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통찰 (Insight)이란 무엇인가?
통찰 (In + Sight)은 안에 것을 보는 힘이다. 외면이 아닌 내면을 보는 힘이다. 현상이 아닌 본질을 보는 힘이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힘이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다.
통찰과 관련된 성서 속의 3사람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다윗 (삼상 16:7)
사울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집에 가서 새로운 왕을 택하여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다. 사무엘은 이새의 집에 도착했을 때 첫째 아들인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과연 여호와의 기름 받을 자가 여기 있다고 생각했다.(삼상16:7) 엘리압은 용모와 신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외모란 문자적으로 ‘눈으로’(at the eyes)라는 말이다. 눈으로 보는 ‘육신의 눈’과 통찰로 보는 ‘영의 눈’을 대조시킨 말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진심을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선지자인 사무엘조차도 외모를 보고 판단을 했던 것이다. 다윗은 8째 아들인 막내로 그곳에 함께할 존재의 의미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부으시고,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고, 내 뜻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행13:22)
2. 예수님 (막 12:14)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서 질문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만약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면,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혀 백성들로 배척 당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옳지 않다고 대답하면, 로마 당국으로부터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질문 의도는 불순했지만, 그들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예수님의 성품은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하시며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오라고 한 후, 되 질문을 한다. “동전의 화상과 글이 뉘 것이냐”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을 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잘 알고 계셨다.
3. 고넬료 (행 10:34)
가이사랴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는 백부장 고넬료가 있었다. 기도 중에 천사가 나타나 욥바에 사는 베드로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으라고 했다. 같은 시각 베드로도 환상 중에 하늘에서 각종 짐승이 있는 보자기가 내려와 먹으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 먹기를 거부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왜 속되다 하지 말라는 책망을 들었다. 3번의 같은 환상이 끝나자, 고넬료가 보낸 사람의 그의 집을 두드렸다.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갔다. 고넬료 뿐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이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드로는 입을 열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방언도 하고 세례도 받았다.
통찰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다. 지혜있는 자는 바른 선택을 한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과대된 칭찬이나 근거 없는 비난에도 의연하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관조하며 볼 수 있다. 지혜는 사건의 전말, 사물의 본질,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있는 힘이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 3:15)
구세군 예배의 4가지 특징
구세군에는 3가지 특징과 2개의 기둥이 있다. 세 가지 특징은 첫째 신학적으로는 웨슬리아니즘 (Wesleyanism), 둘째 실천적으로는 전인구원 (Holistic Salvation), 셋째 조직적으로는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이다.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현재 구세군은 세계를 5개 지역으로 나누어, 131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영혼 뿐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진 ‘행동하는 교회’이다. 누군가 인간의 영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영혼을 질식 시키는 사회악(Social Evil)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긍정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요소도 많았다. 산업화와 도시화 현상으로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면서 사회구조의 변화로 많은 부작용이 일어났다. 감리교는 산업혁명 전반기, 구세군은 후반기에 탄생하여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두 개의 기둥은 ‘구원 (Salvation)과 성결 (Holiness)’이다. 구원이란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하고, 성결이란 구원받은 자가 구원 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다. 구원이 순간적인 성령의 인침이라면, 성결은 지속적인 성령의 인도함이다. 구원은 영혼구원을 넘어 전인구원, 개인구원을 넘어 사회구원까지 강조한다. 원래 구세군의 주일 오전예배는 성결에 초점을 맞춘 ‘성결회’ (Holiness Meeting)이고, 저녁예배는 구원에 초점을 맞춘 ‘구령회’ (Salvation Meeting)이다. 성결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령회는 ‘어떻게 구원을 받나’에 말씀의 중심을 두고 있다. ‘교회의 문턱’은 교회 안에서 보는 것보다 아주 높다. ‘구령회’는 그 문턱을 낮춘 예배이다.
예배 (禮拜)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 (worship, Service)라고 한다. ‘~에게 키스하다, 절하다, 엎드리다, 존경을 나타내다, 가치 있는 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라는 뜻이다. 예배란 존경과 경외감을 갖고 최상의 존재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수가성에서 사마라아 여인을 만났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하고, 자기 조상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어느 곳에서 드리는 것이 바른 예배인가를 물었다. 코로나 사태가 진행중인 오늘날 “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습니까?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질문과 같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드리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지니라”(요4:24) 이곳에 두 번의 “프뉴마”가 나온다. 첫째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이고, 둘째 프뉴마는 거듭난 ‘인간의 영’이다.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께 거듭난 영으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이란 죄로 인하여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 돌아가심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교회에는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예식을 지키는 교인도 있다.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종교생활을 하는 교인도 있다.
로마서 12장 1절에도 영적 예배란 말이 나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 (to Meet God) ‘하나님과 교제’ (to Meet with God)하며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배의 본질은 드리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드려야 하는가? ‘너희 몸’을 드리라고 했다. 몸이란 우리 자신을 드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몸을 드리는 것을 ‘헌신’이라고 한다. 가톨릭 사제의 서품은 완전하게 바닥에 엎드려서 받는다. 자신을 부인하고 철저하게 주님만을 따르겠다는 의미이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겠다는 결단이다. 예배의 본질은 같지만 각 교단마다 예배의 강조점은 조금씩 다르다. 구세군 예배의 4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자유 (Freedom)
예배는 구원받은 자의 특권이지 의무가 아니다. 의무는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하는 것지만, 특권은 자유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신앙 생활은 특권이고, 종교 생활은 의무이다. 구세군은 특별한 예배의 형식에 묶이지 않고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린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우리는 자유함으로 진리이신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둘째 기쁨 (Joy)
예배는 구원의 감사와 감격 속에서 주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은혜가 은혜인 줄 알 때 우리는 구원의 감사와 감격이 넘친다. 윌리암 부스는 “좋은 예배는 병사들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 구세군 안에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고 했다. 은혜와 은사 그리고 감사는 모두 ‘기쁨’ (카라)이란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은혜 받을 때 기쁘고, 은사 사용할 때 기쁘고, 감사할 때도 기쁘다.
셋째 참여 (Participation)
예배자는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이고, 운동장의 관중이 아닌 선수이며, 미술관의 관람자가 아닌 화가이다. 예배는 모두가 함께 드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예배 인도자가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구세군 예배에서 간증은 중요하다. 간증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다. 기쁨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누면 나눌수록 적어진다.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 없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도해 줄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넷째 자비석 (Mercy Seat)
자비석 (Mercy Seat)은 ‘법궤의 뚜껑’이다. 우리말 성경은 ‘속죄소’라고 번역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거기에서 만났다.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출29:42)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출 30:6)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민 17:4) 자비석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는 ‘은혜의 보좌’(히 4;16)이다. 외형적 자리보다는 회개와 헌신과 기도하는 자리로서 일대일로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이기 때문이다. 자비석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회개석 (Repentance Seat)’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성결의 단 (Holiness Alter)’이다.
시드니를 방문했던 ‘바울 선교회’ 대표인 이동휘 목사께서 설교 중 갑자기 교인들에게 질문했다. “여러분, 교회는 왜 오십니까?” 잠시 적막이 흐르다가 어느 한분이 대답했다. “은혜 받기 위해서 옵니다” “아닙니다. 교회는 예배드리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예배와 연관된 간증을 했다. 은퇴 후 집 가까운 작은 교회를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보거나’ ‘예배를 받으려’는 자기를 발견하고 많은 회개를 했다고 한다.
예배를 중심으로 3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 중심이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고, 사람 중심이면 예배를 보는 사람이고, 자기중심이면 예배를 받는 사람이다. 같은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사람은 예배를 드리고, 어떤 사람은 예배를 보고, 어떤 사람은 예배를 받는다. 예배는 보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윌리암 부스’를 통하여 구세군을 세우셨다. 많은 교단 중에 또 하나의 교단이 아닌, 구세군만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에 구세군을 창립하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깨닫고 구세군의 장점을 살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구세군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111 부흥기도운동에 대한 기대
호주 시드니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환기 사관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주의 종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발제할 주제는 ‘111 부흥기도운동에 대한 기대’입니다.
‘111 부흥기도운동’이란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져 사는 750만 한민족이 매일, 오후 1시에, 1분 동안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운동입니다. 현재 세계에는 750만 디아스포라 한민족이 있습니다. 미국 250만, 중국 240만, 일본 80만, 호주 18만 (영주권자 8만, 시민권자 5만, 학생과 주재원 5만), 이중 시드니에 10만 명 정도가 집중하여 살고 있습니다.
111 부흥기도운동은 세계가 물리적으로 인터넷으로 연결된 것처럼, 영적으로 기도로 연결하는 운동입니다. 20세기는 ‘지성과 과학의 시대’로 ‘IQ’가 중시되었고, 21세기는 ‘감성과 융합의 시대’로 ‘EQ’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IQ와 EQ를 어우를 수 있는 단어는 NQ입니다. ‘Network Quotient’입니다. IQ와 EQ가 개인의 지성과 감성이라면, NQ는 연합에 초점을 맞춘 ‘연합지수’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111 부흥운동의 주제 구절은 역대하 7장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111 부흥기도운동’은 악한 길에서 떠나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운동입니다. 부흥 · 기도 · 운동이란 3개 단어를 간단하게 요약함으로 오늘의 주제를 대신할까 합니다.
1. 부흥 (Revival)
부흥 (復興)은 영어로 ‘Revival’로 죽었던 것이 ‘다시 산다’는 뜻입니다. 부흥이란 단어는 회복, 재생, 소생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부흥’이란 단어는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 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부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야’, 헬라어는 ‘아나자오’입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뼈 골짜기의 환상에서 죽었던 뼈들이 다시 살아날 때 ‘하야’란 단어를 사용했고,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잃었던 아들이 돌아 왔을 대 ‘아나자오’라고 하였습니다.
2. 기도 (Prayer)
기도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이다’, ‘기도는 축복의 통로이다’, 역대하 7장 14절의 말씀을 의지하면 ‘기도는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대부분의 타락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선악과 사건도 그렇게, 바벨탑 사건도 그렇습니다. 천사장이었던 루시퍼의 타락 또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사 14장)
3. 운동 (Movement)
‘운동’이란 일회적인 ‘행사 (Event)’가 아니라 지속적인 ‘움직임 (Movement)’이고,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 지역에서 시작되지만 열방으로 퍼져 나가고,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로 이어갑니다. 양화진에 가면 캐나다 출신인 하디 선교사의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가 있습니다.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위대한 불씨로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이제 100주년을 맞아 다시 영적 부흥대각성의 불길을 사모하고, 그가 이 땅에 남기고 간 사랑하는 두 딸의 흔적을 기억하면서 이 비를 세워 역사에 뜻을 기리고자 한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가 부흥의 불씨가 되고, 길선주 장로의 회개가 부흥의 횃불이 되어 한국 교회는 세계 기독교사에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기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영적부흥운동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부흥의 높이는 회개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이제 부흥의 바통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넘겨졌습니다. 흩어져 사는 한민족이 기도로 하나 되어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하고, 다음 세대로 부흥의 바통 넘겨 주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소원을 품고 함께 기도하는 ‘111 부흥기도운동이 되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