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아버지와 탕자들 (Father’s Day)
누가복음 15장은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으로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왔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며 원망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3가지 비유로 말씀하셨다. 4-7절까지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8-10절까지는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11-32절까지는 탕자의 비유. 앞에 나오는 두 개의 짧은 비유는 세 번째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위한 일종의 전주곡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3가지 비유는 점점 강도가 심화됨을 볼 수 있다. 100마리의 양에서 1마리, 10개의 동전에서 1개 그리고 2명의 형제 중에 한 명. 3가지 비유는 구조적으로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주인이 뭔가를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것을 찾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3가지 비유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탕자의 비유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임을 알 수 있다.
집을 나간 탕자
인생의 고민은 선택에 있다. 어제의 선택이 오늘의 나이고,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내가 되기 때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이란 시가 있다.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먼 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 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대부분의 사람은 살았던 삶을 후회하며 인생을 마감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Life is C (Choice,선택) between B (Birth, 출생) and D (Death, 죽음)”라고 했다. 우리는 매일 작고 큰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내가 무언가 선택하지만 내 생각과 관계없이 선택할 때가 너무 많다. 임종 전에 인간이 가장 후회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죽음을 앞에 섰을 때 가장 솔직하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내일 죽는다고 가정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할지가 분명해 진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분깃을 달라고 해서 세상으로 갔다. 그는 재산을 탕진하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다. 돼지를 치면서 돼지의 먹는 쥐염열매도 먹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며 통곡한다.(17절) 이것은 후회이고, 후회는 과거지향적인 단어이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20절) 이것은 회개이고, 회개는 미래지향적인 단어이다. 죄란 ‘하마르티아’ (Hamartia)로 ‘과녁에서 빗나가다’이다. 회개는 ‘메타노이아’ (Metanoia)로 ‘방향을 바꾸다, 생각을 바꾸다’로,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다’란 뜻이다. 후회는 인생을 부패하게 하고, 회개는 인생을 발효하게 한다.
기다리는 아버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란 작품이 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17세기의 최고의 화가 중 한사람이다. 그는 명암으로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심리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빛의 화가’이다. 사진에 ‘렘브란트 조명’이란 용어가 있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기법이다. 사진 (Photography)은 Photo (빛)+ Graphy (그림)의 합성어로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초점 잃은 시선을 속에서 아들을 기다리며 보냈던 인고의 세월을 읽을 수 있다.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는 두 손에서 아버지의 ‘엄부자모’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왼손은 굵은 남자의 손이고 오른손은 매끈한 여자의 손이다. 손에 빛이 모여 있고 두 사람의 시선도 아버지의 손에 쏠려 있다. 아버지의 손은 사랑의 손이고 용서의 손이다. 아들의 머리는 죄수와 같이 삭발했고, 찢어진 옷에,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오른발은 밑창이 뜯어진 신발로 겨우 감싸고 있다. 아버지 품에 안긴 탕자는 통곡한다.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일꾼의 하나로 써주십시오” 아버지는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 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와 잡아서 잔치를 벌였다.
집에 있는 탕자
밭에 나갔던 큰 아들은 돌아오다가 집 근처에 왔을 때 풍악 소리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종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인께서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되었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하고 대답하자 그는 화를 내며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누가 가장 기뻐했으며, 누가 가장 싫어했을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 가장 싫어한 것은 ‘살진 송아지’
아버지가 들어오라고 했지만, 오히려 아버지에게 따진다. “제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왔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는데도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놀아나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없애 버린 동생이 돌아왔다고 아버지는 살찐 송아지까지 잡았습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므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는 세리와 죄인들을 원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세리와 죄인은 둘째 아들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첫째 아들이다. 둘째 아들은 죄인이라 생각하는 죄인이고, 첫째 아들은 의인이라 생각하는 죄인이다. 둘째 아들은 용서받은 죄인이고, 첫째 아들은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 은혜이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용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시란 무엇인가? (What is Revelation?)
타종교는 ‘자력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종교’이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본질적인 차이는 타종교는 ‘자기의 의’로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믿고 행위중심의 종교생활을 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고 믿음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 그리스도인지만 ‘자기 의’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한다면,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2-4) ‘자기 의’란 행위의 의이고, ‘하나님의 의’란 믿음의 의이다.
1. 계시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Omnipotent), 전지하시고 (Omniscient), 편재 (Omnipresent)하시다. 하나님은 시공간의 한계가 없으나, 인간은 시공간의 한계가 있다. 한계적인 존재가 한계가 없는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계시’는 ‘베일을 벗기다’,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 ‘가려져 있는 어떤 것의 덮개를 연다’ 등의 의미다. ‘계시’ (revelation)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창조주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계시는 ‘일반계시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초자연계시)’로 나눌 수 있다. 일반계시는 자연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이고, 특별계시는 초자연적인 계시로 성경, 꿈, 환상, 이적, 예언 등이다.
2. 일반계시 (자연계시) – 롬 1:20, 시 19:1-2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다음 구절부터는 머리로 이해될지 모르지만 가슴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우연히 빅뱅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경륜 가운데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자연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숨결을 느껴야 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진화론 대 창조론’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창조론 대 진화론’ 논쟁의 본질은 ‘과학’과 ‘믿음’ 혹은 ‘과학’과 ‘비과학’의 대결이 아니다. 과학이란 관찰과 실험 그리고 검증을 통해 개관적 결과를 도출할 때 일컫는 말인데, 둘 다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세계관’의 충돌이다. 세계관이란 세상을 보는 관점이다. 진화론자는 무신론자이고, 창조론자는 유신론자이다. 무신론자는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라, 신이 없다는 것을 믿는 자이다.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갖고 산다. 희망이란 내일은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고, 절망이란 것은 내일은 안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파스칼의 팡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천국과 지옥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현명한가?” 우리의 인생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물론 천국이 있음에 투자하는 사람이 현명하다. 천국이 없다면 어차피 둘 다 가지 못하지만, 천국이 있다면 신자만 가기 때문이다.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도 깊이 살펴보면 인간이 생태계의 질서를 침범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같이 공존해야 할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다 보니 결국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는 인간 마음대로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땅을 관리하라는 ‘문화명령’ (Cultural Mandate)이다.
3. 특별계시 (초자연계시) – 히 1:1-2, 딤후 3:14-17, 요 20:31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 특별계시의 궁극적인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1-2)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여러 방식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셨고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셨고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고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기적들을 행하셨다. 또 그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 중에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계시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책이다. 구약은 오실 예수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요한은 성경의 기록 목적을 밝히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노출, 자기 소개, 자기 표현이다. 일반계시인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특별계시인 성경이 우리 발의 등이 되고, 우리 길의 빛이 되기를 바란다.
환갑은 환골탈태의 해 (2019년 1월 글)
‘인생은 60부터’란 말이 있다. 과거에 환갑은 ‘장수’ (長壽)를 의미하며 중요하게 여겼다. 환갑의 생일잔치를 ‘회갑연’이라 한다. 회갑연에서는 자손들과 일가친척,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장수를 축하하였다. 요즘에 ‘회갑연’을 여는 사람이 있다면 축하 대신 욕을 먹을 것이다. 백세시대에 돌입하면서 ‘환갑’은 오래 살았다고 축하할 때가 아니라,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환골탈태’해야 할 때이다. ‘남은 삶은 어떻게 살 것인가’ 새롭게 옷깃을 여밀 때이다.
환골탈태의 60년
환골탈태 (換骨奪胎)는 ‘뼈를 바꾸고, 태를 빼낸다’는 의미이다. 기존의 삶의 방식, 과거의 타성을 과감히 버리고 고통스럽지만 ‘변화와 개혁’을 통해 새롭게 살겠다는 뜻이다. ‘노인’이 될 것인가, ‘어르신’이 될 것인가는 ’60의 선택’에 달려있다. ‘꼰대’란 말이 있다.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나,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형된 속어이다.
60은 ‘노인과 어르신’의 갈림길이다. 노인은 늙은 사람이고, 어르신은 존경받는 사람이다. 노인은 나이만 먹은 사람이고, 어르신은 나이 값을 하는 사람이다. 노인은 배움이 멈춘 사람이고, 어르신은 배우는 사람이다. 인생의 비극은 짧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데 있다. 회개는 인생을 발효시키지만, 후회는 인생을 부패시킨다.
구세군 사관 30년
1989년 6월, 미국에서 구세군 사관으로 임관하였다. 첫 번째 임지는 부산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떠나기 며칠 전 구세군 본부의 급한 호출을 받았다. 부산이 아닌 청주로 가라고 했다. 서청주 교회의 사관이 일신상의 문제로 옷을 벗고, 구세군 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로교회를 개척했다. 청주에 내려가니 교인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1년 선배였고, 목회도 아주 잘했다. 교인들은 구세군교회와 장로교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나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목회 30년을 돌아보면, 가장 순수하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때인 것 같다.청주에서 목회하는 동안 그 분은 계속해서 혹독한 기도 훈련을 시켰다.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감사한다. 지금은 어디서 사역하는지 모르지만 언제 만나면 꼭 식사대접을 하고 싶다.
1992년 합덕교회로 발령을 받고 청주를 떠났다. 서울에만 살아서 지방을 잘 알지 못했다. 충북 청주와 충남 합덕에서 목회하면서 ‘충청도 체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꿈같은 합덕 생활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구세군 본부에서 비상전근 명령이 떨어졌다. 미국 사관이 한국 서기장관으로 오는데 통역할 사관이 필요했다. 1995년부터 구세군 본부에서 통역과 번역을 하며, 영어가 객지에서 고생하던 중, 한국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으니 호주로 가라는 전근 명령이 떨어졌다.
구세군 라이드 교회 개척
1997년 12월 1일부터 시드니한인교회를 섬겼다. 2004년에 호주 구세군으로 발령을 받아, 2018년까지 홍보부와 사회부에서 ‘다문화 선교’와 ‘수용소 담당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역했다. 시드니 서부에서 시작한 다문화, 다민족, 다종교의 열풍이 북부까지 몰아쳤다. 호주 구세군은 시드니 북부지역인 ‘라이드’ (Ryde)에 한인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정했다. 2019년 개척사관으로 나와 집사람을 임명했다. 드디어 30년 전에 품었던 개척사관의 꿈을 한국이 아닌 시드니에서 펼치게 되었다.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에 교회를 개척한다고 하니 사람들의 반응이 각각이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동료 목회자들이 있는가 하면, 우려와 염려를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구세군 본부에서 사역할 때 “사관님은 언제 목회 하세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제 그분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돼서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린다. 그 많은 교회 중 ‘또 하나의 교회’로 전락하면 어떡하나 심히 걱정이 된다.
1988년 12월 18일, 구세군 시카고 한인교회가 창립되었다. 그때 나는 사관학생으로 교회 개척을 도왔다. 30년이 지난 지금 개척 사관이 되었다. 두렵지만 기대된다. 떨리지만 흥분된다. 잠자던 ‘복음의 야성’이 꿈틀거린다.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교회’가 될 것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해본다. (김환기 사관 : 0432 765 722)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