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68) 아서 토마스 코트렐 목사(1903. 1. 4-1982. 1. 4)

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68) 아서 토마스 코트렐 목사(1903. 1. 4-1982. […]

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68)

아서 토마스 코트렐 목사(1903. 1. 4-1982. 1. 4)
한국명: 고도열(高道悅) 목사, 진주 1933-36, 거창 1936-38

호주 전역에 “코티”(Cottie)로 알려진 아서 코트렐은 그 부친이 대장간 주인으로 일했던 윌리암스타운(Williamstown)에서 자라났다. 두 사람은 강한 유대가 있어서 아서는 아버지에게 도제생활을 했다. 그러던 얼마 후에 아서는 목회에 소명을 느끼고, 장로교회의 목회를 위한 국내 선교훈련 과정에 참여하였다.
미틀포드(Myrtleford)에서 첫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아서 코트렐은 1933년 6월에 한국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이 당시 아서 알렌이 갑자기 사망한 이후 후임자를 찾고 있었던 해외선교부는 코트렐의 지원을 받고 크게 환영하였고, 1933년 7월 26일에 그를 선교사로 임명했다.
코트렐은 신학생 3년 동안 노스 브룬스윅 교회(the North Brunswick Church)를 섬기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결과 총회 홀에서 열린 그의 안수식에는 많은 교인들이 참석했다. 코트렐 부인이 출석했던 푸츠크래이(Footscray)의 회중들도 이 감동적인 예배에 많이 왔다.
아서와 제시 코트렐이 어려운 시기에 한국선교사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은 대공황의 한가운데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빅토리아 장로교에게 선교적 희망을 주었다.
코트렐 부부는 1933년 9월 한국에 도착해서 진주에 배치되었다. 한국어 공부를 마친 후, 아서 코트렐은 “스태프의 의무절약계획”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고 복음전도 사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36년에 거창으로 이전하였고, 아서는 의무절약계획의 행정적 책임을 지면서, 동시에 그 지역의 시골교회들을 보살피는 목회적 책임을 감당하였다.
그들 가족은 1938년의 휴가 때에 호주로 왔으나, 코트렐 부인의 지속적인 건강 문제와 딸 제니퍼(Jennifer)의 출산으로 인해 아서 코트렐은 1940년 1월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애들레이드에 있는 굳우드 교회(Goodwood)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는 후에 두 개의 빅토리아 교구의 목사로서 왕립호주공군(RAAF)의 군목으로 일했고, 호주내지선교회(AIM)와 함께 여러 순찰대를 위한 경목(Patrol Padre)으로 일했다.
코트렐은 용기와 희망으로 고통과 병을 견뎌내면서 암과 오랜 투병을 한 후에 1982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