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
오늘은 정신분석세미나 마지막 시간이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란 작품이 생각난다.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에 ‘알자스와 로렌’ 지방이 있다. 프랑스 영이었으나 후에 독일이 점령하게 된다. 주인공인 ‘프란츠’는 불어 수업시간을 아주 싫어했다. 불어는 언제나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수업시간에 늦게 오고 집중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벨’ 선생님이 중대한 발표를 하게 된다. “내일부터 새로운 선생님이 올 것이고, 오늘이 프랑스어로 공부하는 마지막 수업이다” 더 이상 불어를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프란츠’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세상이란 학교에 등록해서 다양한 과목을 배운다. 내가 잘하는 과목도 있지만 못하는 과목도 있다. 필수과목도 있지만 선택과목도 있다. 기쁨과 행복과 같은 좋아하는 과목도 있지만, 슬픔과 불행과 같은 싫어하는 과목도 있다. 인생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각 과목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대충대충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졸업할 시간이 되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게을리 했는가를 깨닫고 뒤늦게 후회한다. 끝에서 시작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하늘에서 땅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있다면, 죽음에서 삶을 볼 수 있는 ‘명철’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의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을 것이다.
교재가 끝 페이지로 향하면서 ‘죽음’이란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생명을 능가하는 죽음” “죽음이 생명을 능가한다는 신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압박이 요구된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변화와 발달”이다. 발달의 끝은 어디인가? 죽음이다. 나는 유난히도 죽음에 대하여 많은 묵상을 했다. 아마 죽음을 알지 못하고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삶이란 무엇인가?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아직 배울 것이 남아 있는 것이고, 아직 남은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이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모세는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사명을 마치고 죽은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 연구한 세계적인 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즈’라는 분이 있다. 그녀가 70세가 되던 해에 썼던 자서전인 ‘생의 수레바퀴 (The Wheel of Life)란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 인간은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사람은 죽음을 선고 받는 그 순간에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녀가 쓴 ‘인생수업’이란 책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오늘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호주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한 Bronnie Ware라는 간호사가 쓴 ‘The top fie regrets of the dying’는 책이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를 다섯 가지로 정리한 내용이다. 첫 번째 후회가 “I wish I’d had the courage to live a life true to myself, but the life others expected of me”(남들이 기대하는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살았어야 하는 용기를 가져야 했는데)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아닌, 보이기 위한 삶을 살다가 죽음 앞에서 후회한다.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해야 한다. 다르면 죽음의 끝자락에 섰을 때 살아왔던 삶에 대하여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살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사도 바울은 살아야 될 이유와 죽어야 될 이유가 동일하였기에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으로 가셨다. 이때 같이 간 제자들은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겟세마네는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 서쪽 중턱에 있는 동산이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기계‘를 의미한다. (눅22:39-44)
1. 정직한 기도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쫓아 감람산에 가시매”(눅22:39) 주님은 규칙적으로 기도하셨다.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예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십자가를 앞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사”(마 26:37)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고 기도를 부탁했다. 이들은 예수님의 중보기도 팀이다. 오래전 벨모아 구세군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인도했던 찬양 사역자 ‘장종택 목사’는 집회 중에 아픈 딸 ‘온유’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장목사는 ‘정직한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썼다. 정직한 중보기도란 인사치레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정말 긴절하게 기도하는 기도라고 했다. 기도부탁을 받으면 예의상 기도하겠다고 하지만, 정작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체포 당하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고(막14:50), 마가는 얼마나 급했으면 알몸으로 도주했다.(막14:51) 기도의 능력은 선택의 순간에 나타난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육적인 선택을 하고, 기도한 사람은 영적인 선택을 한다.
2. ‘그러나’의 기도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투명해야 한다. 시편 150편 가운데 다윗은 73편을 썼다. 다윗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벌거벗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고했다. 하나님께 원망하고 항의하는 시도 있고, 탄식과 좌절하는 시도 있으며, 응답하지 않아 답답해하는 시도 있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은 언제나 ‘찬양과 감사’로 끝난다. ‘그러나’의 기도는 나 중심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기도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충돌될 때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성숙한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켜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이다.
3. 성령 안에서 기도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혈한증이란 의학 용어가 있다. 사람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땀샘의 모세혈관이 파괴되어 피를 흘리는 현상이다. 의사였던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의학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영적인 싸움이다. 누가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22:43)라고 기록했다. 천사가 예수를 도왔다는 기사는 이곳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언급되었다. 천사가 예수를 도왔던 것처럼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은 보혜사이다. 보혜사는 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성령은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할지 모를 때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여 주시는 분이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하는 것이다.
나는 초민감자입니다
머리말
‘나는 초민감자입니다’는 냉혹하고 자극적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 저자의 경험담과 수많은 상담 사례를 통해 인생 전략을 정리해냈다. 초민감자는 공감 능력이 결핍된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 나르시시스트 같은 ‘에너지 뱀파이어’의 대척점에 있어 이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초민감자들에게 각별한 방어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저자인 올로프 박사는 타인의 긍정에너지를 빼앗는 사람을 ‘에너지 뱀파이어 (Energy Vampire)’라고 2004년에 최초로 명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초민감자(Em+path)란 단어는 안(In)과 감정(Path)의 합성어이다. 초민감자는 감정이입이 지나쳐서 타인의 감정이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껴 고통 받는 사람들이다. 교감의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 타인의 감정뿐 아니라 에너지와 신체 증상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이들은 흔히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며, 항상 “좀 대범해져라”라는 충고를 듣는다. 이들의 신경계는 극도로 예민하며 외부 자극을 차단하는 필터가 없다. 따라서 초민감자는 외부의 해로운 자극으로부터 자신의 내적 중심을 지키면서도 민감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1. 타인의 고통을 흡수하지 않는 방법
초민감자의 몸은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 몸은 투과성이 좋아서 주변 사람들의 긍정적, 부정적 에너를 근육과 조직, 기관으로 흡수한다. 타인의 신체 증상을 마치 자기 것처럼 겪는다. 초민감자로 살아가려면 타인의 감정과 고통을 흡수하지 않고 과도하게 자극적인 환경에서 그리운 당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초민감자에게는 훌륭한 특징이 많다. 가슴이 따뜻하고, 곤경에 처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열정적이고, 사려 깊으며, 창의적인 데다가, 감정에 솔직하고, 인정이 많으며,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알아채서 충실한 친구가 배우자가 될 수 있다.
초민감자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에너지 수준을 최적화하기 위한 첫걸음은 자신의 신체적 혹은 정서적 초민감자인가, 아니면 둘 다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신체적 조민감자는 다른 사람의 증성을 자기 몸을 느낀다. 정서적 초민감자는 타인의 정서를 주로 감지한다. 신체적 초민감자와 정서적 초민감자는 자신의 능력만 잘 훈련하면 둘 다 좋은 직관적 치유자가 될 수 있다. 공감 능력으로 다른 사람의 증상을 인지해 병을 진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건강을 지키려면 그렇게 감지한 증상을 노련하게 방출할 줄 알아야 한다.
저자는 공감적 질병(empathic illness)란 용어를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증상이 내 몸에 나타나는 질환을 의미한다. 자신이 신체적 혹은 정서적 초민감자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스스로를 이해하고 세상에 더욱 잘 대처할 수 있다. 저자는 초민감자의 일반적인 어려움을 아래와 같이 지적하고 하고 있다. 1. 과잉 자극을 받는다. 2. 타인에게서 스트레스와 부정적 기운을 흡수한다. 3. 격렬한 감정을 느낀다. 4. 정서적. 사회적 숙취를 경험한다. 5.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6. 정서적 탈진을 경험한다. 7. 빛, 냄새, 맛, 촉감, 온도, 소리 등에 과민하다. 8. 친밀한 관계를 요구 사항을 표현해야 한다.
2. 중독에서 해방되기
과도한 자극으로 인한 불안을 술이나 약물, 음식, 섹스, 쇼핑, 도박 등의 중독으로 자가 치료하는 건 초민감자에게 흔한 일이다. 극도로 민감해서 쉽게 위압되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고통을 너무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초민감자는 자가 치료를 대신할 수단이 필요하다. 초민감자는 무의식적으로 중독에 끌리는 건지도 모른다. 중독이란 Control 해야 할 것에 Control을 당하는 것이다. 술 중독과 관련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중간쯤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한다. 술이 사람을 마실 때가 중독이다. 저자는 중독 치유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는 자신이 중독 상태를 파악하는 게 필수이다. 두 번째는 외부에 있는 그 무엇도 자신을 민감성을 받아들이는 일에 궁극적으로 도와줄 수는 없다. 세 번째로 자신의 중독에 관해 털어놓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Alcoholics Anonymous), 익명의 약물 중독자들, 익명의 과식자들 같은 자조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12 단계 프로그램은 AA의 창립자 빌 윌슨이 만든 중독의 치유의 완치를 돕는 중요한 도구이다. 시드니에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알코올. 마약 중독치료 센터가 있다. 이곳에서 12 Step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첫 번째 3단계를 통과하면 나머지 9단계는 쉽게 통과할 수 있다고 했다. 첫 단계는 자신이 중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둘 번째는 자신의 스스로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절대자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기독교인 뿐 아니라 타종교인들도 있고 무종교인들이 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면 언제나 나갈 수 있다. 초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가는 사람이 많지만, 3단계를 끝낸 사람은 나머지의 9단계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갈 확률이 높다.
3. 진정한 소울 메이트를 찾아서
초민감자는 극도의 민감성 때문에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특히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친밀한 교제를 원하면서도 그 관계 때문에 불안해진다. 초민감자는 나쁜 사람에게 집착할 때가 있다. 건강한 관계라면 연인 사이는 쌍방이 인정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 의향이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변하기를 기대하며 한쪽에서만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건 집착이다. 집착하면 사랑 불능자나 해로운 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초민감자는 자신의 짝과 창의적이고 솔직한 대화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파트너에게 자기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밝힐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이 관계 초민감자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관계 초민감자라면 적절한 경계선을 설정하고 자신의 요구를 주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친밀감이 자랄 수 있다.
저자는 사랑에 빠진 초민감자를 위한 12가지 조언을 한다. 1. 정기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긴장을 풀고 명상하기. 2. 사교 행위에 투자할 시간을 논의하기. 3. 물리적 공간에 관해 의논하고 타협하기. 4. 침애나 침실을 따로 상요할지 생각해 보기. 5. 한 가지 감정 문제에만 집중하고 반복해서 말하지 않기. 6. 설령 기분이 나쁘더라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기. 7. 샌드위치 기술 활용하기, 요구가 아닌 부탁. 8. 고함 금지법 지키기. 9. 남을 만족시키려 하거나 파트너를 고치려 하지 않기. 10. 주변의 소리를 조절하기. 11. 목욕 시간을 협의하기. 12. 장난치기.
4. 에너지 뱀파이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
에너지 뱀파이어들은 너그럽게 친절한 초민감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민감한 사람은 이들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에너지 뱀파이어를 통틀어서 초민감자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치는 유형이 나르시시스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듯이 행동한다. 자신이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끊임없는 칭찬을 원한다. 극도로 직관적인 경우도 있지만, 그 직관력을 이용해 남을 조정하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다. 이들이 초민감자에게 특히 해로운 건 누눈가를 조건 없이 사랑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감능력결핍장애자’(empathy deficient disorder)이다. 초민감자는 나르시시스트에게 공감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때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불리는 위험적 전략을 사용한다. 일부러 이치가 어긋나는 상황을 꾸며 상대방의 인식을 왜곡한 다음, 거기에 반응하면 정신이 온전치 않다고 공격하는 방법이다. 또, 과거를 고쳐 쓰거나 실제로 일어난 일을 부정하면서, 상대방이 걱정하면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무시한다. 초민감자는 나르시시스트의 정서 능력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 당신을 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마라. 당신의 민감성을 존중해줄 거라는 기대를 버려야. 나르시시스트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나르시시스트인 상사와 일하는 상황을 피하라. 나르시시스트의 자존심을 어루만져줘라. 가능하면 모든 연락을 끊어라. 연결 줄을 자르라. 명예로운 종결을 맞이하라.
저자는 초민감자에게 이런 선언문을 제안한다. “나를 탈진시키는 사람들 틈에서 내 에너지를 지킬 것이다. 나는 건전한 경계선을 그을 것이다. 나는 올바른 타이밍에 “싫어”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어떤 관계가 나 자신을 성장시킬지 직감이 가르쳐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5. 직장에서 번아웃 되지 않기
초민감자는 적절한 업무 환경을 만나면 크게 성장할 있다. 기질에 맞는 일은 영감을 주고, 창의적인 영역으로 데려가 주며, 활력과 열정을 끌어올려 준다. 초민감자가 느끼는 편안함의 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크게 3가지가 있다. 의미 있는 일, 주변 사람들의 에너지, 물리적 공간의 에너지이다. 초민감자는 민감성을 활용해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만족스러워한다. 민감한 사람은 소음과 갈등, 사내 징치를 감당하는 임계점이 낮다. 직장에서 극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남들은 눈살이나 한번 찡그리고 넘어가지만, 초민감자는 진이 빠지고 불안해한다. 군물 안과 개인 사무실, 계단에는 각기 다른 미세 에너지가 흐른다. 정신을 고양시키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초민감자는 에너지가 정교하게 발달해서 물리적 공간의 에너지를 직감적으로 느낀다. 초민감자는 자신의 직업 공간에 흐르는 에너지에 주파수를 맞추고 좋은 기분이 드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저자는 번아웃과 동정 피로를 예방하는 법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휴식 시간을 만들어라. 2. 스케줄을 너무 많이 잡지 마라. 3. 잘 먹어라. 4. 평온한 업무 공간 만들기. 5. 규칙적으로 심호흡을 하라. 6. 사무실이나 업무 공간을 가슴 에너지로 채워라. 7. 일터에서 명확한 경계선을 설정하라. 8. 보호막을 둘러라. 9. 물로 디톡스하라. 10. 일에서 벗어나 즐겨라.
6. 민감한 아이 키우기
부모가 되는 건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선택이지만, 초민감자에게는 유난히 더 힘들 수밖에 없다. 초민감자는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출산 여부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자신의 신경계와 프라이버시, 민감성에 미칠 영향은 무시한 채 환상에 빠지면 안 된다. 민감성은 양날의 검이다. 공감 능력은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심리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부모의 신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건강심리학회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감 능력이 큰 부모는 자녀의 우울감과 칭얼거림을 정기적으로 달래주면서 면역력이 약화되고, 미약하게나마 전신성 염증 반응까지 생긴다.
초민감자 부모의 12가지 행동 단계가 있다. 1. 감사하는 말로 하루를 시작한다. 2. 잊지 말고 호흡하라. 3.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라. 4. 마음을 위로하는 음악을 들어라. 5. 명상하라. 6. 원기 회복용 낮잠을 자라. 7. 경계를 정하라. 8. 헬리콥터 부모가 되지 말라. 9. 에너지의 중심을 잡아라. 10. 먹는 음식에 유의하라. 11.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어라.12. 아이들과 즐겁게 논다.
7. 초민감을 받아들이면 직관과 통찰력이 커진다.
초민감자는 세상을 풍요롭고 다층적인 방식으로 인식한다. 민감성이 깨어나고, 이를 사용해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우리의 직관은 더욱 확장된다. 보통 사람들의 직관은 일상 혹은 현실 세계라고 불리는 좁은 영역의 주파수에만 맞춰져있다. 그들이 보는 건 일차적원적인 시간에 한정돼있다. 하지만 물질계가 유일한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민감성을 발휘해 그 너머를 바라보면, 미세 에너지의 세상과 비국소성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 기존의 물리법칙이 무시되는 곳이다. 텔레파시 초민감자는 현재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그 사람이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동료, 고객은 물론이고, 생판 모르는 사람에 관한 이미지나 느낌, 영감, 깨달음까지 수신한다. 외 외에도 예지적 초민감자, 꿈 초민감자, 식물초민감자, 지구 초민감자, 동물 초민감자 등이 있다. 동물과 대화를 하였던 성 프란시스코도 동물 초민감자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직관의 과부화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법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방법을 제시하였다. 1. 내면의 목소리와 대화하라. 2. 목격자의 시선을 키워라. 3. 당신은 다른 사람의 운명에 책임이 없다. 4. 빛을 떠올려라. 초민감자의 선언도 있다. “나는 내 직관을 존중할 것이다. 나는 내 꿈을 경청할 것이다. 나는 내면의 목소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직관과 다른 삶의 영역 사이에 균현을 찾아서 민감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온전한 내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맺는말
올로프 박사는 초민감자이다. 그녀는 초민감자는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민감성이라는 재능을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의 민감성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한다면, 초민감자는 굴레가 아니라 직관과 통찰력을 갖춘 치유자로 거듭날 수 있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비폭력으로 나가는 통로로서 치유자도, 복원자도, 선지자도, 사랑하는 자도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이 ‘초민감자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투시와 신유의 은사가 있다. 자신이 알고 싶지도 않은데 기도하면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알 수 있다. 시드니에서 한국에 있는 특정인을 위해서 기도할 때, 기도문이 떠오르면 그 사람에게 보낸다. 기도문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너무 정확하게 묘사한 기도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심리학적으로 ‘초민감자’라는 표현을 쓰지만 신학적으로는 ‘은사’(카리스마)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나는 초민감자입니다’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Path’와 관련된 용어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면서 마무리한다.
1. 소시오패스(Sociopath), 사이코패스(Psychopath), 나르시시즘(Narcissism)
소시오패스(sociopath)는 사회를 뜻하는 소시오(socio)와 병리 상태를 의미하는 패스(path)가 합쳐져 만들어진 개념이다. 반(反)사회적 인격장애의 일종이다. 반사회적인 흉악범죄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없고,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없다. 이러한 점에서는 사이코패스(psychopath)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시오패스는 잘못된 행동이란 것을 알면서도 반사회적인 행위를 한다는 점에 있어서, 잘못된 행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는 사이코패스와는 구별된다.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소시오패스와 마찬가지로 반사회적 인격장애 질환 중 하나이다. 하지만 평소 정신병질이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가 범행을 통해서만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크게 당황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이코패스 환자들은 감정을 지배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일반인의 15%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다. 고통에 무감각하기 때문에 저지른 죄를 인지하지 못하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흔히 공주병, 왕자병이라 불리는 정도를 넘어서, 허영심의 과다로 타인에게 반감을 사거나 타인의 꿈을 죽이는 중증의 것까지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심적인 피해를 주고 반사회성 성질을 갖고 있으면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분류된다. 자기애성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NPD)는 과도하게 자신이 중요하다는 느낌 때문에 타인에 대한 공감 결여가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은 권력과 성공 혹은 외모에 대하여 오래 동안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이들은 일반적으로 주변사람들을 이용한다. 사람은 목적으로 보지 않고 자기를 위한 수단으로 본다.
2. 동정(Sympathy), 공감(Empathy), 초민감자(Empath)
공감(empathy)과 동정심(sympathy)의 차이는 상대방의 아픔을 듣는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로부터 달라지는 것이다. 공감은 ‘안에서 고통'(em+pathy)을 느끼는 것이며, 동정은 ‘함께 고통을’ (sym+pathy) 느끼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공감과 동정은 상대방의 고통에 대해서 알아가려고 하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는 위치에 따라서, 공감과 동정의 차이점을 가지게 된다.
공감이란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 타인의 입장을 취해봄으로써 그들의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인 것처럼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동정은 외로움, 슬픔, 질병, 죽음, 실업, 빈곤, 차별 등과 같은 특정한 곤경을 당한 사람과 함께 하며 같이 아파하는 것이다. 공감과 동정은 이해 수준에서 차이를 보인다. 동정은 공감에 비하여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낮을 수 있다.
초민감자(empath)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는 필터가 없어서 타인의 감정과 에너지, 신체 증상을 자신의 몸으로 고스란히 느낀다. 다른 사람의 슬픔은 물론이고 기쁨까지 직접 경험한다. 타인의 목소리 통이나 신체 움직임에 극도로 예민하다. 그래서 남들이 입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침묵 속에서 비언어적으로 하는 말까지 듣는다. 초민감자는 먼저 느끼고, 그 다음에 생각한다. 지적 능력이 과도하게 강조되는 현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현저히 다르다. 이들은 자극의 임계점이 낮고,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며, 빛과 소리, 냄새에 민감한데다가, 대규모로 어울리는 걸 싫어한다. 삶에 민감한 사람은 둔감한 사람보다 훨씬 자주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이해하고 뛰어넘는 순간, 놀라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