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내가 누군지 알아! 빌3:4-8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 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입니다 (5절).
바울이 삼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돌와 왔을 때 살기가 등등한 유대인들 앞에서 이렇게 자기를 소개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행 22:3)
그리고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일을 간증했다. 사도행전에는 다메섹 도상의 부활하신 예수님 만난 사건이 3번 기록되어 있다. 행전 9장에 바울이 직접 경할 때와 행전 22장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행전 26장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 변론을 할 때이다. 바울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다메섹 도상에 사건을 간증했다.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 이스라엘 족속, 유대인이라고 소개했다.
1. 히브리인 : 히브리인은 아브라함과 관련 (창세기 14: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창 14:13) 히브리인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과 이와 동등한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키고 구약에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으로 불렀는데 아브라함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온 데서 유래되었다. 이들은 국경도 없고 일정한 인종적 소속도 없으며,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전쟁이 일어날 때 용병으로 싸워주면서 식생활을 해결하기도 하며, 돌을 깎는 석공의 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며 목축업으로 천막에서 생활을 하던 무리를 가리켜 ‘히브리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나라가 없이 떠돌고 있는 집시들이나, 중동지방에서 천막생활을 하고 있는 유목민 베두인들과 비슷한 이름이다.
2. 이스라엘 : 이스라엘은 야곱과 관련 (창세기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8) 야곱에게 태어난 12 아들 중심으로 12지파가 이루어지고, 이들이 430년간 이집트 생활 후 출애굽한 이들의 공동체를 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홍해 사건을 통해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음으로써 장차 가나안에 정착하여 영토를 회복하면 한 민족으로 독립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보다 나에게 독특한 보물이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 말이니라. 하시니라.‘ (출 19:5, 6),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민족들을 그들의 유업으로 나누셨을 때, 그분께서 아담의 아들들을 분리시키셨을 때,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으니, 이는 주의 분깃은 그분의 백성이요, 야곱은 그분의 유업의 몫임이라.‘ (신 32:8, 9)
3. 유대인 : 유대인은 유다와 관련 (창세기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 29:35) 유다 (Juda, Judah, Judas)는 “찬양”이라는 뜻의 레아가 낳은 야곱의 넷째 아들의 이름이다. 유대인은 유다 지파가 차지한 땅인 ‘유대 지역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 중심의 공동체가 되어 이들이 지금의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다. 야곱은 2명의 부인과 2명의 하녀에게서 1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낳았다. 레아: 르우벤(1) 시므온(2) 레위(3) 유다(4) 잇사갈(9) 스불론(10) 디나(딸), 빌하: 단(5) 납달리(6), 실바: 갓(7) 아셀(8), 라헬: 요셉(11) 베냐민(12) 야곱은 유다를 축복하고 유다의 계통에서 메시아가 탄생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 49:8-10) 가나안 땅에 유대 지파의 지도자였던 갈렙이 차지한 땅을 유대하고 하였고,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은 유대의 수도였던 헤브론에서 3년 6개월 동안 통치하고 북쪽의 10지파를 통합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유대인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유대 족속들이 돌아온 후부터였다.
미디어와 관련된 호주 구세군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영상은 움직이는 사진이다. 최초로 영상을 만든 사람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다. 1891년 에디슨은 ‘키네토그래프 카메라’와 ‘키네토스코프 관람 상자’를 만들었다. ‘키네토 (kineto)’는 ‘움직인다’는 뜻이다. 키네토스코프는 혼자밖에 볼 수 없어 영상이지 영화는 아니다.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대중이 볼 수 있는 ‘시네마토그라프’ (Cinematographe)를 만들어 최초의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시네마토그라프’라는 말은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의미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케네토스코프‘처럼 한 번에 한 사람만 감상할 수 있었던 기존 방식과는 달리, ‘시네마토그라프’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하나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영화는 대중과 교감하는 매체이므로 ‘시네마토그라프’를 영화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사용하는 ‘시네마’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최초의 영화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영화사인 고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상영된 세계 최초의 영화는 ‘열차의 도착’ 이라는 50초의 짧은 내용의 작품이었다. 당시의 기술로 필름에 담을 수 있는 최대 시간은 90초였다. 이 영화는 아무런 스토리도 없이 단순히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만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19세기 후반의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영화는 다음해인 1896년에 베를린, 런던 등 유럽 주요 도시에 상영되었다. 뤼미에르 영화 필름은 대부분 정적 화면이지만, 촬영 기사들의 독창성이 아주 뛰어나 최초로 줌이나, 정지 카메라 상태에서 파노라마 화면으로 편집하는 영화 촬영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최초의 장편 영화
1906년 찰스 타이트 감독이 제작한 세계 최초 장편영화로, 19세기 후반 호주의 ‘로빈 후드’로 불렸던 ‘네드 켈리’의 영웅담을 그린 작품이다. 세계 최초의 장편 영화는 미국도 아니고 유럽도 아닌 호주에서 만들어졌다. 1880년 25살의 나이로 사형당한 악명 높은 갱 ‘네드 켈리’의 영웅담을 그린 이 영화는 개봉 이후 9년 동안 호주와 뉴질랜드, 영국을 돌며 놀라운 흥행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약자들의 영웅이었던 그의 범죄를 모방한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자 한동안 상영이 금지됐을 정도로 화제작이었다. 1906년 첫 상영시 67~70분가량의 분량이었으나, 당초 제작되었던 필름이 사라져 원형을 볼 수 없었다. 이후 개인 소장가와 영국 국립기록보존소 등에서 발견된 필름 조각들을 호주 국립영상자료원의 디지털 복원을 통해 총 18분 분량의 필름을 완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최초의 멀티미디어 공연
1900년 9월 13일 멜버른 시청에서 ‘십자가 군병 (Soldiers of the Cross)’이 공연되었다. 호주 구세군의 Limelight 부서에서 공연하였다. 초기에는 최초의 장편영화라는 칭호까지 받았지만, 영화 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가 함께 연출되어 인정되지 않았다. 2000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 90초짜리 16편의 영상을 비롯하여, 200장 이상의 매직-랜턴 슬라이드 필름, 오케스트라와 찬양대 그리고 호주 구세군 사령관인 ‘허버트 부스’ (Herbert Booth)의 감동적인 강연까지 무려 2시간 30분간의 공연을 하였다.
‘십자가 군병’은 로마 병사에게 쫓기어 어린아이를 안고 도망하는 크리스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가 개울을 연결한 좁은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반대편에 있는 동료가 빨리 강을 건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때 다리를 건너려는 병사가 달려오는 속도와 몸의 무게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물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관객들은 가난한 크리스천 여인의 탈출과 당황하는 로마 병사를 보며 긴장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공연 내내 숨을 죽이고 영화와 슬라이드 필름에 집중하고 있던 관객들은 소리를 높여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구세군은 호주 최초의 영상스튜디오를 만들어, 호주정부가 출범한 해인 1901년 1월 26일에 등록하고, 30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호주 구세군의 영상 사역은 Joseph Perry 사관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페리 사관은 ‘Ballarat Prisons Gate Brigade Home’에서 출소자를 위한 사역을 하고 있었다. 1891년 멜버른 본영에서 근무하던 Frank Barritt 사관이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페리 사관이 매직 랜턴 프로젝터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페리 사관은 매주 토요일 밸러랫 (Ballarat)에서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홍보하고 있었다. 구세군 본영으로 돌아온 배릿 사관은 페리 사관에게 프로젝트와 함께 멜버른으로 오라고 하였다. 배릿 사관은 특별 부서를 만들어, 1891년 9월에 호주를 방문할 구세군 대장인 윌리엄 부스를 홍보할 계획이었다.
이때 구세군의 영상을 담당하는 Limelight 부서가 만들어 졌다. 처음으로 페리 사관은 ‘이스마엘의 딸’이란 내레이션이 들어 있는 랜턴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1895년까지 Limelight 부서는 2중 렌즈의 프로젝트를 소유하게 되어, 600개 이상의 유리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당시 페리 사관은 프로젝트를 가지고 호주와 뉴질랜드에 전도여행을 다녔다. 총 522회의 공연을 했고, 469명이 구원받았고, 선교를 위한 1784 파운드의 모금도 했다.
1896년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의 아들인 헐버트 부스가 호주 사령관으로 임명을 되었다. 필름 사역에 관심이 있는 헐버트 부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프랑스에서 제작한 여행용 필름을 수입하였다. 1897년 Limelight 부서는 필름을 여러 지역을 다니며 상영하였다. 허버트 부스 사령관은 페리 사관을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자체적으로 필름을 만들 것을 요청하였다.
1898년 5월 구세군 멜버른 시티 교회에서 뤼미에르 필름과 랜턴 슬라이드 그리고 구세군 음악이 연합한 공연이 있었다.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선교는 구세군은 교회는 물론 구세군 사회사업과 사관학교에서도 사용되었다. 1900년대의 사회는 단순하였다. 당시에 멀티미디어로 선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때이다. 구세군은 창조적인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였다. 길가의 건물에 슬라이드를 비쳐 가로전도를 하기도 했다. 구세군 사람들에게 교회로 모이라고 하는 대신, 사람들을 찾아 거리로 나가는 적극적인 선교를 하였다.
1901년 1월 1일 구세군은 호주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나라의 역사의 현장을 필름에 담았다. 역사가 ‘Christ Long’은 그날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속적인 필름의 프레젠테이션, 길고 중요한 내용,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지속적으로 많은 산업에 영향을 끼쳤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구세군은 호주에서 만드는 80% 이상의 필름을 제작하였다. 필름은 구세군의 복음전도와 사회사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09년 9월 James Hay 새로운 호주 사령관이 부임하면서 구세군의 영상사업은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1910년에 Limelight 부서는 문을 닫고, 장비는 팔리고 필름들은 사라졌다. James Hay 사령관은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구세군에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우리를 진정한 구세군에 합당하지 않은 사악한 길과 가벼움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사업을 완전하게 끝낸다.”
미디어와 관련된 구세군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다. 아름답다는 것은 시대를 선도하는 창조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고, 슬프다는 것은 필름사업이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오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멀티미디어 시대이다. 더구나 코로나 시대는 미디어의 역할이 그 어느때 보다 크다. 미디어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미디어를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이 될 수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죄인이라서 죄를 짓는다
본성이란 동물이나 인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특성이다. 교육이나 환경은 본성을 약화시키거나 강화시킬 수는 있지만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야생동물을 길들일 수 있지만, 야생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는 3가지 설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성선설’, 악하다고 생각하는 ‘성악설’, 본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성 백지설’이다. 대표적인 동서양의 학자들을 언급하자면 성선설은 맹자와 루소, 성악설은 순자와 기독교, 성 백지설은 고자와 로크이다. 인간의 본성이 악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원죄 때문이다. 원죄란 죄의 원뿌리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남용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타락했다. 그 이후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애’와 ‘자기의’로 나타난다.
1. 자기애 (Self-Love)
‘누구라도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 자기 부인이란 옛사람, 육의 사람, 겉 사람을 부인하는 것이고, 자기애 (self-love)는 그러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 (Narcism)이란 말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는 연못에 비친 자기를 보고 사랑에 빠져 연못에 빠져 죽는다. 나르시시즘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 존재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이들은 ‘이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전제를 가진다. 한마디로 왕자병과 공주병에 걸린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의 병이 더 심각해지면 ‘영적 자폐증’으로 나타난다. 자폐란 영어 단어인 “autism”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자신”을 뜻하는 “αυτος”에서 유래된 말이다. 자폐증란 “자기 자신만의 세계 속에 고립된 증세”라는 의미이다. 외부와 관계를 차단하고 자기 안에 갇혀 산다. 하나님은 인간을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하였는데 영적 자폐증에 걸린 사람은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자기 속에 숨어 산다. 지옥은 자기애에 빠져 있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고, 천국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지옥은 긴 숟가락으로 자기만 먹으려다 굶고 있는 곳이고, 천국은 긴 숟가락으로 서로를 먹여 줌으로 배가 부른 곳이라고 한다.
2. 자기의 (Self-Righteousness)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 10:3) 기독교의 의는 행위의 의가 아니라 믿음의 의이다. 자기의 의는 행위의 의이고 하나님의 의는 믿음의 의이다. 사사기는 구약 시대의 암흑기라고 한다. 사사시대의 시대정신은 사사기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인 21장 25절의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이다. 새번역에는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공동번역에는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라고 했다. ‘소견’을 영어 성경에 ‘As he saw’라고 했다. 본다는 것은 ‘관점’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을 세계관이라 하고, 인생을 보는 관점을 인생관, 가치를 보는 관점을 가치관이다. 보는 관점의 기준은 자신이다. 문제는 기준인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기준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죄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오직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관계의 단절은 죽음이고 관계의 회복은 생명이다. 기독교는 관계적 종교이다. 올바른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자기애’와 ‘자기의’를 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함을 받고, 성령충만으로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자, 이제 허황된 희망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