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화성남자 금성여자의 결혼 지키기
오래 전에 ‘화성남자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었다. 그 후에 ‘화성남자와 금성여자의 관계 지키기’를 읽었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관계적이다. 한자로 인간은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이다. 한자는 상형문자이다. 인(人)은 혼자서 존재할 수 없어 둘이 하나를 이루는 모양이다. 인간은 안으로는 나와 나의 관계, 위로는 하나님과 관계, 옆으로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산다. 그레이는 관계의 출발은 자기사랑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는 첫 장 첫 페이지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들도 당신을 사랑하기가 몹시 어렵다. 당신이 그토록 원하고 또 마땅히 누려야 할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경에 율법사가 예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예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였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가 없게 된다. 자기 사랑의 근거는 나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레이는 부부사이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동안 가슴 속에 억눌려 있던 분노와 고통, 두려움, 죄책감 따위를 모두 쏟아 버리도록 노력하라. 그렇게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다 말해 버리고 나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랑이 되살아날 수 있다.” 그는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진실을 말하는 능력에 정비례하고, 상대방에게 감명을 주는 솔직한 대화를 바탕으로 맺어진 진솔한 인간관계는 애정과 긍지의 원천이 된다고 했다.
나는 그의 주장에 토를 달고 싶다. 들어서 약이 되는 말이 있는가 하면, 병이 되는 말도 있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지 않은가? 같은 사건이지만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 자신도 “금성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화성에서 사용하는 언어에는 꼭 같은 어휘들이 존재하는데, 문제는 그 어휘들이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데 있다.”고 했다. 남자는 화성인이고 여자는 금성인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언어와 사고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해부학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역시 다르다” 상호의 차이를 존중하거나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관계가 틀어진다. 사랑에 빠지기는 쉽지만, 사랑을 지키기는 어렵다. 결혼은 일회적인 사건이지만, 결혼생활은 지속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차이점은 스트레스에 반응하는데 그들만의 방식이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여성적 인식은 비교적 주관적, 혹은 감정적으로 스트레스에 반응하는데 반해 남성적 인식은 보다 객관적 혹은 분석적으로 스트레스에 반응한다.” 남성의 인식은 주로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있고, 여성의 인식은 내적이고 주관적인 세계에 보다 관심이 있다. 그레이 박사는 남녀 차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존중이야말로 갈등을 봉합하고 사랑을 재확인시킬 수 있는 핵심이란 점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레이 박사는 투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배우자의 어떤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에게 그런 일면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부부관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어기제는 투사와 투사적 동일시이다. 투사를 통해서 상대방을 탓하며 책임을 전가하고,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서 자기를 정당화하고 상대방을 통제하려고 한다. 문제는 서로가 옳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하기에 결론이 없는 부부싸움은 계속 되풀이 된다. 서로는 타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자기가 변화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레이 박사는 부부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편지 쓰는 것을 제안했다. “사랑의 편지 기법은 당신 내부에서 혹은 남과의 관계에서 빚어진 감정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철저히 진실만을 말할 수 있게 하는 최후의 방안이다.” 편지를 쓸 때는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다. 감정 자체에 대한 판단을 접어두고 자기의 감정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편지를 쓰면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고,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긍정적인 감정만이 좋은 감정이고 지향해야 할 바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피하고 억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이란 ‘E+motion’으로 행동하게 하는 힘이다. 감정은 물위에 떠있는 고무풍선과 같다. 누르면 누를수록 더 반발한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신체화 된다. 일상적인 우울증은 대부분의 경우 내적으로 전환된 분노이다.
영어에 ‘일치 혹은 하나’란 뜻의 ‘Uniformity와 Unity’란 말이 있다. Uniformity는 같기 때문에 하나이고, Unity는 다르기 때문에 하나이다. 화성남자와 금성여자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남자는 목표 지향적이고, 여자는 관계 지향적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부부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때 하나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너를 통해서 나를 본다. 왜곡된 거울을 보는 사람은 자아상도 왜곡된다. 좋은 상담자는 좋은 거울이 되어 왜곡 없이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미운오리새끼가 아니라 백조임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다. 존 그레이 박사는 ‘화성남자 금성여자의 결혼 지키기’라는 책을 통하여 좋은 상담자의 역할을 했다.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 심리치료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의 본능적 욕동에 관계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대상에는 외적 대상과 내적 대상이 있다. 대체로 내적 대상들은 의식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원초적 경험으로서, 무의식적 환상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내적 대상에 대한 개인의 느낌은 사랑하는 외부 세상들, 즉 가족들과의 연결을 통해서 강하게 전달된다. 클라인의 이론의 중심에는 내재화된 대상관계 개념이 있다.
클라인이 대상과의 관계를 강조했기 때문에 그녀의 견해는 ‘대상관계이론’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어린아이 연구에서 클라인은 무의식적인 환상이 그들의 초기 정신 안에 편재해 있으며, 모든 아이들의 환상과 대상이 역동적인 영향을 기친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상을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보는 이런 견해는 리비도 발달 단계 이론에서 대상관계 발달의 이론으로 그 강조점이 변하는 상황과도 연결되었다.
1) 환상
어린아이에게 환상은 곧 사고이다. 어떠한 행위, 사물에 대한 사고, 대상관계 등에 대한 아이의 관념은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 따라 조형되는 환상작용이다. 아이의 환상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추론이나 심리상태로 구성되지 않으며 그러한 시각으로 접근해서 파악할 수도 없다. 클라인은 어떤 환상을 언급하기 위해 ‘가슴’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 같다. 생후 초기부터 유아들은 자극에 대해 즉각적인 환상으로 반응한다. 좌절을 포함한 불쾌한 자극에 대해서는 공격적 환상으로, 만족감을 주는 자극에 대해서는 유쾌한 환상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최초의 대상으로서 어머니의 젖가슴이 주는 충족과 좌절은 유아의 내,외적 세계를 조형하며 이 역동적 상호과정은 환상작용과 결부된다.
특히 클라인 정신분석에서 환상에 관한 논의는 모든 정신적, 심리적 행위에 이미 대상관계가 내재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출발한다. 충동과 충동의 대상 그리고 환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클라인에게 환상은 충동의 정신적, 심리적 표현으로서 이미 내제되어 있다고 가정하며, 따라서 처음부터 충동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본다. 환상은 인간의 정신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메타심리학 임상 개념으로 심리내적 구조와 외적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심리적 현실이다. 클라인은 ‘의식적 환상'(Fantasies)과 구별하기 위해서 ‘무의식적 환상'(Phantasy)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클라인은 부모의 실제 행동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부모의 실제 위협만큼이나 아이 자신의 죄책감이나 불안 때문에 아이가 성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억압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무언가를 생각하면 그것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아이는 성적 환상에 대한 불안해하고 그것을 감추려는 동기를 지닌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2) 포지션의 개념
클라인은 인격의 성장 과정을 두 가지 단계로 보았다. ‘편집-분열자리’(paranoid-schizoid position)에서 ‘우울자리’(depressive position)으로 성장해 가고 이런 과정이 생후 1년 이내에 거의 완성되어 버리며 일생을 반복한다고 보았다. 클라인은 성장의 단계(phase)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자리 (position)이라는 용어를 썼다. 그 이유는 성장이란 계단을 오르듯이 한 계단을 오르면 다시는 그 단계가 나타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입장을 바꾸듯이 상황에 따라서 일생 동안 왔다 갔다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클라인의 포지션의 개념은 프로이드의 단계 개념과 다르다. 클라인은 하나의 관심사에서 다른 관심사로 계속해서 옮겨 가고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편집-분열 포지션과 우울포지션을 불안에 대처하는 상이한 방식으로 기술하였다. 클라인은 발달초기의 단계에서 자신의 공격성에서 기인되는 공포와 박해불안이 지배하는 단계를 편집적(paranoid) position라고 불렀으며, 이 후 분열에 대한 페어베언의 연구를 참고하여 자신의 이론을 편집-분열(schizoid) position라고 수정하였다. 우울적 포지션은 편집-분열적 자리에 뒤이어 나타나는 주요한 발달 단계로서, 이 단계에서 대상에 대한 사랑과 증오, 대상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 대상의 다른 부분적 표상들 그리고 외적 현실과 심리내적 현실 또는 환상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편집-분열 포지션에서는 부분-대상을 다루는 반면, 우울 포지션에의 영향 아래에서 유아는 전체 대상에 대해 훨씬 더 깨닫게 된다. 편집-분열적 자리에서의 주된 정서가 박해 불안이라면, 우울적 자리에서의 주된 정서는 대상을 염려하는 우울 불안이다.
3) 투사적 동일시
클라인은 ‘투사적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란 용어를 처음으로 썼다. 투사적 동일시 개념은 반드시 언어의 개입 없이도 감정과 정서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교류를 이해하기 위해 이제 많은 상황에서 활용되는 수단을 제공한다. 비단 정신분석적 출처만이 아니라 융 학파, 게슈탈트, 부부 및 가족 상담, 조직 역동 및 문학 사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신분석, 심리치료 및 상담에 미치는 클라인의 영향은 그녀의 제자들과 피분석자들의 작업을 통해 고찰되어 왔다.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는 상상을 통해 자신의 분할된 부분을 타인에게 돌리고(투사, projection), 외부에서 일어난 일을 자신에게 생겨난 일로 여겨(내사, introjection) 타인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내적인 상황을 통제하려는 상태이다. 투사적 동일시는 편집-분열 포지션에서 많이 사용되는 기제 또는 환상의 집합이다. 비온은 아기가 어머니에게 감정을 유발할 때 투사적 동일시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상연될 수 있는지 기술하였다. 어머니와 아기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이리저리 동요하는 감정에는,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가 투사적 동일시가 포함된다. 투사적 동일시 개념은 클라인 학파 분석가의 연구에 있어서 중대하다. 자기의 부분이 환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은 효과를 지닌다.
4) 에로스와 타나토스
클라인의 기본적인 가정은 프로이트의 ‘죽음의 본능’(타나토스)과 ‘생명의 본능’(에로스)의 가설에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특히 죽음 본능의 표현인 타고난 공격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클라인은 아이가 젖가슴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것이 부재할 경우, 아기는 그것을 단순한 결여로서가 아니라 가학적인 대상이 능동적이고, 의도적으로 움켜쥐고 주지 않는 것으로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좌절은 편집증적 박해 환상으로 발전된다. 시기심은 탐욕을 일으키고 또 그 탐욕을 강화한다. 구강기적 탐욕은 나중에 일반적인 남근 선망 및 이성에 대한 선망의 토대가 된다. 시기심은 결국 다른 사람의 창조성에 대한 시기심으로 발전되고, 그 시기심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됨으로 해서 자신의 창조성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특수한 유형의 죄책감으로 발전된다. 창조성에 대한 이러한 무의식적 죄책감은 나중에 오이디푸스적 죄책감을 일으키는 소인이 된다고 한다.
생명 본능 역시 생애 초기부터 만족스러운 대상, 일차적으로는 좋은 젖가슴과의 즐거운 접촉 가운데 표현된다고 한다. 이러한 대상에 리비도가 투자되면서 내적 대상으로 내재화되는데, 이 내적 대상에는 최초의 사랑의 표현을 나타내는 정서가 스며들어 있다. 만족스럽고 좋은 젖가슴에 대한 환상은 자아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동일시되거나 좋은 내적 대상으로 내사된다. 좋은 내적 대상을 지각의 장에 나타난 새로운 대상 안으로 투사하여 신뢰감의 토대를 쌓고, 현실과 학습과 지식을 탐구하려는 욕구를 형성한다. 만족스러운 경험은 기본적 신뢰감을 강화하고, 리비도를 표출시키며,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의 상대적인 균형에 영향을 준다. 좋은 대상이 투사되고 다시 내사되는 순환을 통해 심리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좋은 내적 대상은 자아의 통합을 촉진하게 된다.
인간이 가진 한계의 궁극적 벽인 죽음은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이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에만 삶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죽음과 삶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나는 미켈란젤로의 말을 좋아한다. “삶이 즐겁다면 죽음도 그래야 한다. 그것은 같은 주인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 클라인도 인간의 심리를 흑과 백 혹은 악과 선 등의 이원론으로 분석하지 않고, 본성의 그 모습 그대를 수용하고 인정하며 탐구한 것 같다.
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는 하나님은 무한자이고 인간은 유한자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유한성은 상실을 통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존재와 실존은 다르다. 존재는 있는 것이고, 실존은 있음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물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한다. 실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실존의 의미를 하나님 없이 찾으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고, 하나님에게서 찾으면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믿음의 어머니들
오늘 호주는 Mother’s Day, 한국은 어버이날이다. Mother’s Day의 유래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웹스터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그 교회에 주일학교에서 26년간이나 꾸준히 봉사해 온 ‘앤 자비스(Ann Reeves Jarvis)’라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가르침을 잊지 못한 제자들이 선생님인 자비스 부인을 기념하기 위한 추도식에 딸인 ‘안나 자비스’가 초청을 받아 말씀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 1930년 6월 15일 구세군 가정단에 의해 어머니 주일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어머니주일의 정신을 국민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56년 국무회의를 거쳐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공포하였다. 그 후 1973년에 이르러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주는 5월의 둘째 주일은 Mother‘s Day, 9월의 첫째 주일은 Father’s Day로 지킨다.
1. 이삭의 어머니 – 사라
사라는 처음에는 사래라고 불렀으나 이름을 고쳤다(창17:15). 본래 아브함의 이복 누이동생이었는데 아브라함의 아내가 되었다. 애굽에 내려 갔다가 그녀의 미모 때문에 애굽 왕 바로의 궁에 불려 들어갔던 일도 있다(창20:1-5). 신약성서에서 사라를 경건한 아내의 표본으로 삼았다(벧전3:6). 믿음으로 산 신앙 인물의 본보기로 예시되었다(히11:11). 그녀는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대로 고령에 이르러 이삭을 낳아 이스라엘 자손의 조상이 되었다(창20:1-2)
2. 야곱의 어미니 – 리브가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고향 출신의 처녀로서, 아브라함의 조카 브두엘의 딸이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때 그에게 뿐 아니라, 그의 약대에게도 물을 줄 수 있는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웨이터의 법칙이 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보다 웨이터에게 잘하는 사람과 계약을 해야한다는 법칙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리브가는 아브라함처럼 일가친척이 기반을 닦고 살던 땅을 과감하게 떠나 이삭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20년 동안 임신하지 못하다가 남편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해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고,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12족속이 시작되었다.
3. 요셉의 어머니 – 라헬
라헬은 라반의 둘째 딸이요 레아의 동생이고, 야곱의 아내이자,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이다. 라헬은 미모가 드러나게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야곱이 하란 근교 우물가에서 외삼촌 집으로 피신해 가다가 라헬을 처음 대했을 때 야곱이 그를 사랑할 만큼 그 외모가 아름다웠다. 야곱이 라헬을 위해 7년을 봉사할 때 수일같이 여겼다고 밝히고 있다. 야곱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11명의 아들과 딸 디나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여행하는 도중에 베들레헴 부근에서 베냐민을 낳고 난산 끝에 죽고 그곳에 장사 되었다(창 35:16-20).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