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 인문학적 시각으로 본 믿음 이해

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시각으로 본 믿음 이해 종교와 신앙(믿음: faith, […]

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시각으로 본 믿음 이해

종교와 신앙(믿음: faith, belief)

인간은 고대 사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생과 우주에 대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고민해 왔다. 인간이기 때문에 고민하는 문제는 고대나 현대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 것인가? 죽은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이고? 왜 존재하는 것인가? 인간에게 고난은 왜 주어 지며 인간의 참된 행복은 무엇인가? 등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질문들을 해왔다. 심지어 고대 원시인들도 그러한 고민들을 한 흔적들을 동굴벽화와 무덤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기원부터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며,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현대에도 종교는 없어지지 않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종교의 기원을 “인간존재의 유한성과 우연성에서 오는 불안감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인간 소유욕이 빚어내는 긴장 가운데서 발생한 것”으로 규정한다. 또한 종교의 사전적 정의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의 생활과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정의한다. 종교가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존재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그 종교들은 몇 가지 공통점들이 있다.

첫째로 종교의 대상인 절대자가 있고 그 종교의 교의(교리)가 있다. 둘째로 절대자와의 관계를 구체화하는 종교행위, 다른 말로 하면, 종교의식이 있다. 그리고 셋째는 종교행위를 하는 인간과 그 인간이 지켜야 하는 종교윤리가 있다.

모든 종교는 이렇듯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교의 또는 교리들 통하여 인생과 우주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들을 제공받는다. 그러므로 선택한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종교가 믿는 교리, 그 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종교윤리와 의식 등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기독교를 선택했다면 기독교의 세계관을 믿음으로 수용하고 그것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종교를 정의할 때 “종교란 인간의 삶의 방향성을 결정해 주는 세계관에 대한 믿음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의식과 행위의 총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종교가 자신이 신뢰해서 선택한 세계관에 대한 믿음이라면 인간에게 신앙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택한 종교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면 온전한 신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앙 또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의 사전적 정의는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상태”로 정의한다. 표준국어 대사전에는 ‘믿음은 어떠한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으로 설명한다. 철학이나 사회, 정치 등에서는 ‘믿음’을 ‘신념(信念)’으로 표현하며 종교에서는 ‘믿음’을 ‘신앙(信仰), 신심(信心), 신앙심(信仰心)’등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신앙(faith, belief)은 한 마디로 ‘어떤 것을 진리로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최소한 그의 존재를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하면 그 약속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그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신앙은 한마디로 ‘동의’가 될 수 있다.

다원주의 시대의 믿음과 종교간 태도

작금의 시대는 한 마디로 종교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종교가 한국사회에 들어와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토속종교인 불교와 기독교가 한국종교의 주류를 형성해 왔었는데(유교[儒敎]는 일반적으로 종교의 범주에 포함 시키지 않고, 일반적으로 전통이나 문화의 범주로 이해하는 경향이 크다), 세계가 글로벌 시대로 전환되면서 이슬람, 힌두교, 심지어 신흥종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한국사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다원주의 사회에서 오직 진리는 하나이고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구원을 가져오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강의는 어떤 종교가 참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종교인가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이러한 주제는 몇날 며칠을 밤을 세워가며 논의한다 할지라도 각자가 처한 입장이 있으므로 어떤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또한 주제 자체가 변증(호교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므로 나중에 그러한 주제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종교적 진리는 검증 가능한 것인가?’ 하는 논의를 통해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종교인의 다양한 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믿는 종교와 다른 종교와의 상관관계에 있어 세 가지 태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배타주의적 태도이다. 이것은 자신의 종교만이 진리인 것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있는 종교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어지는 태도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만 진리이고 자신이 믿는 종교만 이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의 주장은 다 거짓이고 옳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다. 배타주의적 성격이 강한 종교나 신앙인들은 자칫 독선과 폭력적이 되기 싶다. 한국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던 상황들을 보게 되면 배타주의적 태도를 취했던 사람들에게서 발생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사찰에 가서 불상의 목을 자른다든지, 학교 캠퍼스의 장승을 잘라 버리고, 가톨릭 성당의 마리아상에 불을 질렀던 것들은 모두 배타적 신앙이 돈독했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 질때마다 모두 한국개신교회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심각한 폭력이라 할 수 있다. 믿음과 신앙은 자신이 속한 종교와 그 신앙 공동체내에서 통용되는 행위이어야 한다. 이것을 신앙이 없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본인의 신앙의 절대성을 강요하고 심지어 무례하게 표현하는 것을 본인 신앙의 돈독성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상식이 없거나 독선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비교적 셈족 계통의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종교가 이런 배타주의적 성격이 강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포괄적인 태도이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물론 자신 의 종교가 최고의 진리이고 진리에 이르는 최종적 입장에 있지만 다른 종교에도 그 최종적 진리에 이르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과정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태도이다. 배타적 태도와 비교해 보면 훨씬 관용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종교만이 최고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사람들에게는 ‘타협주의’로 읽혀 질 수 있다. 이러한 포괄주의적 입장을 가진 종교는 다른 종교와 진리들에 대해 자기 전통의 진리속으로 포괄 시키고 동화하는 방식으로 다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으로 인도계통의 종교들인 불교, 힌두교가 이러한 성향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다원주의적인 태도이다. 다원주의는 ‘종교들마다 제시하는 진리는 각기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진리로 수렴된다’는 태도이다. 이것은 포괄주의와는 조금 더 다른 태도이다.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가 최고의 진리이고 다른 종교들은 부분적인 진리들을 담고 있다는 입장이지 만 다원주의는 하나의 최종적인 진리가 있지만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진리들은 모두 부분적인 진리의 현상들을 담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종교는 하나의 절대적 진리에 이르기 위한 다양한 방법으로서 모두 평등한 동반자적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종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배우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완전한 진리는 어느 한 종교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모든 종교가 진리의 단편들을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비교적 현대에 와서 진보적 입장에 있는 종교인들이나 학자들이 취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종교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살펴보았는데 문제는 자기가 믿는 종교가 최고의 완전한 진리인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각자의 종교들은 나름대로 변증적인 입장들을 가지고 있고 체험적으로 또는 나름 학문적으로 체계를 세워 놓고 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을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가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사실 자기가 믿는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신앙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앙은 사람이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가 객관적이고 참된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이미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을 통해 볼 때, 한 종교의 진리나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의 우월성에 대해 논리적으로 또는 합리적인 방법을 가지고 증명해 내는 것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의 진정성을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이 믿는 종교의 우월성이나 진리의 참됨의 여부를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기는 어렵다 할지라도 자신이 믿는 신앙의 참됨 여부는 자신의 실천과 순종을 통해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자신이 믿는 종교나 진리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앙이 있다면 그 신앙고백에 상응하는 삶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을 드러내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철학적 시각에서 본 믿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고대부터 확실한 지식, 혹은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종교와 철학은 확실하고 보편타당한 지식과 영원불변한 진리, 긍극적 실재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무신론자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철학책에서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의심할 바 없는 확신할 수 있는 지식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러셀의 질문처럼 진리에 대한 욕구와 궁극적 실재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을 한번쯤은 던져 보았을 것이다. 데카르트 또한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이 정말 참 된 것일까? 라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 보았을 때, 그는 이성을 가지고 근본적인 질문에 정직하게 숙고하고 탐구하여 유럽 철학의 흐름을 바꾸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무엇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믿음에 적용시켜 본다면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무엇을 믿으며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왜 믿음이 필요할까? 일반적으로 인간은 어떤 것을 믿지 않고서 삶을 영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고 버스를 타고, 믿고 다리를 건너고, 믿고 음식을 먹는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믿음과 연관이 있다. 그렇다고 인간은 무작정 뭘 믿지는 않는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이 경험하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한다. 그리고 일단 믿음이 형성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험을 쌓는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검증한다. 이것은 사람은 한편으로 다양한 사물과 사실을 경험하면서 믿음을 형성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과 접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믿음의 틀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믿음을 점검하는 동시에 새로운 경험의 지평을 확장 시켜나가는 이중적 기능을 가진다. 이것은 믿음과 경험이 상호작용이라는 기능속에서 서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경험과 믿음은 사람들이 세상과 교류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믿음을 형성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믿음은 자기가 태어난 가정과 교육받은 학교, 그리고 속해있는 국가와 문화에 자연스러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소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퍼스는 인간이 믿음을 형성하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고집의 방법’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일상을 통해 별 반성없이 어떤 믿음을 형성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믿음은 심리적으로 안정과 평안을 주기 때문에 좋은 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만 믿음을 형성하는 사람은 대개 합리적 사고가 결핍되어 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하는 일에 둔하다. 심지어 반대되는 결과나 증거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고하거나 검토하려고 하지 않고 마음을 닫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 광신적인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위험이 닥쳐도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타조처럼 자신이 안주하는 신앙의 기만적 성격을 애써 부인하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권위의 방법’이다. 이것은 믿음은 공동체적 차원에서 결정되고 집단적으로 채택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개의 경우 공동체적 채택은 중앙정부의 강제적 강요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권위적 방식은 여러가지 대안들을 공개적,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른 더 좋은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퍼스는 이러한 방법이 의도하는 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의지가 작용하게 하라. 어떤 기구를 만들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이 주목하게 하고 올바른 독트린(Doctrine)을 지키게 하며,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그러한 독트린(Doctrine)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도록 하라. 동시에 반대되는 독트린이 가르쳐 지거나, 옹호되거나, 표현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심경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원인들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하라.

이 방법은 고집의 방법보다 정신적 도덕적으로 우월하게 보이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장악할 수 없게 되는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선천적 방법’이다. 이것은 이성에 부합되는 믿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올바르고 적합한지에 대해 직관적 또는 지적인 감각에서 찾는다. 이것은 앞의 방법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지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모든 믿음의 궁극적 원인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뒤에 나오는 과학의 방법과 달리, 관찰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성적인 탐구가 본인의 기호(taste)와 유행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인 방법은 지성적인 탐구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항상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서 선택하는 기준이 지나치게 주관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한 실례로서 서양 근세 철학의 주역들인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없이 자신의 주관적 성향이나 취향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이 방법의 결정적 문제점은 어떤 개인이나 특정한 문화에서 볼 때 확실하고 직관적으로 명확하게 보일지라도 다른 문화와 입장에서 보면 그렇기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과학의 방법’이다. 다른 말로 하면 ‘탐구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관찰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동연구를 통해 서로가 진리라고 인정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최종적인 결론은 탐구자들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충분한 연구를 통해서 긍극적으로 동의하도록 운명지워진 의견이며 곧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퍼스는 객관적 세계에 부합되는 믿음을 제공하는 ‘과학의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과학적, 탐구의 방법’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과학과 실험을 통해 입증되어진 사실이 세월이 지나 다른 과학적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도 발생한다(빛은 파동이다. 빛은 입자다. 충수돌기는 필요없다 등).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실이나 사건을 모두 과학적 방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인간의 ‘믿음’은 때로 논리적이고 객관적 사실이 밝혀져도 신념의 불일치로 생긴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객관적 사실을 들이대고 충분한 증거가 밝혀져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경우에는 아무리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사실을 들이대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증거가 사실이고 타당 하다는 것을 속으로는 인정해도 미워하는 마음이 이성의 활동을 가로막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태도의 불일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논리나 명분만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욕망에 의해 좌우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해

일반적으로 볼 때, 믿음(신앙)은 어떤 교리에 대한 동의(assent)나 수용, 그리고 이성적으로 인 정(recognize)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그 발생 초기부터 앎(wissen)과 지식(Knowledge)을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신앙을 생각할 때 자기가 믿는 바가 참인지 거짓인지,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참 하나님인지, 아니면 자기 안에 있는 망상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분별력이 필요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 스스로 만든 우상을 신앙으로 오도하거나 미신을 신앙으로 둔갑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신앙은 철저하게 진리를 비판적으로 묻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세와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분명하고도 바른 참지식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John Calvin)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기독교신앙의 근거는 지식(Knowledge)이지 경건한 무지(pious ignorance)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식(Knowledge)은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일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뜻(wil)까지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오토 웨버(Otto Weber)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은 이 지식이 성서에 제시되어 나오는 명제적 진리들을 단순히 알고 있는 지식도 아니고 이 지식에 대한 단순한 긍정도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고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응답으로서의 지식(cognition)임을 주장한다. 즉 오토 웨버가 말하는 믿음(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고, 그리스도가 우리 를 위해 성취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인간의 자유의지로 응답하는 것이다.

사실 칼빈도 믿음(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기독교 근본교리(fundamental doctrine)에 대한 단순한 지식(mere Knowledge)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믿음(신앙)이 아니라 하 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 즉 온전한 순종과 마음을 드리는 신뢰를 강조한다. 이것을 볼 때 기독교 신앙은 지식(Knowledge)을 강조하지만 이 지식은 단순한 성경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 기독교 신앙교리(Doctrine)에 대한 지식들을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칼빈은 신앙에 있어서 분명하고 바른 지식과 함께 성령의 사역이 인간의 지성에 계시되고 인간의 정서에 인쳐졌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인간과 성령의 상호작용 및 인간반응의 주관성이 객관적으로 비쳐지는 것을 인정한다.

신앙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확고하고 분명한 지식(Knowledge)이며, 이 지식(Knowledge)은 그리스도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친바 된 것이다.

바른 신앙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분명한 지식(Knowledge)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식(Knowledge)은 성경의 사실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고백하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지성에 계시하여, 우리의 마음에까지 비추심으로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로 고백하게 하는 살아 있는 응답으로 이끌어 준다.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요구한다. 그래서 황승룡 교수는 신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신앙이란 예수그리스도안에 일어난 객관적 구원사건이 인간의 응답과 믿음을 통하여 자기의 주관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 믿음이란 프리즘을 통하여 오늘 자신에게 일어난 주관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사건은 신앙을 통해서 현재 나에게 구체적이고 실제적 사건으로 임할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 믿음을 통하여 주관적인 나의 경험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앙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ks.j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