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RNA 바이러스의 기원에 관하여
알르엔에이 (RNA)라는 유기물질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다. DNA는 거의 일반화된 유기물이지만 알르엔에이 (RNA)는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유기물이다. 그러나 현금에 인류의 재앙으로 확산된 코로나바이러스의 정체는 알르엔에리 (RNA)다. DNA와 RNA의 화학적구조는 근원적으로 거의 비슷하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된다”는 노래가사와 비슷하게 아르엔에이 (RNA)의 화학적구조에서 산소원자 (O) 하나를 빼면 디엔에이 (DNA)가 된다. 코로나19가 대유행하고 엠아르엔에이 (mRNA) 백신이 나오면서 이제 익숙한 용어가 됐다. 사람처럼 세포로 이루어진 생물에서는 아르엔에이가 유전물질은 아니고 그 정보를 전달하는 데만 관여하지만, 바이러스의 일부는 게놈이 아르엔에이로 이뤄져 있다.
흥미롭게도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비롯해 최근 부쩍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에볼라 바이러스, C형 간염 바이러스가 다 아르엔에이 바이러스다. 앞으로 또 어떤 신종 바이러스가 등장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르엔에이 바이러스에 대한 이해가 더 절실한 시점이다. 그러나 아르엔에이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이들이 일으키는 질병에 대처하기에 급급할 뿐 지구에 얼마나 다양한 아르엔에이 바이러스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학술지 <사이언스> 최근호에는 오대양 12만5천㎞를 항해하면서 210곳에서 채취한 바닷물 시료에 들어 있는 아르엔에이 정보를 분석한 아르엔에이 바이러스의 실체에 한발 더 다가간 연구 결과가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아르엔에이 바이러스는 대략 4천종이고 5개 문으로 나뉜다. 문 (phylum)은 ‘계문강목과속종’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큰 분류 단위다.
바이러스는 동물계, 식물계, 균계, 원생생물계, 원핵생물계 중에 원핵생물계중에서 알엔에이를 분류하면 5개 문 (phylum)으로 나누게 되는데 4500여종의 새로운 알엔에이 바이러스를 찾았다는 것이다.
무색투명한 바닷물에 바이러스가 얼마나 될까 궁금할 텐데 한 숟가락 분량에 무려 5천만 마리의 바이러스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역시 맨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와 플랑크톤을 숙주로 삼아 증식한다. 그 결과 매일 해양 미생물의 10~20%가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바이러스 팬데믹에 시달리는 셈이다.
연구자들은 무려 28테라베이스 (테라는 10의 12승, 즉 1조배를 뜻한다)에 이르는 염기서열 데이터를 분석해 아르엔에이 바이러스 4500여 종을 새로 찾았다. 이 가운데는 기존 5개 문으로 나눌 수 없는 종이 꽤 많아 새롭게 5개 문을 만들었다. 이제 아르엔에이 바이러스가 10개 문으로 이뤄진다는 말이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척추동물 신종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기존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로는 부족해 새로운 다섯 종류가 더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몸 형태를 상상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추가된 5개 문 가운데 하나인 타라비리코타는 아르엔에이 바이러스의 조상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드러난 아르엔에이 바이러스의 세계를 찬찬히 탐색해보면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 아르엔에이 바이러스 질병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데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지구에 생명체가 처음 생겨났을 때, 그 시절엔 디엔에이 (DNA · 디옥시리보핵산), 아르엔에이 (RNA · 리보핵산), 단백질 가운데 무엇이 먼저 생겨났을까? 생명의 기원에 관해 여러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생명 진화의 초기에 디엔에이와 단백질 없이도 아르엔에이가 먼저 홀로 출현하는 게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캘리포니아 스크립스연구소의 제럴드 조이스 박사 연구팀은 최근 무한히 자기 복제를 할 수 있는 ‘아르엔에이 효소’를 실제 구현하는 데 성공해 최근 미국 과학저널 <사이언스> 온라인판에 발표해, 이른바 ‘아르엔에이 세계’ 가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아르엔에이 세계’ 가설이란 생명체가 생겨났던 태초엔 아르엔에이가 유전 정보를 간직하는 기능 (지금 디엔에이의 기능)과 생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촉매 기능 (지금 단백질의 기능)을 모두 다 했을 것이라는 가설로서, 1980년대에 제기돼 그동안 생명 기원 논란의 한 축을 이뤄 왔다.
연구팀은 한 쌍의 아르엔에이 효소를 만들어 적당한 조건을 주었을 때 아르엔에이가 자신의 분자 정보를 무한히 복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연구팀은 복제 과정에선 돌연변이들이 출현하고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효소가 살아남는 식으로 분자 정보가 유전됨을 보여줌으로써, 자기복제와 돌연변이, 유전이 아르엔에이 효소에서 모두 구현될 수 있음을 제시했다. 그러나 연구팀은 “이런 연구가 지상 생명체가 모두 이런 식으로 진화했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영훈 카이스트 교수 (화학)는 “이런 가설과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면, 본래 불안정한 화합물인 아르엔에이가 오랜 진화를 거치면서 유전 정보 보관 기능은 안정적 물질인 디엔에이에 넘기고, 촉매 기능은 훨씬 더 많은 종류를 만들어 갖가지 기능을 할 수 있는 단백질에 넘기면서 변해 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르엔에이는 보통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유기화학물질이지만 지구의 생명체시스템에 깊숙이 관여하며 그 존재성을 너무나 확실하게 각인 (刻印)시켜 주고 있다. (강석기의 과학풍경 참조)
박광하 (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38khpark@hanmail.net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3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생명과학이야기’ (북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