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신학적으로 죽음읽기 – 제1강 Memento Mori! (죽음에 대한 일반적 이해)

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신학적으로 죽음읽기 제1강 Memento Mori! (죽음에 대한 […]

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신학적으로 죽음읽기

제1강 Memento Mori! (죽음에 대한 일반적 이해)

들어가는 말
Memento Mori! 이 말의 뜻을 직역하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죽음을 잊지 말아라’인데 풀어서 말씀드리면 ‘너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입니다. memento란 영어로 remember이고 mori란 to die입니다. 이 경구가 만들어진 유래는 로마의 공화정 시대로부터 비롯됩니다. 전쟁에 나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들은 대개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화려한 퍼레이드를 펼쳤는데 바로 그 개선장군의 옆자리에는 이 승리한 장군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천한 노예 한 명을 앉혀놓고 행진이 계속되는 동안 내내 ‘Memento mori!’ ‘Memento mori!’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최고의 승리자에게 당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노예의 입을 통하여 ‘이겼다고 우쭐 거리지 마라’ ‘오늘 존경받는다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너 역시도 인간이고 모든 인간에게는 죽음의 날이 있다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말라’고 경고해 준데서 전해지는 말입니다. 동시에 퍼레이드의 제일 마지막에는 로마의 황제께서 친히 그 개선장군에게 관(coffin) 하나를 기념품으로 하사했는데 보통 그 관뚜껑에는 이런 말을 써놓았다고 전해집니다. ‘Momento mori’(너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Momento hominem esse’(그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Respice post te huminem te esse memento’(뒤를 돌아보아라 지금은 여기 있지만 다음엔 자네가 이 속으로 들어간다). 모두가 사실이고 엄숙하고 숙연한 행사요, 진실된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우리도 대통령 취임식이나 목사, 신부 안수식이나, 심지어는 결혼식장에서 이런 의미 깊은 performance를 해보면 어떨까요?).
Memento Mori와 관련해서는 또 하나의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예전 로마의 황제에게는 매우 특별한 업무가 주어진 신하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황제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침실로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Momento Mori! ‘폐하! 잊지마십시요. 폐하는 오늘도 죽는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하루 일을 시작하십시오!’
2016년 말 통계로 세계인구는 약 73억입니다. 이 가운데 1년에 죽는 사람은 약 5천만 명 정도로 거의 남한 인구에 육박합니다. 어림잡아 하루 평균 약 13만5천 명이 세상을 떠납니다. 호주통계청(ABS)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2018년 7월 호주 인구는 2천5백만 명이 되었습니다. 년중 신생아와 사망자 통계는 2016년 기준으로 1년에 약 31만2천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고 그 절반 정도인 약 16만 정도가 사망합니다. 하루에 죽는 사람이 약 440명입니다. 주말을 빼고 주 5일 동안 호주에서 치루어지는 장례식은 약 2,200건 정도입니다. 이것은 거의 사회 경제적 변동과는 상관없이 이어지는 현상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이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에 대한 정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도 않고 단순 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의견과 주장들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에게는 인간의 육체적 죽음의 의미 하나를 정의하는 일 조차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타인의 죽음을 옆에 서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의 여러가지 다양한 생각들은 물론이고 죽음에 대해 공부하는 의학자들, 과학자들, 종교인들, 그리고 요즘은 인문학자들과 사회학자들까지 끼어들어 지신들의 주장을 펼침으로 고려해야 할 폭이 퍽이나 많이 넓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의사들과 과학자들이 보는 생물학적 정의가 제일 앞에 옵니다. 그들은 ‘숨은 쉬는가?’ ‘심장은 뛰는가?’ ‘뇌는 활동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 본 다음 그 호흡과 맥박과 뇌 활동의 정지 같은 인체의 중요한 기능이 완전히 멈추고 그 셋 중 어느 하나라도 다시 돌이 킬 수 없다고 판정이 되었을 때를 죽음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 자체도 그리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뇌의 활동은 멈추어져 뇌사상태는 확인이 되었지만 인공호흡기를 이용하여 계속 기계적으로 숨을 쉬게 함으로 생명을 연장 시키는 의학적 기술이 발전됨으로 장기사나 심폐사 혹은 세포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상황이 더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의학자들이 보는 죽음의 정의는 훨씬 더 복잡해서 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고 따라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WHO는 ‘소생 할 가능성이 없는 삶의 완전한 종결 상태’를 죽음이라고 정의합니다만 이것 역시 언어적 및 문서적 선언으로는 이해 할 수 있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개별적 현실 상황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회학이나 문화인류학, 심리학이나 철학, 그리고 다 양한 종교들은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제각기 다른 이해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고대 원시 종교로부터 이집트인들의 신앙과 미이라, 전통적인 유대교의 주장, 힌두교와 불교에서의 사망관, 초기 그리스 철학과 후기 에피큐리안들이 펼쳐온 죽음에 대한 이해와 주장과 해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죽음에는 꼭 육체적 죽음 외에도 여러가지 다른 형태의 죽음들이 있습니다. 인격적 파산, 사회적 매장, 정치적 사형,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나 따돌림 등등 여러가지 정신적 및 사회적 죽음들이 있습니다. 몸은 살아 있지만 이미 정신적으로는 죽은 것 같은 사람도 있고, 반대로 육체는 이미 죽은 지 오래 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회복하기 어렵게 쓰러진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과 같지만 위대한 종교인들이나 사상가들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김일성 수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확신하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생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합니다.

죽음을 표현하는 단어들
보통 풀이나 나무 같은 식물이 죽었을 때는 ‘고사’(枯死)라 하고, 가축이나 짐승이나 어패류가 죽었을 때는 ‘폐사’(斃死)라고 하고, 동물을 죽일 때는 ‘도살’(屠殺) 혹은 ‘도축’(屠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을 때는 그 사람의 신분이나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이름들로 불리웁니다. 보통 많이 사용하는 말로는 ‘숨을 거두었다’ ‘숨이 끊어졌다’ ‘숨이 다했다’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다’ ‘영면 하셨다’ ‘돌아가셨다’라고 하거나 한자어로는 사망, 임종, 작고, 타계, 서거, 절명 같은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높임말로는 서거, 영면, 별세, 붕어, 승하, 유명을 달리하셨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비하하는 천박한 표현들로는 골로갔다, 뒈졌다, 황천행이다, 불귀의 객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경우에는 살인이나 사형이라고 합니다. 종교에서는 그 종교의 교리에 따라 죽음을 이르는 말도 달리합니다. 도교에서는 ‘반진’(反眞), 천도교에서는 ‘환원’(還元), 불교에서는 ‘입적’(入寂), 혹은 ‘열반’(涅槃),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 ‘하나님이 부르셨다’ 혹은 ‘요단강을 건너 가셨다’라고 하고 천주교에서는 주로 ‘선종’(善終)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died, departed, passed away, gone away, went to Heaven, Rest in Peace 같은 말들을 주로 씁니다. 의사들이 쓰는 의학용어로는 죽음을 ‘expired’(만료되었다)라고 합니다.

죽음의 형태와 종류는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自然死입니다. 신체의 노화로 인한 죽음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흔히 장수하고 기운 이 진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을 자연사라고 합니다. 탐욕으로 물든 인간에게 있어서 ‘천수’(天壽)라는 것이 과연 몇 살 까지를 두고 할 수 있는 말일지 알 수는 없겠습니다만 하여튼 하늘이 정해 준 날 만큼 살다가 가는 것을 자연사라고 이릅니다. 그런데 사실 죽음 가운데서는 이 자연사의 비율이 가장 낮습니다. 한국인의 경우 자연사, 즉 노화로 죽는 것은 인구 백명 당 약 6-7명 쯤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병사’(病死)입니다. 모든 죽음 중에서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질병의 종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는 회복 가능한 질병도 있지만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적 질병도 있습니다. 또 개인적 삶의 변화와 사회변동, 생태계의 변혁, 문화와 식생활의 변화 등은 끊임없이 새로운 질병들을 만들어냅니다. 요즘은 흔히 각종 암, 심장 질환들, 순환기 질병들, 고혈압, 당뇨, 폐렴 같은 급성 질환들이 인간의 생명을 많이 앗아갑니다.
셋째는 ‘외인사’(外因死)입니다. 흔히 자연사나 병사가 아닌 죽음은 대부분 외인사에 해당됩 니다. 외인사는 내용상으로 분류하면 (1) 사고사, (2) 자살, (3) 타살이 있다고 봅니다.
(1) 事故死란 말 그대로 사고로 인하여 죽는 것입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에 이르는 것이 사고사입니다. 교통사고, 질식사, 감전사, 실족사, 추락사, 익사, 동사, 압사 같은 것들이 여기에 포함 됩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사고사의 종류에는 무려 66 가지나 나열되어 있습니다. 세월호에서의 죽음이 ‘예측 가능했던 죽음인가 아니면 예측 불가능한 죽음이었나’ 하는 것은 아직도 논쟁의 여지를 지닌 문제라고 봅니다만 사고사란 일반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죽음에 이르는 경우를 말합니다.
(2) 그 다음 自殺은 자신이 스스로 죽을 의지를 가지고 자기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총칭합니다. 자살에도 여러가지 형태들이 있습니다만 대부분 잔인한 것들이기에 여기에서는 굳이 나열 하지 않겠습니다. 요즘은 안락사(安樂死) 문제도 매우 심각합니다. 안락사는 ‘자살이다. 아니다. 타살이다’하는 논쟁은 진행중인 잇슈입니다.
(3) 마지막으로 타살(他殺)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끊어 죽이는 행위입니다. 히브리 성서에서는 인류 최초의 죽음을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타살로 그리고 있습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가 인간 세상에 처음으로 들어온 죽음을 안락사나 사고사가 아 닌 살인으로 본 것은 이들 종교들이 인간과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살인에는 처음부터 고의적으로 죽이려고 의도한 경우도 있고 죽일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타살인가, 사고사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다툼의 여지를 갖게 됩니다. 예전에도 살인이란 끔찍한 것이었지만 요즘은 갈수록 세상이 참으로 많이 험악해지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정말 끔찍한 형태의 살인이 참 많습니다. 친부모가 자기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죽이는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살인의 방법도 잔인무도의 극치를 치닫습니다. 국가의 공권력도 지나친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는 소위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합법적 살인이랄 수도 있는 사형제도를 행사합니다. 고문, 폭력, 치사를 포함하여 국가나 민족 사이에서 벌리는 대량 학살과 전쟁은 국가가 법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살인이요, 타살이요, 외인사라는 지적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전쟁에서의 죽음인 전사(戰死)도 일종의 국가가 행사하는 살인이요, 타살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외에도 종교적 신앙이나 개인적 신념과 사상 때문에 죽는 것, 나라와 자신의 민족을 위해서 죽는 것, 물질이나 명예를 위해 서 죽는 것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참고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목회자로 일하다가 한 5년 전에 은퇴했습니다. 저는 현역에서 일하는 동안 모두 56번의 장례식을 집례했습니다. 그 중에서 자연사라고 할 수 있는 요즘의 평균수명 83세 이상 되신 분들의 장례는 12분이 있었고, 병사로 가신 분들은 28분이었고, 나머지 사고사로 가신 분들은 16명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통계를 호주에 있는 한인 종교인들 전반에서 시행해 본다면 유의미한 연구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호주의 장례 안내서’ 책자 기고글 내용
다음 글은 수년 전에 나온 ‘호주의 장례 안내서’(최초의 한인 Civil Celebrant로 지난 1월 소천하신 이문철 박사 엮음)라는 소책자에다 부족한 사람이 썻던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봄이 있으면 가을이 있고, 여름이 오면 겨울도 오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출생이 있으면 죽 음도 오고, 삶의 기쁨이 있으면 죽음의 슬픔도 있게 마련입니다.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자연의 순리요, 자연계의 질서 중 하나입니다. 삶과 죽음이 피차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것 이냐, 아니면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일회적인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 할 수도 있겠지만 삶과 죽음, 그 자체는 어느 누구도 피하가나 거역 할 수 없는 창조의 섭리요, 자연계의 법칙입니다.
사실 죽음이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식물계에도 싹이 트고, 자라고, 꽃이 만 발하다가는 또다시 잎이 지고, 말라지는 출생과 멸종이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산 것은 죽을 때가 있고, 모든 태어난 것들은 사라질 때가 오게 마련입니다. 죽음이란 인간계를 포함한 생물과 무생물계 전체를 아우르는 우주적이며 보편적 현상입니다.
죽음은 빈부와 유·무식을 가리지 않고 찿아옵니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남녀와 노소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지극히 우발적인 것 처럼 보이고, 갑작스런 이변인 것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예측 가능한 것이며, 이미 예고된 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그가 유신론자냐, 무신론자냐를 가리지 않습니다. 종교적 신앙의 유무나, 신앙 형태의 다름과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죽음이란 그냥 생물학적 현상이요, 자연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자연적인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종교에서는 죽음을 저 세상에서의 새로운 탄생이라고 가르칩니다. 죽음은 참된 안식이요, 휴식이라고 하기도 하고 철학자들 가운데는 죽음을 영과 육의 분리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죽음이란 육체의 감옥에서 우리 영혼이 벗어나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죽음이란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를 찿아 나서는 출발역이라고 보았습니다. 하기야 우리는 이미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종착역이란 늘 시발역이고 시발역은 또 다른 종착역이란 것을 말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시도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기물에서 무기물로의 전환이라고도 말하고, 뇌활동이 정지된 상태니, 심장의 박동이 멈춘 상태니 등 등 여러가지 의학적, 생물학적, 과학적 해석들이 분분합니다. 그중에는 아직도 진행 중인 논쟁적 이론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꼭 생물학적 및 자연적 현상으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정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 종교적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학이나 생물학에서는 죽음을 삶의 종결이라고 보지만, 대부분의 전통 문화나 종교인들은 죽음을 영원으로의 회귀로 봅니다. 조상에게로 돌아가든지, 신에게로 돌아가든지, 죽음이란 돌아가는 것이지,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활동이 정지됨으로 다시 회복이 불가능한 자리에 이르게 되면 사람은 일단 ‘죽었다’고 말합니다. 심장의 박동이나 호흡이 영구히 중단되고, 뇌의 기능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되어 기관과 세포의 조직이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하면 생물학 적으로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신체의 기관과 조직들을 다른 개체로 이식하는 의학적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심장과 뇌를 포함하여 신체의 각 기관들과 줄기세포 등을 다른 신체로 옮겨주게 되었고 다른 이들에게 이식해 줌으로 부분적으로 나의 신체는 계속하여 보존되고 또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가게 되었으니 ‘나’라는 존재가 꼭 죽어서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제 죽음의 정의는 많이 모호해졌습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은 죽음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해석에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많이 연구되는 사망학(Thanatology)에서는 죽음을 의학이나 과학적 시각에서 만 볼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 종교학적, 인문학적, 사회문화적 등 다양한 시각에서 보고 분석하여 죽음을 준비하도록 요구하며 도움을 줄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비록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변하고 달라지고 있지만 ‘인간이란 죽는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마다 생사관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생사관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은 개인적으로 경험이나 실험이 불가능합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간접 경험을 할 뿐이지 내가 직접 죽어 볼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유일회적 사건입니다. 임상실험을 해 볼 수 없는 유일한 분야가 죽음학입니다. 보통 동물 실험을 한 다음에는 인체 실험을 하는 것이 순서인데 죽음의 경우에는 이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여전히 신비요, 수수께기로 남아 있습니다. 죽음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이 직접 죽어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간혹 종교적 사기꾼들 중에는 ‘내가 가본 천국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은 후에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육체는 죽어 자 연으로 회귀하여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은 퍽 오랫동안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 잘 사는 것이 사실은 잘 죽는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요즘은 호스피스 운동을 포함하여 이 곳 저 곳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학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단순히 묘지를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아닙니다. 매장, 화장, 수목장, 암장, 수장, 동굴장 등등 장례법이나 절차에 대해서 생각해 두거나 유언을 작성해 두고 비문을 미리 써둔다고 해서 죽음을 준비했다고 생각해서는 않됩니다. 하루 하루의 삶을 의미있고 뜻있는 것으로 채워가며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감사와 자족, 겸손과 진실을 추구하는 삶이 될 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 행복한 삶, 또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삶이 될 때 우리는 마침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는 오늘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 할아버지 처럼, 아직 살아 있을 때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장례식 까지도 미리 치루어 두는 여유있는 삶, 생각하는 인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끝까지 사랑하며 감사하면서 사는 삶 – 이것이 죽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