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비상하는 2020”
2020년, 구세군 라이드 교회의 표어는 이사야 40:31의 말씀을 의지하여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비상하는 2020”로 정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일대일로 싸우면 호랑이기가 이기지만, 사자는 군집동물이라서 혼자 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동물의 왕을 사자 또는 호랑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 중의 왕은 독수리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독수리의 독은 대머리라는 의미입니다. ‘수리’과 중에서 머리카락이 없는 수리를 ‘독수리’라고 합니다. 서울의 ‘독(禿)산동’도 민둥산 지역이란 뜻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수리는 강하고 빠르며 민첩한 동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독수리란 단어는 37번 나옵니다. 그리스 신화에도 제우스의 상징이 독수리입니다. 로마의 상징도 독수리이고, 395년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후 476년 서로마가 게르만족에 의하여 멸망하자, 동로마 제국의 상징은 ‘쌍두 독수리’가 되었습니다. 서로마와 동로마를 통합한다는 의미입니다. ‘서로마’를 이은 ‘신성로마제국’도 ‘쌍두 독수리’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계보를 이은 ‘독일’ 역시 독수리입니다.
올해부터 ‘수요성경공부’는 신약을 공부합니다. 신약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기록한 4복음서로 시작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사자 복음,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한 황소 복음,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한 사람 복음, 요한복음은 온 인류를 위한 ‘독수리 복음’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이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겔 1:10)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관점이 비슷하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45퍼센트, 마가복음의 76퍼센트, 누가복음의 41퍼센트가 서로 중복됩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의 배경부터 시작되는 ‘수평적 복음’이지만,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임을 선포하며 시작하는 ‘수직적 복음’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다스리는 왕과 섬기는 종의 대조를 이루고,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대조를 이룹니다.
여러분은 어떤 독수리를 상상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입니다. 일반적으로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란 표현은 독수리 날개의 강한 힘을 연상시켜 줍니다. 그러나 실제로 독수리를 잘 관찰해 보면, 날갯짓으로 조금 올라가서는 기류를 타고 날아 다닙니다. 독수리는 자기 힘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상승기류를 타고 나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에서 올라감이라는 단어를 ‘soar on’ ‘비상’한다는 뜻입니다. 독수리가 하늘 높이 오늘 수 있는 것은 날개 짓 때문이 아니라, 공기의 흐름을 타고 납니다. 30절과 31절은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30절) 육신적으로 강건한 소년이나 장정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하여 넘어지지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31절)이라고 했습니다.
‘앙망하라’(wait upon)는 ‘기다린다, 혹은 바라본다, 사모한다, 의지한다’란 뜻이 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앙망이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앙망’이라는 단어가 11회 나오고, ‘사모’라는 단어가 59회 나타나며, ‘갈망’이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앙망’과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사모함과 갈망’이라는 단어를 다 합해보니까 73회가 나타납니다. 앙망이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맡긴 만큼 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삶의 여정을 불꽃과 같은 눈동자로 살피시고 보호하시는 인도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람이 새힘을 얻습니다. 새 힘은 세상이 주는 힘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에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당신께서 하시는 표적을 보니 당신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이군요”.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다시 질문합니다. “사람이 늙어서 어떻게 두 번째 모태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은 기이히 여기지 말라” 여기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영으로 나다, 위로부터 나다’(Born above)는 의미입니다.
새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고, 영적인 힘입니다. 새 힘은 자신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힘입니다. 새 힘은 땅의 힘이 아니고, 하늘의 힘입니다. 새 힘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2020년, 우리 모두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펴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비상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국인 호주 이민
호주의 역사는 1788년 1월 26일에 시작하여, 1851년 금광이 발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호주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인들이 많이 왔습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일 밖에 모르는 중국인을 백인들은 ‘노란 돼지’(Yellow Pig)라고 부르며 조롱하였습니다. 1901년 1월 1일 ‘Australia’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시작되면서 ‘백호주의 정책’(White Australia Policy)을 펼쳤습니다. 호주를 백인들만 사는 나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은 호주 본토까지는 침략하지는 못했지만 시드니 항구까지 잠수함을 타고 왔고, 다윈에 폭격을 가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호주는 인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고 1950년부터 이민의 문호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1973년, ‘고프 휘틀럼 수상’은 ‘백호주의 정책’을 폐지하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인들이 호주로 오기 시작했습니다. 1975년 월남 패망 전후로, 월남에서 살던 한국인들이 관광비자로 호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1976년 제 1차 사면령이 발표되어 영주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 퍼지자 2차 사면을 기대하면서 호주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남미로 농업이민을 갔던 사람, 독일이나 중동에서 일하던 사람 등 해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호주로 왔습니다. 1980년 제 2차 사면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들이 가족초청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1980년 중반부터 ‘기술이민’, ‘투자이민’ 등으로 한국에서 호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초기 이주자보다 비교적 더 많이 교육받고 사회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사람입니다. 1990년 이후부터는 호주는 관광과 교육으로 인기있는 나라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2000년 전후로 조기유학의 붐이 불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만 보내고 아빠는 한국에서 생활비와 교육비를 보냈습니다. 이때부터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기러기가 1년에 한 번씩 이동하듯, 1년에 한 번씩 휴가를 내서 자녀들을 만나러 갔기 때문입니다. ‘펭귄아빠’라는 말도 있습니다. 형편이 안돼서 돈만 보내는 아빠입니다. 이에 반하여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는 “독수리 아빠”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조용히 최후를 기다리며 에베소에 남아서 교회를 돌보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이다. 디도서와 디모데전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한다. 디모데는 고향이 루스드라(행 16:1)이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 2차 선교여행에 합류했다. 아버지는 헬라인이고 어머니 유니게는 유대인이고, 외할머니는 로이스이다.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이어 받았다(딤후 1:5). 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13권 중 가장 늦게 쓴 편지이다.
.마음이란 무엇일까?
기독교 뿐 아니라 타종교나 수련단체에서도 마음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한다. 마음수련이나 명상 등을 통하여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강조한다. 불가에서 “부처란 바로 마음이다”(卽心是佛)라는 말이 있다. 부처란 자기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불교는 자력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종교이다. 불교는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해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은 타락했기에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고 믿는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거룩한 영인 성령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는 새로워 질 수 있다. 일반 심리학에서는 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혼인 푸쉬케(ψυχὴ)를 ‘마음’ 혹은 ‘정신’이라고 한다. 영어로 ‘심리학’(Psychology)이 여기서 나왔다.
성서에 마음이란 단어가 1000여 번 등장한다. 여러 단어를 ‘마음’으로 번역했다. 대표적으로 3가지가 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Heart)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Heart’는 첫째 ‘핵심, 중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둘째 ‘Mind’를 마음이라고 번역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Mind)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셋째는 오늘의 본문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Spirit)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이다. 여기서는 ‘Spirit’을 마음이라고 했다. 이중 가장 많이 사용된 ‘Heart’는 헬라어는 카르디아(καρδιά)이다. 카르디아의 어근은 ‘Cord’로서, ‘중심’(中心)이란 의미이다. “코드(Cord)가 같다, 다르다”란 말이 있다. “마음이 일치하다, 혹은 틀리다”란 뜻이다. 마음이란 ‘존재의 중심’이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창세기 3:10에 ‘두려움’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아담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는 장면이다. 죄를 지은 후에 경외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했다. 두려움이란 죄로 인한 하나님과 단절된 마음이다. 1948년 루마니아의 공산정권하에서 투옥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모진 고문이 두려워 기도하고 성경 읽는 일에 전념했는데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365회 있음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일년 365일 날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붙잡고 힘을 낸 것이다. 1933년 미국의 대 공항시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 선언하고 ‘뉴딜정책’으로 공항을 극복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이다.
.능력 (Power, δυνάμεως, dynameōs)
‘능력’이란 사도행전 1:8의 ‘권능’과 같다. 헬라어로는 ‘두나미스’인데 영어는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번역되어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뜻한다. 능력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준 이 능력은 개인을 자랑하거나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다.
.사랑(Love, ἀγάπης, agapēs)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사랑’(agape)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내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 절제(Self-discipline, σωφρονισμοῦ. sōphronismou)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마지막 열매가 ‘절제’(Self-control)이다.(갈 5:22-23) 8가지 다 잘하더라도 절제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니 절제는 ‘화룡점정’과 같은 열매이다. 절제란 자기통제(self-control)를 말한다. 인간의 타락은 교만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어려울 때보다 잘 나갈 때 더 조심해야 한다. 박해보다 유혹에 조심해야 한다. 창세기 3장에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질 것이라는 교만에 불을 지폈고, 11장에 인간이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겠다는 교만에서 기인한다. 어려울 때도 기도해야 하겠지만, 잘 나갈 때는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나 염려하는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 빌립보서 4:13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는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