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잠에서 깨어난 도시, 폼페이 (Pompeii)
폼페이(이: Pompeii)는 고대 로마의 도시이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주 나폴리 인근으로, 현재 행정 구역으로는 폼페이 코무네에 속한다.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산 분화로 인근의 헤르쿨라네움등과 함께 화산재와 분석에 묻혀 파괴되었다.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다.

○ 폼페이 발굴
폼페이 발굴은 1592년 수로공사 중에 유적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1748년 발굴로 광장, 목욕탕, 원형극장, 약국 등의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3분의 2가 발굴되었다. 작업이 완료된다면 로마 미술의 최고걸작으로 평가받는 ‘큐피드 벽화’와 ‘춤추는 폰의 동상’ 등 수준높은 문화재들이 더욱 많이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1월 6일, ‘검투사의 집’이 폭우로 인해 붕괴되었다.
○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분출물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어버렸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당시 로마의 정치가 소(小)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서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소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다. 폭발 당일 소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소(小)플리니우스에게 알려주었다. 소(小)플리니우스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재빨리 어머니와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의 숙부인 플리니우스는 당시 함대의 제독으로 군함을 타고 나가 구조 활동을 펼쳤지만 독성이 강한 화산 가스에 질식해 그만 죽고 말았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 티투스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 잠에서 깨어난 로마의 도시, 폼페이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4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4/5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나온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최후
타락한 도시의 신의 벌이라고 불리는 폼페이의 최후는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가 멸망하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여서 약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로마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광장과 대규모의 호화스러운 건물과 극장, 상가,그리고 당시의 최고의 설비를 자랑하던 스타비안 목욕탕(Stabian_baths)이 화산재에 묻히고 말았다. 화산 폭발 후 조사차 이곳을 방문한 플리니우스도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며 피해상황이 하도 엄청나서 로마는 폼페이의 발굴 및 재건에 손도 못 댔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굴꾼만 득실대었다고 한다.
○ 위치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 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으며, 사르누스(지금의 사르노) 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돌출부 위에 건설되었다. 폼페이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격렬한 폭발에 의해 헤르쿨라네움 및 스타비아이와 함께 매몰되었다. 이 고대도시들의 유적들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늘날의 폼페이 시(인구 2만 5,081명, 1991)는 고대도시의 동쪽에 있으며, 순례요지인 산타마리아델로사리오 바실리카가 있다.
○ 문학
에드워드 조지 불워 리턴의 ‘폼페이 최후의 날’이 있다.

○ 유네스코의 ‘폼페이·헤르쿨라네움·토레 아눈치아타 고고 지구’ 소개
국가 : 이탈리아(Italy)
위치 : 캄파니아 주(Campania), 나폴리 현(Province of Naples)
좌표 : N40 45 0, E14 28 60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로마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폼페이(Pompeii)와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그리고 이 지역의 많은 주택들이 화산재에 묻혀버렸다. 이 지역은 18세기 중반부터 발굴되기 시작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상업 도시 폼페이의 광막한 공간은, 폼페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보존상태가 좋은 휴양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과 대비를 이룬다. 한편 토레 아눈치아타(Torre Annunziata)의 오플론티스(Oplontis) 저택의 벽화는 초기 로마 제국의 부유한 시민들이 향유한 호사스러운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영문명 : Archaeological Areas of Pompeii, Herculaneum and Torre Annunziata
.등재기준
기준 (ⅲ)(ⅳ)(ⅴ): 서기 79년에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묻힌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들은 특정한 과거 시점의 사회상 및 생활상에 대한 생생하면서도 완전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배경
폼페이는 기원전 6세기의 오피시아를 기반으로 한다. 역사가인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소스는 헤르쿨레스가 에스파냐에서 그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고대 도시인 헤르쿨라네움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두 곳 모두 다음 몇 세기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오스칸, 삼니움, 그리스, 에트루리아의 동맹 도시를 거쳤고 마침내 기원전 89년, 동맹시 전쟁 끝에 로마의 동맹 도시가 되었다. 이 시기에 쿠마이 인근처럼 그리스 식민지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헬레니즘의 지배를 받았다. 폼페이는 기원전 89년, 폼페이는 콜로니아 코르넬리아 베네라 폼페이아나(Colonia Cornelia Venera Pompeiana, 시민권이 부여된 로마의 정식 공동체 도시)로 격상되었다. 반면 헤르쿨라네움은 그보다 격이 낮은 자치 도시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발굴 작업을 통해 폼페이의 발전상이 드러났다. 로마인 마을 남서쪽에 위치한 최초의 주거지는 기원전 4세기에 삼니움인들이 요새화했다. 그러나 로마가 점령하면서 새 성벽과 내부 흙벽을 쌓아 보강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훼손되었다. 초기 도시에는 데쿠마니(decumani)라 불리는 2개의 도로를 가로지르는 카르도(Cardo, 간선 도로)가 있었다. 기원전 2~기원전 1세기, 주 건축 재료가 석회석으로 대치되면서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극장과 더불어 삼각형 열주로 된 포럼이 남쪽의 고대 도리아 양식 신전 주위에 지어졌다. 나중에 지은 두 번째 포럼은 신전에 공식적으로 신성을 부여하기 위해 직사각형으로 연장되어 덧붙여졌다.
폼페이는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대형 원형 경기장, 포럼식 목욕탕, 극장과 나란히 지어진 오데온(소극장) 같은 훌륭한 석조 공공건물들이 들어섬으로써 금상첨화가 되어 갔다. 기원전 1세기 말, 사모 강의 물을 끌어오는 수로 건설과 함께 더욱 발전되었는데, 집과 목욕탕, 공공 분수대로 물을 공급하는 정교한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도로를 따라 높은 보도도 조성했다.
헤르쿨라네움은 해안 위의 매우 작은(벽 안쪽으로 320 × 370m) 지역에 있었다. 전통적인 표준 ‘대경기장(Hippodaminan)’식의 구획에 의한 최종적인 배치가 이루어진 시기는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로인 데쿠마누스 막시무스(Decumanus Maximus)는 포럼처럼 광장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옆으로는 재판정, 헤르쿨레스 신전, 극장, 공공 목욕탕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심의 주택들은 웅장했으며, 당시에는 도시의 오른쪽으로 바다 전망을 끼고 있었다. 성벽 바깥에는 사당, 목욕탕이 있는 종교적인 장소가 있었다. 또한 웅장한 파피리(Papyri) 저택 같은 많은 주택들이 있었다.
두 도시의 역할은 매우 달랐다. 폼페이는 쿠마이와 캄파니아 남부를 잇는 해안 도로, 내륙과 해안, 사모 강을 통한 활발한 무역 중심지로서 상업 도시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포도주 생산지였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도 많은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반면 헤르쿨라네움은 경관이 좋고 쉽게 바다로 나갈 수 있어서 이 지역의 부유한 로마 인들이 머무는 휴양지였다. 그러나 잠시 동안 지진 복구를 위한 재건 작업이 한창이던 두 도시는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다. 폼페이는 화산재와 바위에 묻혔고, 헤르쿨라네움은 화쇄암과 흙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산면적: 98㏊
.완충지역: 24㏊
.참고번호: 829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지역 주택과 마을의 인상적인 유적은 땅속에 묻혀 버렸다. 발굴된 이 유적은 마치 특정 순간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은 듯 그 순간의 일상생활과 사회를 완벽하고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현장성 있는 유적이다.
폼페이는 기원전 6세기의 오피시아(Opicia)를 기반으로 한다. 역사가인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헤라클레스가 고대 도시인 헤르쿨라네움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두 곳 모두 다음 몇 세기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오스칸, 삼니움, 그리스, 에트루리아의 동맹 도시를 거쳤고 마침내 기원전 89년, 동맹시 전쟁(Social War, 同盟市戰爭) 끝에 로마의 동맹 도시가 되었다. 바로 이 해에 폼페이는 콜로니아 코르넬리아 베네라 폼페이아나(Colonia Cornelia Venera Pompeiana, 시민권이 부여된 로마의 정식 공동체 도시)로 격상되었다.
반면 헤르쿨라네움은 그보다 격이 낮은 자치 도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지진 복구를 위한 재건 작업이 한창이던 두 도시는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폼페이는 화산재와 바위에 묻혔고, 헤르쿨라네움은 화쇄암과 흙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파묻힌 두 도시가 발견된 18세기 이후, 헤르쿨라네움보다는 폼페이의 유적이 더 많이 발굴되었다. 주 광장 양 옆으로는 카피톨리움(Capitolium, 세 주신인 주피터·주노·미네르바를 모시는 신전), 바실리카(재판정), 공중목욕탕의 유구와 같은 인상적인 공공건물들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삼각형 포럼(forum)에 2개의 극장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그리스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뒤에 로마 인의 취향에 맞게 개조된 것이다.
눈에 띄는 다른 공공건물로는 보존 상태가 훌륭한 기원전 2세기의 스타비안 목욕탕(Stabian Baths)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폼페이는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자리 잡고 있는 여러 주택들이 유명하다. 먼저 중앙에 안뜰이 있는 홀을 가진 아트리움 주택을 들 수 있는데, ‘외과 의사의 집(House of the Surgeon)’으로 이름 붙여진 집이 바로 이러한 양식의 좋은 예이다.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주택은 규모가 커지고 원주와 아케이드로 장식되었으며, 사교 모임을 위한 사회적 기능이 있는 큰 방들을 갖추었다.
로마 제국의 모든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주택 양식은 극단적으로 수많은 방이 있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제대로 갖춘 궁전과 같은 저택으로 발전했다. 파우누스 저택(Houses of the Faun) 그리고 ‘정숙한 연인의 집’이라 불리는 곳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폼페이에서 가장 이례적인 주택은 ‘수수께끼의 집’이라 불리는 곳일 것이다. 성 밖에 있는 이 커다란 시설물은 기원전 3세기에 지어진 소박한 타운하우스가 발전한 것으로, 확연하게 눈에 띄는 트리클리니움(triclinium) 방의 (수수께끼로 가득 찬) 벽화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벽화에는 디오니소스 숭배를 위한 입회 의식이 묘사되어 있다.
폼페이의 또 한 가지 특성은 벽에 새겨진 수많은 낙서이다. 선거철이 다가올 무렵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에 벽에는 수많은 구호가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이고 상스러운 낙서도 있다. 나폴리 만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유적은 깊숙이 묻혀 있기 때문에 그 규모가 폼페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도시를 덮은 화산재의 특성 때문에 보존 상태는 더 좋은 편이다. 나무와 같은 유기물은 그대로 제자리에 있으며 많은 건물들의 2층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몇몇 인상적인 공공건물 또한 잘 보존되어 있다. 기념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는 널따란 소운동장(palaestra), 그 크기와 활기찬 장식이 기념비적인 도시형 목욕탕을 비롯한 두 곳의 공중목욕탕, 아우구스투스의 성직자 학교, 전형적인 극장 한 곳 등이다. 주택들 또한 그 크기와 장식이 눈에 띄는데, ‘200주년을 기리는 집’이라 불리는 곳이 대표적이다. ‘사슴의 집’처럼 바다 앞쪽에 있는 주택들은 넓은 뜰과 호사스러운 장식을 자랑한다.
완벽한 상점 때문에 상가 역시 주목할 만하며, 포도주 병과 같이 생긴 수많은 그릇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최근의 항구 지역 발굴 과정에서, 재난을 피하려다 결국은 질식해 목숨을 잃은 불행한 시민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창고가 발견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모두 조각, 모자이크, 무엇보다도 벽화를 통해 그 예술 양식을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유네스코 문화유산 위원회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