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목사의 특별기고
세대 전수
우리나라는 요즘 남, 북이 나뉘어진 것뿐 아니라 젠더 이슈로 남, 녀가 나뉘어 있고 좌파 우파가 나누어져서 지속적인 다툼을 하고 있다. 오랜 이념의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 영향을 끼쳤던 것이 지속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가족 치료(family therapy 가족을 치료하는 이론)에서 말하는 ‘세대 전수 (generational transmission)’ 라는 개념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 지를 보게 된다. 지금의 우리 나라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최근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를 이어져 내려온 갈등의 산물임을 보게 되고 누군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 (trauma외상, 상처) 와 관련된 경험이기에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부분들이라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현재의 삶에서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현재에 일어나는 고통자체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고통이 현재의 고통과 맞물려 더 큰 고통과 재앙으로 경험되어지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가족치료를 하다 보면 가계도 (family genogram)를 그리게 된다. 한 가족이 현재의 어려움을 왜 경험하고 있는 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한 사람이 속해 있는 가정의 삼 세대에 걸친 또는 이 세대에 걸친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신기하게도 많은 문제들이 세대를 타고 반복되어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것은 가계에 내려오는 잘못된 정서적 경험이나 중독적 양상에 대하여, 건강하게 인식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고치기 위한 개입 방법들이 있지 않으면 여전히 계속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례로 어떤 사람의 가계도를 그려보니 조부모가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보니 아버지도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리고 자신도 술과 담배를 하는 중독자다. 그 뿐 아니라 조부모님이 이혼을 하셨는데 부모님도 이혼을 하였고 자신은 현재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세대를 타고 반복되는 문제들이 지속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는 사회복지사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잘 생기고 전문 직업을 가지고 있고 부모님도 인격적으로 좋은 분이라고 한다. 삶에서 나무랄 부분이 없고 그렇다고 큰 상처로 보이는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안정되어 보이는데 신기하게도 그 청년은 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한다.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사회 봉사 차원으로 작은 마을에서 연극을 운영해서 하기도 하는데 죽고 싶은 생각이 끊이지 않게 자신을 괴롭힌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길래 필자는 그 복지사님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그 부모님 가족이나 조부모님 가족의 가계도를 그려본 적이 있으신 가요? 그리고 그들 중에 죽음과 관련된 이슈가 있지 않나요? 라고 물어보았더니 신기하게도 그 젊은이의 할아버지가 자살을 했고 그 젊은이의 어머니의 자매, 즉 이모 중의 한 사람도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죽음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된 것이 그냥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세대를 통해서 전수된 ‘자살’ 이라고 하는 해결되지 않은 이슈가 그 가정안에 무의식적인 영향력으로 세대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분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아내의 옷 값이 얼마냐고 밝혀야 하는데 재판관이 밝히라고 판결을 내렸는데 항소를 했다”고 하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필자는 “영부인이 비싼 옷을 입는 게 당연한 데 왜 사람들은 그 옷 가격을 그렇게 알려고 하냐!” 그게 왜 문제가 되냐!” 고 물었다. 그 분이 하는 답변은 “그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이 비싼 옷을 입는다고 맹 공격을 이전에 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문제를 삼는 것이다 “라고 답변을 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사람들의 심리에는 당한만큼 되갚아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건강하게 잘 다루지 못하게 되면 세대에 걸쳐서 자꾸 반복되는 악순환이 될 수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맞으면서 학대가운데 자란 자녀가 커서는 자신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생각 외로 많다는 것도 종종 보게 되는 같은 원리다.
상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대적인 트라우마를 반복하게 만들뿐 아니라 특별히 사람들의 생각을 고정관념으로 묶어서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과거에 전쟁을 경험하고 공산당에게 너무나 고통을 극심하게 당한 삶을 기억하는 60대 이상의 부모님들은 사회주의를 끔찍히 싫어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우파를 지지한다. 그에 비해 민주 운동과 수많은 민주 항쟁을 하면서 죽음을 경험한 시대를 살아왔던 40대 중반, 50대의 많은 사람들은 무조건 좌파를 지지한다. 나의 성향이 우파라 할지라도 우파가 잘못하는 부분들이 보이면 그것에 대해서 바른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하고 나의 성향이 좌파라 할지라도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 보이면 그것을 분별할 수 있고 융통성 있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무조건 내가 지지하고 있는 파가 지향하는 바가 다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많다. 이런 흑백논리 (Black and White logic), 파국적 사고 (catastrophic thinking)와 같이 고정되고 융통성 없는 사고 때문에 분열과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이제는 그것이 젊은이들에게는 젠더 이슈 (gender issue 성별 이슈)로 이어지고 있다. 모양은 다르나 같은 맥락의 문제가 세대를 이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떻게 해야 세대전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흑백 논리와 같은 융통성 없는 사고 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 결국, 누군가는 반복되는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하고 의도적인 노력으로 융통성 있는 사고를 실천해야 이것들이 바꾸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 부모가 나를 돌보지 않았다고 나도 똑같이 자녀를 돌보지 않는다면 나는 세대 전수되는 문제를 가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경험되어진 사람들에게는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애플의 창시자였던 스티브 잡스는 사생아로 태어나 부모님에게 버림을 당하고 입양아로 자랐는데 자신도 젊은 시절에 사생아를 낳고 그 아이를 버리는 반복적인 세대적인 전수의 삶을 살았던 것을 보여준다.
이런 건강하지 못한 삶을 세대를 이어 반복적으로 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부모를 탓하고 역사를 탓하고 과거를 탓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내 안에 있는 문제들을 바로 인식하고 나의 과거가 그랬기에 지금의 나는 이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용서와 화해로 치유와 변화로 과거의 나의 가족들이 살아온 삶을 부인하며 나는 다르게 살아가려는 피땀 어린 노력이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이런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가끔 상담소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구할 때 필자는 마음이 너무 기쁘다. 이런 케이스 중 한 사람의 상담이 이번에 종결이 되었는데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많이 받으시던 분이셨는데 자신도 가족을 학대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래서 가족들이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보통은 가해자인 분들이 먼저 상담소를 찾는 경우가 잘 없는데 이 분은 자신이 바뀌어지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상담소를 찾았고 자신은 상담을 엄청 길게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면서 상담을 시작했는데 거의 일년 만에 회복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너무 많이 좋아져서 상담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말을 해서 상담을 종결하게 되었다.
세대 전수를 끊는 과정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나 자신을 바꾸려고 하는 태도만 갖고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바라기는 좀 더 건강한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정치에도 참여하여 공격과 다툼이 아닌 화합과 성장이 세대전수 되어지기를 바라며 우리 각자가 먼저 악한 세대 전수의 영향력을 끊는데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행
여행에 대한 책에서 이런 글귀가 마음에 닿았습니다. “여행은 본질로의 회귀이니, 자주 떠나라! 장소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기 위해 떠나라.”
새벽에 잠을 깨우는 핸드폰의 알람음을 시작해서 우리는 바쁜 일과를 시작합니다. … 아침부터 분주하게 아이들 도시락을 챙기고 먹고 일터에 갑니다. 도착하면 이 메일을 열어서 클라이언트나 동료들의 요구를 확인하고 그것에 반응하고 학교의 행정일을 처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약속한 사람들과 연락하고 그들에게 동기 부여를 합니다. 그렇게 열심을 다해 맡은 일을 하고 또 관계의 얽힌 다양한 사건들을 듣고 나면 점심은 언제 지나갔는 지 벌써 어느 덧 아이들이 돌아오는 시간이 됩니다.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에게 간단한 일들을 지시한 후 사무실에서 하던 일을 조금 더 합니다. 가끔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또 들어줍니다. 사람들이 좋아졌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뿌듯함과 삶의 감격을 느낍니다. 그리고는 몸과 마음이 얼마나 지쳐 있는 지는 잊어버립니다. 저녁이 되면 몸은 지쳤지만 머리는 여전히 활동합니다. 손에서 핸드폰은 계속 울려 댑니다. 일과를 끝내고 침대에 눕지만 머릿 속은 여전히 복잡합니다. 걱정 근심의 일들뿐 아니라 해야 하는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머리가 복잡한 생각들이 잠을 설치게 하고 과도한 각성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바쁜 삶을 쉬지 않고 계속하게 되면 사람들은 ‘탈진’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더 이상 사용할 에너지가 없이 고갈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불면증 진단을 받게 되고 어떤 분은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되고 어떤 분은 건강에 문제가 생겨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질병으로 진단이 내려지기 전에 정기적인 쉼과 변화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여행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속되는 일상 생활의 스트레스와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게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행이 중요하다라기 보다 여행이 우리에게 공급하는 ‘생각을 내려 놓고 쉼을 얻고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사람들은 여행을 쉽게 떠나지 못합니다. 내담자 몇 분 중에 정말 쉼이 필요한 분들이 있어서 여행을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그들이 여행을 떠나지 못한 것은 재정적인 어려움 보다는 마음의 생각들이 자신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여행을 떠난다고 나의 삶이 달라질 수 있을까? 여행을 떠나면 아이들은 누가 돌봐 주지? 아이들을 돌 봐줄 좋은 배우자가 있는 분들이 있는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데 사용하는 경비를 더 좋은 곳에 써야 하지 않을까? 혹, 여행을 떠났을 때 증세가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낯선 곳에 간다고 하는 것은 나를 힘들게 할 거야! “라는 등의 생각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똑 같은 스트레스를 주는 해로운 감정과 바쁜 일가운데 여전히 머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공간에 들어가게 되면 새로운 사고의 프레임을 갖게 됩니다. 그것의 예로, 주방에서 일을 하다가 필요한 물건이 생각이 나서 욕실에 갔는데 갑자기 무슨 물건이 필요한 지를 잊어버리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욕실에서 그리고 나서 다시 주방으로 돌아오면 ‘아, 내가 싱크대를 청소하려고 치약을 가지고 오려고 했었지.’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때로 환경을 바꾸어주는 여행과 같은 변화는 사고의 프레임을 전환시키고 삶을 변화시키는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호주에 사시던 분들은 고국을 잠시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정서적인 회복을 경험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내가 지쳐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독에 구멍이 난 줄 알면서도 물을 자꾸 붓는 것과 비슷합니다. 몸과 마음은 신호를 자꾸 보내는데 그것에 응답하기 보다는 자꾸 ‘조금 만 더 조금만 더 버티어 보자’ 고 하면서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때 결국 파괴적인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이 속한 삶의 터전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까운 곳이라도 하루 날을 정해서 일상을 벗어나는 일들을 정기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자가 아는 분은 근심이 있을 때 마다 등산을 한다고 합니다. 산을 오를 때 마음 가득 근심을 가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는 어느새 그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고 때로는 근심의 답을 찾아서 산을 내려오게 된다고 합니다.
남은 인생의 여정을 다시 잘 헤쳐 나가기 위해 현재의 나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쉼을 얻고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변화를 시도하는 건강함이 있으시 길 축복합니다.
김훈 박사 (호주기독교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