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Leo Nikolayevich Tolstoy / Lev Nikolayevitch Tolstoy, 1828 ~ 1910) 서거 110주기

역사의 오늘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역사의 오늘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Leo Nikolayevich Tolstoy / Lev Nikolayevitch Tolstoy, 1828 ~ 1910) 서거 110주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 (Leo Nikolayevich Tolstoy, Lev Nikolayevitch Tolstoy, 레브 똘스또이)는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였으며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전쟁과 평화'(1869년), ‘안나 카레니나'(1877년)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Leo Nikolayevich Tolstoy / Lev Nikolayevitch Tolstoy)
.생사: 1828년 9월 9일(야스나야 폴랴나)~1910년 11월 20일 (82세, 아스타포보)
.직업: 소설가
.국적: 러시아
.장르: 사실주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

○ 생애

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에 러시아 남부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과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카잔 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교 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껴서라고 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톨스토이의 주요 작품으로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장편 소설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등의 중편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 초기의 삶

톨스토이는 1828년 러시아 제국 툴라현 크라피브나군에 위치한 톨스토이 가문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 (Ясная Поляна)에서 태어났다. 그가 2세 때 어머니 마리야 볼콘스카야 여공작 (Княжна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Волконская)은 막내 여동생 마리야을 낳고 사망하여 ‘숙모’라고 부른 먼 친척 아주머니 밑에서 자랐다. 숙모라 불린 친척 타티야나 예르골스카야 (Татья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Ергольская)는 어머니와 다름없어 톨스토이의 훗날 성장과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사실 ‘숙모’는 아버지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자신보다 부유한 여성을 만나기 바라는 대인배 마음으로 청혼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아는 톨스토이의 생모와 관계가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톨스토이의 생모가 사망하자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가 다시 청혼하지만 아이들과의 사이가 어색해질까봐 다시 거절하고 대신 평생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가정사는 1836년경 아버지의 유품인 편지를 정리하다 톨스토이가 발견했다고 한다.

참고로 톨스토이의 막내 여동생 마리야는 ‘숙모’라 불린 타티야나 예르골스카야의 조카 발레리안 톨스토이 백작 (Граф Валериан Петрович Толстой)과 결혼한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는 9세 때 급사하여 큰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가 14세 때 큰고모도 사망하여 작은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톨스토이 가문 형제들은 부모없이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고 형제들과의 사이는 전부 좋았다고 한다. 특히 맏형인 니콜라이를 좋아했는데 맏형도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1844년에 외교관이 되려고 카잔 대학 동양어학과[6]에 입학했다가 다시 농민을 위해 일하려고 법학부로 전과하였다. 하지만 학업에 열의가 없고 자기 관심분야의 책만 보던 터라 수업태도 불량으로 유급했고 결국 자퇴한다. 1847년에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위의 형 셋과 달리 당시 귀족들의 진로인 문관이 되거나 군인이 되거나 중에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고 농촌에 틀어박힌다.

이때 잠시 농촌생활에 열의를 가지고 농노들에게 교육이라든가 의료를 제공하고 온정적인 지주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농민들의 차가운 반응과 불신으로 실망하고 다시 도시로 나오게 된다. 이후 젊은 톨스토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학사 검정고시로 학사 학위는 따지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의 사교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어머니가 2살 때 죽어 일종의 컴플렉스를 가진 톨스토이는 성장하면서 여자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거액의 도박 빚을 지는 등, 계속 무분별하게 살아가던 톨스토이는 그러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여 맏형 니콜라이가 복무하던 캅카스 전선으로 여행을 간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농노 제도 없이 사는 카자크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 풍속에 깊은 감명을 받는데, 여기서 쓴 글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을 병탄하기 위해 그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톨스토이는 호전적인 소수민족인 체첸인을 상대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입대하여 당시 귀족들처럼 유년 군사학교나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포병 하사관부터 시작하여 공을 세워 현지 임관한다. 복무 중 틈틈이 그의 성장기가 반영된 반자전적인 소설을 썼는데 《유년 시대》(Детство, 1852), 《소년 시대》(Отрочество, 1854), 《청년 시대》(Юность, 1857)[8]가 그것이다. 이때쯤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고 전역 신청을 했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전역이 거부당하고 크림 전쟁에도 참전한 톨스토이는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공을 인정받아 성 게오르기훈장을 받고, 중위로도 진급한다. 이때부터 문필 생활을 시작하여, 1855년에는 세바스토폴 전투에 관한 짧은 글들을 잡지에 실었다. 이것이 《세바스토폴 이야기》(Севастопольские рассказы)이다. 이런 군 경험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잔혹한 체험 때문에 톨스토이는 평화주의로 기울게 된다. 톨스토이는 1856년 군에서 제대하고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서유럽을 두 차례 여행했다. 그곳에서 교육 방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고 신문 《야스나야 폴랴나》를 발간해서 자신의 교육관을 설명했다.

– 창작 전기

톨스토이는 30살이 넘어 겨우 아내를 맞이했는데, 아내로 고른 여자가 하필이면 18살밖에 안 된 친구의 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였다(당시 톨스토이는 34살). 어쨌든 나이차에 관계없이 톨스토이는 소피아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소피아의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은 톨스토이를 매료시켰고 그의 걸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에 소피아를 모델로 한 주요 인물을 등장시키게 했다.

톨스토이는 1869년의 필생의 역작 <전쟁과 평화>를 완성시켰다. 나폴레옹 전쟁의 러시아 원정을 소재로 한 이 역사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실제로 특출난 사람이나 영웅(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은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역사관을 내세우며 ‘위대한 사람’을 중요시하는 역사관을 강력히 부정해 뭇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7번이나 격전지를 답사하고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는 소련 시절에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공산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인원동원이 간편했기에 보조출연자로 연인원 총 75만(!!)을 동원해 거대한 전투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이는 기네스북에도 오른 기록이다.

톨스토이는 1875년부터 1877년까지 그의 두 번째 걸작 <안나 카레니나>를 연속물로 출간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불륜을 다룬 것 같아 보이는 이 소설은 1870년대의 귀족계급과 러시아의 사회, 도덕, 철학에 대한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 특히 간통에 대한 상류계급의 위선적인 태도와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종교적 신념의 역할 등을 강하게 고찰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2007년 노턴출판사에서 조사한 영어권 작가 125명이 선정한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뽑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보다는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했다고 한다.

– 회심 (回心)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던 해에 톨스토이는 갑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톨스토이는 도덕적 자기 점검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런 물음을 <고백>(1879)라는 에세이에서 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정신적 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교회 사상을 발전시켜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1894)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톨스토이는 그 에세이에서 어떤 폭력이나 무력의 사용은 해로운 것이며 폭력에는 비폭력으로 맞서야 하고 정부로 대표되는 무력이나 종교, 사유재산, 맹세 등 모든 형태의 강제적인 힘에 반대하는 사상을 펼쳤다. 이는 후세에 ‘톨스토이주의’라는 사상 형태로 발전되었다.

종교와 일치하는 삶에 강한 열정을 느낀 톨스토이는 거름통 들면서, 나도 농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생활을 동경했던지라 <인생론>, <참회록>을 저술하고 스스로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스스로 농부처럼 일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다.

부인 소피아는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톨스토이의 폭탄선언을 듣자 톨스토이와 대판 다투고 만다. 물론 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겠지만 이제껏 귀족으로 살아 온 소피아에게는 와닿지 않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소작농들도 톨스토이에 동조하지 않고 되려 그를 비웃었다(…). 톨스토이는 1881년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저작권을 소피아에게 양도했지만 소피아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회심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했다(!). 이 글에서 톨스토이는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준에 따라 톨스토이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라고 흑역사 취급했다. 이 에세이는 러시아 문학계에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후기 작품과 최후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을 시작으로 다시 소설 쓰기로 돌아갔다. 이 작품을 읽고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톨스토이는 동서양 최대의 작가”로 극찬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찬미자는 나보코프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있다.

이때부터 러시아 민담과 설화에 관심을 가진 톨스토이는 민담 형식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바보 이반>, 조이스가 세계문학이 아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극찬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등의 단편 소설들을 썼으며 국내에는 <톨스토이 단편선>으로 다른 톨스토이의 걸작들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다만 후기 톨스토이 작품들은 과학과 교회를 악마의 발명이라고 조롱하는 등의 서술로 인해 전기 작품들에 비해서 홀대받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부터 성욕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는데, 그 영향으로 노년에는 성적인 욕망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은 <크로이체르 소나타 (1890)> 와 <악마 (1889)>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톨스토이는 섹스를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행위로 비판하고, 인간이 성욕에서 해방되지 않는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상 낙원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주장한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악마>는 둘 다 자신의 성욕을 절제하지 못한 주인공의 파멸로 끝난다. 둘 다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톨스토이 역시 젊은 시절 아내 소피아와 결혼식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마차 안에서 강간한 적이 있었고 결혼 후에는 하녀들이나 농부들과의 관계를 즐겼다. 섹스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과거의 방탕했던 생활에 대한 고해성사이다.

한편 톨스토이는 사회 운동가들의 구명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장편소설 연재도 시작했는데 이 소설이 바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걸작인 <부활>이다.

이 사회운동가들이란 러시아 정교회의 분파인 두호보르파 (Духоборы)로, 기독교적 평화주의에 근거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며, 여호와의 증인 비슷하게 세속 정부와 교회의 권위를 거부해서 이단으로 몰렸다.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의 캐나다 이주 비용을 <부활>의 인세로 지원했고, 같은 시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라는 수필을 써서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여 교회에 찍히고 만다. 두호보르파는 캐나다와 러시아 남부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후, 작중에 등장하는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비판 때문에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다. 톨스토이의 비판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매우 수위가 강했다. 단편 <지옥의 패망과 부흥>에서 교회를 악마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였고, <부활>에서는 성체성사를 마술이라고 조롱하였다. 때문에 정교회에서 파문하지 않는게 더 이상했다. 이런 면에서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인 도스토옙스키와 대비된다.

‘부활’에서 대귀족인 신분으로서 하층민들의 삶을 이해해가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쉽게 쓸 수 없는 내용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하지 무라트 (Хаджи-Мурат)’는 자신의 군복무 시절에 만난 무슬림 아바르인 전사, 하지 무라트의 이야기로, 톨스토이 최상의 작품에 속하며 해럴드 블룸에 의하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말년이 되면서 톨스토이와 부인 소피아와의 갈등은 점점 격해져만 갔다. 소피아는 특히 톨스토이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와 사이가 나빴다. 그 갈등의 근원이 톨스토이는 모든 저작권과 판매료를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고 소피아는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판 부부싸움을 벌인 이후 나이 80이 넘어가는 늘그막에 농민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막내딸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가출을 시도하였으나, 기차역인 아스타포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아스타포보역은 톨스토이를 기리기 위해 1918년 ‘레프 톨스토이’역으로 개칭되었다. 이 역은 2014년 폐쇄되었지만 역사는 여전히 남아 있고, 이 역사에는 톨스토이가 사망한 시간인 6시 5분으로 맞춰진 시계가 있다고 한다.

1980년대 위인전에선 비참하게 겨울 날씨 역에서 동사했다고 나온 바 있었는데, 실제로는 역장 숙직실로 옮겨져 눕혀진 상태에서 다음의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다.

‘But the peasants … how do the peasants die?’ (하지만 농민들…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자신의 작품 속에서는 농민들을 찬양하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귀족의 삶을 살았던 톨스토이가, 드디어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이렇게 죽게 되었으니, 이를 한탄했다는 것이다. 죽어서라도 농민이고 싶었던 톨스토이의 한맺힌 심정이 담겨 있다.

톨스토이의 무덤은 그의 위상답지 않게 묘비도 없이 매우 단촐하기 그지없다.

그는 아내 소피아와 끝내 화해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 유언에 아내는 절대로 장례식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당부했다. 그리고 소피아는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 없었고 죽어서도 남편과 합장되지 못한 채 톨스토이 묘지에서 3km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 묘지에 묻혀야 했다.

82세에 폐렴으로 사망한 것과는 별개로 건강했고, 70세에도 젊은이와 다름없는 근력을 지녔다고 한다. 막내딸인 알렉산드라를 56세의 나이에 얻었으며, 막내아들인 이반을 얻은 것도 나이 60살 때 일이다. 다만 이반은 7살 때 병으로 죽고 만다.

○ 작품의 특징

톨스토이는 현실주의 소설의 대가로서, 그의 두 가지 장편인, 전쟁과 평화 및 안나 카레니나로 유명하며, 이 작품들은 통상 이제까지 쓰여진 가장 훌륭한 소설들로서 여겨지고 있다. 전쟁과 평화는 특히 사실상 많은 독자들과 비평가들을 위해 이런 형식을 정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톨스토이의 단편작들 중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 (The Death of Ivan Illyich)은 보통 중편 소설의 가장 훌륭한 예들로 분류된다. 특히 그의 만년의 삼십 년 동안 톨스토이는 또한 도덕 및 종교 선생으로서 세상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신조인 악에 대한 무저항은 간디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비록 톨스토이의 종교적 사상들이 더 이상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관심을 끌지는 못하지만, 그의 삶과 성격에 대한 흥미는, 무엇보다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관심이 증가되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튜 아놀드는 톨스토의의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삶의 파편이다 라고 말했다. 20세기의 러시아 작가인 아이삭 바벨은 논평하기를, 만일 세상이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쓸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의식에 대한 지극히 작은 변화들도 관찰하며 신체의 미미한 움직임들도 기록하는 그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다른 소설가들은 의식의 한 가지 단일한 행위로서 묘사하는 것을, 톨스토이는 일련의 무한히 작은 단계로 그럴듯하게 쪼개어 나간다. 영국의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에 의하면, 그는 당연히 톨스토이를 “모든 소설가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여겼는데, 이와 같은 관찰력들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끌어내었으며, 그들은 “톨스토이가 우리들 위에 고정하고 있는 시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만년의 톨스토이를 방문한 사람들 역시 그가 자신들의 내뱉지 않은 사상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의 무척 불편함 느낌들을 이야기 하였다. 톨스토이를 그의 능력들에서 신처럼 그리고 인간의 조건들의 제약들을 탈피하려는 그의 투쟁들에서 거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자연과 순수한 활력의 현신으로 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를 세상의 양심의 화신으로 보았으나, 그를 알고 있는 또는 그의 작품들을 읽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단지 이제까지 생존하였던 가장 위대한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살아있는 상징이었다.

– 초기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서, 톨스토이는 유년시절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가 편집장인 유명한 잡지인, 소브레메니크 (“현대인”)에서 출판하기 위해 기고하였다. 네크라소프는 열광하였으며, 익명으로 출판된 작품은 두루 칭찬 받았다. 다음 몇 년 동안 톨스토이는 코카서스에서의 자신의 경험들을 토대로한 많은 이야기들을 출판하였으며, “Nabeg”(1853, “습격”) 및 크리미아 전쟁 중의 세바스토폴 포위에 대한 세가지 스케치들 – “Sevastopol v dekabre mesyatse ” (“12월의 세바스토폴”), “Sevastopol v maye ” (“5월의 세바스토폴”), 그리고 “Sevastopol v avguste 1855 goda” (“8월의 세바스토폴”; 모두 1855-56년에 출판되었음) – 이 포함되었다. 처음의 스케치는, 무명의 병사들의 용기를 다루었는데, 황제에 의해 칭찬 받았다. 마치 여행 안내처럼 2인칭으로 쓰여졌으며, 이 이야기는 역시 톨스토이의 엄격한 실험에 대한 예리한 관심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관찰함에 있어서의 도덕성에 관한 그의 평생의 관심을 증거해준다. 두 번째의 스케치는 폭격에 죽기 직전의 병사의 (이런 장치의 초기의 사용들 중의 하나인) 의식의 흐름을 담은 긴 구절을 포함한다. 이야기의 유명한 말미에서, 작가는, 그의 어느 등장인물도 진정으로 역사적이 아님을 언급한 뒤에, “나의 이야기의 영웅 나는 영혼의 모든 힘으로 그를 사랑한다… 그는, 지금도 그리고 언제나 아름다울 것이다 은 진리이다”라고 단언한다. 독자들은 그 이후로 톨스토이의 그와 같이 “절대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 주목을 해왔으며, 이 언어는 흔히 미학적으로 효과적인 현실주의적 소설문학을 붕괴시킨다.

크리미아 전쟁 후에 톨스토이는 군대에서 물러났으며 제일 먼저 성 페테스부르크의 문학세계에서 환영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가시 돋친 자만심, 어떤 지적 진영에도 가입할 것에 대한 거부, 그리고 자신의 완전한 독립의 고집은 곧 급진적인 지식인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그는 자신의 평생을 통하여 “의고주의자 (擬古主義者)”로 있으면서, 지배적인 지적 경향들과 반목하였다. 1857년에 톨스토이는 파리를 여행하였으며 자신의 돈을 도박으로 날린 뒤에 돌아왔다. 러시아에 돌아 온 후에, 그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은 교육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유지에 농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교육 이론 및 실제를 공부하기 위하여 서부 유럽을 여행한 뒤에, 그는 12호의 잡지, Yasnaya Polyana (1862-63)를 발행하였으며, 이것들에는 그의 도발적인 논문들인 “Progress i opredeleniye obrazovaniya” (“진보 및 교육의 정의”) – 여기서 역사가 어떤 내재적인 법칙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 , 그리고 “Komu u kogu uchitsya pisat, krestyanskim rebyatam u nas ili nam u krestyanskikh rebyat?” (“누가 누구의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가: 우리의 자녀들인 농부 아니면 농부의 자녀들인 우리?”) – 여기서 문제에 대한 통상적인 답변을 뒤집는다 – 를 포함하였다. 톨스토이는 1862년 저명한 모스크바의 내과 의사의 딸인 소피야 (소냐)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하였으며, 곧 그의 모든 힘들을 그의 결혼 및 전쟁과 평화의 집필에 쏟았다.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는 13명의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들 중 10명이 유아기를 넘겼다.

1850년대와 1960년대의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자신의 도덕적 및 철학적 관심들을 표현하려는 새로운 형식들을 가지고 실험하였다. 유년시절에 이어서 그는 곧 Otrochestvo (1854; 소년시절) 그리고 Yunost (1857; 청년)을 추가하였다. 많은 이야기들이 유일한 반자서전적인 주인공인, 드미트리 네클루도프에 집중되어있으며, 그는 후일 톨스토이의 소설인 부활의 영웅으로 재등장하였다. “Lyutsern” (1857; “루선”)에서, 톨스토이는 한 사건을 언급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서 시간을 초월한 의미를 숙고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명상들의 과정에 대해 숙고한다. “Tri smerti” (1859; “세 사람의 죽음들”)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없는 귀부인의 죽음, 죽음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한 농부, 그리고 그 철저한 자연의 목적이 인간의 기만과 대비되는 한 그루의 나무의 죽음들을 묘사한다. 오직 작가의 초월적인 의식만이 이들 세 사건들을 묶어 줄 뿐이다. “Kholstomer” (1863년 작; 1886년 개정 출판; “Kholstomer”; “말의 이야기”)는 인기 있는 톨스토이적인 장치인 “어색함”의 극적인 사용으로 유명해졌다–, 즉, “친숙한 사회적 관습들을 당연히 여기지 않는 한 관찰자의 “순박한” 관점에서 시작되는 묘사이다. 독자들은 “Kholstomer”의 주인공이자 주된 화자가 늙은 말인 것을 발견하고는 충격 받았다. 무척 많은 톨스토이의 초기 작품들처럼, 이 이야기는 인간 사회의 기만과 인습성을 풍자하고 있으며, 이는 또한 톨스토이의 소설 카자키 (1863; 코사크 사람들)를 지배하였던 주제이다. 이 작품의 영웅인, 방탕하며 자기 중심적인 귀족, 드미트리 올레닌이, 코카서스에서 복무하기 위하여 장교로 입대한다. 코사크 사람들 안에서 살면서, 그는 자연과 생체 리듬들에 더욱 가까운 삶을 감사히 여기게 된다. 소설의 중심 장면에서, 올레닌은, 숲속에서 사냥하던 중에,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은, 심지어 한 마리 모기라도, “바로 나 자신과 같이 단지 그렇게 별개의 드미트리 올레닌”인 것을 지각한다. 자신이 과거 삶의 헛됨을 깨닫고서, 그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한다.

– 중기

행복하게 결혼하여 야스나야 폴리야나에 자신의 아내 그리고 가족과 안착한 뒤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창의력들의 절정에 도달했다. 톨스토이는 1860년대의 나머지 해들을 전쟁과 평화의 집필에 쏟았다. 그리고 나서, 피터 대제 1세에 관한 소설을 쓸 것을 생각하였으며 잠시 교육(널리 사용된 독서용 초급 독본을 만들어 내었다)으로 돌아갔던 막간의 기간 뒤에, 톨스토이는 그의 또 하나의 위대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하였다. 이들 두 작품들은 일상생활과 지루한 미덕의 이해에 뿌리를 둔 인간의 경험에 대한 환상을 공유한다.

전쟁과 평화는 세 가지 자료들 – 나폴레옹 시기의 전쟁들에 관한 역사적인 해설, 허구적 인물들의 전기들, 그리고 역사의 철학에 관한 일단의 수필들 – 을 담고 있다. 1860 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비평가들은 어째서 이들 세 부분들이 밀착할 수 있는지 놀라고 있으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톨스토이가 장문의 수필들을 포함한 것을 트집잡고 있으나, 독자들은 줄어들지 않는 열정으로서 계속해서 그것들에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작품의 역사 관련 부분은 아우스터리츠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승리로 이끌고간 1805년의 전투, 평화의 시기, 그리고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정된 시각들과는 반대로,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을 무능하며, 자기중심광적인 어릿광대로, 황제인 알렉산더 1세를 역사가들이 그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에 집착하는 공언가로, 그리고 러시아인 장군인 미카일 카투조프(이전에는 비난 받았다)를 인간의 의지와 계획의 한계들을 깨닫고 있는 참을성 있는 노인으로 묘사한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소설의 전쟁 장면들로서, 전투는 혼란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장군들은 그들이 “모든 부수적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상상할지 모르지만, 전쟁은 정말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 의하여 순간에 결정되는 “수백만 가지의 다양한 우연들”의 결과이다.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는, 어떤 제도 또는 모델도 인간 행동의 무한한 복잡성에 대한 설명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소설책의 허구적 인물들 중에서, 독자들의 관심은은 제일 먼저 안드레이 볼콘스티 공작에 초점이 주어지는데, 그는 모든 것을 가짜이며, 천박하거나, 단순히 진부한 것으로 경멸해 온 거만한 사람이다. 상류 사회의 위선을 인정하면서, 그는 영광을 얻기 위하여 군대에 들어가며, 이것을 그는 진정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여긴다. 아우스터리츠에서 심하게 부상당하고 나서, 그는 영광과 나폴레옹을 성 페테스부르크의 사교모임들 만큼이나 시시한 것으로 보게 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안드레이 공작은 자신이 헌신하였던 활동들에 대하여 되풀이하여 공허함을 발견한다. 1812년 그이 죽음에 대한 톨스토이의 묘사는 흔히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효과적인 장면들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소설의 또 하나의 주인공은, 실수를 연발하며 성실한 피에르 베주코프로서, 모든 의문들을 해결할 것을 약속해 주는 어떤 철학적 체계에 대한 믿음과 그를 무감각한 절망으로 밀어 부칠 만큼 절대적인 상대성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는 적어도, 지혜는 체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의 삶의 평범한 진행과정들에서 발견되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톨스토이적인 진리를 발견하며, 특별히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주인공인, 나타샤와 그의 결혼에서 그러하다. 책이 멈출 때에 – 사실 그것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칠 뿐이다 – 피에르는 새로운 유토피아적 계획에 대한 그의 흥분으로 이런 교훈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흥미 없고, 일상적인 활동들이 삶을 유익하거나 악하게 만든다는 톨스토이의 사상과 관련하여, 책 속의 진정한 지혜 있는 인물들은 지식인들이 아니라 단순하며 점잖은 병사인 나타샤의 형제인, 니콜라이, 그리고 관대하며 신앙심이 깊은 여자인, 안드레이의 누이 마리아이다. 그들의 결혼은 소설의 중심적인 진부한 가치들을 상징한다. 전쟁과 평화에 들어 있는 수필들은, 책의 두 번째 중반부에서 시작하는데, 역사에 관한 일반 법칙들을 세우려 하는 모든 시도들을 풍자하며, 모든 역사적 서술들을 지지하는 무분별한 억측들을 거부한다. 톨스토이의 관점에서, 역사는, 전쟁처럼, 근본적으로 우연성의 산물이고, 아무런 방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무런 틀에도 들어 맞지 않는다.역사적 사건들의 원인들은 무한히 변하며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역사에 관한 서술은, 과거를 설명한다고 주장하지만, 필연적으로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역사적 기술들의 형태는 사건들의 사실적 과정이 아니라 이전의 역사적 서술들에 의해서 확립된 근본적으로 문학적인 기준들을 반영한다. 톨스토이의 수필들에 의하면, 역사가들도 역시 수많은 다른 긴밀히 연결된 오류들을 범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가 위대한 사람들 -장군들이거나 정치 지도자들이거나 또는 그들과 같은 지식인들 -의 계획들과 사상들로서 모양을 가지며 그 방향은 주요 결정들에 이르는 극적인 순간들에서 결정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사실상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비록 그들의 행동들이 문서화 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취해지는 무수히 많은 작은 결정들의 총계에 의하여 만들어 진다. 톨스토이가 설명하듯이, 거대한 사건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오직 나무의 꼭대기들 만이 보이는 먼 지역의 시각으로부터 그 지역이 오로지 나무들만 포함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소설은 그 독자들에게 제각기 조그만 영향을 행사하는 조그만 사건들의 무수한 예들을 준다 – 바로 그것이 전쟁과 평화가 너무 길다는 한 가지 이유이다. 평범한 것의 효용성과 제도 구축의 무용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신념은 그의 시대의 사상가들과 그를 대치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가장 논란이 되는 측면들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안나 카레니나 (1875-77)에서 톨스토이는 이와 같은 사상들을 가족의 삶에 적용하였다. 소설의 첫 번째 문장은, 가정적인 관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마도 톨스토이의 가장 유명한: “모든 행복한 가정들은 서로 닮아 있다; 제각기 불행한 가정은 그 나름대로 불행하다”일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세 가정 (오블론스키, 카레닌 및 레빈)의 이야기들을 엮어 간다. 소설은 오블론스키의 가정에서 시작되는데, 그곳에선 참을성 많은 돌리가 그녀의 다정하며 방탕한 남편 스티바의 부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의 친절함, 그녀의 가족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일상 생활에 대한 관심 안에서, 돌리는 소설 속의 도덕적 나침반으로 서게 된다. 대조적으로, 스티바는, 비록 결코 악을 바라진 않지만, 재산을 낭비하고, 자신의 가족을 등한시하며, 그리고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여긴다. 스티바가 상징하는 것은 아마도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매 순간마다 내리는 조그만 도덕적 선택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암시하도록 구상된 것이다. 스티바의 누이인 안나는 뻣뻣하고, 현실적이지만, 다른 면에선 정부 각료인 알렉세이 카레닌의 아내로 그리고 어린 소년, 세리오자의 어머니로 소설을 시작한다. 그러나 안나는, 자신을 낭만적 소설의 주인공으로 상상하여서, 스스로 장교인 알렉세이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도록 한다. 그녀의 남편에게서 오직 최악 만을 보도록 훈련하고서, 그녀는 결국 브론스키와 살기 위해 그와 그녀의 아들을 떠난다. 소설 전체를 통하여, 톨스토이는 사랑에 대한 낭만적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 그 자체인 것으로 동일시하는데, 우월한 종류의 사랑, 즉, 훌륭한 가정들의 편안한 사랑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안나는, 그녀의 남편과 자식을 버린 데 대한 양심의 고통을 겪으며, 거의 미친 상태에 그리고 현실과의 완전한 격리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를 속이는 습관을 발전시킨다. 그녀는 마침내 기차 밑으로 뛰어들면서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가 삶에 대해 틀리게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자각은 오직 그녀가 철길 위에 누워 있을 때 그녀에게 다가오고,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세 번째의 이야기는 돌리의 누이인 키티와 관련한 것으로, 그녀는 처음에 자신이 브론스키를 사랑한다고 상상하지만 그때 진정한 사랑은 그녀의 가정의 오랜 친구인, 콘스탄틴 레빈에 대해 가진 편안한 느낌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구애, 결혼, 그리고 가정의 삶의 평범한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며, 그들은, 많은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행복과 의미 있는 존재를 다듬어 나간다. 소설 전체를 통하여, 레빈은 죽음에 직면하는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의문들에 의해서 고통 받는다. 비록 이런 의문들은 결코 답을 얻지 못하지만, 그것들은, 레빈이 자신의 가정과 일상의 일에 전념하면서 올바르게 살기 시작할 때, 사라진다. 그를 창조한 톨스토이처럼, 레빈은 지식인들의 체계들을 위선이며 삶의 복잡함을 껴안을 수 없다고 여긴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는 공히 윤리학은 특정한 상황들에 적용되는 시간을 초월한 원칙들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사상을 전개한다. 오히려, 윤리학은 감수성에 의존하며, 평생을 통하여, 특정한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특정한 상황들로 발전된다. 톨스토이의 추상성들에 대한 특수성의 선호는 종종 그의 사상의 특성으로 묘사한다.

– 종교적 신념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자마자, 톨스토이는 깊은 존재적 절망감에 빠지며,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Ispoved (1884; 나의 고백)에서 묘사하고 있다. 죽음을 맞이할 때에 모든 활동은 철저히 의미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보통 사람들의 신앙에 감명을 받고서, 종교에 귀의하였다. 처음엔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러시아 정교에 몰두하였으나, 그는 신속히, 그것과 모든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속속들이 왜곡한 부패한 단체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믿은 것이 그리스도의 메시지임을 발견하고서 그리고 죽음에 대한 무기력한 두려움을 극복한 뒤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의 나머지를 그의 새로운 신앙을 발전시키며 전파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1880년대 초기에 그는 세편의 긴밀히 연관된 작품들, Issledovaniye dogmaticheskogo bogosloviya (1880년에 집필; 교리적 신학의 연구), Soyedineniye i perevod chetyrokh yevangeliy (1881년에 집필; 4 복음서의 합일과 해석), 및 V chyom moya vera? ( 1884년에 집필; 나는 무엇을 믿는가)을 집필하였다; 그는 후일 Tsarstvo bozhiye vnutri vas (1893;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및 많은 다른 논문들 및 소 논문들을 집필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톨스토이는 모든 성례들, 모든 기적들, 삼위 일체, 영혼 불멸 및 많은 다른 전통적 종교의 강령들을 거부하였으며,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특별히, 산상 설교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의 참된 메시지를 흐리게 하는 것들이라고 여겼다. 그는 구약성서 및 많은 부분의 신약성서를 거부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그리스어를 연구한 뒤에 자기 자신의 “교정된” 복음서 버전을 창작한 이유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서 그가 일컫는 바, “예수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오직 삶에 대한 진실한 설명에 도달한 현명한 사람이었다. 톨스토이의 종교적 의례의 거부는 안나 카레니나에서의 자신의 경향과 두드러지게 대조되는데, 그곳에서 종교는 교리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전통적인 형태들로서 보여지고 있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 당하였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톨스토이의 과거 수십년 간의 그리스도교는 다섯 가지 신조를 강조하였다: 화를 내지 말라, 정욕을 갖지 말라, 맹세를 하지 말라, 악에 저항하지 말라, 그리고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악에 대한 무저항은, 간디에게 영감 준 교리로서, 악이 반드시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한 방법, 특히 폭력으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톨스토이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정부가 그들의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폭력의 위협에 의존하기 때문에, 톨스토이는 일종의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병역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투표나 법정에 호소함을 삼가라고 권고했다. 그는 그러므로 자신의 유언을 작성하거나 심지어 유익한 사업들에도 저작권에 의하여 확보된 로열티들을 사용할 때에 상당한 내적인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톨스토이는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는 것에 성공하지 못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 (약속들을 포함하여) 맹세들에 반대하는 명령을 자신의 초기 작품으로부터 각색한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미래를 아는 것의 불가능성 그러므로 사전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위험이 그것이었다. 정욕에 반대하는 계명은 결국 그로 하여금 완전한 금욕을 이상으로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는 남자에 관한 어두운 중편소설인 그의 Kreytserova sonata [1891; 크로이체 소나타]에 대한 후기에서 )제안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아내는, 이미 그들의 억지스런 관계들에 걱정하면서, 거부하였다. 그의 가장 극단적인 사상들을 수호하기 위하여, 톨스토이는 그리스도교를 정지해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지니게 되는 등불과 비유하였다; 그것은 인류가 영적으로 진보함에 따라서 언제나 새로운 도덕적 영역들을 밝히며 언제나 더 높은 이상들을 드러낸다.

– 후기

안나 카레니나 이후의 톨스토이의 소설문학은 두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도덕적 이야기들을 썼는데, “Gde lyubov, tam i bog” (1885년 기록;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 “Chem lyudi zhivy” (1882년 기록;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리고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세계의 문학이 아는 한 가장 훌륭한 이야기”라고 다소 지나치게 칭찬하였던, “Mnogo li cheloveku zemli nuzhno” (1885년 기록; “사람은 얼마나 많은 토지가 필요한가”) 등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톨스토이는 현실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교훈적인 소설을 썼다. 이들 작품들 중 일부는 멋지게 성공하였으며, 특히 Smert Ivana Ilicha (1886년 기록; 이반 일리치의 죽음)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으며 자신의 삶이 사소한 것들에 낭비되었음을 점차 깨닫는 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중편 소설이다. Otets Sergy (1898에 작성; 신부 세르지오스)는, 톨스토이의 자아 비판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으로, 성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성자는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오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말해 준다. 거대한 성인으로 여겨지지만, 세르지오스는 자신의 명성이 근거 없음을 깨닫게 된다; 꿈으로 경고를 받고서, 그가 어릴 때부터 알아 왔던 소박하며 기품 있는 여자를 찾기 위해 몰래 탈출한다. 마침내 그는 그가 아니라 그녀가 성자이며, 참된 성자는 자기 자신의 일상적인 선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임을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그러므로 톨스토이가 그의 초기의 위대한 소설들의 시각으로부터 자신의 개종 후에 옹호하던 사상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1899년 톨스토이는 그의 세 번째로 긴 소설인, Voskreseniye (부활)을 출판하였다; 그는 로열티를 박해 받던 종교적 분파인, 두호보르의 캐나다로의 이주를 지불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소설의 주인공, 나태한 귀족인 드미트리 네클루도프로는, 배심원으로 나갔다가 피고를 알아보는데, 창녀인 카추사 마슬로바를 한 여성으로서 그가 과거에 유혹한 적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그녀를 범죄적 삶으로 내몬 것이었다. 그녀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 받은 후에, 그는 그녀를 따라가기로 그리고, 만일 그녀가 동의한다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소설의 가장 주목할 만한 대화에서, 그녀는 그의 위선에 대해 비난한다: 과거에 당신은 나로부터 쾌락을 찾았으며, 이제 당신은 나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하는군요,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소설이 끝나가면서, 네클루도프는, 마침내 그가 톨스토이적인 진리들을, 특히 다른 사람들을 판단함에 대한 어리석음을, 이해하면서 영적인 각성을 성취한다. 소설의 가장 유명한 장들이 교회와 법률 제도를 풍자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개종은 그에게 예술에 관한 한 권의 책과 여러 편의 논문들을 쓰도록 하였다. 때때로 그는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그가 언제나 주장하던 사상들을 표현하였지만, 또한 때때로 그는 자기 자신의 초기 소설들과 양립하지 않는 사상들을 지지하였으며, 초기의 것들을 거부하였다. Chto takoye iskusstvo? (1898; 예술은 무엇인가?)에서 그는 참된 예술은 특정한 경험에, 즉 명제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염”에 의해서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매우 구체적인 느낌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톨스토이의 시각에서, 높은 예술성을 가진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실제적 경험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 예술의 영리한 모방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사실상 전혀 예술이 아닌 “위조된” 작품들이다. 톨스토이는 더욱이 참된 예술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며, 이는 주어진 작품들이 청중을 물들이는 도덕적 감각력에 달려있다. 대부분의 인정된 대작들을, 쉐익스피어의 희곡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위대한 소설들을 포함하여, 모조이거나 악하다고 비난하면서, 톨스토이는 칭송의 목적으로 성서의 요셉 이야기 그리고, 러시아인의 작품들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은 자의 집] 그리고 그의 젊은 친구인 안톤 체호프의 일부 이야기들을 선별하였다. 그러나 그는 체호프의 드라마에는 냉담하였으며, 어느 유명한 재담에서 한번은 체호프에게 그의 희곡이 셰익스피어의 것들 보다 훨씬 조잡하다고 말했다.

톨스토이의 만년의 작품들에는 또한 풍자극 Zhivoy trup (1900년 작; 살아있는 시체), 그리고 농부의 삶에 대한 비참한 희곡, Vlast tmy (1886년 작; 어둠의 힘)을 포함한다. 그의 사후에, 수많은 출판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가장 주목받는 것은 중편 소설 Khadji-Murat (1904; 하지 무라트)로서, 톨스토이의 초기 소설을 연상케 하는 코카서스에 대한 훌륭한 서술이다.

○ 작품세계

– 리얼리즘
톨스토이는 ‘인간의 심리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 분석’을 통하여 최상의 리얼리즘을 성취해 냈다. 이 작가는 일상의 형식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거짓, 허위, 가식, 기만을 벗겨내고자 했다.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는 레닌의 말처럼, 톨스토이는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이 준비되고 있던 시기를 적확(的確)하게 묘사하면서, 그의 문학과 사상을 사회혁명에 용해시켰다. 나아가서 전 인류의 예술적 발전을 한 걸음 진전시키는 데 그의 문학과 사상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 두 개의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라는 ‘두 얼굴의 톨스토이’가 있다. 톨스토이의 세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운다. 후기로 갈수록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우는 그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주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전일성이 드러난 세계로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사상가로서 톨스토이를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 말고, 영적인 탐구심에 기초한 도덕적 태도의 통일성에 기초해서 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의 창작 세계의 전일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구원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이자 인생의 교사로서 이런 관념들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에서는 자족적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기 완결적 순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념을 통하여 그리고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하여 절대적 지각자로서의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하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

○ 활동

– 비판적 지식인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민중들에게 무관심한 교회(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여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1901년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감독기관인 종무원으로부터 파문당했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활약하였다.

– 행동하는 지식인
톨스토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몸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어서, 귀족들의 방해로 폐교되기는 했지만 1860년 고향 툴라에서 농민학교를 운영하여, 부모의 강요로 아동노동을 하는 게 전부였던 농민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게 해주었다. 당시 부모들은 처음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톨스토이가 진심으로 농민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이들을 기꺼이 학교에 보냈다. 농민학교는 자유로웠는데, 이는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서 진짜 교육이 진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에는 직접 교과서를 쓰기도 했는데, 농민과 귀족이 평등하게 교육받도록 한 내용 때문에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을 멸시하는 귀족들은 농민들과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거센 반발을 일으켰지만, 자신들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농민들에게는 칭찬을 들었다.

– 기독교 신앙
톨스토이가 1894년에 저서한 ‘하느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에서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인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고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다. 또한 그는 죽기 전 며칠 전인 1910년 11월 1일 자신의 딸 사샤에게 보내는 편지에 “하느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느님께만 존재한다…” 고 말했다. (“God is the limitless All of which man realises himself to be a limited part. The truth exists only in God…”) 또한 그는 기독교의 영성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까지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제로 그의 단편소설인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오 복음서 25장 40절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라는 단편소설은 폭력은 문제를 더 심하게 만들 뿐,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평화주의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 극작가로서의 활동
톨스토이는 1850년대에 이미 투르게네프나 오스트로프스키의 영향을 받아 극작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근대 연극사에서 유명하게 한 것은 주로 ‘어둠의 힘'(1886), ‘교육의 열매'(1891), ‘산송장'(1911) 등의 작품이라 하겠다. ‘어둠의 힘’은 실화에 의거해 러시아 농민의 음산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 자연주의 희곡으로 뛰어난 작품이며 러시아에서는 상연이 금지되어 프랑스에서 초연했다. ‘교육의 열매’는 시골 귀족의 무의미한 생활을 풍자한 것. ‘산송장’은 기독교적 자기 희생과 결혼법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 유럽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와 ‘부활’은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각색, 상연한 바 있다.

○ 작품들

– 장편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 중.단편
세바스토폴 이야기
카프카스의 포로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하느님은 아시지만 기다리신다
세 현자들
하지 무라트
크로이체르 소나타
가정의 행복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악마

– 사상
예술이란 무엇인가
참회록(고백록)
교회와 국가
인생론
인생독본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