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신학적으로 죽음읽기 – 제4강 존엄한 죽음(Well-Dying)을 위한 준비

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신학적으로 죽음읽기 제4강 존엄한 죽음(Well-Dying)을 위한 준비 […]

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적 신학적으로 죽음읽기

4강 존엄한 죽음(Well-Dying)을 위한 준비

들어가는 말

오늘의 화두와 관계해서 몇 가지 개념 정리부터 해 보겠습니다. 죽음학이나 의료계에서는 보다 심도있고 다양하게 논의를 합니다만 우리 대부분이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것들을 다듬어 보려고 합니다.

(1)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 – ‘유타나시아’란 본래 그리스 말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아름다운 죽음’을 총칭하여 이르는 개념이었는데 오늘날 의료계에서 사용하는 이 말은 회복하기 어려운 중병이나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 치료가 불가능하고 더 이상 생명을 유지(survive)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졌을 때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하는 인위적 방법을 이르는 개념입니다. 동물들에게 적용되는 안락사에 대해서는 별로 큰 반론이 없지만 사람들에게 있어서 안락사는 아직도 계속되는 논쟁거리 중 하나입니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생명을 인위적으로 종결 시키는 안락사에는 소극적 안락사(Passive Euthanasia)와 적극적 안락사(Active Euthanasia)가 있습니다. 소극적 안락사는 말기 환자의 연명의료 행위를 중단하는 것으로 사실상 존엄사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 자신이 원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 의사가 직접 죽을 수 있는 의약품을 처방 함으로 죽음에 이르게하는 것임으로 ‘의사에 의한 조력 죽음’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적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는 의학적, 종교적, 법률적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이 적극적 안락사가 국가에 의해서 법적으로 허용된 나라들은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같은 나라들입니다. 이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죽음이란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삶을 마치도록 돕는 일은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삶과 죽음의 질을 중시하고 Living과 Survive를 구별합니다. 사는 것 같이 살아야지, 죽은 것 같이 사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연적 죽음이 오기 전에 인위적으로 생명을 마감 시키는 안락사 시행에는 기본적으로 첫째, 그 사람이 회복 불능의 질병에 걸려있어야 하고 둘째, 참기 어려운 고통이 있어야하고 셋째, 그러면서도 환자의 의식이 있어야하고 넷째, 환자 스스로가 안락사를 요청하여야만 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것들이 모두 확인된 다음에 의사는 치사량에 해당되는 약물이나 주사로 그를 깊은 잠에 들도록 하게 됩니다. 최근 데이비드 구달 박사에게서 본 것 같이 안락사를 요청한 사람 자신이 의사의 설명을 충분히 듣고 이해한 다음 자기 자신이 직접 치사량 주사기의 입구를 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이 적극적 안락사에도 ‘자발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와 ‘비자발적 안락사’(unvoluntary euthanasia)가 있습니다. 자발적 안락사는 환자의 직접적인 요청이나 동의에 따라서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료행위이고 비자발적 안락사는 환자의 직접적 동의 없이 가족이나 국가의 요구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여튼 안락사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생사문제를 자기가 결정 할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그 어떠한 상황이나 경우에도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의 생명을 유지 하거나 버릴 권한이 원천적으로 없다’고 봅니다. 안락사는 일종의 변형된 조력 자살이며 소극적 살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안락사를 허용하게 되면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길 수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게 되며, 안락사에 대한 오용이나 남용도 생길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화 ‘씨 인사이드’에서 주인공 라몬이 안락사로 죽으면서 하는 말 ‘삶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야!’ 라고 하는 말과 스캇 펙이 그의 책 ‘인간에게는 죽을 권리가 없다’에서 주장하는 ‘삶이란 권리가 아니고 의무입니다’라는 말 사이에서 이제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좀 더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적극적 자살에 대해서도 한번은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한 유명한 야당 국회의원이 자살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 국회의원의 정책과 삶의 자세에 대해서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간적 삶의 태도와 정치적 입장에 대하여 지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저의 정치적 유대감을 떠나 그의 자살로 마감한 인생에 대해서는 커다란 유감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서구의 기독교적 문화와 전통을 지닌 나라에서는 자살은 commit suicide 혹은 kill oneself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자살을 범죄 행위나 살인 행위로 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률이 부동의 1위를 차지합니다).

(2) 존엄사(尊嚴死, Death with Dignity) –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의료행위를 하는 안락사와는 달리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하는 것을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소극적 안락사라고 할 수있는 것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즉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적극적 의료행위가 아니라 회복될 가능성은 없는데 무작정 생명만 연장해 가는 의료행위는 중단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존엄사도 소극적 안락사라고 주장하며 이것도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존엄사란 소생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더 이상 의학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의료행위를 중단하는 것으로 이는 일종의 자연사라고 보아야한다는 주장이 더 강합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적극적인 치료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여겨질 때는 더 이상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 자연적으로 죽음에 이르게하는 것은 남은 생명을 단축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의식이 없는 말기 환자들에게 시행하는 데 이 때도 가족들의 요청이나 아니면 환자가 평소에 글이나 말로 남겨놓은 의사에 따라 실시합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그리고 미국의 오리건주에서 이를 허용해 왔는데 최근 한국에서도 법적으로 이를 허용하도록 했습니다(2018년 2월). 호주에서는 Victoria 주에서 2019년 6월부터 기대 수명 6개월 미만의 불치병 환자를 상대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법률이 통과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의료계에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을 주로 말합니다. 첫째로 심폐소생술의 중단. 둘째로 인공호흡기를 떼어냄(특히 뇌손상으로 인하여 식물인간이 되었을 경우). 셋째로 혈액투석을 중단함. 넷째로 항암제 투약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건강할 때, 혹은 질병 초기나 입원을 했을 때 의료진이나 가족, 혹은 변호사에게 자신의 ‘연명치료 거부 의향서’(Denial of Lifetime Treatment)를 문서나 혹은 녹음으로 확실하게 알려 주는 것이 좋습니다.

(3) 웰 다잉(Well-Dying) – 존엄사와 유사한 개념으로 최근엔 ‘웰 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글자 대로는 ‘잘 죽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이라는 의미의 Well-Being이 유행어 처럼 사용되는 중에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는 데도 질을 따지지만 죽는 데도 질이 있다’는 생각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럼 ‘웰 다잉’ 즉 잘 죽는 죽음이란 어떻게 죽는 것일까요? 여러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다음 몇가지를 주로 많이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그 시대, 그 사회의 평균 수명이나 기대 수명을 약간은 넘어서서 죽는 것, 즉 너무 일찍이나 반대로 너무 오래까지 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갑작스런 사고로 죽지 않으면서, 동시에 너무 길거나 심하게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로 죽는 것입니다. 셋째는 물질이 많다고 해서 질 좋은 죽음이 보장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가난한 것은 인생의 좋은 마침을 방해 할 가능성이 높음으로 개인적으로든 아니면 국가의 사회보장이나 복지 체계로든 어느 정도는 돈, 즉 물질적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는 너무 외롭거나 고독하게 생을 마치지 아니하고 친척이나 친구들이나 이웃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하면서 숨을 거두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믿음 같은 것을 가지는 것이 웰 다잉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앞의 첫째와 둘째를 위해서는 평소 건강한 삶의 태도가 필요하고 셋째를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의 저축이나 보험 혹은 사회보장 제도가 필요하고 넷째와 다섯째를 위해서는 평소 좋은 인간관계나 종교생활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잘 죽는 것(Well–dying)은 잘 살아야’(Well–being)만 가능한 일이고, 반대로 ‘잘 산 사람은 잘 죽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인생을 잘 못 산 사람은 아무리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루고 많은 사람들의 조문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장된 정치적 행위일 뿐이지 역사는 그런 사람을 위대하게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 반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기억해 주는 사람 없이 잊혀진 채로 마지막 길을 간 사람이라 할찌라고 그의 생각과 삶의 일관된 자세가 아름다웠던 사람은 역사가 그를 기억해 주고 그의 삶과 죽음을 증언해 줄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후라는 말이 아니라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피차 하나로 연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부님에게 물었답니다. ‘신부님 기도를 드리던 중에 갑자기 담배 생각이 났을 때 담배를 피우면 안될까요? 신부님이 대답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기도를 받 치던 중에 담배를 태울 마음이 생긴 것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얼마후 다른 사람이 신부님을 찿아와서 물었습니다. ‘신부님 담배를 계속 피우던 중에 갑자기 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 음이 들었을 때 기도를 바쳐도 될까요?’ 신부님이 대답했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마음을 못 잡고 있다가도 기도드릴 마음이 든 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기도하다가 담배를 피우던, 담배를 피우다가 기도를 드리던, 선후를 바꾸기만 했을 뿐이지 그 행위 자체는 동일한 것인 데, 질문하는 순서와 방식만 바꾸면 대답은 반대로 나올 수도 있다는 예화를 들 때 자주 쓰 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거부감이 생기고 잘 수용하기가 어려워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묻게 되면 좀더 진지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먼저 잘 살아야 합니다’ Well –being이 있어야지 Well-Dying도 따라옵니다. 아름답게 죽은 사람은 그의 삶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거룩한 죽음은 그의 삶이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손바닥의 안과 밖 같은 것입니다. 삶의 문제와 죽음에 대한 질문은 똑같은 것입니다.

 우리는 모두 잘 살고도 싶지만 또 잘 죽고도 싶습니다. 아툴 가완디의 말대로 사실 ‘아름다운 죽음’은 없을지 몰라도 ‘품위있고 인간다운 죽음’은 있습니다. 세상엔 같은 모습의 죽음이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존경받는 죽음에는 공통점들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인생을 감사하면서 죽음을 받아드리는 것, 용서하고 또 용서를 빌면서 죽음에 임하는 것,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숨을 거두는 것, 마지막 순간엔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죽는 것, 등등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각자의 생각을 한번 나누어봅시다. ‘나는 어떻게 임종을 마지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침이 될까? 그걸 위해서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 우리는 성공적 인생을 살기 위한 책도 많이 읽고 강연도 많이 들으면서 well being을 화두로 삼는 경우는 꽤 있지만, 모든 인간에게 예외없이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죽음을 존엄하게 마치는 well dying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생각지도 못하고 준비하지도 못한채 그만 엉겁결에 끝자락에 서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 -1950 아일랜드의 극작가, 비평가) 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다고 합니다. ‘오래 살다보면 내 이런 날이 꼭 올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다른 번역 – 내 인생 우물쭈물 하다가 이런 날이 올줄 알았다! / 내 언젠가 이꼴 날줄 알았지!)

 불란서의 철학자 싸르트르의 말입니다. ‘인생이란 B와 D사이에 있는 C와 같다’ B는 Birth이고 D는 Death이고 C는 Choice 입니다. 인생이란 아무리 잘 살아도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날 마다, 순간 마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C학점 짜리입니다. 제가 호주에 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교인 가운데 루케미아로 오래 고생하던 초등학생이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고 병원으로 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늦은 밤에 병원에 갔습니다. 이미 안면이 있던 담당의사가 악수를 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Rev. Hong, I did my best, however he has passed away. Now it’s your turn’ 그 의사의 말에서 저는 ‘생명과 삶의 문제는 의사들이 다루고 죽음과 장례식의 문제는 목사나 신부 그리고 스님의 몫이로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갈수록 많이 복잡해져서 삶도 죽음도, 의료행위도 장례의례도, 실은 거대한 시장, 산업, 자본의 영역으로 편입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현대는 죽음과 거기에 따른 여러가지 절차도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요, 시장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비인간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장례산업을 보십시요. 병원에서 빌려주는 장례식장의 사용료부터 관, 영구차, 꽃, 음식 등에 따른 비용은 물론이고 공동묘지에 가보면 그 가격이 천차만별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크게 드러나는 곳이 공동묘지일지도 모릅니다. 재벌이나 대통령의 묘역 부터 거지나 일등병의 묘지에는 엄청난 차별이 있고, 중국인이나 유태인들의 묘역에서 부터 General Section으로 가는 길은 수백 km도 더 되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교회나 종교 단체들에게 속했던 공동묘지가 오늘날은 대부분 절대로 불황을 타지 않는 사업으로 튼튼히 자리를 잡아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 개인이나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계획(planning)을 세울 수 있고 또한 그 세운 계획에 따라 일을 추진합니다. 국가의 경영이나 회사의 매출이나 심지어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종교 까지도 모두 다 계획을 세워서 그 계획에 따라 일합니다. 요즘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도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계획에 따라 올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무계획적이며 따라서 돌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죽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히려 종교인들을 포함한 일부에서는 ‘죽음을 계획하는 것’은 ‘자살’을 부추기거나 ‘죽음에 대한 인간의 결정권’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기도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준비’(preparation)와 ‘계획’(planning)은 구분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논쟁적(controversial) 성격을 지닌 ‘임신중절’ ‘자살’ ‘안락사’ 같이 ‘계획이 요구되는 문제들’은 이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지닌 분들로부터 따로 이야기를 듣기로 하고 일단은 뒤로 물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미에서 죽음을 염두에 두고 평소에 어떤 인생관과 삶의 태도를 지니고 살아가야 할찌, 또 죽음의 시간이 임박해 올 경우 ‘연명치료의 문제’ ‘매장’ ‘화장’ ‘묘지’ ‘유언’ ‘유서작성’ 그리고 ‘버깃 리스트 작성’ 같은 것들은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 ‘인문학과 죽음’을 주제로 한 우리의 강좌를 마무리 하면서 ‘품위있고 인간답게 살다가 또 그렇게 죽음으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찾아 렛슨을 받으면서 우리 자신의 죽음도 생각해 보고 인생의 끝도 아름답게 준비하고 싶습니다.

 작년, 2017년 3월 3일 미국 뉴욕 타임스에는 특별한 칼럼 하나가 실렸습니다. 제목은 ‘제 남편과 결혼해 주실래요?’(You may want to marry My Husband)였습니다. 이 글은 미국에서 약 30여권이나 되는 어린이 동화를 써서 널리 알려진 여류 동화작가 에이미 크라우즈 로즌솔(Amy Krouse Rosenthal, 51세)이 쓴 글이었습니다. 그녀는 2015년 9월 난소암 선고를 받고 1년 반이나 투병을 해 왔지만 이제는 거이 임종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난 26년을 자기와 함께 살아온 남편 제이슨 브라이언 로즌솔(Jason Brian Rosenthal)과는 이제 이별할 시간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어서 이 칼럼을 썼습니다. ‘저는 이제 제 남편과 아이들과는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간 다음에 제 남편과 결혼해 주실 여자분을 찾습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투병 생활을 이야기한 다음 남편을 소개하면서 칭찬과 자랑의 찬사를 보냅니다. ‘제 남편 제이슨은 꿈처럼 멋진 인생길의 참 좋은 동반자였습니다’ ‘키는 178cm, 몸무게는 73kg, 반백의 머리, 갈색의 눈동자, 세련된 멋쟁이, 3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아빠, 집안 곳곳을 수리도 잘하고, 직접 장을 봐다가 요리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음악감상이 취미이고, 아주 작은 것들도 잘 챙겨주는 자상한 남자’라고 소개한 다음 ‘아마도 이런 남자는 좀처럼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제 남편과 결혼해 주시지 않을래요?’라고 했습니다. – 참 눈물나게 슬픈 이야기이지만 가슴을 찡하게 해주고 인생이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 송광사(전남 순천에 있는 절로써 신라시대 혜린대사가 창건했는데 그 때는 길상사라고 불렀으나 고려시대에 와서 송광사로 이름을 고쳤음 / 송광사는 합천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 사찰로 불리음)의 취봉스님이 남긴 법문 중 한 귀절입니다. ‘핀 꽃은 지게 마련이고 산 사람은 죽게 마련이다’ 그는 1983년 열반하시기 전 스스로 자기 49제를 하고 절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일일히 봉투 하나씩(금일봉씩)을 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받지 않으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송장이 수고한 사람들에게 수고비를 줄수가 없으니 미리 주는 것이네. 나 죽으면 고생 좀 해 주시게’

 얼마 전 이화여대 음악과 윤보희 교수가 95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약 15년 전 남편 현영학교수를 보냈고 자녀는 없었습니다. 특별한 병은 없었지만 많이 늙었고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제일 아끼던 피아노는 조카에게 주고 살던 집은 집 없는 손 아래 동서에게 주었습니다. 그이는 어느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난 다음 미용실에 들려 머리를 손질하고 집에 와서 그날 부터 식사량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한끼, 이틀에 한끼, 삼일에 한끼, 그러다가 마침내 기운이 다하여 삶과 이별했습니다. 물론 이런 방법은 오래 전 에피큐리안들이 실천했던 ‘통증 없이 저 세상으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을 따른 것입니다.

 지난 5월 은퇴한 호주의 생태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David Goodal) 박사는 104세를 일기로 안락사를 선택했습니다. ‘너무 오래 살아서 지금 이 나이에 이른 것이 마냥 즐거운 것 만은 아닙니다. 죽는다는 게 특별히 슬픈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슬픈 것은 죽고 싶은 데도 죽지 못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스위스 바젤의 한 병원에서 스스로 자기 몸에 치사량에 해당되는 정맥 주사의 밸브를 열고 베토벤의 교향곡 제 9번 4악장 ‘환희의 노래’를 들으면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구달은 호주에서 생을 마감하기를 원했지만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되어있지 않아서 스위스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아무런 질병은 없지만 나쁜 건강 속에서 품위있게 살지 못하고 아무런 의미있는 일도 못하면서 겨우 연명만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 할 때 안락사, 존엄사, Well-Dying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 한국의 LG 그룹의 구본무 회장이 지난 5월 73세로 별세했습니다. 뇌종양으로 투병 중에 일체의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평화롭게 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재벌 그룹의 회장이었지만 회사장으로 장례를 치루지 않고 가족장으로 치루면서 빈소나 장례식장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무도 조문을 하거나 조화를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장례식은 가족과 회사의 최측근들을 중심하여 한 백여명 정도가 자리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화장을 한 다음 수목장으로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장례문화에서 아직도 오랜 전통을 벗어나기 어렵고 정경유착이 심한 기업 풍토에서 여러가지 면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살아생전에도 그는 ‘모든 약속에는 그 누구와 한 약속이든지 20분 전에 내가 먼저 간다’ ‘나는 내 아랫 사람에게도 반드시 반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기 준칙에 충실했다고 전해 집니다.

 지난 7월 일본의 구라시키시에서는 폭우와 산사태로 집에 있던 80대 노부부가 함께 숨을 거두는 사태가 생겼습니다. 엄청난 폭우와 비바람으로 온 마을이 흙탕물에 잠겨들어 갔습니다. 86세의 남편 니시하라 도시노는 눈이 어두워 잘 보지도 못하고 다리가 아파 거의 걷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두 노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이자 아내 니시하라 아키코(84)는 그 자리에서 남편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두 노인 부부는 밀려오는 흙탕물 속에서 손을 꼭 잡은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 저는 지금까지 저 자신의 ‘연습 장례식’을 두 번 치루어 보았습니다. 한번은 한 8년 전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진행한 ‘죽음을 위한 10주 코스의 훈련’ 프로그램을 하던 중 제일 마지막 날에 했고 다른 한번은 한 5년 전에 제가 강의하던 학교에서 신학생들을 상대로 예전 교육 차원에서 한 번 했습니다. 1주일 전에 미리 교회에서 광고 겸 부고도 하고 ‘고 홍길복목사의 장례식’이라는 순서지도 만들고 영정도 걸어놓고 장로들과 지인들이 조화도 보내주어서 앞자리에 장식도 했습니다. 실제 주문하여 나무로 잘 만든 관 속에 제가 직접 들어가서 눕고 교우들은 예를 갖추어서 운구를 하고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중에 관을 예배당에 들여다 놓고 장례식을 진행 했습니다. 순서에 따라 찬송, 기도, 설교, 조사 등 기독교 예전에 따라 엄숙하게 거행하였습니다. 일부 교우들은 실제로 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습니다. 장례식 운구차만 빌리지 않았지 모든 것을 진짜 장례식 처럼 해 보았습니다. 물론 이런 연습은 제가 만들거나 창안해 낸 것이 아니라 중세 시대 이후 수도원에서 1년에 한 차례씩 거행해왔던 전통을 다시 되살려서 시행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을 통하여 제일 많은 생각을 하고 배우고 다짐한 사람은 ‘죽은 자로써 관 속에 들어가 한시간을 누워 본’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그 한 시간 동안 하느님과 인생, 가족과 이웃, 사회와 국가, 이 생과 저 생에 대해, 만감이 교차되는 경험을 한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미치 엘봄이 죽기전 살아생전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초대하여 장례식을 하던 그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진짜로 내가 죽은 다음에 자네들이 내 장례식에 참석한들 이미 죽은 내가 자네들 중에 누가 오고 누가 안왔는지를 알기나 하겠나? 지금 살았을 때에 이렇게 이별인사를 주고 받는게 얼마나 좋은가?’

 유석 조병옥 박사가 일제 말기 어렵게 살아 갈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밥술이라도 먹고 사는 친구들을 몇 명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답니다. ‘이보게 자네 나 죽으면 문상 오겠나?’ 그러자 지인들은 거의가 한결같이 ‘그게 무슨 말인가? 당연히 가지 이 사람아’ 라고 말하니 유석이 다시 묻기를 ‘그럴 때 빈손으로 오지는 않겠지?’라고 말했답니다. 그들은 거개가 ‘야 친구야, 무슨 섭섭한 말을 그리하나?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모두 금일봉씩은 가져 갈 걸세. 걱정 말게’ 이 말이 떨어지자 유석은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친구야 나 요즘 많이 어렵네. 죽은 다음에 할 부조 미리 좀 주면 않되겠나? ‘하면서 친구들에게 살아서 조의금 미리 다 받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김동길 박사의 글 중에서)

어떻게 웰 다잉을 준비할까요?

‘인문학과 죽음에 대한 강좌가 좋긴 하지요’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먼 일이요, 자기는 해당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내 나이 90이 되었을 때 암이나 기타 어려운 병에 걸려서 이제는 살 날이 그리 많지 않다고 판단되었을 때 나는 연명치료를 할까, 말까?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죽음 전도사라고 불리우는 최철주 선생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준비한 사람만이 웰 다잉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조언을 합니다. (1) 장수하겠다는 생각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라. (2) 식탁에서 가끔은 식구들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도록 하라. 그 때는 자녀들이 아니라 연장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는 것이 좋다. (3) 가끔 공동묘지를 찿아가서 둘러보고 거기에서 산책을 하도록하라. (4) 내 죽음의 선택권(방식)과 죽음 이후의 처리 문제를 식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지 말고 미리 내가 준비 하도록하라. 그외에 저는 죽음에 대한 책을 좀 더 자주 읽으시길 권합니다. 요즘은 우리 나라에서도 죽음에 대한 책들이 참 많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보통 서점에는 거이가 ‘죽음. 죽어감’(Death & Dying) 코너가 별도로 갖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왜 자꾸 죽고 싶다고 하세요 할아버지’ 하다 게이스케 지음, 김진아 옮김, 문학사상, 2018년 – 이 소설은 노령의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심리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늙으면 죽어야지… 늙으면 죽어야 해’ 자꾸만 중얼거리는 할아버지가 진짜로 죽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고 ‘진심이라면 돌아가시도록 도와드려야지’ 하면서 조금이라도 일찍 죽으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실패하는 스토리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틈만 나면 늘 ‘죽어야 하는데 죽어야 하는 데’ 말만 하시면서도 막상 죽지는 않는 오늘날 고령화 시대에서 안스럽다가도 짜증이 나고, 미안 하다가도 화를 내게 되는 젊은 세대를 생각해 봅니다(국가의 노인 연금만 축내고 우리 시대는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 항의하는 다음 세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웰 다잉을 위한 구체적 준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 봅시다.

(1) 유서쓰기 – 호주에서는 흔히 Will이 많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미리 써서 변호사에게 맡겨 둘 수 있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다시 쓸 수도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자녀나 남은 식구들에게 남기는 인생의 지혜나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쓸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재산에 대한 것입니다. 구체적이고 훗날 분쟁의 소재가 되지 않토록 써야 합니다. 자신의 장례식과 관계되는 것도 유서에 담을 수 있습니다.

(2) 장례비용 준비하기 – 요즘 기준으로 한국에서는 장례비용이 1인당 표준 비용이 약 1200만원 정도로 나와 있는데 실제로는 약 2천만원이 조금 더 든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호주에서도 상조 관계자들에 따르면 약 2만-2만5천불 정도가 드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보험이나 상조회에 가입 하거나 미리 저축을 해 둠으로 남은 유족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토록 해야 합니다.

(3) ‘사전 의료의향서’ 혹은 ‘사전 치매의향서’를 작성하기 – 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자세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4) 버킷 리스트 만들어서 해 보기 – Bucket List란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하나 하나씩 써놓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는 Kick the bucket이라는 말에서 왔는데 ‘양동이를 차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흔히 자살하는 사람들이 목에다 밧줄을 매고 양동이 위에 올라서서 그 양동이를 발로 차버리고 자살하는 데서 온 말입니다. 영화 ‘버킷 리스트’에서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 카터는 10가지 버킷 리스트를 만들고 해보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죽음의 그 날이 오기 전에 꼭 해결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보고 계획을 세워서 하나씩 실천하는 것도 웰 다잉을 위한 좋은 준비가 됩니다. 용서하고 용서 받는 일, 오해를 푸는 일, 감사 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이나 표시하기, 여행이나 추억을 만드는 일, 죽은 다음에 주는 것은 뺏기는 것이고 살아 있을 때 주는 것은 기증하는 것이라고 하니 나누어 주고 싶은 것들을 미리 나누어 주는 것, 즉 그 동안 마음으로나 물질로나 부담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것입니다.

(5) 내세에 대해 희망을 가지기 – 꼭 특정 종교가 아니라 하더라도 죽음 이 후에 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지닌다는 것은 남은 삶에 의미와 보람과 가치를 더해 줍니다.

오늘은 시간이 허락되면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함께 해 보시겠습니다.

(1) 나의 버깃 리스트 만들기

(2) 나의 유언장 쓰기 연습

(3) 내 묘비 미리 써보기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