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꿈을 꾸는 사람들
요엘 선지자는 성령강림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2:28)” 우리는 성령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모인 곳이 교회가 되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나이와 신분에 관계없이 ‘어제의 이야기’가 아닌 ‘내일의 이야기’를 한다. 과거를 회상하지 않고 미래를 꿈꾼다.
1. 비전과 야망
비전과 야망, 둘 다 미래 지향적인 단어이지만 의미는 아주 다르다. 야망은 자신으로부터 나오고 자기중심이며,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 자신이 영광을 받게 된다. 그러나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 중심이며,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 야망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 죽을 때 사라지지만, 비전은 그 사람이 죽어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자신을 위해서 뿌린 씨는 자신이 죽으면 끝나지만, 주를 위하여 뿌린 씨는 열매를 맺고 또 하나의 열매를 기다리고 있다.
양화진에 가면 ‘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있다. 이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으로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있게 되었다.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선교사는 헤론이다. 헤론은 테네시 대학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미 20대에 모교의 교수로 초빙 받은 수재였다.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보장된 길을 선택하지 않고, 헤티와 결혼한 후 북장로회 선교사로 1885년에 조선에 들어왔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했고, 그는 1885년 6월 21일 입국을 하였다.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의사의 신분으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해 12월 4일의 우정국사건으로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칼을 맞고 죽을 위기에서 알렌이 고쳐주었다. 알렌은 고종이 준 하사금으로 1885년 2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설립하였다. 같은 해 3월에 광혜원은 제중원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887년에 헤론이 제중원 2대 원장으로 부임하고 무리하게 환자를 돌보다가, 1890년 7월 헤론은 이질에 걸려 순직하여 양화진에 묻히게 되었다. 이후 이 땅에서 소천한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2. 비전은 권능
성령이 임하면 비전을 갖게 되고, 성령은 비전을 이룰 수 있는 권능도 허락하여 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권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 영어로는 ‘다이너마이트’ (dynamite)이고,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뜻한다. 권능은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이다. ‘하나님의 선교’란 말이 있다.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1:6)”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니 문제가 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10:2-3)
디즈니랜드와 디즈니월드를 만든 ‘월트 디즈니’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의 세계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꿈은 현실이 되어 캘리포니아에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욕심에서 나온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디즈니랜드를 개관하고 그는 또하나의 꿈을 꾸었다. ‘디즈니랜드’ 보다 20배 정도 넓이의 ‘디즈니월드’를 만드는 것이다. 여의도의 35배나 되는 크기이다. 플로리다에서 공사는 시작되었다. 월트 디즈니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개관식이 있던 날 사회자가 디즈니 여사를 소개하면서 “월트 디즈니 씨기 이 개막식을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정말 아쉽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녀는 답사에서 “그는 이미 이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다즈니 월드가 건립된 것입니다.”라고 했다.
3. 비전은 방향
비전은 칠흑과 같은 어두운 밤바다의 등대이다. 항로를 잃고 표류하는 배의 나침반이다. 동방박사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별이다. 40년간의 광야에서 방황하며 떠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이다. 비전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비전은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미래를 앞서 보는 눈이다. 비전은 척박한 현실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는 소망의 근원이요, 비전은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속도 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태양을 향하여 가는 사람은 천천히 걸어가도 그림자는 언제나 뒤에 있지만, 태양을 등지고 가는 사람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언제나 앞에 있다. 인생은 카레이스의 시계가 아니라, 항해사의 나침판이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먼지를 일이키며 다가오는 한 마차를 향해 태워줄 것을 부탁했다. 마음씨 좋은 마부 덕분에 마차에 탈 수 있었다. 여행객은 마부에게 물었다. “예루살렘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30분 정도 걸립니다.” 30분이 지나도 예루살렘이 보이지 않자 여행객은 다시 묻는다. “예루살렘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1시간 걸립니다.” 여행객은 놀라서 따진다. “30분 전에는 30분이라고 하더니, 30분이 지난 지금에는 왜 1시간이라고 합니까“ 마부는 대답한다. ”이 마차는 예루살렘 반대편으로 가는 마차입니다.“
당신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말에 상처받지 말기 바란다. 어렵고 힘든 환경에 의해 눌리지도 말기를 바란다.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힘을 주실 것이고 반드시 시작하신 일을 이루실 것이다.
편집–분열적 자리와 우울적 자리
클라인은 자리 개념을 단계 개념과 구분했다. 프로이트는 구강기, 항문기 등의 단계개념을 사용하여 본능적 충동의 성질, 식욕 및 성욕과 같은 근본적인 신체적 욕구충족의 성질을 설명하였다. 단계들과는 달리, 자리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변동이 있으며, 이것은 자리가 분명한 연속관계는 끊임없는 변동이 있으며, 이것은 자리가 분명한 연속관계를 따라 발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편집–분열적 자리 (Paranoid-Schizoid Position)
삶이 시작되면서 생명본능과 죽음본능 사이에 투쟁이 시작된다. 죽음본능은 자아가 해체되고 완전히 멸절될 것 같은 불안을 낳는데 이러한 불안을 초기의 약하고 통합되지 않은 자아가 감당할 수 없다. 이 때 초기 자아는 이러한 불안을 다루기 위해 분열, 투사, 내사와 같은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초기 자아는 죽음본능을 분열시켜서 밖으로 투사한다. 동시에 생명본능도 이상적인 대상을 창조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투사된다. 이렇게 해서 자아는 리비도적인 부분과 파괴적인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그런 다음에는 분열된 대상과 관계를 맺게 된다.
클라인은 편집-분열적 자리의 중요한 방어기제로서 투사적 동일시라고 했다. 투사가 자신의 감당하기 힘든 충동을 외부 대상에게 투사함으로 축출하는 것이라면, 투사적 동일시에서는 충동뿐만 아니라 자기의 일부가 대상 안으로 투사된다. 이때 투사된 것이 자기의 일부분이므로 무의식적인 동일시를 통해서 추방된 부분과의 연결이 유지된다. 투사된 정신내용은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주체는 그 내용과 관계를 유지하고 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우울적 자리 (Depressive Position)
클라인은 유아가 생후 6개월경에 편집적 상태에서 벗어나 우울적 자리라는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울적 자리 개념은 이후 클라인학파 정신분석 이론에서 중심적인 개념이 되었다. 우울적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편집적 자리에서와는 달리 대상들이 전적으로 좋거나 전적으로 나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는 통합적 인식 능력이 자라면서 좋은 외적 대상과 나쁜 외적 대상이 실제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유아는 전적으로 좋은 대상과 전적으로 나쁜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대상이 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울적 자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제는 보상, 양가감정, 감사이다. 양가감정 (ambivalence)은 특정한 방어기제라기보다 일반적인 정서적 성숙의 표현이다. 동일한 대상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한다는 유아의 의식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촉진시킨다. 양가감정을 포용하는 것은 전체 대상과의 관계에서 사랑이 미움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과 증오의 통합은 정서적 심화와 정서적 성숙, 자기 인식과 타인에 대한 공감적 지각능력의 심화 그리고 대상들 사이의 좀 더 세밀한 분화를 가져온다. 따라서 편집-분열적 자리에서는 인지적 성숙, 어머니와의 좋은 경험 등과 같은 외적인 요인이 편집-분열적 방어가 해소되도록 촉진시키는 반면, 우울적 자리에서는 내적 요인, 우울적 자리의 기제가 바로 우울적 불안을 해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울적 자리는 편집-분열적 자리와는 달리 성숙을 이루는데 필요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5월 1일 주일에 ‘시드니성시화 운동본부’ 임원진의 이.취임식이 있었다. 식순에 의하여 설교를 했다.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을 의지하여 ‘누가 좋은 사람인가?’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관계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관계가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관계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수직적인 하나님과 관계, 수평적인 이웃과 관계 그리고 내적인 나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회복은 생명이고 분리는 죽음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의 회복은 행복이고 분리는 불행입니다. 나와의 관계의 회복은 자존감이고 분리는 자존심입니다. 분리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입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수업시간에 배운 ‘양가감정’에 대해서 설명했다. “지금 제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시원섭섭’합니다. 대표회장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 시원하기도 하지만, 오늘 이후로 아무도 저를 회장이라고 불러주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이진관이 부른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가 생각났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인간은 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이고, 인생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
‘빅터 프랭클 (Viktor E. Frankl)’ 박사를 아는가? 그는 유태인으로 ‘신경과 정신전문의’이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에 그의 아내, 부모님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아내와 부모님은 목숨을 잃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그는 수용소에서 풀려났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
그는 수용소의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자를 썼다. 원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 : Introduction to Logotherapy” 이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준 프랭클 박사의 자전적인 체험수기이다. 체험을 바탕으로 프랭클 박사는 자신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의미치료’ (Logotherapy)를 이룩했다.
그는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든든한 생명줄로 만들었다. 수용소의 철조망 뒤로 넓게 펼쳐진 광활한 대지를 보며 희망의 불꽃을 지폈고,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 속에 비친 하늘의 뭉게구름을 보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승화하는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이루었다. “모든 인생에는 의미가 있으며, 인간은 의미를 찾는 의지와 의미를 추구하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의미치료 (Logotherapy)의 기본원칙이다.
의미 (Logos)
의미치료 (Logotherapy)는 ‘Logos + Therapy’ 합한 말이다. 로고스 (Logos)는 그리스어 ‘말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철학에서는 이성, 신학에서는 ‘하나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 (요1:14)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설득하는 데는 3가지기 필요하다고 했다. 첫째 Logos, 둘째 Pathos, 셋째 Ethos이다. 여기서 Logos는 인간의 이성, Pathos는 감성 그리고 Ethos는 인격이다. 그는 논리적으로 이성인 Logos에 설득할 때는 10%, 감정인 Pathos에 호소할 때는 30%, 전달자의 인격으로 설득할 때는 60% 효과가 있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닌 ‘감성적 존재’이고, ‘감성적 존재’이기보다는 ‘관계적 존재’이다.
스토아학파에서는 ‘로고스’를 인간의 이성을 넘어 ‘우주를 통일하는 법칙’으로 설명했다. 인간도 자연의 질서 속에 살아가는 존재로 이므로, ‘로고스’에 순응하며 금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스피노자가 주장한 ‘범신론’ (Pantheism)도 스토아학파의 Logos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범신론이란 세계밖에 별개로 존재하는 인격신이 아닌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과 자연법칙을 신이라 하거나, 또는 그 세계 안에 하나의 신이 내재되어 있다는 세계관이다.
예수 그리스도 (Logos)
프랭클 박사의 이론을 기독교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성경 요한복음 (1:1)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곧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In the beginning was logos, Logos was with God and logos was divine)” 여기서 ‘Logos’를 ‘말씀’ 대신 ‘의미’로 번역하면 ”태초에 의미가 있었다. 의미가 곧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의미가 곧 하나님이시다.” 그 의미 (Logos)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크로노스’에 예수가 개입하면 ‘카이로스’가 된다. ‘평범한 일’에 예수가 개입하면 ‘특별한 사건’이 된다. ‘피투적 존재’에 예수가 개입하면 ‘기투적 존재’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죽음’의 목적이고 이유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14:7-8)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