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지난주(3월 16일 현재) 블루마운틴에서 NSW 주에서 사역하는 사관 300여명이 모여서 세미나와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찬양과 예배 그리고 간증과 세미나를 통한 은혜의 시간을 가졌다. 주제는 오늘 본문의 일부인 역대하 20:12절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의 말씀이었다. 시대적 배경은 북이스라엘의 왕은 아합, 남유다의 왕은 여호사밧이었다. 아합과 여호사밧은 사돈지간으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우리 땅이었데 지금은 아람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는 ‘길르앗 라못’을 되찾으러 가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은 선지자의 뜻을 구하자고 제안했다. 아합은 부른 400명의 선지자를은 이길 것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여호사밧은 이들 말고도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는 질문에,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언제나 부정적인 말만을 해서 부르지 않았다고 하자, 그를 불러서 묻게 된다. 미가야는 전쟁에서 패할 것이 아합은 죽을 것이라고 했다. 미가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를 감옥에 집에 넣고 출정을 한다. 미가야의 예언이 마음에 걸렸던지 아합은 여호사밧에게는 왕 복장을 입으라고 하고 자신은 변장을 하여 일반 군사의 복장을 입었다. 아람 군인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쏘았는데 정확하게 아합을 맞추었다.(왕상 22:34) 아합은 그곳에서 전사하고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이 사건을 열왕기 상의 마지막 장인 22장과 역대하 18장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같은 사건이지만 열왕기 저자는 아합 중심으로 기록하였고, 역대기 저자는 여호사밧 중심으로 기록을 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여호사밧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다. 모압자손, 암몬자손 그리고 몇 마온 사람들이 연합하여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이다. 위기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지만, 더 견고해 질 수도 있다. 여호사밧은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1. 금식하며 기도 (3-4절)
금식이란 본능적인 욕구를 절제하는 온전한 헌신의 표식이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Lent)을 지내고 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주일 뺀 40일간의 기간이다. 사순절은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음식을 비롯해 어려운 것들을 절제한다. 자신들의 욕구를 절제하고 금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이다. 주님을 닮아가며 그에게까지 자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기간이다.
목회자들이 꺼려하는 3 종류의 교인이 있다. 40일 금식 기도하는 권사, 매일 철야하는 집사, 신학한 장로이다. 금식과 철야 그리고 신학을 한다는 것은 좀 더 주를 알고 닮아가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행위가 외식이 되어 자기 자랑거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금식이 훈장이고 되고, 철야가 자랑이 되고, 신학이 교만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말씀으로 기도 (9절)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출애굽 사건 때 하신 일을 기억하고, 선조들에게 약속한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성경은 ‘Covenant’, ‘Testament’로 약속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인간에 하신 약속의 말씀이다. 목회자가 ‘말씀’을 말씀대로 전해야 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도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해야 한다. 말씀을 근거로 하는 기도가 가장 강력하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켜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이다.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는 없다. 무릎을 순간부터 우리는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는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는 겸손한자 만이 할 수 있다. 기도는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겸손함이다.
3. 믿음으로 기도(12절)
여호사밧에게 다른 차선은 없다. 오직 주님만 바라본다고 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의심은 분열된 마음이다. 의심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급성장했던 70년대에는 이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다. 당시 한국은 경제도 열악했고, 의학도 발전되지 못한 상태였다. 문제가 생기면 주께 엎드려 오직 믿음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세상이 발전하다보니 주님 말고도 의지할 것이 너무 많다. 우선순위가 세상이고, 세상으로 할 수 없을 때야 마지막 방법으로 주님을 찾는다. 기도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세상을 의지할 수 없는 아프리카나, 개발도상국가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레위 자손인 야하시엘에게 여호와의 영을 부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게 하셨다.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15절) 백성들은 용기를 백배하여 다음 날 군대를 전열하고 예복을 입은 성가대들이 군대 앞에서 서서 찬양을 하며 진격했다.
적진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압, 암몬 그리고 세일산 사람의 연합군이었던 이들이 분열하여 모압과 암몬이 연합하여 세일산 사람을 죽이고, 모압과 암몬이 서로 싸워 스스로 전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은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했다. 야하시엘을 통해서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는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두려움을 이긴 사람들
우리는 가끔 불가항력적인 사건을 만날 때가 있다. 불가항력(不可抗力)이란 사람의 힘으로 저항하거나 막아 낼 수 없는 힘이다.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을 포함하여 외부로부터 발생한 일로서 인간의 모든 힘을 동원해도 이길 수 없는 사건이다. 이때 제일 먼저 찾아오는 감정이 두려움이다. 두려움이란 말의 뜻은 경고, 불안, 무질서에 대하여 우리의 정서 내부에서 야기되는 고통스러운 감정, 혹은 불쾌한 상황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다. 두려움은 생각하면 할수록 더 강해져서 사고를 마비시키고, 급기야 공포의 바다로 끌고 가 우리를 익사 시키려한다. 루마니아의 챠우셰스쿠 공산주의 독재하에서 인권과 자유를 외치다가 박해를 받아 투옥된 리차드 범브란트 (Richard Wumbrand) 목사는 옥중에서 성경을 읽다가 <두려워 말라> 라는 말씀이 수 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씌어 있는가 세어 보았더니 “365번”이 씌어져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365일, 매일 두려움과 맞닥뜨리기에, ‘두려워 말라’는 성경 말씀으로 이겨야함을 뜻한다. 어떻게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시편 46편과 연관되어, 두려움을 이긴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한다.
1. 히스기야
시편 46편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난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렸던 남유다 왕이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호세아였다. 열왕기하 18:10절에 앗수르왕 ‘살만에셀’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한다.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의 운명은 바람 앞에 작은 등불과도 같았다. 성안의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 히스기야 왕은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기도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두려워 마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적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실행하셨다.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 19:34-35)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결코 자신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불꽃과 같은 눈동자로 자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움을 할 때“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했다. 다윗은 자신과 골리앗을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과 골리앗을 비교했던 것이다. 우리 앞에 골리앗이 있는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기를 바란다.
2. 마틴 루터
시편 46편은 마틴 루터가 가장 애송하고 사랑했던 시이다. 마틴 루터는 시편 46편에 영감을 받아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했다. 1521년 로마공교회에 대한 이단자라는 심판을 받기 위해 “보름스 의회”에 올라갈 때, 많은 지인들이 올라가면 순교당할 것이라고 만류했지만 루터는 목숨을 걸고 올라갔다. 루터는 “보름스 궁전에 모여드는 악마의 수가 그곳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황에 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생각할 때 마치 슈퍼맨과 같이 대단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종교개혁기간 동안 루터도 많은 갈등과 고민을 했다.
루터의 보름스의 종교재판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순간이다. 교황의 파문은 곧 죽음이다. 재판은 시작이 되었고, 황제는 그가 쓴 책자를 펼쳐놓고 모두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잠시 망설이던 루터는 결정하지 못하고,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날 밤 루터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싸우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다음날 그는 담대하게 답했다. “성서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3. 모세
출애굽 14장에서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시퍼런 홍해에 막혀 진퇴양란에 빠져 심히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만날 수 있다. 모세는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14:13-14)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면초가이다. 사면이 막혔다고 해도 하늘은 열려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쉘라) (시 46:10-11)
쉘라는 시편의 150편중 39편에 71번 등장하며, 하박국 3장에 세 번 등장한다. 셀라의 어원과 정확한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셀라는 “멈춰서 들으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10절의“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다. 두려움이란 부정적 감정에 빠져 떨고 있는 백성에게 “멈추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고 했다. ‘Stillness’란 상황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말고, ‘침묵하라, 평온하라, 침묵하라, 멈춰라, 차분하라, 고요하라’란 뜻이다.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잠잠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임을 알 때입니다. 침묵해야 들리는 소리가 있고,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때인가? 잠잠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임을 알 때이다. 침묵해야 들리는 소리가 있고,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기집착에서 온다. 강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기부인에서 온다. 인간은 자기집착을 하면 할수록 더 두려워 지고, 자기 부인을 하면 할수록 더 강해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라고 했다. (딤후1:7)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했다.(요일4:18) 두려움은 자기에 집착하는 것이고, 사랑은 하나님에 집중하는 것이다.
지금은 어느 때인가?
인간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기집착에서 온다. 강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기부인에서 온다. 인간은 자기집착을 하면 할수록 더 두려워하고, 자기부인을 하면 할수록 더 강해진다. 세상은 집착을 통하여 강해진다고 유혹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다. 1948년 루마니아의 공산정권하에서 투옥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는 감옥에서 기도하고 성경 읽는 일에 전념하다가 우연히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365회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매일 매일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이다.(딤후1:7)
능력 (Power)
‘능력’이란 사도행전 1:8절의 ‘권능’과 같다.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 영어로는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뜻한다. 이 능력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했다. 성령께서 주신 이 능력은 자신을 자랑하거나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게 하는 힘이다. 증인이란 단어는 순교자란 뜻이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도 어려운 시기에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의 각오가 없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산국가나, 무슬림 국가에서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선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랑(Love)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사랑’(agape)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내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가득 찬 것이다.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내 마음에 두려움이 있음은 아직까지 온전히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절제(Self-discipline)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마지막 열매가 ‘절제’(Self-control)이다.(갈5:22-23) 8가지 다 잘하더라도 절제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니 절제는 ‘화룡점정’과 같은 열매이다. 절제란 자기통제(self-control)를 말한다. 인간의 타락은 교만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어려울 때보다 잘 나갈 때 더 조심해야 한다. 박해보다 유혹에 더 조심해야 한다. 창세기 3장에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질 것이라는 교만에 불을 지폈고, 11장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겠다는 것도 교만에 기인한다. 어려울 때도 기도해야 하겠지만, 잘 나갈 때는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링컨은 “거의 모든 사람이 역경을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인격을 시험해보려면 그에게 권력을 주어보라”고 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세월이 하 수상하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전쟁 중이다. 세계는 빗장을 굳게 걸고 앞뒤를 다투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있다. 해외는 물론, 특별한 사안이 아니면 도시간의 여행도 금지하고 있다. 지금은 어느 때인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품고, 잠잠하며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알 때이다. 침묵해야 들리는 소리가 있고, 눈을 감아야 보이는 세계가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