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서
서정주의 믿음과 윤동주의 고민
서정주와 윤동주는 태어난 시기가 거의 비슷한 동시대의 인물들이다.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에 태어나서 2000년 12월 24일 돌아갔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세상에 나와서 1945년 2월 16일 해방이 되기 6개월 전에 일본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2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중 옥사했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있다. 일설에는 죽기 전에 이름 모를 주사를 계속 맞았는데 생체실험을 위해 혈관에 소금물을 주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두 분의 생애를 알아보기 위하여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서정주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출생하였고 전라북도 부안에서 성장하였다. 서정주의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에비는 종”이었다고 고백했다. 노비의 자식으로 서럽기만 했다던 서정주는 대를 이어온 노비의 신분을 벗어 던짐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고 노비의 설움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또한 내면에서 솟아나는 문학적 욕구를 펴고자 했다. 실제 서정주는 14세에 서울로 상경해 중앙보통학교에 다닐 정도로 어느 정도 사는 집안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이다. 기독교 장로이자 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용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7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주는 일제에 맞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할 지도자를 신앙으로 길러낸 외삼촌 김약연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자랐다. 통일운동으로 유명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님도 바로 이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서정주의 시중 초기 작품인 ‘자화상’을 보자.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은 할머니와 대추 꽂이 한 그루 서 있을 뿐이었다.
어메는 임신을 해서 풋살구 하나만 꼭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
…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아래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큰 눈을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여 네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 옆에서’ 작품 감상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의 시적 표현임이 드러난다. 봄이 20대라면 여름은 30대, 그리고 국화꽃이 피는 가을은 인생의 40대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뒤안길’이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결코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가 형성되기까지의 비통과 불안과 방황과 온갖 시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방황과 방랑 끝에 비로소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한 여인이 자성(自省)의 ‘거울’에 비춰 본 자신의 과거이다(정희성·신경림, ‘한국 현대시의 이해’ 참고).
위에서 서정주가 청년일 때 썼던 ‘자화상’을 보았지만 시대적 고민이나 자기민족의 현실에 대한 역사인식은 없고 개인 회고나 살아온 삶에 대한 애환이나 감흥을 수사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그후 좀 나이가 들어 썼다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도 자기시대의 역사 현실이나 시대적 고민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방황, 갈등, 자기 안정 같은 것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후 서정주는 ‘마쓰이 히데오 오장 송가’라는 시를 쓴다,
‘마쓰이 히데오 오장 송가’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이 시는 44년 7월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발표한 ‘오장 마쓰이 송가’라는 서정주의 친일시중 일부이다. 친일하게 된 연유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미당의 고백은 당시 유명한 말이 되었으며 어떤 대학생은 이를 비난하기 위해 미당이라는 서정주의 호를 풍자해 ‘말당선생 보시오’라는 답시를 쓰기도 했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입니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주리자.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맘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십자가’(十字架)
쫒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바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붉은 피를 어두워진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영원히 슬플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갔던 두 사람, 윤동주는 시대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고민하며 민족사가 요구하는 해방투쟁의 길을 선택함으로 자기를 역사적인 존재로 승화시킨 반면 서정주는 시대의 고민과는 거리가 먼 개인적인 고민과 열정, 좌절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야망을 도모함으로 우리 민족의 가열찬 해방투쟁에서 벗어나 일본 강도들의 지배논리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우리는 믿는다 믿는다 한다. 뭘 믿는다는 것일까? 서정주가 파시스트 강도 일본이 영원할 것이라고 아니 100년은 갈 것이라 믿은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이 지금의 세계질서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갈라진 민족의 현실과 분열된 삶 속에서 윤동주의 고민은 계속 부활되고 있음을 믿는다.
권태원 활동가
jpainter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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