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 성경의 형성과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인문학과 신학 성경의 형성과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경이 우리 […]

인문학과 신학

성경의 형성과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경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

신학은 “성경”만 가지고서는 할 수 없는 학문임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성경”이 신학의 중요한 자원(resource)임에 분명하지만, 신학을 하기위해서는 “성경” 이외에 “전통(역사)”, “체험”, “이성”도 신학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자원(resource)임을 알았다. 그러나 신학의 여러 가지 자원중 “성경”은 가장 핵심되는 자원임에는 분명하다. “성경”이 없이는 우리는 바른 하나님 상(想)을 그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특별계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인간이 어떻게 무한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 당신 스스로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 오셔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드러내 보이신 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부르고 특별히 “성경”이라는 보물을 통해서 인간의 역사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우리는 “특별계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경”은 하루 아침에 이 땅에 떨어진 것은 아니다.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초대교회의 오랜 역사적 과정들을 거쳐서야 비로소 정경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먼저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성경의 정경화”라고 부른다. 초대교회가 신앙의 규범과 표준으로 삼는 성경의 정경화 작업에는 몇 가지 원칙들이 있다. 누가의 말대로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기록하려고 붓을 든 사람들이 많았고 초대교회는 실제로 여러가지 문서들이 유통되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 1:1-2).

신약성경의 정경화

초대교회는 예수에 관한 교훈과 행적들이 사도들을 통하여 구전(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으로 전해 졌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사도들이나 예수에게서 직접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기 시작하자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붓을 들어 기록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꽤 많은 문서들이 초대교회때 유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붓을 들어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기록했다고 다 정경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 가운데는 허무맹랑한 문서들도 많았고 신빙성이 의심되는 문서들도 있었다.

초대교회의 고민은 유통되는 이 문서들 가운데 어떤 것이 정확무오하고 신앙의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문서인가를 가려내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정경으로 구분하는 작업이 초대교회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였었다. 원래 정경(canon)이라는 말은 그리스말 카논(kanwn)에서 왔는데 이 말은 ‘곧은 막대기’라는 뜻이다. 카논은 칸나(canna), 즉 갈대(reed)라는 말에서 파생된 용어인데, 갈대는 인류가 제일 처음 무엇을 재는 척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정경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다른 것들과 비교해 볼 때 표준(standard)이 되고 신뢰할 만한 규범과 모범이 된다는 의미이다. 초대교회는 많은 문서들 가운데 신앙의 규범과 표준으로 삼을 만할 문서들을 어떻게 구별해 낼 것인가를 두고 오랜 기간 동안 고민해왔다.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의 표준으로 삼을 정경으로 구분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려 교회가 세워진지 3세기 반이 흘러서야 카르타고회의(397년)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약 성경 목록인 신약성경 27권을 정경으로 결정하였다.

정경결정은 어떤 개인이나 교회 공의회에서 독단적으로 결정되어진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경결정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받아들인다. 정경결정은 당시 초대교회에서 먼저 거룩한 책들로 인정받아서 수용되 어져 읽혀져 온 책들을 선별하였고 후에 공의회들을 거치며 교회회의에서 이를 인정하는 자연 스러운 역사적 흐름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400명이 넘는 초대 교회의 감독들은 오랜 세월 동안의 긴 회의 과정을 거쳐 정경을 가리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들을 세웠다. 정경을 결정하는 데에는 중요한 세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는 사도성이다. 즉 사도들과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받아 기록된 책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원칙이었다.

정경의 표준원칙으로 사도성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 택하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불리움을 받은 특별한 교제권안에 있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도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신적인 대리자로 그리스도에 의해 파송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전한 내용은 독특한 의미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사도들의 기록만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문서도 사도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마가나 누가, 그리고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사도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기록한 문서를 정경안에 포함 시킨 것은 그러한 예들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보편성이다. 그동안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거룩한 책으로 인정을 받아 읽혀져 왔는가? 하는 것이다.

누가의 기록대로 초대교회때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붓을 들었고 많은 신앙문서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유통되었다. 이처럼 초대교회에서는 다양한 신앙문서들이 각 시기와 장소에 따라 자유롭게 읽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 지역의 공동체 안에서 자연적으로 통일된 인식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신앙문서가 성도들을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인도하는 것을 보고 성도들은 신적인 권위가 신앙문서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자연스레 그것을 통하여 성경은 스스로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에게 신앙의 표준을 제시하고 구원과 삶에 영향을 끼친 문서들이 스스로 보전되어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세 번째는 신적인 권위를 입증하는 증거가 있는가?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감(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인가이다.

성경은 스스로 성령에 의해 기록된 책임을 천명한다(딤후 3:16-17; 벧후 1:21).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 공동체는 문서들을 회람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신적인 영향력이 있는 문서들을 가려낼 수 있었고 그 문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천명하는 성경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읽음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깨닫게 되며, 신앙의 진리를 확신하게 될 때 그 문서들은 정경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반면에 정통적인 신앙에 배치되거나 터무니없고, 허황된 이야기들로 가득 찬 문서들은 자연스럽게 공동체 안에서 안 읽혀지고 제외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성경 스스로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신적인 권위를 스스로 입증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긴 역사적 과정들을 거치면서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물론 신앙인들은 이런 역사적 과정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 후3:16).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구약성경의 경우

구약의 경우는 신약과는 다르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미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구약에 대하여 인정하는 태도가 있었다. 많은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상속받은 것은 구약성경이다. 비록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민인 자신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구약성경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구약 읽기를 즐겨 하셨으며 구약의 예를 들어 자신의 사역을 증명하셨다. 신약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께서 구약을 언급하며 구약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이자 신을 통하여 어떻게 성취 되었는지 보여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 당시와 교회 초기 시기에는 구약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39권 성경목록으로 아직 정경화된 시기는 아니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이 불타 없어지게 됨으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중심을 성전중심과 제사중심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중심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교에서는 거룩한 문서들로 읽혀지었던 책들은 있었으나 지금의 구약 39권의 목록으로는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AD90년경 얌니야에서 열린 얌니야 회의로 지금의 구약성경 39권을 확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초대교회에서는 유대교에서 형성된 39권의 구약을 자연스럽게 구약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경의 원저자와 그 중심 :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다?

중세의 안셀름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강조했다. 신앙에 관계된 사항을 알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 하지만,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제한된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는 없어도 안셀름의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신화화되고 초신비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주관적이고 잘못된 신앙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은 우리를 균형 잡힌 신앙으로 인도할 수 있다. 굳이 신앙의 합리성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후 그분이 우리와 의사소통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경”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이 해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속성들을 이해하고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검증 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성경관

결국,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신앙관들이 생성 된다. 성경을 이해할 때 우리는 역사적으로 몇 가지 서로 다른 견해들의 성경관이 존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이 성경의 영감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성경의 영감 (Inspiration)이란 성경의 책들이 쓰여진 신비로운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쉽게 말해 성경이 쓰여질 때 성령께서 성경의 기자들에게 어떻게 감동 하였느냐에 따라 역사적으로 세 가지 다른 입장들이 존재해 왔다.

그 중 맨 처음 견해는 성경이 쓰여질 때 인간들은 그저 성령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인간은 성령의 손에 붙잡힌 펜의 역할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기계적 영감(Mechanical Inspiration)”, 또는 “구술적 영감(Dictation Inspiration)”이라고 한다. 시대에 따라 기계적 영감을 “축자영감”, “완전축자영감”으로 불렀던 때도 있었다. 말 그대로 성경의 글자 한자 한자가 하나님께서 불러 주시는 대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들과 17세기 루터파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 일부에서 이런 주장들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성경의 영감과 관련된 두 번째 견해는 후기 계몽주의 영향으로 나온 것으로 성경의 “기계적 영감”, “구술적 영감”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견해이다. 성령께서 성경기자들을 조명하실 때 영적으로 “조명(Spiritual illumination)”한 정도에 그쳐 인간의 통찰력과 인간의 직관이 성경의 저작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기록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 개념 을 부인하고 오히려 성경저자들의 일반적인 영감, 그들의 영적 통찰력으로 대치시켜 버린다.

이 설에 의하면 성경의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제거되고 성경은 도덕적인 경전 수준에 머무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순전히 인간적인 산물이 되어 버리며, 하나님의 말씀이 오류를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용인하게 만든다. 이 이론은 성경이 최고의 진리를 담고 있지만 인간들의 영적인 통찰, 영적인 직관으로 기록되었기에 성경의 무오성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역동적 영감설 (Dynamic Inspiration)”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기자들을 사용하실때 성경기자들을 단순히 펜처럼 생각없는 필기자들로 사용하시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기자들에게 통찰력을 주어 직관에만 영향을 끼쳐 기록하게 한 것도 아니다.

세 번째 견해는 대다수의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이 동의하는 견해로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들을 사용하실 때 그들의 성격과 기질, 교육과 교양, 은사와 재능, 말씨, 문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 등 그들을 전인적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 기자들의 인격을 억압함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 등 모든 인격적 특성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성령과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유기적 관계 속에서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대다수 의 개혁주의 신앙인들이 고백하는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과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로보트처럼 강제적으로 다루시지 않고 억압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완전한 그리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완전하고 진실한 인간의 말이다. 하나님은 성경기자에게 말씀했지만, 그것을 말하고 쓰는 자들은 성경 기자들이다. 이들이 입신 상태에 들어가 성경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인격적 특성들이 성 경에 그대로 녹아져 표현되고 있는 것을 성경을 통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자들을 유기적(Organic)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성경의 중심

로마 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를 타협하여 하나님 계시의 출처를 성경과 교회의 전통(교황의 말) 둘 다 모두에게 권위를 두고 있다. 이에 반해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만이 구원을 위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이고 인간의 구원과 바른 하나님 인식을 위하여 성경계시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가 성경의 모든 부분에서 그 중심에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의 모든 사역을 통해서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고 가르친다. 성경은 예수 그 리스도 자신이 바로 구약 성경의 오래된 약속들의 성취인 것을 친히 보여주고 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또한 이사야 61장을 인용하며 예수는 “이 글이 오늘 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증거한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선물)이다. 이 성경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분과의 인격적인 교제안 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성경 어느 곳을 펴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른 성경해석법이라 할 수 있다.

성경 해석의 왕도 :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앞에서 보았듯이, 성경의 기록자는 인간이지만 성경은 성령과 성령을 받은 인간들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기록된 책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도 증거하듯이 성경은 사사로이 해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이 분명하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을 함부로 해석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가? 성경해석의 어떤 원칙들이 존재하는가? 등 질문들이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성경 해석학을 논하려면 앞으로 많은 지면에 걸쳐 논의하더라도 부족할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을 해석함에 성경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원칙들은 발견할 수 있다.

점진적(Progressive) 계시

호주의 유명한 세계적인 신학자 그레이엄 골드워디(Graeme Goldsworthy)가 강조하듯이 성경의 구원 메시지는 구약과 신약에 걸쳐 이어지는 구원 역사의 전개를 따라 점진적으로 계시(베일이 드러나고) 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해석은 이러한 성경의 점진적인 구원역사 사건들을 서술하며 해석해야 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성경에서 기록한 모든 메시지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보이는 구약성경의 부분들도 그리스도를 점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펴서 구약의 말씀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해 주신 것을 볼 수 있다.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 하시니라(눅 24:27).

이 설명을 듣고 실망하여 돌아가는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져셔 그가 바로 메시아, 구원자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실패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오신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언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진행하며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연결되어 서술된 것이다. 여러가지의 사건들이 이야기 되지만 결국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정을 향해 집중되며, 그 절정에 다 다른 후에도 그 절정에서 다시 “새 예루살렘의 중심,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역사의 중심이자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하듯이 성경의 기록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실패한 인간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성경해석의 중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 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4-48).

성경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계시하신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성경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성경은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여러가지 일들을 담고 있고 거기에 대한 좋은 가르침들과 권면들을 들을 수 있다. 수많은 도덕적인 조언들이 들어 있으며, 인생의 지혜와 경륜들 심지어는 시와 사랑의 노래들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요한복음 기자가 증거하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시다(요 1:14).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계시 하셨다. 인간 예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그러기에 말씀은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과 또한 그리스도 자신을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으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성경 어느 곳을 펴서 읽더라도 그 부분이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연구하고 고민해야 하며 읽는 그 부분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지, 그리스도가 얼마만큼 드러나고 있는지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읽는 방법들을 깨우쳐야 한다.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ks.j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