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 뒤틀려진 구원 바로잡기: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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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신학

뒤틀려진 구원 바로잡기: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구원

1.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구원받았습니까?” 이 질문은 구원파가 포교활동을 벌이면서 제일 처음 묻는 질문이다. 오래전부터 구원파를 비롯한 많은 이단들은 구원이란 진지한 질문을 빌미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잘못된 신앙으로 빠지게 해왔다. 구원이라는 개념은 모든 종교를 불문하고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사람들에게 가장 본질적이고 고유한 관심사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가? 그것은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최첨단의 과학을 가지고도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아직도 인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질병이나 재난이나 죽음 등은 종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고통과 악과 죽음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해방 될 수 있다면 구원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문명이 발달하여 우주를 왕복하고 복제 인간을 만드는 등 최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질병과 고통, 재난과 죽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과 악과 재난과 죽음 등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제한성과 불완전한 구조는 인간의 죄악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창 3:16-19; 롬 6:23, 7:15-23).

2.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제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류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근세기에 두 번에 걸쳐 일어난 세계대전은 인간의 근본 문제인 악과 고난을 인간의 이성과 능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인간 스스로 일어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철학자들도 전쟁의 참화에서 충격을 받아 인류와 문명의 구제책으로 생의 철학, 실존주의 철학사조를 일으켰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을 향해 “피투된 존재” 즉, “던져진 존재”라고 규정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마치 허무와 불안가운데 던져지고, 내팽개쳐진 고독한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이 언제나 까닭모를 고독과 불안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어찌보면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한 조각 나룻배 마냥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표류하는 존재이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 드리워져 있는 이 까닭모를 심연의 깊은 그림자는 고향을 잃은 인간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두려움가운데 숨어 있었던 아담 모습의 투영이기도 하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힘이 있었다면,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범죄하여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3. 구원이 필요한 인간

기독교는 이 땅에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죄악과 그로 인해 비롯된 여러가지 왜곡과 한계들(고통, 질병, 재난, 악, 죽음)에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타락하여 이 땅에 뒤틀림과 왜곡들을 가져오게 하였고 인간은 심판을 받고 유한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절대 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자기의지에 반하여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무한한 존재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으로 인해 유한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한됨과 무력함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은 인간에게 가장 의미있고 필요한 일인 것이다. 분명히 모든 인간은 구원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구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어떤 인간도 참된 만족과 해방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성경은 인간을 향해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고 정의한다. 성경을 보면 타락한 인간은 죽음과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주고 있다.

4.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나무위키를 찾아보면 구원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구원(救援), 일반적으로 어떤 것에서 구출되고 해방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나무위키는 구원에 대한 신학에서의 정의를 “신학에서 쓰이는 용어로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원론은 이 구원을 연구하는 세부 항목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구원(Salvation)이라는 영어 단어는 13세기, 약 1225년에 고대 프랑스어 salvationm라는 말로 처음 나타난다. 어원은 구출하다는 뜻의 라틴어 salvation, 그리 스어 soteria를 옮긴 것이다. 대적으로부터의 해방, 보호, 죄로부터의 구속, 영생, 그리고 성화의 과정이다. 또한 구원에는 치유, 건강, 염려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평안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나무위키의 정의대로 ‘구원’이라는 의미에는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대적으로부터의 구원부터,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그리고 영생이라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5. 한국교회의 뒤틀려진 구원관

그런데 현대 기독교와 한국교회의 구원에 대한 이해는 “예수 믿고 죄용서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좀 더 단적으로 말하자면,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 즉 인간이 죽은 후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썩지만 영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가 영원히 사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구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앞서 강의한 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서 살펴보았듯이 현대 기독교, 특히 한국기독교는 “하나님나라”를 한국의 무속종교와 유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천당”으로 환치시켜 대중들에게 잘못된 “천국관”을 심어 주었다.

성경에서 예수가 선포했던 “천국” 즉 “하나님나라”는 분명 한국 전통 개념인 “천당”과는 다른 개념이다.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구원관을 과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구원관에는 세 가지 내용이 함의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다른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는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로 한정시키는 문제이다(사후 천당행).

두 번째는 구원은 죄 많은 이 땅에서 저천성, 천당으로 옮겨지는 것이다(공간이동으로 한 정).

세 번째는 구원은 영혼이 받는 것이다(육신은 땅으로 돌아가 소멸하고 영혼만 구원받음).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죽음 후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천국행 구원관의 핵심인데 이 세 가지 내용은 사실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이다.

아시다시피 이원론(dualism)은 이 세계가 두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예를 들어,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선과 악, 성과 속 등의 대립된 두 가지 원리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원론의 기본사상은 이 세상을 정신계와 물질계로 나누고 정신계에는 영혼, 예술, 철학 등이 속하며 이것들은 불변하며 완전하고 영적인 실재하는 이데아라고 보았던 반면에, 물질계에는 자연, 육체, 감각, 이성이 속하며 이것들은 가변적이고 불완전하며 가상적 그림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인간생활을 우열로 분열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원론은 염세주의와 영지주의에 노출되기 쉽다. 이 세상은 물질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벗어나야 할 장소이고, 등지고 살아야 곳이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집 아니네’ 이런 노래가 한국교회에서 유행했던 것은 이런 사상적 기반을 반영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원론은 인간성을 무시하고 신비주의를 조장시킨다. 이원론은 인간을 비인간화 시킨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정신계와 접촉하는 ‘신성한 광기의 네 가지 노하우’를 제시했는데, 그 네 가지는 모두 인간성을 무시하고 신비주의의 문을 여는 것들이었다. 그 네 가지는 예언(prophecy), 치유의 광기(healing madness), 예술적 영감(artistic inspiration), 신성한 사랑(divine love)이다. 이 네 가지가 강조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체험의 무용성이라 할 수 있다.

정신의 세계가 현현될 때 인간적인 것은 평가절하되고, 인간의 창조성은 무용지물이 되며, 세속적인 것은 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나, 음악 등 인생을 즐기고 재미를 추구하는 것을 멀리하기 위해 어떤 종교 단체에서는 성경이나 주기도문을 주문처럼 수백 번 반복해서 암송하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원론은 결국 이성을 신앙의 적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지성’ 즉 ‘생각하는 것’을 비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비이성주의를 부추긴다.

6. 이원론과 뒤틀려진 구원관의 문제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원론이 기독교의 구원관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이런 이원론의 영향으로 인해 하늘은 진리의 세계로서 영원불변의 세계이고, 땅은 물질의 세계로서 변화무쌍한 없어질 세계이기 때문에 없어질 땅보다는 영원한 하늘만을 강조하게 한 것이다. 인간 또한 영혼만이 영원불멸하는 존재의 근원이고, 육체는 변화무쌍한 물질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구원관은 영혼이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구원은 영혼이 물리적 세계를 떠나 영적세계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구원의 대상은 오직 영혼이고, 영혼의 해방은 오직 육체가 죽어야만 가능하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원론은 초대교회 교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기독교의 대신학자라 할 수 있는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신국론은 이러한 이원론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서구신학(라틴신학)은 이러한 어거스틴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는데, 이러한 라틴신학의 천국개념이 단테의 ‘신곡’에 와서 문학적으로 꽃피우게 되었다. 14세기 이탈리아 문학가 단테의 ‘신곡’은 이후 기독교세계에서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성경보다 더 생생하게 전달하게 되었고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성경적 개념을 왜곡시키고 현재 기독교인들이 상상하는 그릇된 ‘천국’ 개념을 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따르는 구원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플라톤의 이원론의 영향과 단테의 신곡의 영향을 받아 “예수 믿어서 죄사함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가 영원히 사는 것을 구원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이러한 사상을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구원이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고 있다. 성경은 오히려 정반대로 표현한다. 어그러지고 왜곡된 육체가 예수의 재림시 부활하여 영혼과 육체가 다시금 조화롭게 회복되고 갱신되는 것, 갈라진 하늘과 이 땅이 다시금 통합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설명한다(엡 1:10).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한다(마 6:10).

분명히 플라톤이 말하는 구원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다르다. 그런데 그동안 기독교와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이 아니라 플라톤이 말하는 구원관을 믿고 따라왔다. 플라톤 철학에 기초한 이원론적 사상의 구원관 – 1) 구원은 죽음이후의 문제다. 2) 구원은 이 땅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3) 구원은 죽은 후 육체는 썩어지고 영혼이 받는 것이다 -을 성경적 구원관인양 굳게 믿고 따라온 것이다.

7. 이원론적 구원관의 분석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적 구원관의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사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앞서 살펴보았지만 무속 신앙부터 다른 종교에도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2005년 한국인의 장례 문화에 대한 갤럽조사를 보면 한국인의 40.7%는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는다고 조사됐다. 이것은 기독교 인구 15%를 제외하면 25% 이상의 타종교 또는 무종교인이 죽음 이후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는 비기독교인들의 구원관은 무엇일까? 이들 중 대부분은 ‘착하게 살면 죽은 후에 영혼이 좋은 곳에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후에 좋은 곳에 가기위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사후세계가 ‘극락’이 되었든 ‘천국’이 되었든 이 세상보다는 좋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의 구원관은 이것과는 분명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천국가기 위해 ‘착하게 살면’이 아니라 대신 ‘예수를 믿으면’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사후세계도 ‘이 세상보다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사후세계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별 다를 바가 없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 외에 기독교인이 믿는 ‘사후천국’과 비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사후내세’의 구원관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사후세계를 가리켜 ‘천국’이라고 하느냐, ‘극락’이라고 하느냐, 아니면 ‘좋은 곳’이라고 하느냐만 다를 뿐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다’,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구원은 영혼이 받는 것이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좋은데 꼭 젊어서 믿어야 합니까? 내 맘껏 살다가 숨을 거두기 전에 믿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러한 질문의 요점은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심지어 교회안에 저변적으로 깔려있는 의식 때문이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또 이러한 질문을 교회안에서 종종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매(형제)님, 오늘 밤에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왜 사람들은 ‘자매(형제)님, 지금 천국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묻지 않고 ‘오늘 밤에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잠재의식 속에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여기에서도 보면, 예수님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으로 미래형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옮겼다”는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다.

산상수훈에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죽은 후에 천국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지금 천국을 본다고 말씀하고 있다(마 5:3).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에게도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다(눅 19:9). 12년 동안 혈루병 앓던 여인을 고치신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구원을 받았다(마 9:22). 또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안에 있다(눅 17:20-21)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건은 죽음 이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건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바울사도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고 말하고 있다. 죽은 후에 화평을 누릴 것이라 말하고 있지 않고 지금 여기서 화평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이 죽은 후의 천국행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여기서 참여하고 향유할 수 있는 선물로 구원을 베푸셨다.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신 것은 죽은 후에 우리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살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혼자서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살기 어렵기 때문에 함께 모여 공동체로 서로 격려하고 배우고, 함께 세워나가라고 교회라는 공동체로 부르신 것이다. 물론 여기, 이 세상에서의 구원이 온전할 수 없다. 종말의 그 날까지 우리의 구원은 부족한 구원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설명할 때, “Already, But yet: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설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구원은 죽은 후에나 이루어지는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역동적인 현실: Dynamic Realty’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지 않고 사는 자가 죽어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을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주요, 구세주로 인정하는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로 ‘구원이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천국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이해한다면 “예수 믿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생각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천국을 어떤 장소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닌 것이다.

지난 강의를 통해서도 강조했지만,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 영토를 설명하는 공간적 개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 당시 구약을 공유했던 유대인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성경에서 ‘천국’을 표기하고 있는 영어를 참조하면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천국’이 하늘의 어떤 장소를 의미한다면 영어는 ‘The Kingdom in Heaven’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영어로 ‘The Kingdom of Heaven / The Kingdom of God’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당’과 ‘천국’은 전혀 다른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천국은 ‘하나님의 다스림’ ‘통치’영역에 초점이 있다. 반면, 천당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는 무관한 ‘영혼들이 사는 세계’ 공간적, 장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어거스틴과 단테를 거치면서 서구교회에서도 천국을 장소적 개념으로만 대치시킨 결과이다.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영국교회의 상황을 이렇게 지적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기독교 가 구원받은 혹은 복받은 사람들이 들어가게 될 위에 있는 천국과, 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게 될 아래에 있는 지옥에 대해 가르친다고 생각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의 공적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톰 라이트의 말처럼 서구교회 역시 전통적으로 천국을 천당이요, 영혼들이 죽어서 가는 공간적, 장소적 개념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톰 라이트는 그의 책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에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직 저 천국만을 그리워하는 왜곡된 천국의 개념을 가진 자들에게 그러한 생각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톰 라이트는 하나님나라의 긍극적 완성은 종말론적 성취에서 이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성취된 새 창조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을 지적하면서,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전령이 되어 그분의 주되심을 온 세상에 공포하고 그분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 우리의 순종을 통해 임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경은 분명히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늘(영들의 세계)과 땅(물질의 세계)을 배타적인 두 세계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하늘과 땅을 하나의 세계로 바라본다. 하늘과 땅은 상호공존하고 협력해야하는 통합적 세계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세계관은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인 것을 알 수 있다. 바울 또한 이것을 에베소서에서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구원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고 더 이상 배척하지 않고 아름다운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사역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참된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천성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삶, 죽음의 권세에 굴복한 삶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출하셔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 불의한 것들에 대해 항거하고 불의를 바로잡는 삶, 평화를 추구하고, 부활의 소망을 품고 생명을 나누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선물 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처음으로 선포하였던 말씀은 바로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였다. 이 말씀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떠날 채비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에 도래 했으니 너희의 불의하고 부정한 삶의 방식을 전환하라는 말씀이었다. 계속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간구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도 “주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 또한 세계 열방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구원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사 2:4, 미 4:1-3). 또한 구원의 날이 이르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 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을 것이라”(사 11:6-8)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을 영혼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창조세계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육신은 죽고 영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것 또한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은 결코 영혼만이 구원받고 영혼만이 하늘나라에 간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구원받고, 우리 인생과 관련된 삶 전체가 구원받는다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피조세계 전체가 구원 받는다고 고백한다(롬 8:19-23).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심으로 물질적인 세상을 긍정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부활사건은 인간의 몸을 긍정하는 최고의 사건임을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사건은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는 메시지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시킨 사건은, 인간의 육체는 죽어 결코 썩어 없어질 값어치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에게도 그대로 강조되고 있다.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신다”(롬 8:11)고 강조한다. 또한 우리 모두가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롬 8:23). 이처럼 육체의 부활을 믿는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었다. 죽음으로 분리된 영혼과 육체가 다시 재결합 한다는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궁극적인 믿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믿음을 고백하고 가르쳤던 초대교회가 그리스, 로마 세계로 들어가자 육체를 폄훼하고, 육체를 부정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 후 플라톤의 이원론은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서구 기독교가 이러한 플라톤의 이원론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몰트만은 이렇게 비판한다. “교회의 신학이 영혼불멸이라는 플라톤의 관념을 일찍이 받아들였으며, 플라톤의 관념이 오늘날까지도 교회의 신학을 대변하고 있다.” 톰 라이트 역시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연유된 영혼만 구원받는다는 사상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와 하위 기독교전통은 우리에게 실제로 영혼이 있고, 구원을 받는다면 바로 그 영혼이 받으며, 구원의 내용인즉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대부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연되어 온 죽어서 가는 사후 천국관과 영혼만 천국에 간다는 사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져오게 했다.

1) 신앙과 삶의 분리를 가져왔다. 교회 안에서는 사후의 천국을 위해 신앙으로 살고 교회밖에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따라 사는 신앙과 삶의 괴리, 신앙과 삶이 통합 되지 못하고 분리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2) 신앙생활의 본질과 성격이 변질됐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본래 사후 천국행 보험이 아니라 현재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사는 것이고, 우리의 일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향유하며 사는 것인데, ‘사후 천국행’ 신앙에는 현실도피적인 신앙생활과 신앙을 내세를 위해 보험을 드는 행위로 바꾸어 놓았다.

3) 천국이 천당으로 바뀌었다.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롬 5:1)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현재의 삶 또한 중요한 것인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죽어서 옮겨가는 장소적 개념으로 변질되었다.

4)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사후 영혼만이 천국에 가는 신앙에는 영혼만이 참된 실재이고 영혼만이 구원에 참여하기 때문에 물질세계의 창조의 의미가 없어지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별의미가 없는 종교적 신화로 추락했다.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ks.j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