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떡집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주님
오늘은 대강절(대림절, 강림절) 3째 주일이다. 대강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4주간을 의미한다. 올해는 11월 29일부터 12월 24일까지이다. 대강절 (The Advent)은 ‘도착’ 또는 ‘오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됐다. 일반 달력은 1월 1일이 한해가 시작되고, 유대인은 유월절을 기점으로 시작되며, 교회력은 대강절로부터 시작된다. 대강절은 단순히 2000여 전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렸던 그 마음 그대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첫 두 주일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대, 나중 두 주일은 그리스도의 처음 오심을 맞이하는 기대를 주제로 묵상한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기록되어 있다. 이 복음서는 내용과 관점상의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 탄생과 관련하여 동방 박사의 경배(마 2:1-12), 헤롯의 유아 학살(마2:13-18) 등을 언급함으로써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로부터 배척당하셨음을 강조하였다. 이에 반하여 누가복음은 말구유에서 예수의 탄생(2:1-7), 천사들의 찬송(8-14절), 목자들의 경배(15-20절)를 다룸으로써 예수께서 비록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천사들과 인간들로부터 경배받기에 합당한 메시야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로마 황제이던 가이사 아구스도 (BC 27 ~ AD 14)는 인구조사를 명령했다. 요셉은 임신한 마리아와 함께 로마 제국의 명령을 따라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서(눅 2:1)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다.(눅 2:4-7). 동방박사들은 별을 쫓아 아기예수에게 가다가 헤롯 왕을 만났다. 헤롯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계획하였으나,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보고하지 않고 다른 경로를 통해 고국으로 돌아갔다.(마 2:1-12), 화가 난 헤롯은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의 모든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천사의 경고를 받은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다(마 2:13-18). 헤롯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 나사렛으로 갔다. 성경은 그 이유를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마 2:22)라고 기록하고 있다.
헤롯 대왕이 기원전 4년에 죽고 헤롯 아들들을 분봉왕으로 세워 헤롯 대왕의 영토를 3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게 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헤롯 아켈라오, 나사렛이 자리 잡고 있는 갈릴리 지역과 베레아 지역은 헤롯 안디바스, 갈릴리 북부 지역을 헤롯 빌립이 다스렸다. 베들레헴은 아켈라오가 통치하는 지역이었다. 그는 매우 잔혹하고 억압적인 통치하여 요셉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헤롯 안디바가 통치하는 나사렛으로 갔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귀족들은 로마 황제 아구스도에게 대표단을 파견해서 아켈라오의 폭정을 알리었다. AD 6년 아구스도 황제는 아켈라오를 제거하고 총독을 보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분봉왕과 총독이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베들레헴 말 구유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주의 사자가 이르는 대로 이스라엘 땅에 되돌아와서 정착한 곳이 그 부모의 고향이기도 한 나사렛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 (마 2:22 ~ 23, 요 19:19)으로 불린다. 이집트에서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곳 (눅 2:39)으로, 예수님은 그의 소년시절 (눅 2:51)을 이곳에서 보내셨다.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산간 지방을 거쳐 북쪽으로 약 137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출생 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했던 때를 제외하시고는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이다. 나사렛은 작은 도시였다. 빌립이 예수님를 만나고 너무 기뻐서 친구인 나다나엘을 전도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소. 나사렛 동네에 사는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다” 이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것을 보면(요 1:46) 그곳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를 알렸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수태고지 교회’, 요셉이 목수일을 하던 집터 위에 세워진 ‘성 요셉교회’등 예수와 관련된 관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자살에 대하여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작품으로 일약 유명 작가가 되었다. 작품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한 비련의 주인공 ‘베르테르’의 슬픈 이야기다. 친구 ‘알베르토’의 아내인 ‘로테’를 사랑한 베르테르.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갔다. 마침내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에게 빌린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생을 마감한다. 당시 유럽의 많은 젊은이가 소설 속에 묘사된 주인공 베르테르처럼 옷차림을 하고 다녔고, 베르테르를 따라 젊은이들이 자살을 했다. 급기야 ‘베르테르 효과’ (Werther effect)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거나 인기있는 사람들의 자살 이후 이를 따라 자살 시도가 늘어나는 ‘사회적 심리현상’을 지칭한다.
자살은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살고는 싶지만,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표현이다.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내일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자살을 결심한다. 삶의 행복보다 감당키 어려운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들은 자살을 선택한다. 자살은 절망의 표출이다. 내일이 없는 오늘을 사는 인간은 절망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어떻게 자살을 방지할 수 있을까? 자살방지대책에는 3가지 방식이 있다. ‘사전예방’ (prevention), ‘위기개입’ (intervention), ‘사후관리’ (postvention)이다.
사전예방 (Prevention)
한국은 자살 선진국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의 국가 중에서 자살률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별히 노인 자살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노인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주된 이유로는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크다. 중앙자살예방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노인은 우울증으로 인해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비관적인 생각이 들게 되고 만성질환으로 인해 내 몸이 아프고 불편해서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인간은 삶의 가치와 의미가 상실 될 때 ‘실존적 공허’의 상태에 빠진다.
하나님은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지 않고 작품으로 만드셨다. 상품은 시간이 가면 가치가 떨어지고, 유통기간이 지나면 폐기 처분된다. 그러나 작품은 시간이 가면 더 높은 진가를 발휘한다. 우리의 육신은 상품과 같아 시간이 가면서 점점 가치가 떨어지지만, 영은 그 반대이다. 육을 쫓는 사람은 상품 같은 삶을 사는 것이고, 영을 쫓는 사람은 작품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위기개입 (Intervention)
의학에는 두 종류가 있다. ‘치료의학’과 ‘예방의학’이다. 요즘은 치료의학보다 예방의학이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치료의학이란 병이 발생된 후 치료하는 것이고, 예방의학은 검진을 통하여 발병 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위기개입 (Intervention)은 치료와 같다. 급박한 생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여러 방법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살자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있다. 절망이란? 고통 받는 사람이 다시는 그 어떤 좋은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는 심리적 상태이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다. ‘희망의 신학’을 주창한 ‘몰트만’이란 신학자가 있다. 그는 ‘부활과 영생’을 바탕으로 희망에 초점을 맞추어 신학을 연구했다. 인간이 현재에 머물러 절망하거나 체념하는 것은 ‘비인간적 현상’이라고 했다. ‘희망’은 미래지향적이고, 가능성을 향한 ‘미래적 의식’이라고 강조했다. 내일에 대한 희망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오늘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사후관리 (Postvention)
호주에 ‘사후관리호주선교’ (Postvention Australia’s Mission)란 단체가 있다. 자살 방지와 자살한 유가족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단체이다. 이 단체의 총무인 ‘알랜 스테인’은 86세의 ‘구세군 특무’ (Salvation Army Envoy)이다. 그는 2018년 10월 18일 캔버라를 떠나 11월 16일 시드니에 도착할 예정으로 330K의 행군을 시작했다. 시드니까지 오는 도중에 14 곳의 도시를 들려 자살방지, 개입, 관리 등과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다. “매년 호주에서 약 3000명의 사람이 자살을 합니다. 한 사람이 자살함으로 최소한 135명이 영향을 받습니다. 하루 평균 1000명 이상이 자살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알랜은 자살 후 남은 가족의 ‘사후관리’가 왜 중요한 가를 밝혔다. “자살 후 남은 가족은 심적으로 불안한 상태입니다. 이들은 정상인보다 8배까지 사살할 확률이 높습니다. 남은 가족에게 다양한 도움을 주는 것이 더 이상의 불필요한 자살을 방지하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인간에게는 ‘양가감정’ (兩價感情)이 있다. 양가감정이란 어떤 대상에게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갖는 상태이다. 대표적으로 ‘애증’ (愛憎)이란 단어가 있다. 사랑하지만 증오한다는 뜻이다. 깊이 생각하여 보면 증오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라, 사랑의 또 다른 면이다. ‘사랑’의 진짜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일 것이다. 혹시 우리사회의 만연된 무관심이, 이 사회를 자살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
프랑스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은 결코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개인이 속한 사회적 힘이 자살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현진건의 ‘술권하는 사회’에서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일제의 암울한 시대를 사는 지식인 주인공은 매일 술을 마신다. 아내가 “누가 매일 당신에게 술을 권합니까?” 묻자, “이 사회가 술을 권한다오” 답한다. 답답해 하며 집을 나가는 남편을 보고, 그녀는 “그 몹쓸 사회는 왜 술을 권하는고!” 탄식한다.
구세군은 하나님의 군대이다
구세군의 특징은 3가지가 있다. 신학적으로 감리교나 성결교와 같은 ‘웨슬리아니즘 (Wesleyanism)이고, 실천적으로 ‘전인구원’ (Holistic Salvation)을 강조하며, 조직적으로는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이다. 전인구원과 관련되어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Heart to God and Hand to Men)’, ‘한 손에는 빵, 다른 손에는 성경’ (One hand holding Bread, the other Bible)이란 모토가 있다. 구세군은 영혼뿐 아니라 실존적 문제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진 ‘행동하는 교회’이다.
구세군은 선교 공동체 (Community of Mission)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에클레시아 (Ecclesia)’아 적인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디아스포라 (Diaspora)’적 교회가 되어야 된다. 모이는 교회 (에클레시아)가 방주 역할을 한다면, 흩어지는 교회 (디아스포라)는 구조선 역할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최대의 계명’ (The Great Commandment)이 사랑이라면(마22:37-40), ‘지상최대의 위임’ (The Great Commission)은 선교이다.(마28:18-20) 교회의 본질은 선교에 있고, 교회는 ‘선교 공동체’이다. 우리 모두는 ‘보내는 선교사’가 아니면 ‘가는 선교사’이다. ‘선교적 교회’ (Missional Church)와 ‘선교사 교회’ (Missionary Church)는 조금 다르다. ‘선교사 교회’는 교인 모두가 선교사 사명을 갖고 있다. 교회는 모이기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흩어지기 위하여 모였다. 하지만 아무 준비 없이 무조건 흩어져서는 안 된다. 모일 때마다 새롭게 무장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 (The Full Armor of God)를 입고 나가야 한다. ‘선교의 전후방’이 사라진 것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다. 무슬림이 몰려오고, 아프리카 사람이 오고, 중동인이 오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땅끝이다.
구세군은 예배 공동체 (Community of Worship)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요 기독교의 핵심이다. 예배 (Worship)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인정하며, 창조주께 드리는 피조물의 최고의 행위이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느니라” (민 6장24-26절)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 (to Meet God), ‘하나님과 교제’ (to Meet with God)한다. 예배를 중심으로 교회에는 3종류의 사람이 있다.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 ‘예배 보러’ 오는 사람, 심지어 ‘예배 받으러’ 오는 사람도 있다. 교회 오는 목적이 하나님 중심이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사람 중심이면 예배를 보는 것이며, 자기 중심이면 예배를 받으러 오는 것이다.
구세군은 섬김 공동체 (Community of Service)
‘섬김’이란 헬라어로 ‘디아코니아’ (Diakonia)라고 한다. ‘디아코니아’라는 말은 식탁 옆에서 시중든다는 의미로 집사(Deacon)란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교회는 디아코니아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 중심의 공동체에서,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했고, 예수 그리스도도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존재는 아니다. 섬김은 육신적 차원을 넘어, 영적 차원까지 이르러야 한다. ‘복음 없는 섬김’은 ‘구원 없는 봉사’이다.
1988년 12월 18일, 구세군 시카고 한인교회가 창립되었다. 당일 ‘시카고 교회협의회’ 회장께서 말씀을 전했다. 그는 ‘미식축구’의 비유를 들어 구세군을 환영했다. “구세군 교회가 시카고에 창립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교회가 ‘방어적 교회’ (Defensive Church)라면, 구세군은 ‘공격적 교회’ (Offensive Church)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 구세군 (救世軍)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선한 싸움을 하는 ‘하나님의 군대’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