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제국의 이집트 점령기 (BC 331~BC 30)
○ 아르게아스 왕조(알렉산드로스 3세)
아르게아스 왕조(고그: Ἀργεάδαι, 라: Argeadai)는 고대 그리스의 왕조이다. 기원전 700년부터 기원전 310년까지 마케도니아 왕국를 통치했다.
‘아르게아드’(Argead)와 ‘아르기베’(Argive)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아르게이오스(고 그: Ἀργεῖος, 라: Argeios) 또는 아르고스에서 라틴어 아르기보스(: Argīvus)를 경유하여, 호메로스에서 최초로 등장하며, 그리스인들을 집합 명칭을 나타내는 아르기베 다나안스(고그: Ἀργείων Δαναῶν, 라: Argive Danaans)로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인 설명에 따르면, 아르게아스 왕조의 기원은 그리스의 아르고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따르면 아르게아스라는 이름은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아르고스의 테메노스 가문에 이어지는 가계임을 주장했다. 초대 조상은 전설상의 헤라클레스의 손자의 손자인 테메노스이다. 아이가이에서 왕궁을 발굴한 마노리스 안드로니코스는 돔 모양의 방(이것을 알현실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에서 이 전승과 관련된 비문을 발견했다. 이것은 헤로도투스의 ‘역사’의 설명과 일치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테메노스의 일족인 가우아네스, 아에로포스, 페르디카스 삼형제는 아르고스에서 일리리아로, 그리고 상부 마케도니아로 레바이아라는 마을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왕을 섬겼다. 왕은 페르디카스에게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징조를 믿고 그들에게 왕의 영지에서 떠나도록 요구했다. 삼형제는 마케도니아의 다른 지역으로 길을 떠나 베르미오 산기슭의 미다스의 동산 근처에 옮겨갔다. 그들은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점차 왕국을 형성했다. 또한 헤로도투스는 그리스에서 이민족 취급을 받던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 1세가 기원전 504년 또는 500년에 개최된 고대 올림픽에 참여하였는데, 그리스인이 아니라고 이유로 관계자로부터 이의를 제기받았던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헬라노디카이는 알렉산드로스 1세가 아르고스 출신이라는 주장을 조사한 후, 마케도니아인이 사실상 그리스인임을 인정하고 그의 참여를 인정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따르면, 아르게아스 가문은 원래는 아르고스 출신의 테메노스이며, 고원에서 하부 마케도니아로 내려왔고, 피에리아에서 피에리아 인들을 쫓아내고 아크시오스 강을 따라 펠라와 바다로 도달하는 길쭉한 토지인 파이오니아를 손에 넣었다. 그들은 또한 에도니 족, 에오르디아 인들과 알모피아 인들을 내쫓고 미그도니아를 영지로 추가하였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아르게아스 족의 통치자였지만, 필리포스 2세의 시대에는 그 지배를 더욱 확대하였고, 상부 마케도니아의 모든 나라를 마케도니아의 지배 하에 편입시켰다.
아르게아스 왕조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더 3세 (대왕)이며, 그들의 지도 하에 마케도니아 왕국은 모든 그리스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전복하고 이집트와 인도까지 확대했다. 그러나 대왕의 사후 왕위 계승자로 남겨진 것은 지적장애를 가진 필리포스 3세와 영아 알렉산드로스 4세이며, 그들은 이름뿐인 왕이었다. 따라서 후속 장군(디아도코이)과 남겨진 왕족들은 서로 세력 다툼을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후속 장군 혼자 대왕의 이복자매 테살로니케와 결혼한 카산드로스에 의한 찬탈을 받아 아르게아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 알렉산더 3세의 이집트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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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제국의 충돌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한 정복자를 탄생시켰다. 기원전 334년 코린트에서 헬라스 연맹을 소집해 총사령관에 추대된 알렉산더는 오랫동안 그리스를 침입해 그리스인들을 괴롭혀온 강대국 페르시아를 무너뜨릴 결심을 했고, 마침내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그 뒤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기원전 323 재위)의 군대는 곧 이집트로 진주할 채비를 차렸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치하의 이집트에 진입하기 전에 가자에서 바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와 이집트 징집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으나 곧 쳐부수고, 기원전 332년 가을에는 이집트의 현관이라고 할 수 있는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그러자 페르시아 총독 마자케스는 저항하지 않고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알렉산더에게 넘겼다.
알렉산더는 이집트 인민들에게 자신을 해방자로 선전했다. 그는 헬리오폴리스와 멤피스의 이집트 신들에게 경배했다. 특히 멤피스의 수호신 프타 신의 살아 있는 표상인 아피스라는 신성한 황소에게 엎드려 경의를 표했고, 또한 리비아 사막에 위치한 오아시스 시와에 가서 장엄하고 신성한 제사를 드린 후, 스스로 아몬-라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면서 이집트 통치에 대한 신탁(神託)을 신으로부터 받아냈다고 선언했다.
아문-라의 아들이 된 그가 오가는 길은 신의 가호로 이제 안 내리던 비가 내리고, 길을 잃고 헤매는 소규모 군대에게는 까마귀가 갑자기 출현해 길잡이가 되어주었다고 민간전승은 전하고 있다. 페르시아의 캄비세스처럼 그 역시 이집트의 합법적인 왕, 파라오로 인정되었다. 여기다가 더해 민간전승에서는 그를 이집트의 마지막 토착민 왕이었던 넥타네보 2세의 후손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대정복을 펼쳐야 하는 사업 때문에 이집트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앞선 페르시아의 왕들처럼 그도 이집트 역사에서는 부재군주에 불과했다. 이집트의 통치는 휘하의 장수 프톨레미에게 맡겨졌는데, 그 뒤 기원전 305년 프톨레미는 스스로를 이집트의 왕으로 선언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한편은 지중해로, 다른 한편으로는 마레오티스라는 담수호로 둘러싸인 한 어촌지역을 이집트의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나일 강의 서쪽 끝 지류에서 50㎞쯤 떨어진 이곳은 삼각주 가장자리에 형성된 평탄하고 폭이 좁은 석회암 지대로, 도시를 건설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은 지중해로 직접 교역을 할 수 있고, 마레오티스 호를 통해 거미줄처럼 펼쳐진 운하로 나가 델타의 삼각지와 내륙의 나일 계곡과도 쉽게 연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더욱이 토지는 비옥하고,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과 바닷바람이 어우러지는 기후도 알맞아, 깨끗한 공기와 함께 언제나 활력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알렉산더는 이 도시가 훌륭한 해군기지이자 무역항이 될 뿐만 아니라 그가 꿈꾸는 새로운 제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보았다. 그런 만큼 신도시는 치밀한 계획에 따라 세워졌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직접 도시 설계를 감독했고, 특히 시장과 그리스 신전,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의 위치를 직접 선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알렉산더의 이름을 따른 알렉산드리아 시가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다.
그는 대정복 사업을 위해 기원전 331년에 이집트를 떠났으나, 알렉산드리아 시는 계획대로 완성되어 당대 지중해권에서 제일가는 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더는 정복지마다 자기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곳곳에 세웠지만, 가장 번성하고 오늘날까지 그 유명한 이름이 변함없는 도시는 이곳뿐이다.
한창 절정기 때의 알렉산드리아 시는 화려한 대리석 건축물들과 궁전, 극장, 원형경기장, 사원 등이 숲을 이루었다. 포세이돈과 디오니소스를 모신 사원이 있었고, 그리스의 제우스 신과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이 혼합된 세라피스 신이 세라피온에 모셔졌다.
파로스 섬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높이 130m의 3층탑으로 된 빛나는 대리석의 파로스 등대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북동구에는 정원이 딸린 화려한 궁전들이 줄을 지었는데, 그것들은 로키아스 섬까지 뻗어 바다에 닿았다.
길이 6㎞, 너비 1.5㎞ 정도의 기다란 평행사변형으로 된 알렉산드리아 시가지는 넓은 도로망이 시원하게 깔려 있었는데, 로데스 섬 출신의 디노크라테스가 고안 · 설계한 것이었다. 7스타드(고대 그리스의 길이 단위로 7스타드는 1,200m에 달함)의 대로는 등대가 있는 파로스 섬과 육지를 이어주었고, 동쪽에는 대포항이, 서쪽에는 귀향항이 형성되었다.
거리는 늘 사람으로 북적댔다. 시가지에는 30만 명의 알렉산드리아 시민이 거주했고, 세계 각지에서 온 70만 명이 변두리에 살았다. 도시는 크게 3개의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심은 그리스인들이 차지했고, 동부는 유대인들이, 서부의 구시가지는 이집트인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선원, 상인, 장인, 관리, 외국인 용병 등이 그 주위에 머물렀다.
운하와 저수지, 그리고 나일 강과 마레오티스 호의 물을 정화시켜주는 정교한 장치와 시설들 없이 도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심의 공원들과 숲만으로는 대기오염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알렉산드리아의 부자들은 마레오티스 호수 주변에다 정원과 과수원, 호화별장을 짓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았다.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와 뱃길의 교차점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에는 자연히 상아, 향료, 이국산 과일, 식량, 술, 공예품 등 엄청난 양의 교역품들이 거래되는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 유명한 그리스 여행가 스트라본이 알렉산드리아를 가리켜 ‘세계의 무역항’이라 말했듯이, 절정기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없는 상품이 없었으며, 식량을 보관하는 여러 창고마다 밀이 가득했다. 또한 아름다운 무희나 창녀들이 성적 쾌락을 팔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지식과 예술의 교류가 매우 활발해 알렉산드리아는 세계 최고의 문화 도시로 발전했는데, 당대 최대 규모의 도서관과 박물관이 존재했다.
– 아르게아스 왕조의 역사 군주
카라노스 (기원전 808년- 기원전 778년)
코이노스 (기원전 778년- 기원전 750년)
티림마스 (기원전 750년- 기원전 700년)
페르디카스 (기원전 700년- 기원전 678년)
아르가이오스 1세 (기원전 678년- 기원전 640년)
필리포스 1세 (기원전 640년- 기원전 602년)
아에로포스 1세 (기원전 602년- 기원전 576년)
알케타스 1세 (기원전 576년- 기원전 547년)
아민타스 1세 (기원전 547년- 기원전 498년)
알렉산드로스 1세 (기원전 498년- 기원전 454년)
알케타스 2세 (기원전 454년- 기원전 448년)
페르디카스 2세 (기원전 448년- 기원전 413년)
알케라오스 (기원전 413년- 기원전 399년)
오레스테스와 아에로포스 2세 (기원전 399년- 기원전 396년)
알케라오스 2세 (기원전 396년- 기원전 393년)
아민타스 2세 (기원전 393년)
파우사니아스 (기원전 393년)
아민타스 3세 (기원전 393년)
아르가이오스 2세 (기원전 393년- 기원전 392년)
아민타스 3세 (복위) (기원전 392년- 기원전 370년)
알렉산드로스 2세 (기원전 370년- 기원전 368년)
아로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 (섭정) (기원전 368년- 기원전 365년)
페르디카스 3세 (기원전 365년- 기원전 359년)
아민타스 4세 (기원전 359년- 기원전 356년)
필리포스 2세 (기원전 359년- 기원전 336년)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 (기원전 336년- 기원전 323년)
안티파트로스 (마케도니아 섭정) (기원전 334년- 기원전 323년)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 (기원전 323년- 기원전 317년) 직함 왕
알렉산드로스 4세 (기원전 323년- 기원전 310년) 직함 왕
페르디카스 (마케도니아 섭정) (기원전 323년- 기원전 321년)
안티파트로스 (마케도니아 섭정) (기원전 321년- 기원전 319년)
폴리페르콘 (마케도니아 섭정) (기원전 319년- 기원전 317년)
카산드로스 (마케도니아 섭정) (기원전 317년- 기원전 306년)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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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5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린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왕가를 말한다. 파라오를 칭했고, 기존 이집트의 전통과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이집트 제32왕조라고도 불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장군이자 그의 계승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기원전 305년에 이르러 스스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로 칭하고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즉시 그를 독립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로 인정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기원전 30년 로마 공화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300년을 이집트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남자 통치자들은 모두 프톨레마이오스 로 칭했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 아르시노에, 베레니체로 불렸다. 통상 그들의 이름 뒤에 붙이는 숫자는 현대 역사연구가들이 편의상 붙이는 것으로 당대의 그리스계열 왕가는 이름 뒤에 붙이는 별칭으로 구분했다. 가령 프톨레아미오스 1세 뒤의 소테르는 “구원자”라는 뜻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고대 이집트 중 유일하게 토착 이집트어를 구사하지 못했고 고대 이집트 종교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이들은 오직 그리스 신화를 숭배하였다. 이들 중 유일하게 클레오파트라 7세만이 토착 이집트어를 구사할수 있었으며, 본인을 그리스인의 후손이 아닌 토착 이집트인의 후손을 자처하며 혼자서만 유일하게 고대 이집트 종교를 숭배하였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역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마토르
프톨레마이오스 7세 네오스 필로파토르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
클레오파트라 2세 필로메토라 소테이라
클레오파트라 3세 필로마토르 소테이라 디카이오소시네 니케포로스
프톨레마이오스 9세 소테르 2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 : 클레오파트라 3세와 공동통치
베레니케 3세 필로파토르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알렉산드로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네오스 디오니소스
클레오파트라 5세 트리파이나 : 베레니케 4세 에피파네이아와 공동통치
클레오파트라 7세 테아 네오테라 :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 프톨레마이오스 15세와 공동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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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