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1)
2020년 3월 11일부로 WHO(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를 팬데믹(Pandemic) 전염병으로 선언하고 7월 가깝게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초긴장상태이다. 미국은 다음 달이 대선인데 대선후보인 트럼프 대통령 부부가 지난 목요일 확진자로 판정이 되면서 모든 유세 일정을 취소하였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작될 때 두 가지 질문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바이러스와 세균(박테리아)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이러스는 생명인가 아닌가? 호주에 사는 분자 생물학자인 양지연 박사를 만나 의문을 풀렸다. 세균은 세포가 있어 스스로 번식, 복제 등을 할 수 있어 생물이고, 박테리아는 유전물질을 갖고 있지만 세포가 없는 단백질로 싸여 있는 단순물질이나, 살아 있는 세포를 가진 숙주에서 생명활동을 하는 전염성 감염원이기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 존재(반생물)이다. 바이러스는 ‘살았다, 죽었다’는 표현을 쓸 수 없고 ‘활성화, 비활성화’란 용어를 사용한다. 세균은 유전물질을 DNA에 저장하지만, 바이러스는 DNA 바이러스도 있고, RNA 바이러스도 있다. RNA 바이러스는 DNA 바이러스보다 돌연변이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RNA 바이러스의 질병은 세균 질병이나 DNA 바이러스 질병보다 백신이나 치료제를 개발하기가 어렵다.
요한복음의 중심주제는 ‘생명’이다. 생명이란 생물학적 생명인 ‘Bios’가 아니라, 영적인 생명인 ‘Zoe’를 뜻한다. 생명(Zoe)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적 개념이다. 관계의 단절은 죽음이고, 관계의 회복은 생명이다. 계시록의 사대 교회는 살았다고 주장하지만 죽은 교회라고 했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았지만 영적으로는 죽었다는 뜻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Zoe)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요한복음에는 ‘생명’이 36번, ‘영생’이 37번 나오는데 ‘구원’과 같은 의미이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말한다. 이중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한다.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이란 공통적인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기술했다는 의미다. 공관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에 역사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네 가지 형상(겔1:10)과 계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계4:7)의 특성을 근거로 하여 마태복음은 사자, 마가복음은 소, 누가복음은 사람,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라고 한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의 표적과 7번의 자기선언이 나온다. 요한복음에는 ‘기적’이라는 단어 대신 ‘표적’이라고 했다. 기적이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표적(Sign)은 사건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임’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7가지 표적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임’을 밝히고, 7가지 자기선언을 통해서 ‘하나님’임을 선언하였다. 7가지 자기 선언은 출애굽기 3장에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질문을 했을 때 “I am who I am.”(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 출3:14)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다” (I am~)의 히브리어 ‘야훼’(YHWH)를 헬라어 ‘에고 에이미’로 번역했다.
1) 생명의 떡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남자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있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5). 오병이어의 기적사건은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 가운데 유일하게 복음서에 네 번 등장한다. 5병 2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따라왔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떡을 채워 주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따라왔으나, 주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 예수를 통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생명을 주기 위하여 온 것임을 말씀하셨다. 광야에서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의 이야기를 하자, 예수님은 모세가 준 것은 육신의 생명을 위한 것이지만, 내가 주는 것은 영생을 위한 것이라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그 ‘생명의 떡’임을 밝혔다. ‘육신의 떡’은 입으로 먹지만 ‘생명의 떡’은 믿음으로 먹는다.
떡이란 영어 성경으로 Bread이다. 빵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번역일 것 같은데, 우리 정서에 맞게 떡이라고 했다. 사실 서양 사람들은 쫄깃쫄깃한 떡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떡집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 떡 중에 하나의 떡이 아니라 ‘바로 그 유일한 떡’이라는 의미에서 The라는 정관사를 붙였다.
2) 세상의 빛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본문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3대 절기 때에는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농경사회의 절기는 추수와 관계가 있다. 이스라엘은 일 년에 세 번 추수한다. 보리, 밀, 과실이다. 이스라엘의 추수기는 역사적 사건과 어우러져 있다. 보리를 추수하는 ‘무교절’은 출애굽한 ‘유월절(Passover)’, 밀을 추수하는 ‘맥추절’은 율법을 받은 ‘오순절(Pentecost)’, 과실을 추수하는 ‘수장절’은 광야생활을 기념하는 ‘장막절(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이다. 명절의 지키는 의미는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추수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신 하나님과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키는 ‘추석’은 ‘수장절’과 같은 날이다. 올해 한국에서는 10월 1일을 ‘추석명절’로 지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로, 일 년 중 가장 먹을 것이 풍요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가을은 하늘은 높고 말도 살찐다고 해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한다. 시드니는 봄이지만, 달은 여전히 보름달이다. 올해는 호주 모리스 총리가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를 한국말로 하고 축하 메시지를 남겼다. 중국은 중추절(中秋節)이라고 한다. 영어로 ‘Mid-Autumn Moon Festival’이라고 한다. 가을의 중간에 있는 절기이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후에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다그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을 쓰신다. 다시 재촉하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시작 젊은이까지 모두 떠난다. 예수님은 ‘너를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다.
이 사건이 있으신 후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다. 요한복음에는 생명과 빛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 1: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예수께서 친히 ‘세상의 빛’이 되시고 예수 안에서 ‘생명의 빛’을 얻는 사람들은 ‘세상이 빛’이 되라고 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라”(마 5:14) 우리는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이다. 빛을 받아야만 빛을 발할 수 있는 반사체이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의 빛이 되는 반사체이다.
3) 양의 문 (요 10:7)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성서에는 사람을 양으로 비유하여 설명한 곳이 몇군데 있다. 대표적인 곳은 시편 23편이다. 시편 23편 읽노라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을 상상하게 된다. 넓은 초원이 있고, 이른 아침에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목장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 1마리의 찾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는 목자의 이야기도 있다. 마태복음 25장은 심판장인데 오른 쪽에는 양, 왼쪽에는 염소의 두고 마지막 심판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기준으로 오른 쪽의 양은 칭찬을 받으며 영광의 보좌에 앉고, 왼쪽의 염소는 영원한 불구덩이로 던져진다.
양은 시력도 나쁘고, 방어력도 없고, 방향 감각도 없고, 잘 속고, 잘 넘어진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인간의 시력에 빗대어 말한다면, 양은 마이너스 10 디옵터 정도의 안경을 써야할 만큼 시력이 나쁘다고 한다. 1-2 M 앞에 있는 사물도 분간할 수 없다. 하지만 시력이 약한 반면 양의 청력은 굉장히 발달되었다. 양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할 때 계속해서 ‘메에’ 소리를 내는데, 이는 무리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한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양의 우리’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밤새 춥지 않도록 보호하고, 밤중에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호주나 뉴질랜드와 같은 곳에는 양의 우리가 없다. 그냥 방목하여 키운다. 밤에도 그렇게 춥지 않고, 양들을 위협할 야생동물 또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목자는 밤이 되면 양들을 우리 안으로 넣는다. 양이 우리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양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문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문 밖에 있는 양과 문 안에 있는 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양의 문이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두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 밖(Out of Christ)에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자기선언의 7가지 중 처음 3가지,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3가지 선언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생명의 떡, 세상이 빛 곧 생명의 빛이라고 했고, ‘양의 문’의 결론은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이다. 생명은 구원이고, 풍성한 생명은 성결이다. 생명은 성령세례이고 풍성한 생명은 성령충만이다. 성서를 기록한 목적을 말씀드리며 결론을 맺으려고 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이다. 성경을 읽을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고 더욱더 풍성하게 얻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속도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 보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 사람의 외모도 변하고, 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실상은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어떻게 배운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실상은 배운 사람이 더 지능적으로 힘들게 한다.
세상에는 참 이상한 것들이 많은데 그중에 가장 이상한 것은 사람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엔 어른 되기를 갈망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버린 다음,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번돈을 병원과 약국에 바친다.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 버리고, 결국 미래도 현재도 다 놓쳐 버린다. 영원히 살것처럼 아둥바둥 살았는데, 언제 죽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본체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시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한 3가지 단어가 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다.
1. 도우시는 하나님 – 에벤에젤 (삼상 7:12)
에벤에셀은 ‘에벤(돌) + ‘에셀(도움)’의 합성어로 ‘돕는 돌’이란 뜻한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7:12)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겼다가, 그들이 자진 반납하여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있었던 때이다. 백성들이 여호와를 사모하기 시작하자 사무엘은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금식하며 회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침공을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미스바에 계속 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큰 우뢰 발하여 그들을 혼돈케 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곳에 에벤에셀의 승전비를 세웠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인함이라는 신앙고백이다.
다니엘서 2장에 ‘뜨인 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느브갓네살이 꿈을 꾸고 방백에게 꿈을 이야기하고, 해몽하라고 명령했다. 방백들은 꿈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왕은 이야기하지 않고 그것까지 맞추고, 의미를 설명하지 않으며 모두 죽이겠다고 했다. 방백들은 포로로 잡혀서 왕궁에서 교육을 받은 다니엘을 찾아갔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이 꾸었던 금신상의 꿈을 이야기하고, 해몽을 했다. ‘머리는 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 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 그 발은 철과 진흙으로 된 금신상이다. 그런데 갑자기 뜨인 돌’이 나타나서 금신상을 순식간에 부숴버리고 금신상은 겨와 바람과 같이 날라가고 돌이 태산이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되었다. 금신상은 바벨론이후의 제국이고 뜨인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도 베드로전서 2장 4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산 돌’이라고 했다.
호주에 ‘에벤에젤 선교회’가 선교회가 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여 ‘한인장애인복지회’를 설립하고, 지난 금요일 ‘이전확장기념예배’를 드렸다. 에벤에젤 차민정 대표는 매순간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간증하였다. 6월 초에 이전 사무실에서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청소까지 마치고 키를 반납했다. 그날 밤 누군가 사무실 빌딩 1 층에 불을 질렀다. 만약 하루라도 늦게 나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수 없음을 고백했다.
2. 함께하는 하나님 – 임마누엘 (마 1:23)
임마누엘은 “임(함께)+마누(우리)+엘(하나님)”의 합성어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소명을 받고 두려워하는 모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출3:12) 하셨고, 모세의 대권을 받은 여호수아에게도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수1:9)고 말씀하셨다. 모세와 함께하시고,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28장)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어느날 목사님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말씀을 듣고, 할머니는 은행나무가 앞마당에 있어 여러가지로 번거로운 뒷마당으로 옮겨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앞마당에 나가서 보니 은행나무가 그대로 있었다. 목사님에게 따졌다. 목사님이 질문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어디로 가셨습니까?” “앞마당이요.” “의심을 하셨군요. 기도를 했으면 뒷마당으로 가셔야죠. 그래서 안 들어 주신 겁니다.”
3. 준비하는 하나님 – 여호와 이레 (창 22:14)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하나님)+이레(준비하심)”의 합성어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14)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순종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은 얼마나 급했던지 아브라함의 이름을 거듭 부르시며 중지 시키시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칭찬하셨다. 아브라함이 주위를 돌아보니 수풀에 뿔이 걸린 수양이 있어, 수양을 잡아 번제로 드렸다.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했다.
신명기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출애굽 2세대들에게한 모세의 3번의 설교이다.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첫번째 하나님을 기억하고(1-4), 두 번째 하나님의 율법을 교육하고(5-26), 세 번째 가나안 땅에서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라(27-34)는 내용이다. 첫 번째 설교는 에벤에셀의 하나님, 두 번째 설교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세 번째 설교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의 앞길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찰스 다윈과 시드니 블루마운틴
블루마운틴 세자매 봉(Three Sisters)에 전설이 있다. 3자매가 있었다. 카툼바 부족으로 자미슨 계곡에 살고 있는 3 자매가 있었다. 그녀들은 이웃 네피안 부족의 3명의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부족법에 의해서 결혼할 수 없었다. 3 청년은 부족법을 어기고, 3 자매를 강제로 데려오기로 결심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카툼바 마술사는 3자매를 보호하기 위해, 주문을 걸어 잠시 바위로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전쟁 중 마술사가 죽어 마법을 풀지 못해 3자매는 지금까지 바위로 남아 있다.
안내하는 가이드가 부탁한다. “혹시 여러분 중에 주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제발 풀지 말아주세요. 세자매 봉이 없어지면,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제 수입에 문제가 생깁니다.”
1836년 1월 12일 26살의 ‘찰스 다윈’은 탐사선 ‘비글호'(Beagle)를 타고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는 5년 동안의 탐사 여행 중 중요한 항구 중에 하나이다. 19일 동안 시드니에 머물면서 안내원과 2마리의 말을 빌려 ‘바서스트’에 가서 호주의 일반적인 정보를 얻었다.
지금은 블루마운틴의 ‘찰스다윈의 워크’라고 불리는 ‘윌슨 공원’에서 ‘웬트워스 폭포’까지 탐사했다. 그곳에서 다윈은 영국의 물쥐와 비슷한 ‘오리 너구리'(Platypus)를 발견했다. 그의 항해기에 따르면, ‘진화론'(Evolution)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했다. “동물은 원래 한 종이었는데 백 만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면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종이 변한 것이다.”
1839년 9월 9일 존 클레멘츠 위크햄이 비글호가 호주 남부 항에 도착했다. 그는 ‘찰스 다윈’를 기념하여 이름을 ‘다윈 항’으로 붙였다.
On January 12, 1836, HMS Beagle entered Sydney Harbour with the 26-year old Charles Darwin on board. Sydney was just one of many ports of call for the Beagle on its five-year round-the-world surveying voyage.
During the Beagle’s 19 days in Sydney, Darwin “hired a man & two horses to take [him] to Bathurst … to get a general idea of the country”. In the Blue Mountains, he traversed what is now called the Charles Darwin Walk, a wonderful bush track that follows Jamison Creek from Wilson Park to Wentworth Fall.
Darwin watched the odd animals known as ‘platypus’(오리 너구리) playing in a stream and made notes that they behaved “exactly like the water rats he knew back home in England”
According to biographers, this was a key moment in his formation of the theory of evolution…“that different species had in fact evolved from the same origin over millions of years, changing their characteristics to suit their environments.”
The commonly told legend of the Three Sisters is that three sisters, Meehni, Wimlah and Gunnedoo, lived in the Jamison Valley as members of the Katoomba tribe. They fell in love with three men from the neighbouring Nepean tribe, but marriage was forbidden by tribal law. The brothers were not happy to accept this law and so decided to use force to capture the three sisters. A major tribal battle ensued, and the sisters were turned to stone by an elder to protect them, but he was killed in the fighting and no one else could turn them back. This legend is claimed to be an Indigenous Australian Dreamtime legend.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