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신학적으로 죽음읽기 – 제3강 아툴 가완디와 폴 칼라니티의 삶과 죽음 이야기(인문학적 죽음의 현대적 모델)

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신학적으로 죽음읽기 제3강 아툴 가완디와 폴 칼라니티의 […]

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신학적으로 죽음읽기

3강 아툴 가완디와 폴 칼라니티의 삶과 죽음 이야기

(인문학적 죽음의 현대적 모델)

들어가는 말

오늘은 이 강좌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추천드린 책들 중에서 다음 두 권으로부터 옮겨온 글들을 같이 읽으면서 편안하게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제목을 붙여서 다듬거나 정리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쓰는 잡기장의 모습으로 제가 밑줄을 친 글들입니다. 대부분의 글들은 가완디와 칼라니티가 직접 쓴 글들이지만 저 자신의 잡기장이기에 간혹 저의 개인적 생각도 조금은 덧붙어 있습니다.

(1)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 아툴 가완디(Atul Gawande)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2015.

(2)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 지음, 이종인 옮김, 흐름출판, 2016.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간단한 내용과 저자 소개

이 책을 지은 사람은 현재 하버드 의과대학 보건대학원 교수이며 외과 의사인 아툴가완디 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인도에서 출생하여 미국으로 이민 온 비뇨기과 전문의사였고 어머니 도 의사였습니다. 그는 스탠퍼드 졸업 후 옥스포드에서 철학과 윤리학을 공부한 다음 하버드에서 공중의학 석사와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한다’ ‘체크! 체크리스트’ 같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을 여러 권이나 썻습니다.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100인’에도 이름이 올랐던 그는 우리 시대의 정직한 지식인 중 하나이며 퍽 양심적인 의료인 가운데 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에 의해서 쓰여진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2014년 Malcolm Gladwell에서 출판되었고 이듬해인 2015년 전문 번역가인 김희정이 한국어로 번역하여 부키가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현대의학의 숙제를 논픽션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모든 태어난 인간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가는 과정입 니다. 의학적으로 볼 때 이 죽음을 향한 여정에는 늙어감과 병듦이라는 현상이 동반됩니다. 이 책은 우리가 나이가 들어감으로 더 이상은 자기 혼자서 자신의 몸을 돌볼 수 없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의사가 내 병상 곁에 와서 ‘이제는 더 이상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말 할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해서 살려달라고 매달리며 이것저것 연명치료에 매달릴 것인가? 이 책은 어떻게든지 사람을 살릴려고만 애쓰는 현대의학과 의사들에게 또 다른 측면, 즉 사람을 아름답게 돌아가게는 못해도 인간답고 품위있게 준비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철학적,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이란 없지만 인간다운 죽음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저자는 의학적 용어를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실제로 벌어지는 여러가지 케이스들을 바탕으로 비교적 쉽게 이야기를 이끌고 갑니다. 아툴 가완디는 보수적 의사로써 안락사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유보적입니다만 호스피스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여러가지 사례들을 이야기 하면서 의료인들이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현대 의학이 좀 더 깊이 관심해야 할 부분은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인간이 존엄하고 평안하게 삶을 마감하고 죽음을 마지하며 받아드리도록 돕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은 그런대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대부분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에게 아름답고 존엄하고 동시에 지혜롭게 삶을 마무리 하도록 준비하고 노력해야한다고 충고해 주십니다.

여덟 장으로 되어있는 이 책은 그 제목만 읽어도 어느 정도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1) 모든 인간에게는 혼자서는 설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2) 모든 것은 결국 무너지게 마련이 다. 3) 내 삶에 대한 나의 주도권을 잃어버리는 때가 꼭 온다. 4) 치료를 계속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5)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있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6) 인간다운 마무리를 준비해야한다. 7) 두렵지만 그래도 꼭 나누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8) 마침내 우리는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드려야 한다.

이 책의 마지막 파트는 아툴 가완디 자신의 아버지가 노화와 투병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드 리면서 인간으로써의 마지막 존엄과 품위를 지키면서 돌아가셨고 또 그 장례를 치루었는지를 아주 담담하게 잘 그려줍니다. 이 책은 그의 인생관을 반영하며 한 사람의 전문 의료인의 정직한 반성과 고뇌를 서술함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 동시에 나 또한 어떻게 이생에서의 삶을 마무리 지어야 할지를 생각하고 고민하도록 도와줍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옮겨온 나의 잡기장

의대생들과 의대교수들은 ‘의대 교육의 목표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꺼져가는 생명의 불길을 살려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꺼져가는 생명의 불길이 그냥 잘 꺼지도록 돌보는 것도 가르쳐야한다.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잠간 아플뿐이예요 치료 받으면 곧 좋아질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은 의료인들의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고 기만이다.

의사의 기본적 책임은 정직과 친절이다. 의사들은 절대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사실을 알 고 있으면서도 용기, 진실, 그리고 지혜롭게 말할 줄을 모른다.

의료인들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한다.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그런 입장에서 사람들을 대해야한다.

의사들은 수술만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데도 수술 못지않게 정교한 기술이 필 요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사실 의사들에게는 말하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의 말을 듣는 기술이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이해가 않되고, 이해가 않되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스스로 의사를 결정할 수 없는 상태를 예견하고 미리 나의 건강문제와 연명치 료에 대한 의사결정 대리인으로 다음 세 사람을 지명해 둔다(홍현철, 홍지은, 홍지혜).

암이나 기타 어려운 난치병의 경우, 이 수술 혹은 이 치료를 받은 이후에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평소에 하던 일들을 계속할 수 있을지를 의사에게 묻고 의사 선생님이 ‘그럴 수 있다’고 답해 주면, 그럼 나는 수술과 항암치료에 동의 할 것이다. 1) 나는 하루에 커피 한잔과 와인 한잔 정도를 마실 수 있는가? 2) 나는 가끔 냉면을 먹을 수 있는가? 3) 나는 TV에서 골프 중계방송을 볼 수 있는가? 4) 나는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이나 베토벤의 교향곡 제 9번을 들을 수 있는가? 5) 나는 하루 한 두시간 정도 성경이나 다른 독서를 할 수 있는가? 6) 아주 천천히라도 나는 하루에 한 30분 정도는 산책을 할 수 있는가?

의사는 환자의 삶의 질을 잘 유지시켜 줄 의무가 있다. 나타난 질병만 치료하고 나머지는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1945년 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사람들은 거의 자기 집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인간이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나아간다.

미국 의료계에서는 다음의 8가지 중에서 한 가지라도 혼자서 할 수 없게 되면 그는 독립적으로 살 수 없다고 판정하여 요양원에 가도록 추천한다. 1) 화장실가기, 밥먹기, 옷입기, 목욕하기, 머리 손질하기, 청소하기, 빨래하기, 전화 받기 등과 같은 일상생활을 혼자 못할 때, 2)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지 못 할 때, 3) 의자에서 혼자 일어서지 못 할 때, 4) 걸을 때 부축을 받게 될 때, 5) 혼자서 쇼핑을 못 가거나 가서도 계산을 못할 때, 6) 혼자서 음식을 못해 먹을 때, 7) 혼자서 약을 챙겨 먹지 못할 때, 8) 혼자서 외출을 못하거나 돈 관리를 못할 때.

지난 세기까지는 사람들이 흔히 자기의 나이를 높여서 나이든 척하는 ‘반올림 현상’(age heaping)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기 나이를 깎아서 말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런 저런 일들은 주로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 러나 지금은 아들 딸이나 손자녀들에게 물어본다. 혹시 컴퓨터를 통하여 구글에게 물어본다고 해도 그런 걸 검색하는 방법은 아이들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미국에서 retirement village, retirement community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고 세워 나간 사람은 의료인들이나 정부나 social service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동산업자 였던 Dell Webb이다.

현대의 nursing home system은 노령에 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병 실 사용에 따른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재정 담당자들이 고안해 낸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평균 죽기 전 1년은 요양원에 있다가 숨을 거둔다.

군대의 막사나 훈련소, 고아원, 정신병원, 감옥, 그리고 nursing home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다 당국에 의해서 취침과 기상, 식사와 운동 등이 계획되고 통제되고 강요된다는 점이 다. 일단 그런 곳에는 들어가고 나면 자기 마음대로 자고 일어나고 먹고 쉴 수는 없다.

Nursing home의 목표는 노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가치있는 여생을 보내도록 돕는데 있지 않다. 가장 돈을 적게 드리면서 노인들을 보살피고 간호해 주는 시스템이라고 보면 된 다.

양노원에서는 직원들이 옷을 입혀주는 것이 노인들이 자기 스스로 입는 것 보다 쉽고, 빠르 고, 시간이 절약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직원들이 옷을 입혀주고, 세수를 시켜주고, 신발을 신켜주는 것은 그들이 친절해서가 아니라 그게 훨씬 비용이 덜 들고 효율적이기 때문이 다. 사실 노인들은 아무리 늙고, 힘들고, 시간이 걸려도 자기가 스스로 옷도 입고, 씻고, 걸어 보려고 한다. 노인들은 헝겁인형이 아니잖는가!

요양원의 모든 시설은 오직 1) 안전, 2) 위생, 이 둘에만 촛점을 두고 설치, 운영한다.

요양원은 노인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노인들을 그 곳에 맡긴 고객인 가족들과 자녀들을 위 해 존재하는 곳이다.

양노원에는 3가지 역병이 있다. ‘무료함’, ‘외로움’, 그리고 ‘무력감’이다.

나이가 들면서 물러지는 것은 치아와 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더 굳어지는 것은 혈관, 관절, 근육, 심장판막, 그리고 폐다.

나이가 늘면서 줄어드는 것은 키만이 아니다. 뇌가 제일 많이 줄어든다. 70세가 넘으면 두 개골 속에 약 2.5cm의 공간이 생긴다. 그래서 판단기능을 하는 전두엽과 기억기능을 하는 해마가 쇠퇴된다.

의사들은 노인환자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인 분야의 수입이 의학계에서는 가장 낮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일종의 고물 자동차와 비슷하다. 귀도 잘 않들리고, 눈도 침침하고, 기억 력도 않좋고, 의사가 방금 말한 것도 다시 물어봄으로 진료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노인들 은 한 가지 증상만 가지고 의사를 만나는 게 아니다. 한번 의사를 만나면 대여섯 가지 이상 아픈 데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증상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몇 십년씩 된 것들 이다. 고혈압, 당뇨, 관절염 등등… 노인들의 병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만병의 의사’는 없다(노인은 하나님도 못 고치시니까 그냥 데려가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고치실수 있다면 왜 데려가시겠느냐!).

노인병이란 고치는 것이 아니라 현상 유지나 확산의 방지를 위해 관리해 드리는 것인데 노인들은 자꾸 고쳐달라고 한다.

노인에게 가장 심각한 위험은 ‘넘어지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약 35만명이 넘어져서 골절상을 입는다. 그 중 약 40%는 요양원으로 가게 되고, 20%는 다시 걷지를 못한다.

노인들은 늙어가면서 예전 보다 말다툼을 많이하게 된다. 첫째는 청력이 떨어져서이고, 둘째는 행동이 굼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도 있다. 노인들은 다투기도 잘 하지만 용서도 훨씬 잘한다.

늙어 가면서는 자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는 점점 못하는게 많아져’라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80세 이상의 운전자가 교통사고를 내는 것이 10대에 비해 3배나 높게 나온다.

나이가 드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들은 인생을 아주 잘 안다. 그들은 저녁 7시 TV 뉴스를 보면서 일일 연속극을 본다고 생각한다. 주연 배우 대통령은 오늘 또 무슨 쇼를 할지 잘 알고 있다.

카르마!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일어 날 일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잘 살았으면 됐지 뭐!’ 노인들은 그래서 감사하게 된다. 몰이해는 잔인함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되어 있다.

의사들은 그들의 의학적 충동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노화나 노인성 질병으로 쇠약해진 사람들을 살려보겠다고 이 약 주고 저 약 주면서 손을 써보려는 충동적 욕심을 참을 수 있어야한다. 너무 지나치게 살려보려는 노력은 오히려 환자를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그것은 환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의사의 욕심과 의료적 실험일 뿐이다. 미국에서 1년에 쓰는 전체 의료비의 25%는 1년도 못 사는 환자들을 위해서 쓰여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암 스페샬리스트 중 40%가 효과가 없을 줄 알면서도 치료를 계속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환자나 가족이 원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왜 그랬는가? ‘고객은 왕이니까’ 고객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소비자 중심의 문화 속에서 의사들은 환자의 기대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미 의사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비지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 의사들은 절대로 의사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사의 기대와 환자의 기대는 서로 다르지만 그래도 그걸 함께 맞추어가는 것이 치료의 과정이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는 다음 3가지 유형이 있다.

1) 전통적 관계 – 가부장적 관계다. 의사는 의학적 권위를 가지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의사는 마치 신부나 목사처럼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갑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환자는 양순하게 그의 말을 잘 듣는 을이 되는 것이다.

2) 서비스적 관계 – 의사는 환자에게 모든 정보와 사실과 수치를 정확하게 제 공해 준 다음 ‘이 약은 여기에 좋고 저 약은 거기에 좋다’는 식으로 설명을 한 다음 선택은 환자가 하도록 한다. 의사는 소매상이고 환자는 소비자로써 환자에게 완전한 권한과 자율성이 주어진다.

3) 공유관계 – 의사 결정을 함께하는 관계이다. 함께 X ray와 MRI를 보면서 의사는 전문가로써의 지식을 가지고 설명해 주고 ‘무엇이 궁금하세요?’ ‘걱정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럴 경우에는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보세요?’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둘이 공동의 합의를 돌출해 내는 과정이다.

기계적 인공호흡, 전기적 심폐소생술, 심장 압박치료 – 제발 나 홍길복에게 이런 것은 하지 말아주세요.

환자들이 의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다. 환자들은 의사는 어떻게든지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의사들에게는 고칠 수 있는 병 보다 못고치는 질병이 더 많다. 환자들은 의사 가 자기를 못 고치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한다. 더 오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버릴 때 더 오래 사는 길이 열린다.

물론 의학은 질병이나 죽음과 싸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죽음이 의학보다 더 강력한 힘 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죽음이 이기게 되어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우리는 아군이 다 전멸 할 때까지 싸우는 장군을 원치 않는다. 점령할 수 있는 영토를 위해서는 싸우고 그럴 수 없을 때는 항복 할 줄 아는 장군을 원한다.

숨을 거두기 전 가족들에게 ‘참 고마웠어’ ‘사랑해’ ‘미안해’ ‘난 괜찮아’ 같은 인삿말을 나누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원 세상에 멜본이나 서울에 갈 때도 ‘잘 갔다 와’ ‘잘 있어’라고 서로 인사하고 가는데 저세상이라는 먼 길을 떠나면서도 인삿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간다면 이거야 어디 사람이 할 짓은 아니지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연장 못지않게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작별인사하기, 유언장 작성하기, 장례식 순서 만들기, 장의사 선정하기, 장지나 화장터 준비하기 등등 할 일이 많이 있다. 죽음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일찍부터 예고하고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있다.

죽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며 예술이다. 라틴어로 ‘ars moriendi’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서양의 전통종교인 기독교에서는 이 죽음의 기술과 준비를 1) 죄를 고백하고, 2) 용서를 확 인 받고, 3) 믿음을 고백하고, 4) 속세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는 것으로 보았다.

예전에는 가난해서 집에서 임종했다. 그 후에는 경제가 좋아져서 병원에 가서 임종했다. 그러다가 요즘은 경제가 더 좋아져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임종한다. 인생의 길에는 반드시 종착역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고통이란 짧아도 늘 길게 느껴지고 기쁨이란 길어도 늘 짧게 느껴지는 것이 인생이다.

스포츠 경기를 구경하다 보면 내가 응원하던 팀이 내내 잘 하다가도 그만 마지막에는 시합 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마지막 때문에 그 경기 전체를 망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판단이다. 사실 우리는 거의 한 시간 내내 즐거웠고 행복했다. 실망은 한 5분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인생도 그런 것이다.

홍길복은 다음 4가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NO다. 1) 심장이 멈추면 심폐소생술을 원하십 니까? – NO! 2) 삽관이나 기계적 인공호흡기 같은 공격적 치료를 받으시겠습니까? – NO! 3)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항생제를 투여할까요? – NO! 4) 스스로 음식을 먹지 못할 때 관이나 정맥 주사로 영양공급을 해드릴까요? –NO, Thank you!

숨결이 바람 될 때에 대한 내용과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

이 책의 저자 폴 칼라니티는 1977년 뉴욕에서 태어나 서른여섯 밖에 않된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생을 마감한 신경외과 전문의사입니다. 스텐포드에서 영문학과 또 이와는 전혀 다른 분야인 생물학을 복수전공하여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 케임브리지에서는 철학을 공부하고 다시 예일대학 의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과 함께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을 마칠 즈음 여러 유명한 병원과 대학으로으로부터 교수로 초청을 받았지만 바로 그 무렵 폐암이 발견되어 2년 후 마침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문학도요, 철학도이면서 동시에 장래가 촉망되던 의사로써 그는 아내 루시와 8달 된 딸 케이디를 남겨놓고 ‘인생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일하다가 어떤 모습으로 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산 사람에게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런 의미에 모든 먼저 간 사람들은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선생님입니다’

앞에서 본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저자 아툴 가완디가 이 책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추천하는 글에서 한 말입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한 유능하면서 또한 장래가 기대되던 의사 폴 칼라니티가 그만 자기 자신이 난치병인 폐암에 걸려 환자가 되어 숨을 거두기까지 약 2년 간에 걸친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담담하고도 눈물겹게 아름다운 필치로 써내려간 자서전적 자기 고백의 책입니다. 의사이면서도 환자요, 환자이면서도 동시에 의사였던 한 인간이 그에게 허락된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보여 줌으로 우리 또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 책은 이해인 수녀의 말과 같이 ‘우리 자신의 고통을 객관화하는 냉철함’과 마지막까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챙기고 따뜻하게 배려해 주는 것’을 배우게 해 줍니다.

이 책의 Prologue는 신경외과 레지던트 6년 차, 마지막 해 폴 칼라니티가 자신의 CT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무수한 종양들이 폐를 덥고 있었고 척추는 변형되었고 암은 이 곳 저 곳으로 넓게 전이 되어 있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이 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가정으로 돌아가 남은 시간은 아내와 식구들과 함께 보낼까? 아니면 평생 내가 그렇게도 쓰고 싶었던 작품을 쓸까? 그러다가 그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의사로써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수술대에 서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충실하게 남은 2년을 최선을 다합니다. 왜냐하면 의사는 직업이기에 앞서 소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는 그날부터 이 책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기를 부추기며 끝까지 자신에게 충실하는 것이 바로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 책의 에필로그는 그의 아내 루시가 마무리를 해 줍니다. 모든 인생의 끝은 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정리되는 것입니다.

이 책의 Epilogue는 발병된 지 2년 후 2015년 3월 9일 아침, 마침내 폴 칼라니티가 숨을 거두고난 후 그의 아내 루시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진실과 마주했던 목격자의 진술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한 환자의 정직한 자기 진술서이며 동시에 그 아내의 목격담과 보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시는 이틀 후 일기장에다 ‘천로역정’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씁니다. ‘당신은 제게 두 가지 유산을 남겼습니다. 첫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만족해 하실만한 사랑을 남겼고, 둘째는 그래서 바다보다 더 넓은 고통을 주고 가셨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비결은 부부 중 한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는 것’이라고 농담과 더불어 ‘불치병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사랑은 불치병을 고치지는 못해도 이기게는 해 줍니다’ 부부 사이의 사별은 그들의 사랑을 멈추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신혼여행을 다시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C. S. 루이스의 말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시작하는 글과 마치는 글을 빼고 나면 이 책은 두 파트로 되어 있습니다. 제 1부는 폴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회고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는 왜 의사가 되고자 했는지 의사가 되어서는 무엇을 하고자 했던지 그리고 어떻게 그 의사가 되는 길을 걸어왔는지를 되돌아 봅니다. 그런데 제 2부는 갑자기 역전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는 이제 의사가 아니라 환자가 되었습니다. 의사에서 환자로! 여기에서 그는 어떻게 그의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그리고 그 결정을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그는 다짐한 대로 삽관 대신에 안락사를 선택합니다. 그는 소생치료(DNR. Do Not Resuscitate)를 거부합니다. 바이팝을 빼고 모르핀을 맞으면서도 최대한 가장 맑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1부이던 2부이던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도 그래도 해야 해!’입니다. 그는 자주 새무엘 베케트의 소설을 인용합니다. ‘I can’t go on’ 그러면서도 ‘I’ll go on‘이라는 문장입니다. ‘나는 정말 계속해서 나갈 수가 없어! 그래도 난 계속 앞으로 나갈거야!’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옮겨온 나의 잡기장

죽음이란 피하지 말고 예를 갖추어 겸손하게 받아드려야 할 손님입니다.

반성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은 어느 분야 못 않게 정치적입니다. 의학 세계에서의 경쟁은 다른 곳 못지않게 치열하고 공격적이고 쉬운 길을 찾으려는 유혹으로 가득 차 있는 학문입니다.

나를 수술실로 들어서게 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 때문입니다.

의사는 일생동안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 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 동안 수 많은 환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치료해왔지만 한번도 내가 환자가 되리라고 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인생을 반쪽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레지던트에게 하루는 참 길지만 일년은 아주 짧습니다. 노인에게도 하루는 길게 느껴지지만 일년은 너무 빨리 갑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결국 죽음을 공부하기 위해서 입니다. 철학자의 직업은 죽음이기에 철학자는 죽음을 놀라운 일이라고 말해서는 않됩니다.

편안한 죽음만이 최고의 죽음은 아닙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남은 삶을 의미있게 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의사의 임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다시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그 가족을 안아주고 마지막까지 그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