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히브리 성경에서 욥기는 ‘잠언’ ‘전도서’와 함께 성문서(Writing) 중 시가서(Poetry)로 구분되는 지혜서이다. 잠언이 ‘실천적 지혜’에 대한 것이라면 욥기와 전도서는 ‘사색적 지혜’이다. ‘사색적 지혜’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역설적 지혜’이다. 전도서는 인생의 ‘모든 것이 헛됨’을 거듭 말해서 염세적인 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는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인과응보’란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뒤따르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은 의인이 고난을 받고, 악인이 번성함이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욥기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이다.
동방의 의인 욥(1-2장)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본문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라고 말한다. ‘순전하다’는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을 가리킨다.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증거할 때(창 6:9), ‘완전한’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또 욥은 정직하였다. ‘정직함’은 올바름, 기준에 맞음이라는 뜻이며 의롭다는 말과 같다. 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 말하며,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이유는 하나님이 물질적인 축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거두신다면 욥은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했고, 욥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아 일순간에 사랑하는 자녀와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지만 “주신 자도 여호와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 받으실지니라”(1:21) 고백하자, 2차 시험으로 욥의 몸을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하였다. 악창이란 피부의 종기를 말한다. 욥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재 가운데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었다. 이제는 아내마저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위로하러 온 세 친구는 너무 처참한 욥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7 주일간 함께 통곡했다.
욥과 3친구(3-31장), 엘리후 (32-37장)
욥은 너무 고통스러워 ‘자신의 삶’을 저주했다. 그는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2-10절), 태에서 죽어 나왔더라면(11-19절), 지금이라도 죽었으면(20-26절) 등의 표현으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3장의 욥은 1장과 2장의 욥과 너무 다른 모습이다. 마치 욥이 두 명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랬을까? “과연, 나라면 어떡했을까?” 출애굽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심한 불평과 불만을 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체험했으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 쉽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난한다. 출애굽 길을 순례하는 팀이 있었다. 목사님이 사막 한가운데 버스를 세우고 5분간만 광야를 걸어 보라고 했다. 5분이되기도 전에 교인들은 뜨겁다고 난리를 치며 버스로 뛰어 올라갔다. 그 후 출애굽을 읽을 때마다 그날의 경험을 떠올리며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Silence)이란 역사소설이 있다. 17세기 일본을 선교하기 위해서 파송된 존경받는 예수회 신부가 배교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야기는 일본에 선교를 갔던 ‘페레아 신부’의 배교 소식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로드리고 신부’를 파송하면서 시작된다. 일본에 도착한 ‘로드리고’는 ‘페레이’를 만나서 배교한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비난하며 자신은 순교할 것이라고 했다. ‘로드리고 신부’는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다. 순교를 각오한 그에게, 만약 배교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고민을 하던 로드리고 신부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를 선택하고, 왜 페레이 신부가 배교했는지를 깨닫는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후메오’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새겨진 동판을 발로 밟아야 했다. 그 순간 그는 엄청난 발에 통증을 느낀다. 후메오의 예수는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라.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은 “나는 침묵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너희들과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다’, ‘약한 것(배교)이 강한 것(순교)보다 괴롭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신앙과 상황’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3장부터 31장까지 위로하러 왔던 욥의 3 친구는 돌아가면서 죄가 없는 자는 결코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며 욥을 비난했다. 일반적으로 고난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은 죄와 연관을 시킨다. 하지만 고난이 반드시 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난은 성도를 더 성숙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도 귀하다”(벧전1:7)고 했다. ‘믿음의 시련’이란 믿기 때문에, 믿음대로 살려다 보니, 믿음을 지키다 보니, 믿음을 전하다 보니 당하는 시련 즉 죄 때문이 아니라 잘 믿다 보면 당하는 시련이다. 이러한 시련은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욥은 자신은 죄가 없다고 반박했지만, 고난당하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더 이상 대화가 진전되지 않았다. 32장부터 37장까지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리후가 등장한다. 엘리후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고 여기는 욥에게 노를 발하며 책망을 했고, 욥의 세 친구에게는 정죄만 하려고 했지, 적절한 답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책망했다. 그러나 엘리후 역시 잘못은 지적했지만, 고난에 대한 명쾌한 답은 주지 못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욥이 3친구가 책망할 때는 바로 반박을 했는데, 엘리후가 책망할 때는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욥과 하나님 (38-42장)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8:1-2) 드디어 침묵 속에 계시던 하나님이 폭풍가운데 나타나 욥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하나님이 욥에게 약 90개 질문을 했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하나도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회개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6) 그리고 욥이 자기를 비난하던 친구를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은 2배의 축복을 허락하셨다.(42:10)
욥기의 주제는 인간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전부는 이해할 수 없고, 선한 사람도 고통을 받을 수 있지만, 분명 거기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고,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은 다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인간의 생각으로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분명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알아야 믿을 수 있는 ‘인식의 세계’가 있고, 믿어야 알 수 있는 ‘영적인 세계’도 있다. 보이는 세계는 ‘이성의 세계’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성의 세계’이다. 믿음은 미래를 현재화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히11:1)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이다. 시인은 악인은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고 모든 것이 형통하고, 오히려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고 거의 실족할 뻔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17절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의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반전을 가져온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28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를 마친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악인이 잘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니 그들의 결국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이 죄 때문이라면 회개해야 하고, 믿음 때문이라면 기뻐해야 하며, 알수 없다면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절대주권을 믿어야 한다.
김환기 사관(구세군라이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