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죽어서 가는 하나님나라? :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1. 예수 믿고 천당간다?
한국의 기독교신앙은 “예수 믿고 천당간다”, “예수 믿고 복 받는다”, “예수 믿고 병 고친다” 등으로 대중화 되었다. 이것을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내세신앙, 기복신앙, 치병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내세중심, 기복중심, 치병중심의 신앙은 기독교를 한국 땅에 뿌리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이러한 내세중심, 기복중심, 치병중심의 신앙은 성서의 중심내용인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치명적으로 훼손 시켰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예수 천당’은 기독교신앙을 왜곡시킨 가장 극단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하나님의 복과 예수 그리스도의 치병사례들이 있지만, 천당이라는 개념과 용어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한국에 전례될 때 한국의 전통종교들과 무속사상들의 영향을 받고 개념들이 혼동(misuse)되면서 성서에도 없는 ‘천당’ 사상이 들어왔다.
2. 한국 전통 무속사상의 저승과 천당
샤머니즘의 우주관은 천상, 지상, 지하의 3층 구조로 되어있다. 그리고 한국의 무속과 관련하여 저승이란 용어는 우리 조상들이 죽음과 관련항 가장 흔히 써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고 육신은 장사지내고 영혼만이 저승으로 간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무속에서 부르는 무가(巫歌)에서는 죽은 자의 혼이 저승차사와 함께 저승에 도착하여, 이승 삶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은 후, 저승에서 영원히 살 것인지 아니면 이승에서 다시 태어날 것인지를 심판받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제도종교에서는 특정 신앙을 통해 수행 하여 득도에 이르거나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천당이나 극락으로 간다고 믿지만, 무속에서는 현세에서 일정한 신앙을 갖지 않아도 극락과 천당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다행히 지은 큰 죄가 없고 조금이라도 공덕이 있는 사람은 저승의 좋은 곳에서 영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무속에서 굿을 하는 이유는 죽은 자가 ‘저승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있거나, 이생에서의 미련이나 원한’이 남아 있으면 저승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므로 무당이나 가족이 진오기굿을 해서 망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자굿에서는, 무당은 망자의 영혼을 불러내어 자꾸 반복해서 넋두리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다. 전해져 내려오기로는, 이 세상에 원한이 많은 원령은 3년이 지나도록 저승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면서 방황하게 되어 자손을 괴롭히게 된다. 그래서 무당이나 가족이 진오귀, 오구굿, 씻김굿 등을 통하여 망자의 영혼을 달래어 저승으로 인도해주는 굿 등을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한국 무속에서는 죽은 자가 내세의 저승세계로 가는 것은 철저하게 망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의 도입으로 극락정토로서 천당과 그에 대응하는 지옥의 가르침이 전해지면서 무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저승으로서의 천당과 극락정토 사상이 수용되고 그 상대개념으로서 지옥이 일반화 되었다. 상여가 나갈 때 부르는 상엿소리에는 저승을 ‘황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무속에서의 저승은 천당과 지옥을 다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속에서는 전적으로 사후의 초월적 세계로서의 저승에 대한 장소적 관심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의 나라’는, 뒤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장소적 개념보다는 ‘통치(reign)’의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3. 불교사상의 극락정토와 천당
인간이 죽은 후에 벌어질 세계에 대한 신앙은 불교의 극락정토 왕생신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불교신도들이 가장 많이 되내이는 경구는 ‘나무아비타불(南無阿彌陀佛)’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극락정토를 세우고 중생들을 그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부처이다. 대승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극락정토(極樂淨土)란 부처와 보살의 한량없는 공덕의 결과로 받게 되는 청정한 땅이요, 영원히 보존되는 실재이며, 모든 중생이 번뇌를 여의고 필경 돌아가야 할 영생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극락왕생(極樂往生: 극락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하는 것을 불교의 본원으로 삼을 정도로 중요하다. ‘불설 아미타경’에는 극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리불아, 저 세계를 어째서 극락이라 하는 줄 아느냐? 거기에 있는 중생들은 아무 괴로움도 없이 즐거운 일만 있으므로 극락이라 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극락세계에는 일곱 겹으로 된 난간과 일곱 겹의 구슬로 장식된 일곱 겹 가로수가 있는데, 금, 은, 청옥, 수정의 네 가지 보석으로 눈부시게 장식되어 있느니라.”
정토신앙을 한국에 뿌리 내리게 한 사람은 원효이다. ‘정토왕생 신앙은 원효의 삶의 목적이고 도정이며 삶의 전체’였다. 원효는 정토를 천당(天堂)이란 용어로 표현했다. 천당은 중국에서도 익숙한 개념으로 수(隨)나라 때 대운하가 개통되어 항주(杭州)와 더불어 소주(蘇州)땅이 문물이 번성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나자,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원효의 저서 ‘발심수행장’에는 ‘무방천당(無防天堂)’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천당으로 향한 문은 막힘이 없는데도 이르는 사람이 적은 까닭은 탐진치 번뇌로 자기 집의 재산을 삼았기 때문이요, 지옥에서 오라고 유혹하지 않는데도 들어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사오욕으로 망녕되이 마음의 보배를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철 스님도 이야기 했지만, 원래 정통 불교사상에는 천당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교설들도 불교학계 안에서는 회자되기도 한다. 성철 스님의 구원받는 길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가고 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이처럼 천당에 대한 비판을 하는 불교학설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대중 불교인들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들이 사후에 그들의 영혼이 극락왕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제(遷度祭)가 불교에서는 중요하다. 천도(遷度)란 길을 바꾼다는 뜻으로 부처의 ‘목련경’에 나온다. “너의 어머니의 죄가 너무도 무거워 너 하나의 힘으로는 구제할 수 없겠노라. 너의 효성이 천지를 감동시킨다 해도 어려운 일이니 많은 수도승들의 위신력을 함께 해야 하니라. 음력 7월 15일 수도승들의 해제일을 맞아 정성껏 그들에게 공양을 올려 그들의 수행력의 힘들을 모아야 선망조상과 현세부모, 친족, 친지 영 가들이 고통을 벗어나 안락한 복덕을 누릴 것이며, 나아가 해탈할 것이며 생존 부모, 친지는 이 삶이 복될 것이다.”
이러한 불도의 가르침에 의하여 한국 불교에서는 천도제가 널리 유행되어지고 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불교에서는 천당에 대한 가르침이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중요한 신앙의 업보로 여겨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천당은 죽은 후의 망자가 가는 초월적 세계로 저승에 대한 장소적 의미가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4. 한국 초기 기독교의 천당 사상
로마 가톨릭은 조선에 와서 ‘천주교’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공교롭게도 개신교보다 100년이나 앞서서 전래된 가톨릭은 포교초기부터 극심한 배타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조선 말기에 들어온 것으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이승훈의 번역을 통해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전래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가톨릭교회를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문화를 파괴한다고 생각했고, 하필이면 신자들이 당쟁에도 연루되면서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조선 말기의 천주교의 4대 박해는 유명하다. 서학을 일찍 접할 기회가 많았던 천주교 실학자들이 이 시기에 박해를 받아 순교를 하거나 귀향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성직자도 없이 박해받던 시대에 신앙을 전하고 지키기 위해 대중적인 신앙가사와 사상이 필요했는데 이 때 내세중심의 ‘천당’에 대한 내용이 많이 불리워졌다. 영종도에서 발견된 ‘남마두 가첩’의 천당가를 보면 당시 내세에 대한 확고부동한 사상들을 접할 수 있다.
성경셩서 살펴보니 텬당진복 긔이하다.
이세상에 부귀복락 텬당복락 비길진데
도로혀 취루하니 복락이라 일흠하랴.
눈으로 못보왓고 귀으로 못들은걸
말로엇지 형용할가 비유할게 아조업네.
이러한 것을 볼 때 조선말기 들어온 한국의 천주교신앙은 박해를 통과하면서 전통적인 무속과 불교의 천당과 융합하며 내세 중심의 천당신앙으로 자연스럽게 토착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한국의 천주교신자들은 ‘살아서는 성당, 죽어서는 천당’이란 말을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회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의 한국 개신교도 천주교의 천당가사와 비슷한 천당 찬송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개신교 역사도 천주교 역사 못지않게 박해와 고난을 통과하면서 자연스럽게 내세중심의 신앙형태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말로 개신교가 들어오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들어서게 되고 일제의 개신교 탄압은 성도들을 자연스럽게 내세 중심의 신앙형태로 자리잡게 하였다. 이후 근대화에 들어선 한국은 전쟁도 겪고 지독한 빈곤과 가난에 처하면서 신앙도 자연스럽게 ‘죄많은 이세상은 내집 아니네’식의 현실도피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신앙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 개신교의 천당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최권능 목사’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심심찮게 부흥회나 설교예화로 등장하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쳤던 최권능 목사의 이야기는 한국교회의 천당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개신교 전례 이후로 성서의 사상과는 다른 ‘천당’이라는 용어는 1967년 개편찬송가의 출판으로 인해 비판되어졌다. ‘천당’이라는 용어는 성서의 용어가 아니라는 신학적 반성과 함께 ‘천당’으로 표기된 모든 가사를 ‘천성’ 또는 ‘천국’으로 고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은 ‘천당’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구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가슴 아픈 실정이다.
5. 천당, 천국, 하나님 나라
4복음서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인정되는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나님 나라’는 복음서에만 무려 113회나 등장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로 보내심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눅 4:43).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예수가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자 주된 내용이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천당은 사후의 초월적 세계로서 저승에 대한 장소적 개념으로 내세 중심적 사상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reign)’ ‘왕적 존엄’ ‘왕권’ 등을 의미한다. 바로 하나님께서 왕(basileu)이 되어 통치하신다(basileia)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1세기 예수가 “때가 찾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였을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당시 청중들은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1세기 예수가 복음을 전할 당시 예수와 그의 청중인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구약과 신구약 중간기 시 대에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지 않고 대신 ‘주의 나라’ ‘주의 통치’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 ‘나라’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 ‘말쿠트(תוכלמ)’인데 구약에서 무려 200회나 나타나고 있다. 이 ‘말쿠트(תוכלמ)-나라’는 각 본문에서 의미가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우선적으로 ‘말쿠트’가 인간 왕에게 적용될 때는 주로 ‘통치’ ‘지배’ ‘치세’ ‘왕권’ 등과 같은 역동적이고 추상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 통치권 – ‘솔로몬이 그 아비 다윗의 윗에 앉으니 그 ‘나라-말쿠트’가 심히 견고 하니라 (왕상 2:12 / 참조 대상17:11, 28:7)
여기서 ‘나라-말쿠트’는 ‘솔로몬의 왕적 통치권’을 말한다. 솔로몬의 왕적 통치권이 견고하게 안정되게 세워졌다는 말이다.
2) 왕적권위 – 싸움을 예비한 군대 장관들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여호와 의 말씀대로 사울의 ‘나라-말쿠트’를 나에게 돌리고자 하였으니 그 수효가 이러하였더라(대상12:23).
이 구절의 의미는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갔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여기서 말쿠트는 ‘왕으로서의 권위’를 지칭한다.
3) 치세(reign) – 헤브론 자손중에 여리야가 그 세계와 종족대로 헤브론 자손의 족장이 되 었더라. 다윗이 ‘왕위에-말쿠트’ 있은 지 사십년에 길르앗 야셀에서 그 족속중에 구하여 큰 용사를 얻었으니(대상 26:31).
여기서 사용된 말쿠트는 ‘왕의 치세’ ‘왕의 다스림’이라 할 수 있다. 말쿠트의 같은 의미의 본문들은 이외에도 구약에서 다양한 곳에서 발견된다(대하 3:2, 스 4:5-6, 24, 6:15, 렘 26:1, 단 1:1, 2:1) 등 여기서의 말쿠트는 ‘다스림’ ‘치세’의 의미이다.
4) 왕의(royal)라는 의미의 형용사적 용법 – 또한 말쿠트는 자주 ‘왕의’라는 형용사적 용법으로도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왕의 옥좌’(대상 22:10, 대하 7:18, 에 1:2, 단 5:20) / ‘왕의 관’(에 1:11, 2:17, 6:8)
‘왕의 궁전’(에 2:16, 대하 2:1, 단 4:29) 등등,..
그러나 말쿠트가 아주 부차적으로 왕이 통치하는 공간적 영역, 지역, 영토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다리오가 갈대아 말쿠트의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단 9:1) 이 말은 다리오가 갈대 아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그래서 여기서 말쿠트는 ‘지역’ ‘영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례는 지극히 제한적 의미로 나타나며 따라서 말쿠트의 일반적 의미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말쿠트가 하나님께 적용될 때, 이 단어는 예외없이 천상적인 왕으로서의 통치와 권위를 지칭한다.
1) 왕적권위 – 그들이 주의 ‘말쿠트-왕적권위’의 영광을 말하며, … 당신의 능하신 일과 당 신의 ‘말쿠트-왕적권위’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당신의 ‘말쿠트-왕적권위’는 영원한 ‘말쿠트-왕적권위’이니 당신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1-13).
2) 통치권 –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말쿠트(왕권)-통치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 103:19). 여기서 말쿠트는 ‘통치권’을 말하고 있다.
3) 왕의(royal)라는 형용사적 용법 – 하나님이여 당신의 보좌가 영영하며, 당신의 ‘말쿠트-왕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시 45:6). 여기에서 말하는 말쿠트는 ‘왕의’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말쿠트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예외없이 ‘통치’ ‘지배’ ‘치세-다스림’ ‘왕권’ 등의 의미로 사용되며 말쿠트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영토’ ‘영역’ 등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거의가 다 ‘통치’ ‘지배’ ‘왕권’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히브리어 ‘말쿠트(תוכלמ)’는 헬라어로는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로 번역된다. 많은 학자들이 ‘나라’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가 히브리어의 ‘말쿠트’와 더불어 유대교 문학에서 ‘영역’ ‘영토’라는 공간적 의미보다는 ‘통치’ ‘치세’ ‘다스림’ ‘왕권’ 등의 추상적 역동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 모두들 동의하고 있다.
실제 몇몇 예를 보면, ‘그 때에 그의 바실레이아(통치)가 그의 온 피조물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모세의 유언 10:1).
‘우리 하나님의 바실레이아(왕권)가 심판받는 나라들 위에 영원하십니다’(솔로몬의 시편 17:3).
‘주의 바실레이아(통치)가 너희 가운데 있지 않을 것이다’(베냐민의 유언 9:1).
‘과연 불멸의 왕의 가장 위대한 바실레이아(왕권)가 모든 사람들 위에 드러날 것이다’(시빌신탁 3:47-48).
이 모든 경우들을 보면 바실레이아가 ‘통치’ 또는 ‘왕권’의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유대문학에서도 ‘나라’로 번역된 ‘바실레이아’는 ‘말쿠트’와 더불어 똑같이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 ‘왕권’들을 지칭하고 있다. 구약성경과 유대문학의 이러한 용례들을 종합해 볼 때 예수 당시 유대인 들은 ‘나라’라고 번역 될 수 있는 ‘말쿠트’나 ‘바실레이아’를 일반적으로 ‘통치’ ‘왕권’ 등의 역동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이나 ‘지역’과 같은 공간적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권’과 같은 역동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 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를 유대인 독자를 대상으로 저작한 마태는 ‘하나님’이란 용어대신 ‘하늘’로 바꾸어 ‘하늘나라: 천국’으로 표기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하늘 나라’나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6. 나라이(가) 임하옵시며?
주기도문을 보면 ‘나라이(가) 임하옵시며’라고 기원하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나라-바실레이아’는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 ‘왕권’이 이 땅에 임하여 달라는 간구이다. 이것은 주기도문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고 성서의 중심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80년 멜번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대회 주제가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였다. 하나님의 나라(통치와 다스림)가 오늘의 역사적 현실과 상황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면서, 오늘의 역사적 현실과 상황을 하나님 나라(통치)에 조명하여 분석하고 이해하는 모임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념적인 세계가 아니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초월적 내세 중심적 세계가 아니라 이 땅에서 고통받고 억눌리고, 갇힌 자들에게 현재 이 땅에 임해야 할 세계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의 지배와 외적의 침략으로 인해 종살이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해방하여 여호와의 선민으로 살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구약에 다윗이 말한 ‘여호와 나라’나 시편에 말한 ‘주의 나라’는 공간적인 이스라엘 조국의 건설을 말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가 주권을 가지고 그의 거룩한 뜻대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도’가 실현되는 나라를 의미한다. 신약시대 유대인들도 로마의 통치하에 살면서 유대민족이 회복되어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할 것을 기대하였다. 메시야가 오면 유대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하여 유대민족 국가를 건설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 민족이 기대하는 공간적인 국가를 건설하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였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공평한 통치로 ‘의’와 ‘인’과 ‘신’이 실현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인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나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도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고 천하만국이 복을 얻게 하려고 부르셨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부르심의 목적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복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창세기 18:18-19에 잘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8-19).
다시 말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의 후손들이 이 땅에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먼저 부르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부르심에 실패한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할 때 그 선포를 듣는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의 억압과 착취를 받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면, 하나님의 통치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실천하는 자(마 7:21)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통치이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오히려 너희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눅 22:25-26, 공동번역).
세상 통치는 강자가 약자를 그 힘과 권위로 지배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온갖 억압과 강제의 불의한 통치가 자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통치 방식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시사하였다. ‘억압하는 통치자(ruling king)’의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구조 자체의 해체를 선포하고 그 대안으로 ‘봉사하는 통치자(servant king)’의 섬기는 자세를 제시한 것이다.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ks.j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