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걸림돌을 디딤돌로 (시편 119:71-73)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한다.” ‘토마스 카알라일’의 말이다. 길을 걸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돌을 만난다. 오늘 내 앞에 놓인 돌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내일이 달라진다. 인생길에는 수많은 돌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돌을 걸림돌로 볼 것인가, 디딤돌로 볼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인생의 고민은 선택에 있다. 어제의 선택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1. 위기를 기회로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이다. 위기란 전환점으로,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이다. 코로나 위기로 많은 부정적인 것이 있었지만, 긍정적인 것도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은혜이고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시간을 악용하여 믿음이 퇴보 되었고,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간을 선용하여 믿음이 성숙하게 되었다. 코로나 사태로 학생들의 성적 편차가 더 커졌다고 한다. 코로나 사태를 기회로 선용한 학생은 실력이 늘었고, 코로나 사태를 위험으로 악용한 학생은 실력이 퇴보되었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만약 요셉이 형들에 팔리지 않았다면 이집트에 갈 수 없었을 것이고,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가 없었더라면 감옥에 갈 수 없었을 것이고, 감옥에 가지 않았더라면 술 맡는 관원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술 맡은 관원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바로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바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집트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지 못했더라면 아버지와 형제들을 도와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요셉은 모든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켰다. 우리도 요셉과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하여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며 그들을 위로하였더라 (창50:20-21)
2. 상처를 축복으로
“우리를 기도로 인도하는 모든 것은 축복이다”스펄전 목사의 말이다. 상처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면 상처는 축복이다. 헨린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란 책이 있다. 상처가 주안에서 치유가 되면 ‘치유자’가 되지만, 상처가 상처로 남아 있으면 ‘가해자’가 된다. 치유자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인정하며, 품어주고 세워주지만, 가해자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상처를 준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이기에, 상처도 치유도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받는다. 관계의 중심에는 말이 있다. 솔로몬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고 했다. 탈무드에 왕이 두 신하에게 각각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과 가장 선한 것을 알아오라고 했다. 한 신하는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은 사람의 혀라고 보고했다. 두 번째 신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도 혀라고 했다.
우리는 Project를 통해서 PPT를 본다. 우리가 보는 것의 실상은 컴퓨터 안에 있다. 심리학 용어에 ‘투사’(Projection)이란 말이 있다. 우리는 너를 통해서 나를 보는 것이다. 새가 지저귈 때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웃는다고 한다. 새는 동일한 소리를 내지만 듣는 사람의 심정에 따라 다르게 듣는 것이다. 상대방에 의하여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의 진실을 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길 것이다.
3. 숙제를 축제로
인간은 태어나면서 세상이란 학교에 등록해서 다양한 과목을 배운다. 내가 잘하는 과목도 있지만 못하는 과목도 있다. 필수과목도 있지만 선택과목도 있다. 모든 수업에서 숙제는 필수이다. 숙제가 없기를 기대하지 말고, 숙제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숙제를 축제로 바라볼 수 있다면, 숙제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 될 것이다. 숙제는 수동적이고 강제적으로 의무로 해야만 것이지만, 축제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누리는 특권이다. 신학자 하비콕스는 예배는 축제라고 했다. 예배는 구원 받은 자의 특권이지 의무가 아니다. 우리는 축제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예배가 의무가 되면 예식이 된다. 신앙생활이 의무가 되면 종교생활이 된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특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구세군 예배의 특성은 기쁨이다. 예배는 구원받은 자의 특권이지 의무가 아니다. 의무는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지키는 것이지만, 특권은 자유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특권이고, 종교생활은 의무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우리는 자유함으로 진리이신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특권을 의무로 전락시키지 말자. 우리는 모두 축제에 초대된 주의 자녀이다.
플라시보와 노시보 그리고 성경 효과
가짜인데 진짜로 믿으면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인데 가짜로 믿으면 진짜가 가짜가 된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가짜와 진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약 자체보다 ‘인간의 마음이 더 중요함’을 설명하고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플라시보 효과 (Placebo Effect)
‘플라시보 효과’란 심리학과 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위약(僞藥) 효과’로 번역된다. 의사가 환자에게 가짜 약을 투여하면서 진짜 약이라고 하면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병이 낫는 현상을 말한다. 권위 있는 의사가 주는 약은 더 믿음이 생기게 되고, 그 믿음은 환자의 치료에 도움을 준다. 또한 처방할 때 약이 비싸거나 구하기 힘든 것이라고 귀띔해주면, 흔한 약이거나 저렴한 약이라고 말해주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를 얻는다. 연구결과, 위약 투여 후 나타나는 위약반응은 가짜가 아닌 실제 심리생물학적 변화로 임상시험과 치료 상황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사 효과로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가 있다. ‘피그말리온’이라는 명칭은 그리스 신화 속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에서 유래되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여성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자, 이를 지켜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감동을 받아 조각상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간절히 믿으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효과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던가!
노시보 효과 (Nocebo Effect)
‘노시보 효과’는 ‘플라시보 효과’의 반대이다. 진짜를 가짜로 믿기에 치료되지 않는 효과이다. 외과 의사들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환자들의 수술을 꺼린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환자들은 죽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자신의 심장이 특별히 취약하다고 믿는 여성들은 그렇게 믿지 않는 여성에 비해 심장마비로 죽을 확률이 4배나 높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냉동창고에 갇혀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그날 냉동창고는 가동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냉동창고가 가동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사 효과로 ‘낙인효과'(Labeling Effect) 혹은 ‘스티그마 효과'(Stigma Effect)가 있다. ‘스티그마’는 원래 인두를 가축의 몸에 찍어 소유권을 표시하는 ‘낙인’을 뜻하는 말이다. ‘스티그마 효과’란 주위사람에게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면, 실제로 그 대상이 점점 더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효과이다. 과거의 경력이 현재의 평가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면, 결국 당사자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과거 지향적 행태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 효과 (Bible Effect)
그리스도인들은 ‘긍정적 사고’를 넘어 ‘성경적 사고’를 해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성서는 믿음의 근거이며 가르침의 원천이다. 믿음의 대상은 자신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며, 환경도 아닌,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구약은 오실 예수, 신약은 오신 예수.
‘성경 효과’란 무엇인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Godliness)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8) ‘경건’이란 말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ευσεβεια)’라고 하는데, 이는 ‘유(ευ, 좋은)’+ ‘세베이아 (σεβεια, 두려움)’의 합성어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갖게 되는 ‘좋은 두려움’이다. 유대인 남자는 예배 때 반드시 ‘키파’(Kipa)라는 ‘작은 모자’를 써야 한다. ‘통곡의 벽’ 앞에 서 있는 유대인에게 물었다. “키파는 왜 써야 합니까?” 그는 상냥한 미소로 대답했다. “하나님의 임재(Divine Presence)를 인식하고, ‘그를 두려워'(Fear of God)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경건'(Godliness)이다. ‘성경 효과’란 성경을 믿고 경건하게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늘과 땅의 축복’이다.
인생을 관통하는 3가지 원칙
인생을 관통하는 원칙이 있는가?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더라도 결코 변치 않는 원칙 말이다.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세상에는 절대란 절대로 없다”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명제자체’가 절대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상대화’를 ‘절대화’한 ‘신념’으로 살고 있다. 신념은 나 중심이고, 신앙은 하나님 중심이다. 신념은 변하지만, 신앙은 변하지 않는다. 신앙인의 인생을 관통하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1) 목적의 원칙
우주 만물에는 ‘엔트로피 법칙’이 적용된다. 엔트로피 법칙이란 에너지가 ‘질서에서 무질서’로 움직이는 법칙이다. 엔트로피 현상은 ‘목적’이 없을 때 생긴다. 목적 없는 인생은 ‘코스모스(Cosmos)에서 카오스(Chaos)’로 움직인다. 인생은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항해하는 것이다. 표류하는 인생은 환경에 따라 움직이지만, 항해하는 인생은 환경을 넘어 목적지로 향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인 ‘카오스(Chaos)에서 ‘질서'(Cosmos)를 만드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2) ‘혼돈, 공허, 흑암’이란 무질서를 뜻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에서 말씀으로 ‘질서’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주를 ‘코스모스'(Cosmos)라고 한다. 우주는 우연한 빅뱅으로 만들어진 것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경륜 가운데 만들어진 ‘질서'(Cosmos)이다.
2) 몰입의 원칙
몰입이란 분산된 마음의 에너지를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태양빛이 렌즈를 통해서 한곳에 집중하는 것과 같다. 몰입은 ‘Flow’라고 한다. 거대한 흐름에 자신을 맡긴 상태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몰입은 ‘그리스도와 내’가 구분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몰입 상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구하는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걱정과 근심’이다. 믿음은 맡기는 것이다. 수영을 잘하려면 물에 자신을 맡겨야 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맡겨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존재’이고,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유한한 존재’이다. 유한한 인간이 어찌 무한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있겠는가?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 이니라 여호와의 말씀 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 이니라 여호와의 말 이니라”(사 55:8∼9) 비록 우리가 다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도, 하나님을 믿고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3) 반복의 원칙
광야에는 길이 없다. 같은 곳을 반복해서 가면 길이 된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다. 반복된 경험을 통해서 길이 만들어진다. 길이 만들어 지면 자극과 관계없이 길을 통해서 반응한다. 긍정의 길을 만든 사람은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부정의 길을 만든 사람은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인간은 스스로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산다. 인간의 뇌는 반복되는 행동패턴을 기억하여 회로를 만든다. 이를 ‘습관회로’라고 한다. 뇌세포는 ‘뉴런'(Neuron)이고, ‘뉴런과 뉴런’의 연결 부분을 ‘시넵스'(Synapse)라고 한다. 시넵스의 연결이 ‘습관회로’이며, ‘마음의 길’이다.
습관은 반복되는 감정과 생각에서 나온다. 감정은 생각보다 원초적이어서, 생각하기 전에 먼저 느낀다. 심리학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의 길’을 차단하고, ‘긍정의 길’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한다. 기독교에서는 ‘길의 바꿈’을 ‘회개’라고 한다.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아’는 ‘생각을 바꾸다’, ‘방향을 바꾸다’, ‘길을 바꾸다’라는 뜻이다. 지옥 가는 길에서 천국 가는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길은 하루아침에 대로가 되지 않는다. 계속된 반복을 통해 좁은 길은 넓어지고, 약한 회로는 강해진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목적과 우연’이다. 진화론은 존재를 우연이라고 하지만, 창조론에는 목적이 있다.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성공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이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