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투데이
타임지가 보도한 가뭄 속에 허덕이는 농촌 실정
호주 내륙은 연간 강우량이 80∼250mm(한국의 연평균 강우량 1227mm)로 아주 적다. 더욱이 태양열이 강한 적도 부근에 놓여 있어 내린 비의 증발이 빨라서 물이 곧 말라 건조하다. 예전 호주 개척자들은 먼저 다녀온 사람들이 만든 지도에는 강이 있다고 표시가 되었지만 얼마 후에 그곳에 가면 물이 말라 마실 물도 찾지 못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현재도 호주 사람들은 해안에서 50Km 안에 80%가 살고 있다. 50Km 안에는 비도 많이 오고 더위도 그리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주에 여자 시인이였던 도로디 맥켈라(Dorthea Mackellar, 1885-1968)는 19세에 “My Country”라는 시에서 “나는 불타는 뜻한 더위와 가뭄에 시달리는 내 조국을 사랑한다(I Love sunburnt country)”라고 시를 써서 더위와 가뭄에 시달렸던 호주 농촌을 오히려 자랑했다. 그는 의사이며 상원의원(Charles Mackellar)의 딸로 시드니 동부 부자촌인 “Pointpiper” 해안 저택에서 태어났다.
지난주(3월 11일 현재) 타임지가 가뭄에 시달리는 NSW 농촌을 취재한 내용을 소개했다. “크리스탈 벌랜(Krystal Bullen, 36세) 여인은 교통사고로 몸져누워 있는 남편을 대신해서 심한 가뭄에서 4000에이커(Acres; 1에이거는 1240평으로 축구장 반 보다 조금 적은 넓이)의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시드니에서 서북부 480Km 떨어진 Pilliga(인구 273명)에 산다. 남편은 작년 9월 양을 관리하기 위해 빠른 4바퀴 오토바이(Quad-Bike)를 말 대신 이용하다 사고로 거동을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입원중이다.” 이 차를 속력내어 달리다가 언덕에서 평형을 잃어 많은 사고가 발생한다. 2000년부터 호주 농촌에 8,000여대가 보급되었는데 200여명의 농부가 사망하고 8,000명이 병원에 입원중이다.
벌랜(Bullen) 여인은 가뭄(농촌지역에는 3개월만 비가 안와도 가뭄이 시작된다)이 호주에 자주 발생하여 경험이 많지만 금년같이 이리 심한 가뭄은 없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금년가뭄은 더위를 동반하기 때문에 버티기 힘들다는 말도 했다. 호주 내륙은 낮에는 덥지만 밤에는 추워지나 금년에는 이런 현상이 별로없이 늘 덥기만 하다는 것이다. 혼자 1,700마리 양을 관리하다 보니 먹이도 없고 물도 없어 많은 양이 죽어갔다. 특히 힘없는 양들이 물을 마시기 위해 저수지에 들어갔다가 진흙에 빠져 음직이지 못하는 양떼들을 까마귀 떼와 도마뱀 무리가 산채로 뜯어먹는 장면은 차마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른 풀(먹이)이 톤당 500불 정도된다. 주에 약 1만불이 소요된다. 현재 부채도 43만불이 된다고 한다. 아침 5시에 일어나 트럭에 먹이를 실고 넓은 농장에 양을 찾아가 먹이를 주다보면 하루종일 뜨거운 햇빛에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병원에 남편도 방문해야 하기 때문에 어찌 혼자 할 수 없어 종자양 500마리만 남기고 모두 도살해 파묻었다. 가뭄으로 파는 양의 값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드니 사립학교 기숙사에 있는 16세 딸 “케서린”을 휴학시키고 아버지 병간호를 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금년 가뭄의 특징은 더위가 동반되고 가을까지도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는 기상청의 발표가 있다. 호주 국립대학 교수이며 IPCC(국제기후변화 패녈) 부회장인 마크 하우던(Mark Howden) 박사는 “호주는 2005년 이후 10년중 9년이 점점 더워가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호주 대륙 서북부에는 심한 홍수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더위가 심해 금년 1월에 발생한 타스마니아 산불 등 모두가 기후변화로 야기되는 결과”라고 말했다. 또한 “호주가 더워지는 원인이 더운 기후가 물을 빨리 증발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이로 인해 가뭄이 심해지고 오래가며 참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호주만 온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태라면 금세기 말은 전 지구가 가뭄이 발생할 것이라 했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겨울에 씨를 뿌리는 Winter Crops(밀, 보리, 콩 칸올라 등등)의 수획양이 작년보다 23%가 줄어들고 호주 동부 해안의 가뭄으로 야채 생산하는 농장은 49%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가뭄으로 풀이 말라 소와 양 등 가축이 17%가 도살이 되었다. 호주 기후전문가들은 호주에 강우량이 줄어들지 않고 약간 늘었지만 인구가 많고 곡창지대인 동부해안 쪽에는 크게 줄어 문제가 된다고 본다. 반면 이제껏 비가 없었던 동북쪽, 서북쪽에는 강우량이 늘어나고 있다 한다.
멜본대학 교수인 조엘 저지스(Jolle Gergis)는 1885부터 1902년에 있었던 호주의 대 가뭄에 각 도시에는 음료수가 고갈되어 교회마다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회가 열렸으며, 호주의 밀 생산은 거의 사라졌고 가축수는 40%로 줄어들었다고 언급하며, 앞으로 더 심한 기후변화의 문제가 생길수도 있다는 내용의 책(the History and future of climate Change in Australia)을 발행하기도 했다.
정부는 가뭄 피해를 당한 농가당 1만2천불씩 지원토록 하는데 3월에 6,000불, 내년 9월에 6,000불을 지불하게 되고 가뭄으로 어려운 가정 1만9천 가구에는 주에 295불씩 농부 휴직 수당이 지불된다.
호주 선거에 대한 이야기
지난주(3월 18일 현재)에 호주 선거관리 위원장 톰 로져(Tom Rogers)는 지난 2010 선거에 투표 참가율이 96.3%였다고 말하고 이것은 호주투표 역사상 가장 높았다며, 이같이 높은 투표 참석율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들다고 했다.
영국은 2017년에 투표등록 인원의 68.7%가 선거에 참석했다고 과시하고, 미국은 2016년 총선에서 58.1%가 참석했다고 투표율을 자랑하고 있다. 호주도 이런 때가 있었다. 1901년 1월 1일 영국에서부터 자치 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그후 1903년에 제 1회 연방정부 선거가 있었다. 투표자는 영국시민권자나 영연방시민권자만 투표할 수 있었다. 호주 시민을 정한 것은 1980년대 이후였다. 그 당시는 경찰과 우편배달부들이 넓은 대륙에 흩어져 있는 투표자를 방문해서 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투표율은 43.36%였다. 투표율이 저조해지자 1911년 노동당 Andrew Fisher 정부가 강제투표 제도를 제정하고 1924년부터 실시했다. 그 결과 91.3%가 되었다. 32%의 투표율이 늘어난 것이다. 그 후도 계속 90%가 넘어서 호주 정부는 다수 국민 참석자에 의해 굳건히 세워졌다. 의무 투표로 인해 투표일에도 일을 해야만 하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노인이나 젊은이들이 모두 참석해서 굳건한 민주정부를 마련해 왔다.
호주의 국민 의료 제도인 무료 메디캐어(Medicare)제도를 보수당 정부는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료 의료제도를 적극 찬성하는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태의 국민들이 모두 참석하여 투표 결과 그 의도는 무너지고 말았던 지난번 선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 결과 호주가 평등사회(Egalitarian Society)를 이루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투표를 기권하는 힘없는 국민들은 정부의 지지를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강제투표를 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투표율이 높으면 젊은층이 많아 진보세력이 우세하고 투표율이 낮으면 노인들이 많이 투표해서 보수층이 이긴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두 참석해서 자기 의사를 충분히 표하여야만 자기 주장이 성사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이다.
호주 투표일은 언제가 토요일이다. 그러나 미국은 월요일부터 금요일 하는 기간이 다르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투표하지 않는 것도 정치 행위인데 왜 투표 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어야 하는가? 연방정부 선거에 불참하면 벌금이 대략 20불이고 주정부 선거에 불참하면 79불이라고 한다. 투표하기 싫은 사람이 벌금을 내기 싫어 투표장에 가서 장난으로 “기호 1번”만 찍어버린다든가 하면 다수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호주, 브라질, 스위스 등 32개국이 강제투표를 실시한다. 호주에 처음 죄인 선단이 도착한 1788년 1월 26일부터 55년간은 영국에서 임명한 총독과 영국군대에 의해 NSW 정부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민자도 늘어나고 죄인들의 후예들이 농촌에 상당한 땅을 허가받아 부를 누리게 되었다. 특히 177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전쟁은 영국정부에게 호주에도 빨리 자치권을 부여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를 원했다. 그 당시 호주를 대표하는 총독의 자문기관(legislative Council, 현재 상원) 위원은 이제껏 총독이 임명한 사람만 가능했다. 그러나 1843년부터 그중에 일부 위원을 주민들의 투표로 선출토록 했다.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은 정부가 임명을 하였는데 농토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였다.
영국정부는 호주의 헌법과 자체 정착인들의 선거에 의해 의회를 구성하고 주지사를 선출토록 했다. 그러나 NSW주 하나로는 힘이 강해질 수가 있어 NSW주를 나누기 시작했다. 첫째 남부호주와 타스마니아주를 1856년에 독립시키고, 빅토리아주는 1855년, 퀸스랜드주는 1859년에 독립시켜 자체 지방정부를 만들어 NSW주에서 분할했다. 남부호주는 죄인들이 아닌 순수 이민자들만의 정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1856년 주선거에 21세 성인중 영국시민권자나 영연방시민권자들은 전원 투표하도록 했다. 1857-1896년에는 호주 전역에도 적용되었다.
영국 정부는 한 발 더 양보해서 1901년 1월 1일 호주 자체 영방정부를 세우도록 하였다. 다만 국방과 외교는 여전히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자부심을 가진 남부호주정부는 1894년 여자도 21세 이상이면 투표하게 하였는데 세계에서 여성참전권의 시초가 되었다. 전 호주에 적용하는데는 9년(1899-1908년)이 걸렸다. 선거 나이가 21세에서 18세로 정한 것은 1973년이다.
원주민들의 투표 참여를 보면 1949년에는 주정부 선거에만 참석토록 허가하였고 대신 군대를 징집하도록 했다. 그러나 퀸스랜드주, 서부호주는 이 법을 무시하고 1960년대에 가서야 허가 했다. 1984년에 가서 연방도 투표가 허가 되었다. 이제는 원주민이라도 상원이나 하원 의원까지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영국인, 영연방인의 투표를 제한하고 호주 시민만 투표를 하게 된 것은 1984년부터였다. 영국인들이 과거에는 권한이 많았지만 지금은 일반 이민자들과 다름 없어지고 있다.
50명을 살해한 호주 이민반대, 백인우월주의
뉴질랜드는 일 년에 살인 사건이 10건 이하이며 IS의 테러도 전혀 없었던 평화로운 나라이다. 지난 3월 15일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Al Noor(알 뉴르) 모슬렘 사원에 금요예배를 위해 300여명의 모슬렘들이 이곳에 참석하여 기도중일 때인 1시 40분경에 군대식 반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괴한이 진입하여 총기를 난사해서 41명이 사망시키고 50분후는 다른 Linwood 사원에서 7명을 총으로 사살했다. 사망자들은 모슬렘 피난민으로 뉴질랜드에 정착하여 편안함을 느껴온 사람들이다.
범인은 28세의 호주인 Brenton Tarrent로 NSW 동북쪽 Grafton 출신이다. 가족에 의하면 그는 북한까지도 여행을 할 정도로 여행을 좋아했으며 그 후에 크게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 그는 이민을 반대하며 모슬렘을 싫어하는 백인우월주의자였다.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호주인은 62,712명(2013년 인구조사)이다. 그는 담화문(Manifesto)을 만들어 자기의 정당성을 이야기 했고 실전을 Facebook에 유포시켰다. 뉴질랜드 제신다 아던(Jacnda Adern) 총리는 이번 사태를 “명백한 테러리스트의 공격”이라고 정의하며 “우리가 확보한 정보에 따르면 이번 범행은 사전에 매우 잘 계획된 것”이라고 밝혔다. 호주 스콧 모리슨 총리도 “이번 사건에 충격을 받았고 분노한다”고 했다.
현지 언론은 범인 탤런트가 헬멧에 장착된 카메라로 17분에 걸쳐 범행 현장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생중계했다고 전했다. 뉴질랜드 정부는 각 업체에 이 동영상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시민들에게 “공유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현지 언론들은 범행 이유를 담은 ‘성명’을 냈지만, “고려 끝에 공개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미국 CNN이 공개한 87쪽짜리 성명에는 “반 이민, 반 무슬림에 대한 생각과 이번 공격을 저지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고 전했다.
사상 최악의 테러 참사에 뉴질랜드는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졌다. 뉴질랜드 크리켓팀은 3월 16일로 예정됐던 방글라데시와의 경기를 취소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는 이웃 나라를 위해 조기를 걸자고 제안했다.
근래는 한 나라의 일이 한 나라의 일로 끝나지 않는 ‘지구촌’ 시대가 왔다. 인구가 70억으로 증가와 동시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 휩싸인 나라마다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이 늘고, 이들이 죽기 살기로 다른 나라로 탈출하면서 증가하는 난민행렬과 이민인구에 각국이 예민해졌다. 시리아 예멘 북부아프리카 출신들은 유럽으로 밀려들고, 중남미 출신들은 미국으로 몰려들며,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출신들은 호주와 뉴질랜드로 향한다.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갑자기 너무 늘어나자 독일 등 난민에 우호적이던 나라들까지 “더 이상은 감당이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번 뉴질랜드 참사를 계기로 젊은 여 수상의 처사는 크게 모범이 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장면은 히잡을 쓴 저신다 아던 수상의 모습이다. 38살의 좌향적 정치인 아던은 먼저 피해자들을 끌어안았다. 참사 다음날부터 히잡을 쓰고 무슬림 피해자들을 찾았다. 많은 고통을 겪고 정말 그들은 평화에 나라로 온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백인총리가 히잡을 쓴다는 것은 실망한 모슬렘을 무슬림으로 존중한다는 상징. 이민자로서 공격을 당하고 슬픔과 두려움에 차있던 모슬렘 커뮤니티는 안도하고 감동했다. 또 테러범에 단호했다. 테러범이 참극을 벌이면서, 스스로 대단한 존재나 된듯 우쭐하며 얻으려는 것은 명성일 것이다. “나는 그의 이름을 절대로 언급하지 않겠다”고 아던은 선언했다. 범인이 즐기려던 것을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참사 발생 단 6일 후인 21일 그는 발표했다. “3월 15일 우리의 역사는 영원히 바뀌었다. 이제 우리의 법도 바뀔 것이다.” “군사용 반자동소총 등 이번 범행에 사용된 총기류 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이미 퍼져있는 총기들은 정부가 사들이겠다”고 발표했다. 강력한 총기규제로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의지이다.
그러나 범인을 길러낸 호주 실정은 어떤가? 많은 무슬림이 테러를 당하고 실제로 IS 소탕에 참여하여 모슬렘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지만 인종주의 정당인 One Nation Party 창시자 포린 핸슨은 처음 아세아 이민자를 줄여야 한다더니 모슬렘 이민자를 받지 말자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지 않는가? 보수당의 이민장관을 오래한 현 총리 스커트 모리슨, 토니 아버트 등은 폭격에 쫓겨 호주를 찾은 모슬렘 불법 망명자들을 강제 구금시키고 있지 않는가?
특히 프레져 앤잉 상원의원은 이번 사태에 대하여 “모슬렘이 왔으니까 살해를 당하지 않았는가?”식에 이야기를 하다가 소년에게 계란 세례를 받고, 전 국민이 서명을 통해 퇴출운동을 벌리고 있다. 이민자를 박해하는 미 대통령 트럼프는 이번 테러를 놓고 양측에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이 발언으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로부터 그는 극우라는 공격을 당했다.
이번 테러는 모든 이민자들을 충격과 불안에 빠뜨렸다. 반이민 테러는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명호(SBS 방송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