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과 실증주의의 창시자, 오귀스트 콩트 / 꽁트 (Auguste Comte, 1798 ~ 1857)
오귀스트 콩트 / 꽁트 (Auguste Comte, 프: Isidore Marie Auguste François Xavier Comte, 1798년 1월 19일 ~ 1857년 9월 5일)는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이다.
사회학의 시조로 실증주의자, 주저에 “실증철학”이 있다. 사회학자로 분류되지만, 철학자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학문적으로 총명함을 보였고, 프랑스의 이공계 최고 명문인 에콜 폴리테크닉에 입학하였으나, 교수와 마찰을 빚고 중퇴하였다. 그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데, 처음에 공상적 사회주의 시조인 앙리 생시몽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후 여러 가지로 생시몽과는 사상의 방향이 달라 결별하고,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해 나간다. 학벌주의가 지배하던 프랑스 학계에서 졸업장을 못 얻고 중퇴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직은 갖기 힘들었고, 자신의 아파트에 수강생을 모아서 강연을 하고, 저술을 하는 식으로 학술활동을 해나갔다.
훗날의 엄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가난에 찌든 불우한 인생을 살았고,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업적이 인정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국인 프랑스보다는 영국으로서, 서신으로 교류하던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영국학계에 큰 자극을 줌으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도 실증주의는 프랑스 철학보다는 영미사상의 주류가 되고 있다.
– 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
.출생: 1798년 1월 19일, 프랑스 몽펠리에
.사망: 1857년 9월 5일, 프랑스 파리
.본명: Isidore Auguste Marie François Xavier Comte
.영향을 준 인물: 클로드앙리 드 루브루아 드 생시몽, 장자크 루소, 존 스튜어트 밀, 데이비드 흄 등
.학력: 몽펠리에 대학, 에콜 폴리테크니크
○ 생애 요약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과 실증주의의 창시자. 고향 몽펠리에를 떠나 1814년 파리 이공과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한 것이 계기가 되어 1816년에 퇴학당한다. 그 곳에서 프랑스 혁명 후 무질서 상태에 있던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사회를 재조직하려는 꿈을 꾸게 된다.
1817년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생 시몽을 만나 영향을 받게 된다. 타고난 반골 기질과 직선적인 성격으로 당대의 학자들에게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던 그는 초라한 자리 몇을 제외하곤 어떤 공식적인 자리도 얻지 못했다. 1844년 존 스튜어트 밀의 노력으로 후원자들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게 된다.
그의 사상에 일대 전기를 가져온 것은 클로틸드 드 보라는 여성과의 만남인데, 이때부터 자신이 강조해왔던 과학적 분석 방법을 버리고 ‘감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그가 인간성을 숭배하는 ‘인류교’를 제창하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만년의 콩트는 실증철학을 통하여 사회의 재조직화에 이르고자 했던 대학자와, 인류교의 사제라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주요 저서로는 ‘실증철학강의’ (6권, 1830~42), ‘실증정치체계’ (4권, 1851~54) 등이 있다.
○ 사상적 특징
프랑스 출신으로 최초로 사회학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이다. 프랑스 혁명의 폭풍 속에서 성장한 콩트는 혁명의 정당성이나 불가피성을 논하기 앞서, 그로 인한 사회와 정치의 혼란에 맞서야 했다. 그는 사회를 현대적 의미의 개인이 출현할 수 있는 토양으로 규정했는데, 즉 사회의 성격이 어떠한지에 따라 개인의 속성이 결정된다는 논리이다. 사회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테제를 처음으로 정식화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후의 사회학이 스스로를 근대와 함께 태동한, 근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도 콩트의 주장이 영향을 주었다.
콩트 사회학의 가장 큰 특징은 실증주의적 태도이다. 콩트는 사회의 무질서를 두고 사회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지 (知)적 무능력의 결과로 인식하여,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최초로 주장했다. 콩트에 의하면 과학적인 인식을 위해 사회학 연구는 자연과학에서 그 성공이 확인된 관찰, 실험, 비교의 세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비교로서, 이는 비교를 통해 인간이 절대주의적인 관점을 벗어나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의 물리 법칙과 마찬가지로 사회에도 모종의 법칙이 존재하고, 그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인류의 발전 과정을 설명함과 동시에 미래의 진행 과정을 예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사회에 대한 학문은 자연 법칙에 대한 학문인 물리학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그는 자신이 주창하고자 하는 학문을 사회물리학이라 명명하였다. 여기서 후에 물리학이라는 단어가 빠짐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널리 쓰는 사회학이 탄생한다.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콩트가 말하는 ‘실증주의’의 개념은 현재의 실증주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콩트가 스스로 정의하기에 자신의 실증주의적 태도란 ‘공상주의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실제적인 것’, ‘맞닥뜨린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건전한 성찰에 필요한 진정한 목적’을 의미한다. 오늘날 사회학자들이 실증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적 사실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신의 가치판단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경험과학적으로 엄격하게 사실과 관찰을 중시’한다는 의미이다. 이 당시 콩트가 실증주의라고 부른 것은 사회학을 과학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오늘날 쓰이는 의미에서의 실증주의는 콩트의 사회학 전통이 아닌 막스 베버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다만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것과 구분이 모호하던 초기 사회학의 발생에서 콩트가 과학적인 태도를 주장하였기에 사회학이 독립 분과로 나타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콩트는 사회 질서 (구조)와 사회 변동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자신의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두고 각각 사회 정학 (social statics)과 사회 동학 (social dynamics)이라 일컫기도 한다. 전자는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각각 생물처럼 유기적인 특성을 가지고 결합하여 전체를 이룬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후자에는 그럼에도 사회는 역사를 가지고 이를 반추하며 변화하기에 생물과는 구분된다는 주장이 실려있다.
이른바 실증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정치적 성향으로 가르기를 꺼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누자면 콩트는 사회 동학에 담긴 사회의 역동적인 측면보다는, 유기체로서의 사회를 더 중시하는 보수적 경향을 보였다. 이는 그가 겪었던 대혁명 이후의 혼란상에 일부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반드시 보수적인 인물인 것만은 아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 중에는 콩도르세나 앙리 드 생시몽이 있는데, 이들은 적어도 당시에는 가장 대표적인 진보주의자들이었다. 또한 콩트는 혼란스러운 상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욱 철저한 변혁이 일어나, 더 높은 단계로의 발전이 일어날 것이라 보기도 했다.
콩트의 연구결과 중 가장 유명한 것이 3단계 진화법칙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중세 이전의 신학적 단계 → 중세의 형이상학적 단계 → 19세기 이후의 실증적 단계로 구분했다. 이는 지극히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이론으로, 많은 경우 유물론을 전제하는 실증주의자가 향한 결론치고는 이색적인 데가 있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인식의 발전이 사회 질서를 가져오므로 인류 역사는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선형적 발전 테제가 대부분 기각된 오늘날엔 콩트의 연구 결과가 자주 인용되지는 않는다. 그가 사회학의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고전 사회학자들에 비해 대중적으로 덜 유명하다.
여전히 콩트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사회학을 철학이 아닌 과학으로 바라보고, 과학적 방법론을 이용한 학문으로서 사회학을 정립하고자 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로소 철학 혹은 협의의 인문학과 분리된 인간 (사회)에 대한 학문으로서 사회학의 독자적인 자리매김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뒤르켐, 베버 등을 거치며 사회학은 사회과학으로 더욱 탄탄하게 자리를 잡는다.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사회과학이 과학인지 그리고 과학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장구한 과학철학 논쟁과, 사회학과 철학, 경제학, 심리학, 물리학 등 인접학문들간의 영역 다툼, 그리고 사회학 제국주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근대 이후 전개되어온 사회학 관련 논쟁들을 볼 때 사회학은 물론이거니와 지성계 전체가 콩트에게 나름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개인 삶
오귀스트 콩트는 1798년 프랑스의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막바지에 태어나 프랑스의 정치적인 급변이 계속되던 혼란의 시기에 살았다. 프랑스는 그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안정적인 정치체계를 이루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혼란은 더해져 가고 있었다. 콩트는 이러한 시기를 살았으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사회의 안정을 이루고 개선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에꼴 폴리테크니크 (당시의 엘리트 기술학교)를 그만둔 후 당시의 저명한 연구자인 앙리 드 생시몽과 교류하였으며, 그와 함께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론보다는 사회를 개선하려는 실질적인 행동에 더 비중을 두는 생시몽과 갈등하였으며 결국 결별하였다.
콩트는 이후 자신의 저작인 ‘실증철학강의’를 집필하는 데 주력하고 ‘사회학’의 원리들을 창안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그다지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의도한 모든 과학의 통합은 지나치게 큰 야망으로 생각되었고 따라서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아야 했다. 결국 학계에서 고립된 콩트는 자신의 후기저작인 ‘실증정치체계’에서 과학보다는 종교적인 색채의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류교’를 만들고 스스로 사제가 되었다. 즉, 종교의 대체물로서 실증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이전과 매우 대비되는데, 왜냐하면 그가 생시몽 유사 종교적 속성을 비난하였으며 그러한 이유로 생시몽과 결별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학문 내에서도 모순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였으나 그가 사회학을 창시하고 후대의 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다.
○ 실증철학 강의
콩트의 대표적 저서인 실증철학 강의를 중심으로 본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콩트는 생시몽과 결별한 후 자신의 대표저작인 ‘실증철학강의’를 집필한다. ‘실증철학강의’는 콩트 사회학의 정수로 그의 사회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콩트는 이 저작에서 사회학적 이론의 원칙, 실증주의적 연구에 대한 방법론, 사회 진보의 단계와 법칙, 사회학적인 연구 대상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사회학의 기본 전제
1) 사회물리학 : 자연현상에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처럼 사회에도 그런 법칙이 있음
2) 사회조직에 대한 연구 : 사회는 어느 한 부분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는 유기적 전체
– 사회학 이론에 관하여
콩트는 당시 아이작 뉴턴에 의해 일어난 과학혁명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는 뉴턴 (만유인력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자연법칙에 종속된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시키려 했다. 그는 관찰에 기초하여 사회를 연구하고, 그 사회를 지배하는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법칙들을 발견하는 것을 사회학적 이론의 전개 (관찰을 통해 사회적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밝히는 것)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사회학 방법론과는 동 떨어진 것으로, 그는 단순히 사회학적 사실들에 대한 인과적인 연구를 원한 것이 아니라, 그 인과 관계들을 통해서 사회의 궁극적인 속성을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콩트는 관찰에 기초하여 사회학적인 원리와 법칙을 발견하려 하였고 이것을 실증주의라고 불렀다. 실증주의라는 단어는 현대에 와서 경험주의로 오독되는 경우가 많은데 콩트의 실증주의는 이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는 단순히 현상을 관찰하는 데 그치는 조야한 경험주의를 비판하면서 “모든 이론이 관찰된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면, 모든 현상도 이론에 기초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이 주창하는 실증주의가 단순히 경험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법칙의 발견이라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현실을 관찰하는 방법론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콩트에게 사회학의 목적은 추상적인 이론적 원칙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일단 사회학이 이론과학으로서 잘 정립되고 나면 그 법칙들은 사회세계를 개선하는 도구나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다. 사회의 조직과 변동에 관한 법칙은 다양한 새로운 사회적 제도들을 창출하는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다.
– 연구 방법론 (사회학적 방법의 정식화)
콩트는 사회적 법칙, 원리를 발견하려는 사회물리학의 연구 방법으로 체계적인 3개의 방법론 (또는 4개)을 제시한다. 이것은 사회현상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연구 방법으로 관찰, 실험, 비교 또는 역사적 분석이 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찰
위에서 말한 바 있듯이 관찰은 단순히 현실의 사회적 사실을 관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앞서 콩트는 이러한 것을 조야한 경험주의라고 비판했다는 것도 언급했었다. 콩트는 관찰에 대해 “관찰은 현상의 동적법칙과 정적법칙에 종속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론적 뒷받침이 없는 경험적 사실들의 관찰은 과학의 발전에서 무용한 것으로 증명 될 것이라고 간단하게 주장한다. 따라서 관찰이란 현실의 사실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험적인 법칙관계를 밝혀내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험
콩트는 과학적 방법론인 실험을 사회학적인 방법론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실험이라는 인위적인 방법은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로 인해 사회를 대상으로 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콩트 역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그는 인위적 실험 대신 자연적 실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콩트는 자연적 실험에 대해 “현상의 규칙적인 과정이 일정한 방식으로 간섭받을 때 언제나 이루어진다.”라고 쓰고 있다. 자연적 실험의 대표적인 예는 생리학의 병리적 현상 관찰처럼 사회적 병리현상의 관찰, 즉 사회적 일탈현상의 관찰을 들 수 있다. 사회물리학자들 역시 병리학적 사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사회의 정상적 과정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비교와 역사적 분석
콩트가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방법은 비교와 역사적 분석이다. 비교란 간단히 말해서 사회들의 비교를 통해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역시나 생물학적인 방법을 차용한 것으로 콩트는 다양한 형태를 가진 사회형태들의 비교를 통해 각 사회들의 작동원리와 근본적인 속성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적 분석이란 사실, 비교의 방법 중 하나로 (현재와 과거에 대한 비교), 시공간적 측면에서 사회를 비교하는 것이며, 그의 역사적 ‘삼단계 법칙’과 관련하여 중요성을 띤다.
– 사회학의 구조
콩트의 사회학은 여러 가지 과학 중에서도 특히 생물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기체에 대한 생물학적인 연구가 사회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회학은 근본적으로 유기체적인 사회조직에 관한 연구로서, 사회조직이라는 이 연구대상은 유기체가 나뉠 수 없는 것처럼 결코 나뉠 수 없는 것이고 부분에 대한 연구는 전체의 맥락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콩트는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사회학적 구조를 세웠다. 그는 “사회물리학에서 질서의 개념과 진보의 개념은 생물학의 조직 개념과 생명 개념처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개념들은 실로 과학적 견지에서 생물학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사회를 유기체로 보는 자신의 사회관과 자신의 사회학적 연구 대상들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사회정학
앞서 말한 사회물리학의 두 개 개념들 중 질서에 속하는 것이 바로 사회정학이다. 사회정학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 그들 간의 질서에 대한 법칙을 연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사회정학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의 전제조건에 관한 연구로 질서에 대한 관심이며 따라서 ‘인간의 존재조건’간의 조화에 관한이론이다.” 그는 사회의 ‘진정한’ 구성요소를 개인이 아닌 가족으로 보았다. 그가 개인이 아닌 가족을 사회의 기본 구성단위로 본 것은 가족이 ‘사회유기체의 다양한 특성들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이 개인이 가지는 이기심을 중화시키고 사회로 통합될 수 있도록 도운다고 보았다. 따라서 개인은 절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기본적인 구성단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콩트의 사회정학에서 중요한 점은 사회의 통합과 질서에 관련된 법칙, 조건에 관한 것이다. 그는 사회의 하부구조들이 단순한 상태에서 좀 더 정교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이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경향은 사회기능의 분리를 가져오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총합적, 일반적 정신을 소멸, 제한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의 각 기관들은 점점 더 전문화, 분화되지만, 동시에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통합을 유지 할 것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그러한가? 콩트의 설명을 살펴보자. 그는 사회적 기능의 분화가 불러오는 전문화가 오히려 사회구조들 간의 상호의존을 심화시킨다고 보았다. 분업의 예를 살펴보자, 분업을 통해 물건을 생산하는 경우 각 노동은 분리되고 전문화된다. 이러한 기능분리는 각 분업참가자들 간의 이질성을 강화시키지만 동시에 의존성을 심화시킨다. 각 노동이 합쳐지지 않는 이상 개별노동은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사회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콩트는 통합을 이루는 다른 두 가지에도 주목했다. 하나는 각 부분 간의 교환과 통합을 유도하는 지배력과 권위의 집중이고 다른 하나는 구성원간의 보편적 합의였다. 그는 사회 성원들 간에 언어와 종교 같은 공통된 지적관념과 도덕성이 존재함으로써 통합을 이루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들이 사회분화 현상을 상쇄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보았다. 후에 논의하게 되겠지만 그는 사회를 지배하는 역사적 지식체계를 세 가지로 구분했으며 그중에서도 자신의 실증주의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위한 지식체계라고 보았다.
1) 체계의 각 부분들의 상호의존성
2) 부분들간의 교환을 조정하는 권위의 집중화
3) 성원들 사이의 공통의 도덕성
.사회동학
두 번째 연구대상은 진보의 개념에 관한 것으로 콩트는 이를 사회동학이라고 불렀다. 사회동학은 계승의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계승의 법칙이란 인간문명의 주요 변동이 잇달아 일어나는 추상적 질서를 뜻한다. 콩트는 이러한 계승의 법칙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3단계 지식, 사고 체계에 상응하는 사회발전의 3단계 법칙 (신학적•군사적 – 형이상학적•법적 – 실증적 단계로 이어지는)을 정립했다. 이러한 삼단계법칙에는 몇 가지 유의해서 볼 점들이 있다. 첫 번째, 각 단계는 진화적이다. 즉, 각 단계의 사회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각 단계의 조건들이 성숙해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변화가 갑자기 일어나거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번째, 각 단계로 넘어가는 중간의 단계에는 전단계의 요소들과 다음단계의 요소들이 서로 갈등하면서 혼란을 일으킨다. 콩트는 발전의 과정을 순탄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중간단계에서 혼란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특히 그는 자신이 살던 시기를 이러한 혼란의 시기로 인식한 듯 보이며 자신이 주창한 사회물리학의 임무가 바로 이런 혼란의 시기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 신학적 단계 : 인간의 힘이 아닌 초자연력에 의지하는 단계, 모든 현상은 신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함.
2) 형이상학적 단계 : 여러 현상은 본질이나 본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의해 설명된다고 믿는 단계, 사물에는 그 속에 담긴 어떤 본질이 있고 그것을 밝히는 연구를 통해 지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단계
3) 실증적 단계 : 진정으로 참다운 지식의 단계, 현상을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그에 따라 실험을 하는 과정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는 방법
그렇다면 진보의 계기는 무엇인가? 콩트는 기본적으로 사회 진보의 계기를 자장 먼저 지식의 진보에서 찾는다. 그는 사회동학의 확립에 튀르고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는 달리 경제력보다는 지식의 진보가 사회진보의 가장 중요한 계기라고 말함으로써 튀르고와는 차이를 보인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지식진보의 삼단계에 따라서 사회진보의 삼단계법칙을 만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콩트는 단순히 지식의 진보만이 모든 진보의 계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또 다른 계기는 바로 인구이다. 당시에 인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멜서스 식의 인식이었다. 즉, ‘인구의 증가가 인류의 불행을 불러올 것’이라는 인식으로, 이것은 인구의 증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콩트는 반대로 인구의 증가가 진보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도 인구의 증가가 분명히 자원의 부족을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원의 부족이 인류에게 위기로 다가오기보다는 인간에게 ‘필요’를 발생시킴으로써 진보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앞서 말한 지식의 진보와 함께 사회내부적인 해결책인 생산성의 발달 (산업화로 인한 분업의 확대가 대표적인 예다)을 이룸으로써 인구증가로 인한 자원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 지식 진보의 단계와 과학의 위계
콩트는 지식의 삼단계법칙, 과학의 위계론을 ‘실증철학강의’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창안한 ‘사회물리학’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로 인간의 지식이 진보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단계는 사회의 진보 단계처럼 진화적으로 진행된다. 즉, 각 단계는 뛰어넘을 수 없고, 각 단계는 다음 단계의 조건을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콩트에 따르면 사회학은 바로 마지막 단계인 실증적 단계의 최고 정점에 선 학문이다. 왜 그런 것 일까? 콩트는 과학의 위계론을 통해 사회학의 성격과 위치를 규정짓는다. 그는 과학에는 위계가 있으며 총체적인 성격의 과학은 하부과학의 발전을 통해 발전한다고 말한다. 콩트의 말에 따르면 천문학이 가장 먼저 마지막 단계인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고 물리학, 화학 등이 뒤를 이으며 이어서 유기체에 관한 학문인 생물학이나 생리학이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물리학’은 생물 유기체에 관한 연구에 기반 하여 사회적 유기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므로 가장 마지막에 실증적 단계에 도달한다. 이것은 사회물리학이 모든 과학 중 가장 총체적인 학문이며 모든 과학을 통합한다는 콩트의 생각을 대변한다. 또 이러한 생각들은 과거의 사회학에 남아있던 신학적, 형이상학적 잔재를 청산하고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사회학을 창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콩트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믿음은 근대 사회학의 창시자로서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고 있다.
○ 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와 실증주의 (Positivism)
1) 어귀스트 콩트의 생애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성격이 변질되어가던 1798년 몽펠리에서 하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오귀스트 콩트는 1814년 몽펠리에를 떠나 파리 이공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는 1816년 학생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다른 학생들과 함께 퇴학 처분을 당한다. 짧은 기간이지만 여기서 지낸 시절은 콩트의 생애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구체제를 떠받치던 온갖 제도들과 확신들이 사라져 버린 무질서 상태에 처해 있던 당시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사회를 재조직하려는 꿈을 키웠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그가 사회적 유기체를 강조했다. 또한 무질서한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 조직화를 위한 인간사회의 정신적 통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후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생시몽을 만나 그의 제자 겸 조수가 된다. 이 대가와의 만남은 그의 실증주의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1824년 생시몽과의 관계를 단절하기까지 약 7년간의 세월은 콩트의 실증주의 사상이 점점 무르익는 기간이었다. 1830년부터 1842년에 걸쳐 ‘실증철학강의’라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를 모두 여섯 권으로 출간한다. 그리고 1851년부터 1854년 사이에 또 하나의 대작인 ‘실증철학체계’라는 책을 출간하고 1857년 사망했다.
2) 실증주의와 콩트
철학의 방법이 과학의 방법과 다른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철학적인 입장이다. 바꾸어 말하면 과학으로 얻어지는 지식의 총체 이외에 참된 지식은 없다고 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그 자체보다는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인식할 있는가의 방법이 중시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감각적 요인이 중시되고 감각을 통한 검증 가능성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즉 실증주의는 자연보다는 인위성의 문제를 다루고 혹은 인위성을 통한 자연의 문제를 다룬다 (인위성: 자연의 힘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콩트는 고전실증주의를 정립한 사상가중 한명으로써 경험적 증거와 증명, 그리고 확인을 통해서만 가능한 인식을 중요시 하였다.
그에게 실증주의는 체계적인 사유를 통하여 인간 집단의 행동을 규제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인간 정신의 세 가지 요소를 정신, 마음, 행동으로 보았다. 마음은 정신보다 우위에 놓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그는 감정 속에 확립해야 할 질서는 이기적 본능들에 대한 사회성과 이타성이라고 하였다. 18~19세기 지식인들은 사회의 질서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18세기 프랑스에는 앙시앵 레짐의 반발로 ‘이성’을 기치로 한 혁명이 발발했는데 혁명이 끝난 후에도 로베스피에르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이성’을 도구로 폭력을 휘둘렀다. 이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으로 실증주의자들은 합리적인 방법론을 모색했고 콩트는 이성과 함께 감정을 강조하게 된다. 인간은 개인일 때보다 사회일 때 더 질서가 잡히는데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감정적 연대이다. 이성으로 이룰 수 없는 사회적 결속을 감정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3) 콩트의 3단계론
콩트가 살았던 시대는 앞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혼란의 시대였다. 그 시대에 많은 철학자들이 해답을 내놓았으나 그의 앞 시대 철학자, 콩도르세는 수학의 추상적인 이론만을 제시하였다. 그는 과학과 경험적 사실에 기반을 한 정치사회적 질서의 재조직을 꿈꾸었다. 그에게 진정한 진보는 질서를 기초한 것이었는데 때때로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 왕정복고주의자의 주장으로 간주되어 해명해야만 했다. 그 결과 제시한 것이 사회 발달의 삼 단계 법칙이다. 첫 번째는 신학적 단계, 두 번째는 형이상학적 단계, 세 번째는 실증적 단계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인간은 자연현상을 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작품으로 상상했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사회적인 현상을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존재나 힘에 귀속시킨다. 그러나 신학의 단계가 끝나고 형이상학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면, 초자연적인 절대자라는 관념은 어떤 추상적 본질이라는 관념으로 바뀌게 된다. 신 대신 현상들을 지배하는 근원적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추상적탐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시기에서는 형이상학에 의해 제기된 질문들이 여전히 신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세 번째 단계에서 인간은 절대적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이해하게 되었고, 따라서 우주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공허한 탐구를 포기하고 학문적 작업을 자연현상들 상호간의 우호관계를 설명하는 데로만 국한시켰다. 인간 정신 발달의 궁극적 지향점인 실증의 단계에 다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경험적 관찰과 논리적 추리의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자연형상을 수학적으로 정의함으로써 환경을 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는 문명의 발전을 자연적 진행으로 보았다. 또한 그가 실증주의 철학체계를 제시한 것은 학문연구를 신학과 형이상학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사회연구에 자연과학적 방법을 도입시켜 궁극적으로는 사회변혁 속에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삼 단계 법칙이 필연적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자연적 질서가 점차로 실현되는 과정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실증적 단계에서 완성된다. 즉 진보는 질서의 전개를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자연적 질서는 무엇이며 왜 그것은 단번에 실현되지 않고 시간 속에서 서서히 전개되는가? 콩트는 미리 존재하는 질서의 상태가 시간적으로 전개되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개됨에 따라 진보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가에 대해 그는 긍정적이게 대답했다. 완성함이라는 단어보다 전개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우리의 기본적 능력들이 단순히 자연발생적 도약으로부터 적절한 문화에 의해 점차 촉진되는’과정을 설명하였다. 즉, 3단계는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의미에서 진보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는 생물학을 근거로 하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학문을 한층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한 사회유기체설을 주창함으로써 사회계약설을 비판하였다. 그가 주장한 사회유기체설은 사회를 생물유기체에 비유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을 생물유기체의 기관에 견주는 것으로, 개인은 사회유기체의 한 분자로서 활동하고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거기서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반면 사회계약설은 정치사회 성립의 역사적, 논리적 근거를 평등하고 이성적인 개인 간의 계약에서 구하려는 정치이론으로 국가 기타의 정치적 제도는 실제적, 실체적 성격을 잃고, 계약을 지탱하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그 존재가 좌우되는 인공적 가공물이라고 생각했다.
○ 저서들
주요 저서로는 ‘실증철학강의’ (6권, 1830~42), ‘실증정치체계’ (4권, 1851~54) 등이 있다.
– Bibliography
Comte, A.; A general view of positivism [Discours sur l’Esprit positif 1844] London, 1856.
Comte, A.; Bridges, J.H. (tr.); A General View of Positivism; Trubner and Co., 1865 (reissued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Comte, A.; Congrev, R. (tr.); The Catechism of Positive Religion; Kegan Paul, Trench, Trübner and Co., 1891 (reissued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Comte, Auguste, and Gertrud Lenzer. Auguste Comte and Positivism the Essential Writings. Transaction Publishers, 1998.
Comte, A; Martineau, H. (tr.); The Positive Philosophy of Auguste Comte; 2 volumes; Chapman, 1853 (reissued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Comte, A.; Jones, H.S. (ed.); Comte: Early Political Writing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Comte, A.; System of Positive Polity; various publishers
Comte, A.;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Tome II; Bachelier, Paris, 1835.
Comte, Auguste, and Ferré Frederick. Introduction to Positive Philosophy. Hackett Pub. Co., 1988.
Comte, Auguste, and H. S. Jones. Early Political Writing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