 공교육체제를 벗어나 대안학교를 찿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 개인 윤리의식이 약화 되면서 마약, 매춘 등을 포함한 각종 사회적 범죄가 점증한다. / 종래의 가문, 학벌, 동향, 혈통 중심의 모임에서 점차 취미나 동호 클럽 형태로 사회 관계가 변화한다.

대표적 학자들

대표적인 포스트모던이스트들로는 이미 35강과 36, 37강에서 소개해 드렸던 레비 스트로스, 소쉬르, 로랑 바르트, 자크 라캉, 미셀 푸코, 보드리야르, 데리다, 기타르,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하여 알튀세 (Louis Althusser), 들뢰즈 (Gilles Deleuze), 리오타르 (Jean-Francois Lyotard) 같은 이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어로 된 추천도서들

포스트모던이즘의 이해, 김욱동 지음, 문학과 지성사, 1990 (이 책은 2004년에 개정판으로 연세대출판부에서 ‘포스트모던이즘’이라는 제호로 다시 나옴) / 포스트모던이즘과 문화, 권영택 지음, 문예출판사, 1991 / 포스트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 길희성 지음, 민음사, 1994 / 포스트모던이즘, 신국원 지음, IVP, 1999 / 포스트모던 하나님 포스트모던 기독교, 데이빗 그리핀 지음, 강성도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성찰, 신승환 지음, 살림출판사, 2003 /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던이즘까지, 사무엘 이녹 & 제임스 피저 공저, 이광래 옮김, 열린책들, 2004 /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이즘, 마단 사럽 지음, 전영백 옮김, 조형교육, 2005 /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김희상 옮김, 열린책들, 2017

Questions, Comments & Sharing

포스트모던이즘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노암 촘스키는 포스트모던이즘이 주장하는 것들은 오늘날 우리 인간과 사회에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아무런 실제적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도킨스 역시 포스트모던이즘은 과학의 엄밀성을 너무 과소 평가한다고 비판합니다. 사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엇이라고 이름이 붙여질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포스트-포스트모던이즘>이 나올 날도 있을 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글을 읽으신 후 어떤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시드니인문학교실> 1기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우리 교실에서 부족한 사람이 맡았던 서양철학사를 중심한 인문학교실은 오늘로써 제 1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2017년 이후 지난 5년 반 동안 제가 진행해온 부분은 사실 누구든지 조금만 미리 준비하시면 다 하실 수 있는 내용이었는데 실력도, 능력도 부족했던 제가 조금 앞에 나섰다고 해서 아는 척했거나 잘난 척한 것이 있었다면 널리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늙어가며 점점 아둔해지는 사람에게 그래도 글을 읽고, 써보며,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인문학 친구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날 우리가 이런 작은 모임이나마 함께 해 올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땅 시드니에 <이런 식으로나마 생각을 나누며 자신을 성찰하는 이들의 모임>이 필요하다고 여기어 함께 해 주신 여러분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이번 38회로 일단 한걸음 머물러 서서 숨을 고르려고 합니다. 희망 사항입니다만 앞으로 혹시 능력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도철학과 중국철학 그리고 한국철학을 비롯한 동양의 인문학에서 만나는 날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거듭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