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87)
애슬리 배리 콜빈(1930. 3. 24)
부산 1954-58, 한국명: 홍배순
배리 콜빈은 뉴사우스웨일즈 출신으로 한국에 파송된 첫 번째 선교사였다. 그는 1954년 4월부터 업무를 시작하면서 부산에서 4년간 선교회의 비즈니스 매니저로 일했다. 그 당시 그는 1942년 선교사들의 철수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매우 어려운 재산문제들을 해결하였다. 해방이후 많은 선교회의 재산과 토지들이 여러 교회들과 기독교 기관들에게 넘어갔고, 재산 기록의 일부는 태평양 전쟁 동안 그리고 다시 한국전쟁 기간에 상실되었기 때문에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배리는 한국어의 어려움으로 늘 다른 사람을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자신의 일에 좌절감을 경험하였다. 언어가 유창하지 않았음에도 배리는 특히 진주, 거창, 마산에서 재산 소유권을 재 등기하고, 잉여토지들을 처분하고, 무단거주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토지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는 거창과 진주에서, 한국전쟁 동안 파괴되어 온 모든 자산의 소유권들을 다시 기재하였다.
동시에 그는 일신 병원의 본관을 신축할 때 행정적인 수고를 하였다. 이 일은 유엔민사처(Korean Civil Assistance Command)와 대한군사원조단(American Forces Assistance to Korea)과 많은 협상을 해야 했다.
정부와 다른 선교회들과 외환 문제를 협상하는 일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암시장의 환율과 비교해서 공식 환율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복잡했다. 그는 서울에서 모이는 한국자원단체협회(Korean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ies)의 정기회의에 선교회를 대표해서 참석했고, 1956년 말 소아마비에 걸려서 그 일을 중단했다.
배리가 시골교회들과 접촉하는 일은 주로 구제품을 배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는 모든 일 가운데 이 일을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또한 새로운 차량을 구입하고 등록하는 일, 화물을 보내고 들여오는 일을 관리했다. 그는 자신의 일이 다른 선교사들에게 여유를 주어 더 중요한 선교사역을 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사실 때문에 자기 일에 만족했다.
그는 사무업무의 모든 기록을 꼼꼼하게 정리했고 선교회의 사무가 잘 조직화되도록 했다. 선교부의 상임총무 빅터 쿰스 목사(Rev. Victor Coombes)는 1957년 그에게 편지를 썼다.
증여와 양도에 대해 교회에 간접적으로 알려지는 이 불확실한 시대에 직면해서 귀하께서 많은 어려움들을 아주 잘 정리해 주신 것은 놀라움 및 특별한 감사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콜빈은 1958년 2월 6일 부산을 떠나 호주로 돌아갔고 1959년 4월에 그의 회계학 공부를 마쳤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