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아프가니스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아프가니스탄은 전략적인 위치로 인해 수많은 제국들이 점령한 곳이다. 대표적인 정복 세력으로는 알렉산더 대왕, 이슬람 제국, 몽골 제국, 대영제국, 소련, 그리고 미국에 이른다. 그러나 어느 제국도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지 못하고 모두 쫓겨나게 되어 ‘제국의 무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세기 부동항을 찾아 남진정책을 펼치는 러시아와 영국령인 인도의 안보를 위해 지정학적 요충지인 아프가니스탄 확보에 나선 영국이 ‘그레이트 게임’을 벌였다. 결국 러시아가 패배하고 영국이 승리하지만 나중에는 러시아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새로 태어난 소련이 영국의 패권을 뛰어넘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1907년 영러협상을 통해 영국과 러시아가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 1919년 왕국으로 독립한 아프가니스탄은 1933년 모하마드 자히르 샤 국왕이 즉위하면서 정치, 경제적으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아프간은 내부적으로 파슈툰, 하자라, 타지크 등 아프간 내 여러 민족들의 갈등과 왕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자는 공화파와 사회주의파,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파 등으로 나뉘어져 내부 분열과 내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1965년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되어 있었던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등 아프간 국내 좌익 인사들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라는 정당을 세웠고 이들은 농민, 노동자, 극빈층 등의 지지를 키워나가 아프가니스탄 최대 좌익 정당으로 성장했다. 대통령이 된 ‘다우드 칸’은 장기 독재를 꿈꾸며 점차 다른 세력들을 탄압해 나갔는데, 공산주의 세력과 아흐마드 샤 마수드, 부르하누딘 라바니 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동시에 탄압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했다. 이에 그에 독재에 대한 아프간 내부의 불만이 거세어져 갔다. 1978년 4월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격, 다우드 칸 일가를 몰살시킨 후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던 인민민주당 당원들을 석방시켜 새 정부를 구성하게 했다. 4월 30일 인민민주당의 지도자였던 ‘누르 타라키’가 새 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하여 인민민주당 1당 독재 국가인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서 아프가니스탄은 친소련 공산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내전으로 정국이 어려움에 빠지면서 1979년 소련이 아프카니스탄을 정복하게 된다. 소련이 점령하자 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반군세력을 미국이 지원하였다. 소련은 1979년부터 1989년 10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철수하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에 돌입한다.
이때 1994년 탈레반이 등장하고 1996년 정권을 잡는다. 이들은 강력한 이슬람 종교법인 ‘샤리아법’으로 통치했다. 샤리아법은 이론적으로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담은 ‘하디스’, 이슬람 공동체 내부의 합의인 ‘이즈마’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탈레반은 세계문화유산인 석불을 파괴하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졌다. 2001년 9.11사태 벌어지고,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빈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 숨었다는 정보가 포착되고, 미국은 그를 양도할 것은 요구하였지만 이를 거부하자 같은 해에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고 점령한다. 이때부터 미국은 2001년부터 2021년까지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붙는 격으로 아무런 소득이 없자 철수를 결정하고 드디어 2021년 8월 31일에 철수작전을 마쳤다.
표면적으로 미국의 힘없는 패배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긴장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영국은 러시아와 ‘Great Game’을 종식하면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기 위하여 ‘와칸 회랑’이라는 비정상적인 땅을 국경으로 만들었다. ‘와칸회랑’은 중국의 ‘신장 위구르’와 맞닥뜨리고 있다. 위구르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 동부에 타림 분지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크 계통의 민족이다. 신장 위그루 자치구는 천만이 넘는 수니파 무슬림들이 사는 지역으로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의 탄압을 받고 있다. 탈레반도 수니파 무슬림이다. 지금은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세를 낮추고 있지만, 언젠가는 신장 위그루 족의 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높일 날이 올 것이다. 중국가 신장 지역의 독립을 용납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자치지구로 이어질 ‘도미노 현상’ 때문이다. 중국은 지방 행정을 4계층의 수직 구조로 나누어 통치하고 있다. 최상층을 제1급 행정구역이라고 부르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광대한 영역을 22개의 성, 5개의 자치구, 4개의 직할시에 수평 분할하고 있다. 5개의 자치구 중에 티벳도 있다. 이중 하나의 자치구가 독립을 한다면 당연히 다른 자치구에서도 같은 독립 운동이 일어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중국은 지금 발 빠르게 탈레반의 재건을 돕겠다고 하고 있다. 탈레반은 자신들의 발등의 불을 꺼야 하기에 받아들이겠지만, 이들은 알라를 중심을 뭉친 원리주의 종교집단이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이며 위구루를 탄압하고 있다. 과연,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이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다윗과 압살롬
오늘은 Father’s Day이다. 1956년 5월 8일 한국은 ‘어머니의 날’을 정하여 지키다가, 1973년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이름을 바꾸어 부모 모두에게 감사하는 날로 정하고 있다. 호주는 5월의 2번째 주일을 Mother’s Day, 9월의 1번째 주일을 Father’s Day로 지키고 있다. 한국 사람에게는 나이가 곧 서열입니다. ‘넘버 3’라는 조폭 영화가 있다. 딸 아이가 문제가 있어서 부모가 학교에 불려갔는데 조폭 어버지가 선생님에게 나이를 물더니, 나이가 어리다며 동생 취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교통사고 후 말다툼을 하다가 열이 받으면 “너 몇 살이야” 라고 묻는다. 가정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빠가 1위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서열이 점점 밀려, 지금은 1위는 엄마, 2위는 자녀, 3위는 아빠. 요즘은 반려동물이게도 밀려서 꼴지가 되었다고 한다. Father’s Day를 즈음하여 아빠의 위치를 회복해야 할 것 같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별히 다윗과 셋째 아들인 압살롬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윗과 압살롬에 관한 이야기는 삼하 13장부터 19장까지 이어진다. 다윗이 자녀들에 관하여 삼하 3장과 역상 3장에 기록되어 있다.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은 이러하니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다니엘이라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역상3:1-2) 3절과 4절까지 아들의 이름이 언급되다가 5절이 돼서야 예루살렘에서 난 아들 중에 솔로몬의 이름이 등장한다. 서열로 보면 솔로몬은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무엘하 3장 3절에는 둘째 아들을 ‘길르압’이라고 했다. 둘째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어릴 때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삼하 14:25-26절에 압살롬의 용모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압살롬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고 더구나 머리털로 수려했다. 당시 머리털은 힘과 미의 상징이었다. 힘이 강한 자는 머리털이 많고, 빨리 자란다고 생각했다. 1년 자란 머리털의 무게인 200세겔은 약 2.3Kg이다. 보통 사람의 머리털은 1년에 500g를 넘지 못한다. 머리털은 압살롬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아는가? 자랑거리가 올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압살롬은 그가 자랑하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죽게 된다.
이솝 우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 사슴이 목이 말라 호숫가를 찾았습니다. 물을 마시다 호수에 비친 그림자를 본 사슴은 여러 갈래로 힘차게 뻗어 있는 자신의 뿔에 감탄했습니다. “내 뿔은 정말 아름답단 말이야! 어쩜 이렇게 멋질까?” 그러다 자신의 가느다란 다리를 보고는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 다리는 왜 이렇게 가늘고 못 생겼지? 이런 다리는 없는 것만 못해.” 그때, 사슴은 멀리서 사자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란 사슴은 정신없이 숲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사슴은 날렵한 다리 덕분에 사자보다 더 빨리 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사자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큰 뿔이 그만 나무에 걸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슴은 한탄하며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못마땅하게 여기던 다리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자랑으로 여기던 뿔 떄문에 결국 목숨을 잃는구나!”
삼하 13장부터 19장까지 압살롬에 대한 이야기이다. 삼하 13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삼하13:1-2)
암논에게는 요나답이란 친구가 있었다. 요나답은 암논의 고민을 듣고 다말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 암논이 자신의 누이 다말을 강간하고 버리자, 압살롬은 복수의 칼을 간다. 2년이 지나고 에브라임 근처 바알하솔에서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부하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했다. 그리고 2년 동안 그술의 왕 암미훗의 아들 탈마이에게로 도망했다가, 요압의 권유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하지만, 다윗은 2년간 압살롬을 무시하고 방치한다.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고, 요압의 중재로 4년이 지나서야 다윗을 만난다.
그 후 압살롬은 궁 안에서 멀리서 재판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 4년이 지나고 서약을 지켜야 한다며 헤브론으로 간다.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반역의 깃발을 높이 든다. 다윗의 책사였던 아히도벨, 군사령관 아마시아 등을 포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압살롬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 다윗은 요르단 강을 건너 마하나임 지역으로 피신했다. 다윗은 전열을 정비하고 요압에게 절대로 압살롬은 죽이지 말라고 부탁한다. 요압은 압살롬의 군대를 물리치고 압살롬을 추격한다. 압살롬은 도망가다가 상수리나무에 머리털이 걸려 매달렸다. 한 병사에 보고로 받고 달려온 요압은 다윗의 명을 어기고 창으로 찔러 압살롬을 죽였다. 다윗은 전령병인 구스 사람에게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은 통곡한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속담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부모와 자식 사랑에는 온도 차이가 있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할 수는 없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과 같다. 동물도 자기 새끼기 위험에 빠졌을 때는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을 본다. 치사랑이란 올리 사랑이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지 않겠냐마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할 수는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십계명의 1-4계명은 대신관계이고, 5-10계명은 대인관계이다. 대인관계의 첫 번째가 부모공경이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첫째란 단어인 ‘프로테’(πρώτη)는 단순히 순서로서 첫 번째가 아니라,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첫째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나머지 계명도 잘 지킨다. 하나님은 부모를 통해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고,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이로써 우리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말씀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아일랜드를 알면 식민지 (植民地)가 보인다
아일랜드는 싱그러운 녹색의 풍경이 끝없이 펼쳐지는 섬나라이다.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로부터 지속적인 침략과 수탈, 식민지배를 당했다.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인을 ‘하얀 흑인'(White Negro)으로 멸시했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는 마치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유사하다. 지정학적으로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아주 먼 나라이다.
1923년부터 영국과 아일랜드는 ‘공동여행구역'(Common Travel Area)을 결성하여 입국심사 없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했다. 두 나라는 EU의 회원국가이지만 ‘셍켄 조약'(Schengen Agreement)에는 가입하지 않아 EU 국가로 여행 가려면 반드시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 ‘셍켄 조약’이란 유럽에서 해당 조약 가입국 사이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고 범죄수사도 협조하자는 조약이다. 영국은 솅겐 조약에 가입할 경우 유럽으로 입국한 불법체류자의 최종목적지가 영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가입하지 않았다.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와 연결이 되어 있어, 자신들만 독자적으로 가입할 수가 없었다.
식민 (植民)
植木이란 ‘나무를 심는다’란 뜻이고, 植民이란 ‘사람을 심는다’란 뜻이다. ‘식민지 정책’이란 땅을 점령하고, 자국민을 이주시켜 자신들의 땅으로 만드는 정책이다.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아일랜드를 점령하여 식민지 국가로 전락되었다.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이 계속되고 잉글랜드 인이 어려움을 당하자, ‘크롬웰’은 대대적으로 아일랜드를 공격하고 북아일랜드에 개신교 신자들을 이주시켰다.
이후로 잉글랜드의 차별정책으로 아일랜드인들은 말 할 수 없는 수난을 겪게 된다. 종교적으로도 성공회로 개종하지 않는 가톨릭 사람에게 많은 불이익을 주었다. 더블린에는 유럽을 대표하는 명문대학 중의 하나인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가 있다. 1592년 엘리자베스 1세의 칙령에 의해 식민지, 관료, 성공회 자녀의 고등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다. 18세기 가톨릭 차별 철폐가 진행되면서, 1793년부터는 가톨릭교도의 입학도 허용되었다.
학교 가이드를 맡은 여학생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얼마 전까지 라틴어가 필수 과목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졸업식 만큼은 라틴어로 진행합니다. 졸업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 졸업장을 수여하는데, 성적순으로 부릅니다. 자연스럽게 누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누가 꼴찌인 줄 알게 됩니다. 공개적으로 창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졸업 시즌이 되면 학생들이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
이민 (移民)
1801년 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정식 합병이 되었고, 1845년 ‘대기근’이 일어났다. 1842년 미국 동부의 감자 재배는 대규모의 ‘감자역병’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다. 이 역병은 순식간에 북미 전역으로 확산된 뒤 다시 배를 통해 전 유럽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1845년 여름의 아일랜드는 유난히 비가 잦아 감자 역병이 돌기에 최적인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아일랜드 섬의 기후 자체가 극히 불안정하여 현대 기술 없이는 곡물 경작이 극히 어려웠기 때문에 인구가 불어난 아일랜드인은 감자가 주식이었다. 주식인 감자가 병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감자역병’은 아일랜드인에게는 한마디로 ‘대재앙’이었다. 북아일랜드에서 만난 연세가 많은 택시기사는 잉글랜드인이 의도적으로 퍼트린 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잉글랜드라면 치를 떨며 잉글랜드인이 아일랜드인을 박해한 장소만 보여 주었다.
대기근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나 땅이 없던 사람들을 힘들게 하였다. 이들은 자국에서 살수 없기에 미국, 호주, 캐나다 등으로 이민을 간다. 1820년부터 1860년까지 1,956,557명의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으로 떠났으며, 이들의 75%는 아일랜드의 대기근 이후에 들어왔다. 1860년 이후에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주로 가족들과의 재통합으로 인해 1900년에 지속적으로 들어왔으며, 대부분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이전에 설립한 공업 도시들에 정착하였다. 아일랜드인이 정착한 지역 중에 ‘Brooklyn’이 있다. ‘Brooklyn’이란 영화가 있다. 1950년대 배경으로, 아일랜드 여인이 ‘Brooklyn’에 정착하면서 일어난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숫자가 3,467만 명이다.
아일랜드 이민은 호주도 예외는 아니다. 초기 아일랜드 사람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좀도둑질을 했거나, 독립운동을 한 정치범들이 죄수의 신분으로 왔다. 형기가 끝난 후, 혹은 사면을 통해 자유인의 신분을 되찾으면서 도시 노동자나 소작농으로 전락해 호주 시민사회의 하층을 구성하면서, 지배층을 형성하던 앵글로 색슨계와 대립하게 된다. 후에 1850년 ‘골드러시’로 자발적으로 이주해온 노동자도 있고, 아일랜드의 대기근으로 이주해온 사람들도 있다. 2011년 통계에 의하면 호주에 거주하는 아일랜드 이민자는 2,087,800 명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호주에 거주하는 아이리시 후손들의 숫자는 호주 인구의 30%가 넘는다고 한다. 3월 17일은 ‘성 패트릭 기념일'(St. Patrick’s Day)이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녹색 옷을 입고, 녹색 깃발을 흔들며 시티에서 퍼레이드를 한다.
독립 (獨立)
1916년 아일랜드에는 ‘부활절 봉기’가 있었다. 1919년에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해와 유사하다. 부활절 봉기는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의 주도하에 무력을 통해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일어났다. 봉기는 비밀조직인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에 의해 계획되었으며, 1916년 부활절 주간의 월요일인 4월 24일부터 4월 30일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500명이 사망하고 2000여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봉기는 혁명정부가 1주일간 수도를 장악하는 선에서 끝났지만, 1922년 아일랜드공화국을 실현하는 기점이 됐다는 점에서 아일랜드인에게 의미가 크다.
본격적인 아일랜드 독립 전쟁 (Irish War of Independence)은 1919년 1월 21일부터 2년 반 동안 계속되었고, 1921년 7월 11일 휴전하였다. 휴전 협정 끝에 1921년 12월 6일 영국 런던에서 휴전협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아일랜드는 대영제국의 지배 하에서의 자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조약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서 ‘아일랜드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 중 독립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마이클 콜린스’는 반대파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는 ‘김구’와 같은 인물이다. 내전의 결과 아일랜드는 ‘남과 북’으로 분리되었고, ‘북아일랜드’는 영국으로 잔류하고, ‘남아일랜드’ 26주로 구성된 아일랜드는 자유국이 출범하였다.
1937년, 아일랜드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헌법에서 아일랜드는 자신들의 공식명칭을 아일랜드어인 에이레 (Éire)로 명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일랜드는 중립국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만여 명의 의용군이 영국군에 지원하였으며, 정부 역시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였으나 연합군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1949년에는 아일랜드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영연방에서 탈퇴하였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