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호주의 역사를 아십니까?
역사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사관이 내일을 위해 기록한 글이다. 호주 역사는 기독교 역사이다. 호주는 기독교 국가로 출발하여 유산의 대부분은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호주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가 되면서 더 이상 신양교육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종교적 접근’이 아닌 ‘역사적 접근’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신앙교육을 할 때가 되었다.
1788년 1월 26일은 ‘호주의 날’(Australia Day)이다. 이날은 호주 주요 도시에서 각종 크고 작은 기념행사가 열린다. 하지만 호주 원주민 관련 단체는 자신들의 땅을 침략한 ‘침략의 날’(Invasion Day)로 규정하고 시위를 벌인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사회, 경제, 정치 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가지고 왔다.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도시빈민, 실업자, 범죄자, 알코올 중독자,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 착취, 환경오염 등의 예상치 못한 많은 사회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전반기에 탄생한 교단이 감리교이고, 후반에 탄생한 교단이 구세군이다. 기존교단이 개인의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선교했다면, 그 영혼을 질식 시키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죄수들이 차고 넘치자 영국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어, 대안으로 해외에 ‘유형 식민지’(Penal Colony)를 개척하기로 결정한다. 초창기에는 미국으로 보냈으나, 1776년 미국이 독립하면서 더 이상 죄수들을 미국으로 보낼 수 없게 되었다. 1787년 아더 필립(Arthur Philip) 제독의 지휘하여 11척의 배에 778명의 죄수(192명 여자, 586명 남자)를 포함한 약 1500명의 인원을 탑승한 첫 함대가 8개월의 항해 끝에 ‘보타니 베이’(Botany Bay)에 1788년 1월 18일에 도착하였다. 필립 제독은 ‘보타니 베이’가 정착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어서 근처 지역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1788년 1월 21일, 필립 제독은 맨리(Manly)에 갔다. 그는 원주민을 만나게 된다. 그는 그들의 자신감과 남자다운 행동으로 그곳 이름을 ‘맨리 코브’로 지었다. 맨리 선착장 바로 옆에 “1788년 1월 21일 맨리에 온 최초의 백인” 이라고 새겨진 필립 제독의 기념비가 있다. 드디어 1788년 1월 26일, 지금의 ‘The Rocks’ 에 영국기를 게양하고, ‘영국 내무부장관'(British Home Secretary)이었던 ‘로드 시드니'(Lord Sydney)의 이름을 기념하여 ‘시드니'(Sydney)로 명명하였다.
1788년 1월 26일 도착하고, 2월 3일 첫 번째 주일예배를 드렸다. 교단은 성공회만 인정하였다. 성공회 목사였던 ‘리차드 존슨’에 의하여 첫 예배가 드려졌다. 1793년에 첫 번째 교회가 건축되었으나, 5년이 지난 1798년 죄수들이 일으킨 화재로 소실되었다. 죄수 중에는 가톨릭교인도 있었고, 장로교인도 있었고, 불신자도 있었다. 호주의 정착민의 종교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영국의 상황을 알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가 ‘영국’이라 불리는 발음은 ‘England’에서 왔다. 영국은 England, Scotland, Island, Wales 4개의 왕국(Kingdom)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이다. 영국은 England 주도로 연합된 UK(Untied Kingdom)이다.
영국은 기독교 국가지만 서로 교단이 다르다. England는 성공회, Scotland는 장로교, Island는 가톨릭이다. 호주에 온 죄수들은 서로 다른 교단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점차적으로 타교단의 예배가 인정 되었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교회는 1809년에 건립한 에벤에셀 장로교회이다. 1977년 감리교, 장로교, 회중교회가 통합하여 ‘연합교회’를 만들면서 지금은 에벤에셀 연합교회가 되었다. 교단별로 보면 성공회는 필립 제독을 기념하여 건축한 ‘성 필립 교회’, 가톨릭은 ‘성 마리아 교회’이지만 화재로 소실되고,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페트릭 교회’가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록스 광장에는 사암(Sandstone)으로 만든 기념탑이 우뚝 서있다. 탑에는 초기 정착민을 대표하는 3 종류의 사람이 그려져 있다. 한쪽은 죄수들이다. 초기 죄수들은 마치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종일 노동을 하고, 특별한 잠자리도 없었다. 1820년에는 주정부는 스탬프가 찍힌 노란색 옷을 지급해 주었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호주는 죄수가 개척하였고, 뉴질랜드는 간수가 개척하였다.” 그래서 호주를 ‘유형식민지’(Penal Colony)라고 한다. 호주는 6개 주(State)와 2개의 준주(Territory)로 구성되었다. 이중 남호주(South Australia)와 빅토리아(Victory)는 ‘자유 식민지'(Free Colony)이다. 죄수가 아닌, 자유인이 개척했다고 해서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다른 쪽은 병사이다. 첫번째 함대는 211명의 해병대가 왔다. 이들의 의무는 정착을 도와주고 죄수들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영국은 상주하는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1790년 두번째 함대에 강력한 군사 100명을 더 파견하였다. 당시 영국 식민지 중에 가장 큰 부대가 조지 스트리트에 있었다. 1793년, 장교들은 땅을 분할 받아 농지를 만들었다. 병사들은 정착민들과 같은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또 다른 한쪽은 정착민이다. 필립 총독은 계속해서 영국에 경험 있는 농부와 기술자 그리고 감독관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드디어 1793년에 11명의 자유 정착민이 도착했다. 필립 총독은 해방된 죄수와 병사 그리고 정착민에게도 땅을 나누어 주었다. 1788년 – 1830년 사이에 63000명의 죄수와 14000명의 자유 정착민이 호주에 왔다. 1840년부터 NSW 주가 죄수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타스마니아로 많은 죄수들이 이송되었다. 마지막 죄수 호송선은 1868년 서 호주에 도착한 ‘Hougoumont’ 호이다. 1788년부터 1868년까지 80년 동안 죄수 162,000명이 호송되었다. 모두가 영국에서 온 죄수들은 아니다. 시드니에 ‘카나다 베이’가 있다. 카나다에서 온 죄수들이 살았던 지역을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사관이 내일을 위해 기록한 글이다. 과거가 없는 현재도 없고, 오늘이 없는 내일도 없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점과 같다. 점에는 방향성이 없다. 점과 점이 연결되면 선이 되어 방향성이 생긴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가? 현재의 점과 과거의 점을 연결하면 선이 되어 내일의 길이 보일 것이다. 사건은 객관적이지만 사관은 주관적이다. 오늘 내가 나의 과거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내일의 내 길이 달라질 것이다.
축도란 무엇인가?
축도란 영어로 ‘Benediction’입니다. ‘Bene’란 말은 ‘Good’이란 뜻이고, Diction이란 ‘Words’란 뜻입니다. 축도(祝禱)”를 한자어 뜻대로 보면 “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Benediction’의 기원을 민수기 6:22-27와 고린도후서 13:13절 등에서 근거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6:22-27절에 하나님께선 모세를 통해 아론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복을 선포하라”고 하였고, 고후 13장 13절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축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번역에는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새번역에도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등으로 기원을 합니다.
축도에는 ‘선포와 기원’의 두 가지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축도는 보통 담임 목회자가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목회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성경에 ‘축도권’이란 말은 없습니다. 한국에서 축도는 안수 받은 목회자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서양에서는 평신도도 축도할 수 있습니다. 축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 아닙니까? 누가 목회자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합니까? 만약 민수기 6장의 제사장인 아론의 예를 든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항 반박문을 걸면서 개신교의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개신교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라는 3개의 기둥 위에 신학이 정립되었습니다. 기둥 하나를 더 첨부한다면 ‘만민제사장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지성소의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라고 했습니다.
축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으로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 받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상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상으로 살았습니까? 아니면 은혜로 살았습니까? 여러분의 노력으로 지금 이곳까지 이르렀습니까? 아니면 내 노력과 관계없이 여기에 이르렀습니까? 제는 여러분을 만나 같은 교회를 섬길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만나 함께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살았던 것도 은혜이고 사는 것도 은혜이고 살아갈 것도 은혜로만 사는 것입니다. 오래전 중국 흑룡강성에 혜림에 간적이 있습니다. 머무는 호텔 리셉션에 복자가 거꾸로 쓰여 있었습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들도 복은 인간적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성경의 율법은 613개입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말라가 365개, 하라가 248개입니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10계명이고, 10계명을 요약한 것이 위로는 하나님 사랑, 옆으로는 이웃사랑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관계이고 신상생활은 인간과 관계입니다.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도 사랑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34-35)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베드로를 찾아가 3번씩이나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롬13:10) 했고,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 쫓는다“(요일4:18)고 했습니다.
3. 성령의 교통
교통이란 헬라어는 “코이노니아(koinonia)”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교통, 친교, 교제 등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보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코이노니아는 친교(fellowship), 참여(participation), 연합(communion) 등으로 번역합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세 방향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의 교통이고, 둘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의 교통을 이고, 셋째는 사람과 자연의 교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문화명령’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땅의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창1:28)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자연을 잘 다스리고 하신 것이지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직면하고 있는 코로나 사태는 잘못된 자연과 잘못된 교통으로 인한 ‘자연의 역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성령의 교통’으로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성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롬8:9)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이다. 우리가 ‘성전’인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부패하는 세상의 방부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4), 그리스도의 편지(고후3:3)라고 했다.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은 박해 속에서 예수를 믿었다.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은 네로 황제 이후이다. AD 64 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한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네로는 화재의 원인을 크리스천에게 돌려 희생양으로 삼았다.
313년 기독교는 대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312년에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로마의 권력을 두고 밀비안에서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다.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꿈속에서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깃발을 들고 가면 승리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는 꿈에서 본 십자가를 제국의 깃발로 사용하여 승리한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에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공인’이란 로마가 인정하는 종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전까지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가 아니었다.
392년(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다. 국교가 된다는 것은 로마가 지배하는 모든 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되고, 백성들은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이후 기독교는 양적으로 급성장했지만, 질적으로 순도는 엄청나게 떨어졌다. 교회는 세속화되고 교인은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392년을 기점으로 ‘교인과 그리스도인’은 구분이 애매하게 되었다. 로마가 지배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교회를 다녀야 했고, 핍박을 받을 때는 분명히 구분이 되었지만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교인과 그리스도인의 구분이 불분명하게 된 것이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많이 나올 것 같은데 단 3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었던 사람이다. 그들의 신앙은 순수했고, 자신의 생명보다 예수가 먼저였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첫째 : 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The disciples were called Christians first at Antioch.)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하여 안디옥에 정착하게 된다. 안디옥에 파송된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바울을 데려와 공동목회를 한다.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안디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스스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일컬음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는 뜻이다. 안디옥 사람들은 자기들과 언어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 이상한 사람들이란 의미로 비하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오늘날의 예수쟁이와 같은 말이다. 그들은 안디옥에 살고 있지만 안디옥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다. 하늘의 시민권을(빌3:20) 가지고 이 땅에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둘째 : 행전 26: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Then Agrippa said to Paul, “Do you think that in such a short time you can persuade me to be a Christian?“)
아그립바는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대왕의 증손자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사마리아와 유대 지역은 로마가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를 했고, 나머지 지역은 아그립바가 분봉왕으로 통치를 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울은 예루살렘 유태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심문을 받게 된다. 바울을 자신이 로마시민임을 밝힌다. 예루살렘의 천부장은 이 가이사랴에 있는 베릭스 총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밤에 그를 유대인들 모르게 가이사랴로 이송한다. 베릭스 총독은 바울을 심문하여 보니 아무런 죄가 없으나,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을 2년 동안 구금했다.(행24:27) 베릭스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고,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한다.(25:1)
베스도는 바울을 심문하지만 아무런 잘못을 발견하지 못한다. 바울은 그에게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을 것임을 밝혔다. 그가 부임한 것을 알고 아그립바가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온다.(26:13절)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바울을 만날 것을 권유한다. 아그립바 역시 바울을 만나고 싶어 했다.(25:22) 이 때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다메섹 도상의 있었던 일에 대하여 말했다.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자신이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복음을 증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에게 말했다. 너무 논리정연하고 확신에 찬 바울의 간증을 듣고 놀라며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울은 다시 말한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26:29)
셋째 : 벧전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However, if you suffer as a Christian, do not be ashamed, but praise God that you bear that name.)
베드로는 ‘소망의 서신’이다. 다가올 박해에 대비해 신자들로 하여금 구원의 소망을 갖고 인내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쓴 글이다. 세상에 고난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광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난이 삶의 일부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면 회개해야 겠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이란 믿음대로 살다가 당하는 고난이다. 베드로는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벧전1:7)했다. 또한 그는 고난을 만날 때 회피하거나 도망하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하며 기뻐하라고 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단어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나는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생각나는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차고에 들어간다고 다 차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고난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