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인간과 역사는 과거보다 나아졌고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라고 보십니까?
(18세기 계몽주의 이야기 –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혀라)
18세기 유럽의 시대적 특징
시대적 배경을 모르면 그 시대의 의미와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text는 그 시대의 context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입니다. 계몽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서 이런 사상이 생겨나게 된 시대적 배경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시대가 사상을 만들기도 하고 또한 사상이 그 시대를 엮어내기도 한다는 상호관계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우리는 18세기 유럽을 한마디로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였다고 정의합니다.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영국을 중심한 ‘산업혁명’이었고, 둘째는 프랑스를 중심한 ‘시민혁명’이었습니다.
(1) 산업혁명
우리는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 사이에 영국으로부터 출발된 과학, 기술의 혁신과 거기에 따른 사회-정치-경제적 변혁 운동을 통칭하여 ‘산업혁명’(The Industrial Revolu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역사학자 Arnold Toynbee였습니다. 산업혁명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수 만년 동안 생존의 방식으로 삼아왔던 수렵경제와 농업경제와 수공업 체제를 공장과 공업과 기계산업 구조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지난날의 소규모 수공업 생산체제를 공장을 통한 대규모 대량 생산 구조로의 전환이 따라왔고 곧 이어서 생산의 전문화와 분업화가 촉진되었습니다. 이렇듯 산업혁명이 촉발된 데는 그 이전에 괄목할만한 몇 가지 과학기술의 발명과 발견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첫째는 신소재, 즉 새로운 에너지의 재료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사람들이 오직 나무나 숯같은 것을 통해서만 에너지를 얻었습니다만 마침내 인류는 석탄과 구리 등 여러가지 광물자원으로부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없이 더 강하고 풍부한 에너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석탄을 비롯한 광물 에너지는 곧 이어서 석유와 전기 에너지로 가속적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원자 에너지에 이르기까지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당시로서는 이 새로운 에너지원의 발견이 인간들의 생활뿐만이 아니라 사고방식에까지도 무서운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둘째는 이들 새로운 에너지원을 통하여 증기기관과 방적기계를 발명해내고 이는 곧 이동과 통신, 생산성과 소비성의 방향에 놀라운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초기 증기기관차나 증기선은 뒤를 이어 자동차와 전신과 라디오로 이어졌고 이는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대륙과 대륙을 연결하여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Global village의 초기 형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실로 산업혁명 초기, 수력을 이용한 방적기를 발명해낸 Sir Richard Arkwright(1732-1792)나, 이를 더욱 발전시킨 James Hargreaves(1720-1778)와 Samuel Crompton(1753-1827), 그리고 증기기관을 처음 고안해낸 James Watt(1733-1819)와 그 뒤를 이어 이를 더욱 크게 발전시킨 Richard Trevithik(1771-1833)과 마침내 그렇게 만들어낸 기관차가 시속 39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도록 개량해낸 George Stevenson(1781-1848) 같은 이들이 근세 계몽주의 시대를 연 선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자연과학의 발전은 인문-사회과학을 선도해낸 마중물이 됩니다.
셋째는 위의 두 가지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결과로써 생산체계와 소비구조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생산구조는 적은 인력을 가지고서도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노동력은 점점 더 전문화되고 분업화됨으로 생산성 자체가 높아지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고 제품의 질적 수준도 나날이 향상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품질 좋은 고급 물건을 찾게 되었고, 제품의 질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생산과 소비의 패턴을 바꾸는 방향으로 전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잠간 산업혁명이 이루어낸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로 산업혁명은 정치-경제적 봉건체제를 무너트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산업혁명은 근대적 산업사회를 만들어냈습니다. 종래의 지주 계급 대신에 신흥 산업 브르조아지와 노동계급이 생겨남으로 지난날의 농노사회는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도시 임금 노동자 계급이 생겨난 것입니다. 둘째로 산업혁명은 단순히 경제체제만 바꾼 것이 아니라 정치체제를 바꾸어 나가는 데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경제구도의 변화는 귀족들과 지주계급을 무너뜨리고 신흥 브르조아지와 도시 노동자 계층을 만들어 냄으로 민주사회로 가는 교두보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종래는 토지의 크기에 따라 선거에서 투표용지의 숫자를 정해왔는데 이제는 1인 1표제가 서서히 머리를 들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은 보편적 선거제도를 추진하고 시민혁명의 불씨를 지피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에는 부정적 측면도 동시에 생겨났습니다. 기술의 혁신과 공업화는 인간과 사회를 비인간화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시화와 거기에 따른 각종 부작용들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런던은 세계의 쓰레기장처럼 되었습니다. 도로나 하수도를 비롯한 도시 기간산업은 전혀 갖추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도시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도시를 황폐화 시키고 각종 전염병과 온갖 범죄와 폭력으로 멍들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산업혁명은 인간을 농노상태에서는 해방 시켰지만 동시에 그 인간을 새로운 착취계급 앞으로 던져놓았습니다. 사람은 이제 기계의 부속품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도시화와 거기에 따른 각종 부작용에는 환경오염,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착취, 갖추어지지 아니한 노동법, 하루 최저 12시간에서 최고 16시간에 이르는 노동, 저임금과 임금착취, 여성들에 대한 성적 착취, 어린이노동의 심각함(어린이 노동을 하루 12시간 이내로 법제화하는 데는 수 십년이나 걸렸습니다)은 극에 달했습니다. 동시에 산업혁명은 새로운 식민지 개척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그 혁명이 만들어낸 또 다른 부작용 중 하나입니다. 산업혁명과 함께 영국을 비롯한 유럽제국들은 앞을 다투어 가면서 아프리카와 중동과 동남아시아와 호주를 비롯한 남태평양 지역에 식민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산업혁명이 불러들인 비참한 인간 삶과 어두운 사회적 모습은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불러오는 원인 제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산업혁명이 빚어낸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부정적 측면이 이 후 칼 마르크스를 중심하여 인간성을 회복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해야 하겠다는 정신에 기초를 둔 초기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시민혁명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18세기 ‘시민혁명’은 분명히 1789년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민주적 시민혁명을 중심하지만 이미 한 세기이전인 1688년 영국에서 시작된 ‘명예혁명’(The Glorious Revolution)과 1776년 미국의 독립운동까지를 포함합니다. 영국에서 피흘림이 없이 추진되어온 ‘무혈혁명’(Bloodless Revolution)은 ‘왕은 존재는 하지만 군림하지는 못한다’는 계약에 왕과 의회가 함께 합의함으로 서구 최초로 시민혁명의 가능성을 열어놓았습니다. 의회민주주의 출발점이 된 이 혁명은 그 이후 그 어떤 왕이나 여왕도 절대 시민들의 투표로 뽑힌 사람들이 만든 의회를 통치, 간섭, 무시하지 못하는 전통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후 1775년부터 미국 동부의 13개 주에서 시작된 미국 독립전쟁은 1783년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서 얻은 고귀한 결과였으며, 이로 인하여 미국은 세계 최초로 독립 선언문을 만든 나라요, 성문법으로 된 최초의 헌법을 제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독립운동은 이후 거의 모든 나라의 크고 작은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 1848 베를린을 중심한 독일혁명, 1868년 일본의 메이지유신, 1917년 러시아혁명까지, 대부분의 시민혁명들은 거의 다 미국의 독립운동으로부터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가장 눈여겨보는 프랑스 혁명은 그 어떤 다른 시민혁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희생 속에서 얻어낸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받쳐서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왕권은 하느님이 내리신 것이라고 믿어왔던 오래된 ‘왕권신수설’을 민중의 혁명적이며 폭력적 거부와 힘으로 무너뜨린 혁명이었습니다. 이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사실 프랑스혁명의 직접적 배경은 루이 14세를 중심한 정치권력의 억압과 경제적 수탈같은 직접적 요인 이외에 이론적으로는 룻소나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생겼다고 보겠습니다. 루이 14세, 15세, 16세로 이어진 억압과 폭정, 수탈과 국가 재정의 붕괴,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치와 방탕, 거기에다 이어진 가뭄과 흉년과 홍수는 성난 민중들로 하여금 ‘시민들이여! 손에는 무기를 들어라! 모여라! 뭉치자!’ 하면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민중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체포된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안넷은 재판에 회부된 후 사형판결을 받고 꽁코드 광장에 마련된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나갔습니다. 마침내 1789년 8월 26일 혁명을 통하여 만들어진 ‘국민의회’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선포하였습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eclaration des droits de Homme et du Citoyen) 이라고 표현된 이 선언문의 원문은 하늘이 내려준 천부적 인권으로,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 주권재민, 사상과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의 인정 등을 핵심으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 뿌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초창기 이 선언은 자유, 생존, 저항, 소유권들을 강조했으나 후에는 ‘자유 평등 박애’로 바뀌어졌습니다. 하여튼 18세기 프랑스에서의 시민혁명은 절대 왕정 체제를 무너트리고 민주적 시민사회를 세워나간 정치적 민주-인권운동이었습니다. 피지배자들이 유혈혁명을 통하여 그들의 통치자들을 무너트리고 자유와 민권을 쟁취해 낸 것입니다. 한 사회의 최하층에 있던 백성들이 최고위층에 앉아있던 왕과 왕실, 성직자들과 신학자들, 봉건귀족들과 부자들을 단두대에 세워 목을 친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 부와 신분에 따른 차등제 투표는 민주적 보통선거가 되었고 남자에게만 부여되었던 투표권은 여자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졌고 입헌 군주제로 출발했던 정치제도는 차츰 공화주의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출발점이 18세기 프랑스혁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계몽주의에 대한 일반적 이해
계몽주의, 혹은 계몽사상이란 17세기 후반에서부터 시작되어 18세기를 거쳐 19세기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앞에서 본 산업혁명 및 시민혁명과 더불어 유럽사회 전반에 걸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철학, 예술, 종교 등 제반 분야에서 펼쳐나간 사회 진보 운동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계몽’(啓蒙)이란 한자대로는 ‘꿈을 깬다’ ‘어리석음이나 무지함을 깨우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60년대 대학에 다닐 때 여름이나 겨울 방학이 되면 ‘농촌계몽운동’을 가서 문맹자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한글을 가르치거나 여러가지 농촌 계몽운동을 한 것이 하나의 예가 된다고 봅니다. ‘지난날의 어두움을 박차고 환한 빛의 세계로 나온다’는 의미에서 영어로는 ‘Enlightenment’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밝게 한다’ ‘환하게 한다’는 뜻을 지닌 18세기 유럽에서 출발한 계몽주의 사상은 대단히 폭넓은 개념입니다. 넓게 보면 한 사람 한 사람 개인들은 물론이고 한 시대 전체를 미성숙한 상태에서 성숙한 길로 이끌어 들인다는 뜻이 있습니다. 일체의 전통이나 관습, 무비판적인 의례나 도덕에서 벗어나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는 것이 계몽주의 사상의 근간입니다. 종교적으로는 미몽, 혹은 미신 같은 맹신적이며 신화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이성적이며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고 지성적으로 성서를 해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하자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종교적 권위와 틀을 바꾸는 것이 기본입니다. 정치적으로는 통치권자의 억압에 굴종하던 노예와 같은 체제에 대해 항거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주권재민의 민주정치를 추구하자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는 기존의 정치적 권력을 ‘왕과 귀족으로부터 시민사회로’ 변혁하는 일이 기본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소수의 부자들로 부터 다수의 농민들과 노동자들로’ 부의 구조적 틀을 바꾸자는 운동입니다. 이렇듯 종교적으로는 이성을, 정치적으로는 민주와 인민의 자유를, 경제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골고롭게 사는 평등한 사회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계몽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몽주의의 기본 개념은 3가지입니다. ‘이성’ ‘자유’ ‘평등’입니다.
계몽주의 사상이 추구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철학적으로 계몽주의가 지향하는 바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계몽주의는 서구의 전통적 철학이 제기해 왔던 이론적인 문제들, 특히 형이상학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인간의 일상적 생활과 관계되는 현실 문제에 촛점을 두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현대의 미국식 프라그마티즘(Pragmatism)과는 다른 것입니다. 프라그마티즘은 ‘실용성’에다 방점을 두는데 비하여 계몽주의는 ‘현실성’에다 촛점을 둡니다. 철학의 주제를 존재나 인식, 삶이나 죽음 같은 데서 옮겨, 일상적 경험이나 상식, 경제나 정치, 과학이나 문예의 영역에서 다루어 보자는 것입니다.
(2) 둘째로 계몽주의는 전체주의적이며 억압적인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사상입니다. 다수 보다는 소수, 집단 보다는 개인에게 더 큰 무게를 두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과 자유와 생각을 존중함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하고 권력이나 집단의 주장에 대하여 No라고 이야기하며 항거하는 저항권을 가치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3) 셋째로 계몽주의는 몇몇 특별한 사람이나 집단에게 주어지는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보편적 평등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법은 만인 앞에서 평등하고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계몽주의의 주요 사상입니다. 바로 이 법치주의 사상과 더불어 계몽주의는 자연권과 계약론에 근거하는 새로운 정치이론을 펼침으로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토대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4) 넷째로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가장 크고 높은 덕목이요, 판단의 준거라고 봅니다. 한마디로 계몽주의 사상은 ‘폭넓은 합리주의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계몽주의는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진보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이성뿐이라고 보았습니다. 중세의 ‘하느님 제일 주의’와 ‘믿음 제일 주의’가 이제는 ‘인간 이성 제일 주의’로 바뀌어졌습니다. 인간의 사유와 행동,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제도와 통치–정치제도, 경제구조, 학문적 이론, 종교적 신앙까지 일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이성의 토대 위에서’ ‘이성의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와 신학은 이성적 도전을 받게 되었고 교회가 가르쳐 온 교훈은 미신적이며 불합리하다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대해서는 이성적이며 비판적인 해석방법이 도입되었고 그에 이어 ‘자유주의 신학’이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14세기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인문주의와 인본주의가 18세기 계몽주의에 이르러 현실화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들은 타인이나 권위, 제도나 조직의 간섭이나 억압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그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 권위에 대해서도 자신의 이성에 따라 판단하고 거부하고 항거하며 NO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계몽주의는 종래, 하느님이 국가와 사회의 창조주요, 따라서 하느님이 세상의 통치자며 주인이고 이 땅에서의 왕은 그 하느님의 권위를 위임 받은 ‘신의 대행자’라는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신학적 국가관, 신학적 정치관 등 신학적으로 덧칠해졌던 껍데기들을 벗겨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신 위에 세워진 계몽주의 사상의 핵심을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1)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세계를 이해한다. (2)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신을 이해한다. (3)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세계와 인간의 미래를 보다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나눔의 끝 부분에 가서 다시 논의해 보겠습니다만 계몽주의의 이런 확신이 정말 역사 속에서 제대로 맞아왔다고 보십니까?
계몽주의 사상을 펼치어 온 대표적인 사상가들
이상에서 말씀드린 계몽주의 사상의 토대를 만들고 그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온 사람들 중에서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와 룻소의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프랑스의 백과사전파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언급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프랑스의 보르도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으로 남작이라는 작위를 가졌던 몽테스키외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을 지냈습니다.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사회분석을 시도한 정치 사상가요, 법률가였습니다. 정치 사상가로 그는 1748년 대표적 저서인 ‘법의 정신’(Defennse lesprit des lois)을 지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최초로 삼권분립 이론을 제창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즉시 이 책을 금서 목록에 올렸습니다. 오늘날은 누구나 알고 쉽게 인용하는 말이지만 몽테스키외 시대 ‘국가의 권력은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누어져 서로 견제되어야만 한다’는 이론은 국가와 교회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요 선전포고였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인간 사회가 경험해 온 정치구조와 형태를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그 첫째는 전제정치인데 이는 공포정치라고 규정했습니다. 둘째는 군주정치인데 이는 명예정치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공화정치인데 이것이야말로 덕의 정치라고 주장했습니다. 몽테스키외가 초기에 주장했던 삼권분립이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권력의 입법, 행정, 사법의 분권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에서 국왕과 귀족과 시민 계급이 각각 적당히, 그리고 합리적으로 권력을 나누어 갖는 ‘권력의 분할과 균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초기의 발상조차도 당시로써는 대단히 위험하고 또 혁명적이었습니다. 이 후 민주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 이론은 오늘날의 삼권분립으로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최종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란 결국 정치적 자유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몽테스키외의 이런 명언은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2) 볼테르(Voltaire, 1694-1778)
본명인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cois Marie Arouet) 보다는 필명인 볼테르로 더 잘 알려진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주의 작가요, 사상가입니다. 주요 저서로는 ‘철학서간’(Lettres Philosophiques), ‘형이상학론’(Traite de Metaphysique) 및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 portative)을 비롯한 시와 희곡과 서한 등이 있습니다. 빅톨 유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가 있었고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는 무신론자라고 정죄되어 평생을 망명과 도피 속에서 살았으나 사실은 理神論者라고 평가하는 것이 바르다고 봅니다. 한 때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탈옥하여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꼭 10년 만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그의 자유스럽고 비판적인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당시에는 무신론자라고하여 교회로부터 매장지를 받지 못했으나 프랑스 혁명 후에는 국가 유공자 묘역인 판테옹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시와 희곡과 단편 등 자신의 저서들을 통하여 루이 15세를 비롯하여 섭정 필립 2세 등 당시의 왕실은 물론이고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회와 이슬람을 신랄하게 비판, 비난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았던 볼테르의 어록들 가운데서 몇 개를 옮겨보겠습니다. ‘모든 기록된 역사는 언젠가는 반드시 수정이 되거나 재해석된다’ ‘모든 理論과 주장에는 반드시 異論이 제기 되어야만 한다’ ‘의심하는 일이 유쾌한 일일 수는 없지만 확신하는 일은 의심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 사실이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그 시대의 잠정적인 가설일 뿐이다. 사실은 늘 새롭게 거듭난다’ ‘우리가 태어난 나라에서의 진리는 그 나라에서만 진리일 뿐이다. 모든 진리는 태어난 나라에 따라 달라진다’ ‘교회나 국왕이 발표하는 것들은 절대로 곧이 곧 대로 믿으면 않된다. 비판없이 받아드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의심을 통하여 검증되지 아니한 진리는 아직 진리가 아니다’
(3) 룻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프랑스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룻소는 제네바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로잔을 거쳐 청년시대 이후엔 주로 프랑스의 파리, 링옹, 샹베리에서 활동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출생한 후 닷세 만에 죽음으로 편부 슬하에서 힘든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방황했고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늦게 공부했습니다. 주요저서로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 ‘사회 계약론’(1762) ‘에밀’(1762) ‘참회록’ 등이 있습니다. 특히 국민주권 사상과 시민종교를 부르짖으며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여 학생중심의 교육을 제창한 그의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당시의 종교적 및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심각한 분노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흔히 룻소의 명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자주 언급합니다. 그러나 룻소는 자연철학자가 아닙니다. 그는 문명을 거부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가 의도한 것은 불평등한 사회를 개혁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쇠사슬에 묶이어서 살아간다’는 것이 룻소의 사상을 가장 잘 들어내는 말입니다. 라틴어로 자연이란 natura입니다. 영어로는 nature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본래 의미는 ‘人間의 本性’입니다. 룻소는 ‘인간회복’을 주창한 것입니다. 인간의 천부적 권리를 그는 자연권으로 보았습니다. 자연의 낭만성이나 야성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평화스런 사회를 그렸던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그는 사유재산 제도는 반듯이 폐기되어야 할 악법이라고 보았습니다. 룻소는 모는 사회악과 갈등의 근본 원인은 ‘경제적 불평등’에서부터 생겨나고 역사란 흘러가면 갈수록 빈부의 격차는 더 심화될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왕실, 귀족, 종교들이 칼테르를 형성하여 부를 나누어 갖고 그것을 대물림하는 것을 끊어내는 ‘사회구조의 변혁을 통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이론이 프랑스혁명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사유재산은 반드시 폐지되어야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 ‘현존하는 법과 제도는 기득권과 사유재산을 보호하려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반드시 없애버려야 마땅하다’ ‘국가는 개인의 행복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 ‘국가와 국민은 바로 이를 이루어 내겠다고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것이 그가 쓴 ‘사회 계약론’의 핵심입니다. ‘정치란 무엇인가?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겠다고 정치가와 국민이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것을 어겼을 때 국민들은 그 정치가를 쫓아내고 다시 다른 정치가와 계약을 체결할 권리가 있다’ 프랑스혁명은 바로 이런 主權在民 사상에 기초하여서 일어난 것입니다.
(4) 백과사전파
여기에서 말하는 백과사전이란 디드로를 비롯하여 당대 많은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1751년 첫 권을 출간한 후 1772년까지 20여년에 걸쳐 모두 35권, 71,818개의 항목을 수록한 백과사전입니다. 그러나 이 백과사전은 그 이전 영국에서 발간했던 Encyclopedia와는 다른 것입니다. 영국의 백과사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학문, 사상, 문학, 예술, 철학, 종교, 과학 등등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과 지식을 담는 것이었습니다만 프랑스 백과사전은 단순한 지식 전달의 창구가 아니라, 기존의 신념이나 관행, 전통, 주장, 종교적 믿음 등에 대하여 그 잘못된 것을 공격하고 바로잡고 더 나아가 그런 이론들을 지지했던 사람이나 주장들을 엎어 버리려는 일종의 이론적이며 학문적인 무기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책은 출판 초기부터 금서목록에 올랐습니다. 앞에서 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룻소는 물론이고 디드로, 달렘베르, 케네 등 모두 184명의 철학자, 사상가, 과학자, 정치인, 문인 등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이들이 이 사전 편찬을 통해서 하고자 했던 목표는 인간들이 전에 가졌던 지식을 비판적으로 다시 검토함으로 인간 이성의 능력을 고양하여, 세상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이성의 터전’에서 보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이성의 기초’ 위에서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성서도 교회도 왕권도 가정도 ‘다시보자’는 것입니다. 1772년 초판 표지에는 찰스 니콜라스 코친(Charles Nicholas Cochin)이 그린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가운데는 진리의 빛이 비춰지고 주변에는 이성과 철학이 진리를 감싸고 있는 상징적 그림입니다. 이것이 곧 ‘계몽주의’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모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행동은 인간과 사회와 역사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킨다는 확신 속에서 만들어진 이 백과사전이 바로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핵심적 질문
18세기 계몽중의 사상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 최고로 고양되어왔던 지난 시대를 살아오면서 이제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과연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인가?’ ‘인간과 역사는 이성의 터전 위에서 보다 더 나은 상태로 진보해 왔는가?’ 자, 이제는 오늘 강좌에다 붙인 질문에 대하여 각자의 생각을 함께 이야기해 보기로 합시다. “당신은 지난날 인간의 역사와 인간 자체(인간의 본성, 이성, 감성 등)는 긍정적인 면으로 발전되어왔고 또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나아진 면도 있지만 동시에 퇴보한 면도 섞여있다고 봅니다’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에 따라 보는 방향이나 시각도 다르고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 역시 똑같은 것은 아니기에 얼마든지 달리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인문학교실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대로 ‘나와 달리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를 뿐입니다’ ‘컵에 물이 절반 쯤 있는 현상’도 사람에 따라 컵에 물이 ‘절반 밖에 없다’고도 할 수 있고 ‘절반이나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역사학자 랑케(Friedrich Albert Lange)는 ‘역사란 ‘실제로 일어난 일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라고 했지만 E. 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면서 역사란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고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포스트 모던이즘 역사학자 키스 젠킨스(Keith Jenkins)가 그의 저서 ‘Re-thinking History’(우리말로는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번역했음)에서 주장하는 대로 모든 역사는 ‘그 누군가’의 역사이며 ‘그 누군가를 위한’ 역사로서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른 ‘해석’이요 ‘담론’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만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화두인 ‘인간과 역사는 과거보다 나아졌고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라고 보십니까?’하는 질문은 계속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 이후 ‘panta rei’ ‘모든 것은 변한다’는 생각과 파르메니데스 처럼 ‘해 아래 새 것은 없고’ ‘모든 만물은 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결코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두개의 서로 다른 주장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1) 인간과 역사에 대하여 긍정적 생각을 지닌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캐나다 출신의 심리학자이며 하바드대학 교수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빈 서판–인간의 본성은 타고 나는가?’ ‘다시 계몽의 시대로’ Enlightenment Now 같은 저서들이 있습니다) 같은 이는 우리들이 흔히 과거가 지금 보다 더 좋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 것’이라고 말한 Franklin Adams의 말을 인용하면서 여러가지 구체적 사례들을 들어가며 인간과 역사는 서서히 좋은 방향으로 전진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2017년 미국에서는 10만명 당 5.3명의 살인사건이 생겼고, 국민 전체의 빈곤률은 7%였으며, 1년 총 미세먼지 배출량은 2,100만톤이었으며, 아황산가스 배출량은 400만톤이었는데 30년 전만해도 인구 10만명 당 살인사건은 8.5명이었고, 빈곤률은 12%였으며, 미세먼지 배출량은 3,500만톤이었으며, 아황산가스 배출량은 2,000만톤이었다’고 대비하면서 세상은 서서히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2017년도에는 12개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60개 국가가 독재국가이며, 세계인구 중 극빈자는 약 10%이고, 지구상에 있는 핵무기는 약 1만개 정도이고, 그해 테러로 죽은 사람은 모두 238명이었는데 30년 전인 1988년 만해도 꼭 30개 지역에서 전쟁이 떠졌고, 85개 국가가 독재 체제였으며, 세계인구의 37%가 극빈층이었으며, 핵무기는 무려 6만개 이상이나 되었으며, 그 해 테러로 죽은 사람들은 모두 440명이나 되었다는 겁니다. 세상은 힘들기는 해도 그래도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핑커의 입장입니다. ‘컵에 물이 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아직도 컵에는 물이 반이나 남아있다’고 말하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인생관과 삶의 자세를 지닌 사람들은 역사를 사실에서 확인하는 사람들이지 막연한 가설이나 기대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난 날 인간의 기대 수명은 30세 정도였으나 오늘날은 80세를 넘어섰으며, 5세 이전의 유아 사망률도 30%를 웃돌았으나 오늘날은 최고로 가난한 나라에서도 6% 이하이며, 50년대 초 만해도 전쟁에서의 사망률은 인구 10만명당 22명이나 되었는데 오늘날은 1.2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하여튼 핑커는 수많은 통계 수치들을 열거하면서 역사는 민주와 자유를 향하여 발전되어왔고, 인간들은 보다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수 만년 전 구석기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수렵과 농경시대를 거쳐 왕정체제와 신정시대를 지나 르네상스와 18세기 계몽주의시대를 지나오면서 모든 인간과 사회와 나라들은 보다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어 옴으로 확실히 ‘인간과 역사는 과거보다 나아졌고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그러나 위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인간과 역사는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해 아래 새것은 없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의 성품과 인간의 역사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르네상스운동을 펼치면서도 오히려 인간들은 전 보다 더 잔인하고 포악한 방식으로 식민주의를 확대해 나갔고, 정복전쟁과 전염병을 퍼트리면서 수백만 명의 원주민들을 죽였습니다. 사보나톨라 같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나타나 과학적 발명과 발견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 붇기도 했습니다.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고 노예시장을 확산하고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세상을 정복전쟁으로 몰고 갔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을 통하여 인간은 이성을 하느님의 자리에 앉혀놓았습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무모한 1,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절대로 이성적 존재가 아님’을 고백했습니다. 과학이 발달되었다고 해서 인간이 보다 더 합리적인 존재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성을 소중히 여긴다고 말은 하면서도 인간의 행위가 전보다 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합리적 사고가 정치와 경제, 문화와 사회에서도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이성적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편리에 따라 ‘부분적으로 이성적인 척 할 뿐’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는 지구의 온난화를 가져온 생태계의 위기나 IS를 비롯한 지역분쟁, 각종 의약품들이 만들어낸 인간신체의 저항력의 약화와 정신건강 장애의 증가,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위기, 공동체정신의 상실 등 여러가지 ‘더 악화되어가는 인간과 세계의 실상’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제가 지난 방학 중에 읽은 몇 가지 책 중에서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쓴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은 위의 질문에 대하여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해 줍니다. ‘역사의 진보를 주장하는 이들은 개인의 평등과 인권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그들의 실상을 보면 보수주의자들 보다 훨씬 더 인간의 평등과 기본권을 가볍게 여긴다’ ‘러시아는 국가 전체부의 87%를 상위 10%의 부유층이 차지하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이다’ ‘세계 부의 50%는 1%의 부자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최고 부자 100명이 세계최저 빈곤층 40억 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 ‘2001년 9.11테러로 숨진 사람은 약 3천명이었다. 그 후 이어진 테러로 죽은 사람들은 이제 2만5천을 넘어 섰다’ ‘매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은 약 250만이고, 당뇨나 심장병으로 죽는 사람들은 약 350만이며, 대기오염으로 죽는 사람들은 약 700만 명쯤 된다. 이제 인류는 처음으로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 보다 고령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아졌고, 기아로 숨지는 사람보다는 비만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졌고, 폭력에 의해 죽는 사람들 보다는 사고로 인하여 죽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교통사고로 죽는 125만 중 약 90%는 음주운전이나 인간의 실수로 죽는다. 아! 그래서 세상은 전보다 많이 많이 좋아진 것일까?’ ‘Brexit 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투표지에 “Brexit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 “Brexit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성적 느낌을 물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국민투표에 붙여 확정하거나 조종사가 비행기를 어느 활주로에 착륙 시킬지를 승객들에게 물어보는 것과 흡사한 행위를 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자기도 모르면서 결정하곤 한다’ ‘2012년 3월 호주에 온 일본 관광객 3명이 GPS의 지시에 따라 운전을 하다가 태평양에 뛰어들었다. 21살 유주 노다는 말했다. 우리는 GPS가 시키는 대로 그 쪽으로 가면 곧장 갈 수 있다고 해서 간 것 뿐이예요’ ‘오늘날 우리는 인생의 모든 크고 작은 문제를 다 구선생(Google)이나 유선생(You Tube) 한테 물어보고 그가 하는 말은 진리라고 믿고 있다’ ‘역사는 늘 진보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대답해야한다. 링컨이나 오바마 보다는 트럼프가 더 나은 사람인가? 그가 보다 더 이성적이고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인가?’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무지한 사람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늘 집단적 사고에 끌려가면서 행동하는 존재이다’ ‘손에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못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금 post-modern 시대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실은 post-truth시대에서 살고 있다’ ‘도둑질은 꼭 내가 남의 것을 훔쳐야만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니는 회사가 제 3세계 가난한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거나 환경을 파괴하면서도 그걸 모르는체 한다면 그것 역시도 도둑질이고 거짓말이 된다. 1930년대 후반 독일의 한 지방에 우체국장이 있었다. 그는 평소 우체국 직원들의 복지를 위하여 노력하고 분실된 소포 하나까지도 끝까지 찾느라고 애를 썼고 늘 다른 직원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우편물 관리에 착오가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는 열심이 있었고 성실한 우체국장이었다. 그런데 그가 관리하는 우체국이 사실은 나치의 신경망 중 핵심세포였다. 나치는 그 우체국을 통하여 각종 선전물을 배달하고 처리해야 할 유대인들의 명단을 알려주고 군입대 통지서나 SS특수부대의 명령서를 발송하는 일을 했다. 그는 몰랐다. 알려고 애쓰지 않으면 자기의 성실성과는 관계없이 나쁜 일에 앞장서게 된다’ ‘아는 것은 의무이다. 모르는 것은 책임회피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현상유지를 편드는 행위다’ ‘광고 선전 선동 반복해서하는 설교들은 우리 모두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코카콜라 광고를 보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건강한 젊은이들이 콜라병을 흔들면서 땀 흘리며 힘차게 운동하는 모습이 연상되는가? 아니면 과체중 당뇨병 환자가 침상에 누워있는 모습이 그려지는가? 코카콜라회사가 수 십년 동안 계속해서 수십억 달라를 써가면서 지구 수십억 사람들에게 무슨 이미지를 만들어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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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인가?’ ‘우리가 사는 사회는 예전 보다 도덕적인가?’ ‘우리는 대부분의 일들을 합리적이며 상식적인 선에서 처리하고 있는가?’ ‘역사는 좋은 방향으로 전진해 가고 있는가?’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