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
오늘은 12월을 시작하는 첫날이자,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마지막 달이다. 어떻게 한 달을 시작하고, 어떻게 한 해를 마무리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간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이 세 번 나온다. 알파(Alpha, α)와 오메가(Omega, Ω)는 그리스 문자의 첫 번째와 마지막 글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란 뜻이다. 모든 일은 주와 함께 시작하고, 주와 함께 마무리해야 한다.
1) 요한계시록 1장 8절 :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이 되셔서 존재하는 모든 시대와 세대의 주가 되고 또한 재림 주로 오실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엘 샤다이'(El Shadhai)로 자기 계시를 하시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셨다. 창세기 17장에 99세인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이름을 ‘아브람’(Abram)을 ‘아브라함’(Abraham), ‘사래’(Sarai)를 ‘사라’(Sarah) 바꾸어 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열국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말씀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내 나이 100세, 아내는 90세인데 어떻게 출산하겠느냐”(창 17:15)고 했고, 사래는 18장에 천사가 사래에게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하자,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고 남편도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창 18:12)하며 속으로 웃었다. 그는 사라에게 되 질문을 했다.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 다음해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고 ‘이삭’이라고 했다. 이삭은 ‘웃음’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헛웃음’을 ‘진짜 웃음’으로 바꾸어 주셨다.
2) 요한계시록 21장 6절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목마름’의 비유는 성경에서 영적인 갈급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갈급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서 채울 수 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세상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다(암 8:11). 예수 그리스도는 갈급함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생명수’가 되신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다. 그녀의 관심사인 물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영생의 물로 그녀를 인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물이다. ‘값없이’는 사랑과 호의로 베푸시는 은혜이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3) 요한계시록 22장 13절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처음이란 단어는 ‘아르케’이다. ‘아르케’(arche)는 그리스어로 ‘처음·시초’라는 뜻으로, 원질을 의미한다. 철학의 아버지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탈레스’이다. 탈레스가 철학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세계와 만물의 ‘아르케’(arche)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처음으로 질문을 던진 사람이다. ‘아르케’는 단순히 어떤 순서의 처음이나 시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기원, 근원, 원천이란 의미다. 고고학을 영어로 ‘Archeology’라고 한다. 만물의 근원은 ‘빅뱅’으로 우연히 생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텔로스’로 시간이나 순서의 마지막 뿐 아니라, 모든 것의 완성을 의미한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 1:6).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다.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 ‘이신론’(Deism)이란 사상이 있다. 이신론(理神論)은 세상을 창조한 신은 인정하지만,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신은 인정하지 않는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신학이론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지, 이 땅에 계신 분은 아니다. 지금도 신앙인 중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아닌 이성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알파와 오메가’ 되셔서 인생의 ‘시작과 끝’을 불꽃과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다.
마라나타의 믿음으로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이다. 유대인들의 달력이 유월절을 기점으로 시작되듯이 기독교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된다.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을 의미한다. 대림절(대강절, Advent)은 ‘기다릴 대(待)’를 써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첫 두 주일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대, 나중 두 주일은 그리스도의 처음 오심을 맞이하는 기대를 주제로 묵상한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만날 때 마다 “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란 뜻의 ‘마라나타’하며 인사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에서 수많은 고난과 괴로움, 모순과 부조리를 겪으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마라나타’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기다림의 공동체’이다.
‘나다나엘 호손’이 쓴 ‘큰 바위의 얼굴’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어느 마을 산마루에는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 얼굴을 닮은 큰 바위가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유명한 장군이 나타나 마을의 소동이 일어났지만 아니었다. 어느 날은 위대한 정치인이 나타났지만 그 역시 아니었고, 글을 잘 쓰는 시인이 나타났지만 마찬가지였다. 마을사람들이 실망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마을 토박이 ‘어네스트’가 사람들을 격려했다. “우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다.” 붉은 저녁노을에 그의 모습이 비추이자 마을사람들 중 하나가 외쳤다. “어네스트를 보셔요. 저 사람이 바로 큰 바위의 얼굴입니다.” 큰 바위의 얼굴을 마음에 품고 기다리던 어네스트는 자신이 ‘큰 바위의 얼굴’이 된 것이다.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기다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작은 예수’이다.
1. 야고보(James)
성경에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3명의 ‘야고보’가 등장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큰 야고보),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작은 야고보),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쓴 책이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이기도 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에 헤롯 아그립바에 의하여 순교를 당했다. 그의 시신은 후에 스페인에서 발견되었다, 야고보는 헬라식 표기이고, 히브리식 표기는 야곱(Jacob), 영어식 표기는 제임스(James)이고, 스페인어는 ‘산티아고’(Santiago)이다.
스페인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 프랑스 남쪽 끝에 위치한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하여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야고보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stela)까지 800Km의 여정이다. 2019년 8월에 영국에 살고 있는 딸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했다. 하루에 27Km 정도씩 걸어서 1달 일정으로 떠났으나, 25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여 땅 끝 마을이라고 알려진 ‘피스텔라’(Fisterra)를 들린 후, 다음 목적지인 프랑스 테제공동체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2. 흩어져 있는 12지파
신약성서는 27권이다. 사복음서(4), 사도행전(1), 서신서 21권과 계시록(1)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신서는 ‘바울서신’ 13권과 ‘일반서신’(General Epistles) 8권으로 구분된다. 바울서신은 특정 수신자가 기록되어 있으나, ‘일반서신’은 특정개인이나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편지라는 뜻이다. 바울서신은 수신자의 이름이 책이름이고, 일반서신은 히브리서를 제외하고 발신자의 이름이 책이름이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서’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신앙의 실천, 신앙인의 삶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헤이스(Hayes)라는 신학자는 “야고보서는 신약 속의 구약이다”라고 했다. 핵심구절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약 2:26)이다. 행함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고, 자전거의 앞뒤 바퀴와 같다. 행함은 보이는 믿음이다.
3. 믿음의 시련(The testing of your faith)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뜻한다. 베드로는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도 귀하다”(벧전 1:7)고 했다. 믿음을 지키고, 믿음대로 살고, 믿음을 전파하다가 당하는 어려움을 뜻한다. 성서는 Testing(Trials)은 시련이고, Temptation은 시험이라고 번역했다. 두 단어 모두 어려움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로 Test는 외적 어려움이고, Temptation은 인간의 욕심에 기인한 내적 유혹이다(약 1:14). Test는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우리를 온전하게 구비한다(약 1:4). 1장 12절의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 ‘시험’은 ‘Trial’로 ‘생명’으로 인도하고, 13절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에서 시험은 ‘Temptation’으로 ‘사망’으로 인도한다.
4. 환란은 소망을 이룸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5). 시대가 악할수록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된다. 여기서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인내는 막연하게,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의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다림의 대상이었던 우리가, 이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인으로 성숙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쁨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국화 옆에서 – 서정주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 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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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