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보리 [麥]의 생명과학
꽁보리밥 하면 마지못해 먹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 하였던 시절을 떠 올리게 한다. 젊은이들은 배고픔과 가난의 상징이었던 꽁보리밥에 서려있는 정서를 알 리가 없지만 노년층은 보리밥과 관련된 추억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 서민들은 3~4월이 되면 전 해에 거둔 곡식이 다 떨어지고 보리를 수확하기까지 2~3개월을 기다리며 초근목피 [草根木皮]로 연명해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흰 쌀밥은 감히 먹을 엄두고 못 냈던 시절을 옛 이야기처럼 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에 벼 품종 개량과 농사 방법이 현대화 된 후에 미곡생산이 획기적으로 증가 되면서 보리밥은 밥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조리하기도 번거롭고 속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아 꽁보리밥은 부드러운 맛이 없고 껄끄럽다. 흰 쌀밥 먹는 것이 소원들이였지만 막상 성취되고 보니 아쉽기도 하고 보리밥이 사라진 후에서야 식품적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보리 농사는 다른 어떤 작물보다 훨씬 오래 전에 시작한 것 같다. 보리는 서기전 7,000년에 이미 야생종이 재배되었다고 하며,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남한강이 인접한 여주, 흔암리, 유적지에서도 여러 종류의 토기와 함께 탄화된 벼, 보리, 조, 수수 등이 발굴된 것으로 봐서 오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학자들은 한국의 보리 재배는 약 3,000년 전쯤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새삼스럽게 꽁보리밥을 화제로 삼은 것은 시드니에서 가깝게 지내고 있는 몇몇 가정이 겉보리를 사서 싹을 티워 길금 [엿기름]을 만들어 감주도 만들고, 고추장도 담근다. 길금 [엿기름]의 천연 효소를 이용한 식품을 개발하며 살아온 선조들의 지혜에 놀라움을 금 할 수가 없다.
엿기름 하면 기름이라는 말과 함께 지방분인 기름을 연상하게 되는데 지방분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이다. 몇 가지 설이 있지만 “기르다”의 명사형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전남에서는 “엿질금”, 경상도에서는 “질금”이라고 부른다. 보리의 싹이라는 뜻에서 한방과 양조분야에서 맥아 [麥芽]라고 한다. 보리 싹을 틔우면 지벨렌린 [gibberellin]이라는 홀몬이 생성되며, 이 홀몬의 작용으로 싹이 틀 때, 아밀라제 [amylase]라는 효소를 합성한다. 아밀라제가 쌀의 녹말을 수용성인 엿당으로 분해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과 같은 포유류의 침 속에도 성능이 같은 프티알린이라는 소화 효소가 있다. 밥을 오래 씹으면 단 맛이 나게 되는 것은 프티알린의 작용으로 밥의 탄수화물을 엿당으로 분해하기 때문이다. 엿기름의 이런 효소 작용을 이용하여 식혜도 만들고, 엿이나, 조청, 고추장 담그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보리는 대부분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자라기 때문에 다른 작물에 비해 병충해가 심하지 않아 농약을 살포할 필요성이 거의 없는 무공해 식량자원으로서 그 가치가 높으며, 백미에서 부족하기 쉬운 여러 가지 영양소를 가지고 있다. 보리쌀의 성분을 보면 조 단백질이 9.5-11.8%로, 백미 [7분도미], 6.9%보다 높고, 당질[탄수화물]은 77%로 쌀의 81.6%보다 적다. 섬유질의 경우는 보리가 밀가루의 5배, 쌀의 16배나 많은 양을 함유하고 있다. 보리는 쌀처럼 속겨층이 완전이 제거되지 않는데다가 보리알 중앙에 깊은 골에 섬유가 많이 남아있어 먹을 때 거친 질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보리의 섬유질은 물이 잘 스며들지 않게 하기 때문에 밥을 하려면 물에 오래 담가 두어야 하고, 한번 삶았다가 밥을 하기도 하였다. 물에 담갔던 보리쌀도 조리에 들어가기 전에 오랫동안 박박 닦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것이다. 이런 불편함을 덜기 위해서 요즘에는 도정한 보리를 적당히 불려 놓은 압맥 [壓麥]과, 보리를 쪼개서 보리알 중앙의 속껍질을 제거한 할맥 [割麥]으로 도정해서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시절에 보리밥에 질린 분들은 보리밥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한국엔 보리밥전문식당이 곳곳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지난 시절에 향수로 찾기도 하겠지만 볶은 보리로 우려낸 구수한 보리차와 함께 된장찌개, 생선구이, 싱싱한 채소가 올라오는 보리밥상은 손님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요소를 갖추었다. 섬유질이 많으니 변비에 좋다고 소개할 수도 있고, 단백질과 비타민B1. B2가 많으니 각기병 예방이 된다고 마음놓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의 ‘오병이어’ 구절이며, 보리 이야기가 여러 군데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농작물임에 틀림없다. 영어 [英語]로 보리를 “barley-바리”라고 하는데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한국에서 길금이 아닌 보리싹을 10여cm가량 키워서 채소처럼 식용하는 붐 [boom]이 일고 있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길금은 보리가 잎을 형성하기 전에 뿌리가 발아한 상태에서 형성된 효소를 이용하는 것이지만 어린 잎과 줄기가 나오면 길금과는 다른 물질이 형성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보리 싹의 아버지”라고 불리어 지는 일본인 영양학자 하기와라 요시히데 박사는 보리의 새싹이 질병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보리 새싹에는 우유의 55배, 시금치의 18에 달하는 칼륨 [K]과 우유의 11배나 되는 칼슘 [Ca]이 들어있고, 빈혈을 예방하는 비타민 C의 경우 시금치의 3배, 사과의 60배가 들어 있음도 알아냈다. 이외에 많은 종류의 미네랄이 들어 있어서 비타민처럼 과다 복용에 따를 부작용이 없는 천연식품이라고 밝힌 것이다.
한국의 농촌진흥청 연구팀은 보리 새싹에 고지혈증, 당뇨병을 예방하고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는 폴리코사놀 [polycosanol]과 사포나린 [saponalin] 등의 기능성 성분이 있음을 새롭게 밝혀 내기도 하였다. 농촌진흥청은 이 연구결과를 대학연구진에게 임상실험을 의뢰해서 실제로 콜레스톨 경감효과가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식품의약품안전처로 부터 허가를 받아 보리 새싹에서 추출한 폴리코사놀을 건강기능성 식품으로 시판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의 신비에 호기심을 갖는 것은 아동이고 어른이고 구별없이 마찬가지 일 것이다. 씨앗을 땅에 뿌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며 새로움과 희망이 부풀게 마련이다. 조금 더 관심을 가지면 호기심이 발동하게 되고 이 호기심은 생명체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지는 탐구의 새싹이 된다. 2007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페터 그뢴베르그 [Peter Grunberg]는 “어떻게 하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호기심을 갖고 연구에 매진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보리에는 호기심을 발동시킬 분야가 너무나 많다.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만 봐도 꽁보리밥의 식품성, 길금의 효소작용, 보리 새싹의 신비한 효능으로 성경에 기록된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의 말씀 보다 몇 배까지도 배부르게 먹일 수 있는 신비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보리 싹을 키우며 신비한 생명현상에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것은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박광하 (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38khpark@hanmail.net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2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생명과학이야기’(북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